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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월 8일 살아나서 살리는 교회 주일 설교
제목 : 주도권 싸움이 끝나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feat.나아만장군)
본문 : 요한일서 2장 6절
하나님 안에 있다고 하는 사람은 자기도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과 같이 마땅히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새번역)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어떤 직위에 있게 되면 그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변하게 마련이라는 말입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의 동의를 얻은 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이들은 ‘사람이 자리를 만드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것에 동의하는 편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이 말이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사실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종교들처럼 수련이나 고행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무엇인가 해야만 얻어지는 결과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도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에베소서 2장 8~9절, 새번역>
행위가 아닌 은혜로, 하나님의 선물로 우리는 구원을 받아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역효과가 나타나기도 합니다. 구원을 너무 쉽게 생각하게 되고, 그리스도인이 된 것을 너무 가볍게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무엇인가 노력해서 얻은 결과를 ‘성취감’ 속에서 누리기를 좋아하는 존재입니다. 만약 구원이라는 ‘성취물’을 엄청난 노력을 통해서 얻었다면 다들 이렇게 쉽게, 가볍게 여기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너무도 소중하게 생각하고, 아끼고 자랑할 것이며, 두고두고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등장하는 이야기 거리가 될 것입니다. 마치 군대를 다녀온 남자들의 이야기처럼 고생한 그만큼 할 이야기도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무런 노력도 없이, 공로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신 하나님 아버지가 보여주신 사랑의 결과로 구원이란 엄청난 선물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 사이에 가로막힌 담을 허물어 버리시고 하나가 되는 길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아멘’으로 받아들인다면 하나가 될 것이고, ‘의심’으로 받아들인다면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사실 여기서부터 하나님을 향한 주도권 싸움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받아들일 것인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인가? 하나님과 하나가 될 것인가? 여전히 둘로 존재할 것인가?
사실 받아들이기로 한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주도권 싸움이란 말 자체가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 은혜에 감사하고, 감격하고, 감동하여, 하나님과 하나 됨을 기뻐하는 이들에게는 앞으로 펼쳐질 신앙생활을 그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행하는 여정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기로 결심하지 않는다는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분명히 선물로 주어진 구원인대, 그냥 구원이란 선물은 받고 싶긴 한대,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은 망설이게 되는 것입니다. 왠지 여기서 그냥 받아들이게 되면 평생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살아가야 하는 것은 아닐까 슬쩍 손해 보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한 번 뿐인 내 삶 내가 원하는 대로 마음대로 살아가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과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것일까요? 주도권 싸움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주도권 싸움이 바로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참 아이러니하게도 ‘자유의지’가 이래서 진짜 멋진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심으로 자신을 만든 창조주마저도 ‘부인’하고 ‘거부’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소위 ‘선택’할 수 있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왜 자유의지를 허락해 주셔서 인간들이 멋대로 행하게 하셨는지 가끔은 정말 이해가 가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하나님은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지만 반드시 그 하나를 강요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강제로 하나가 되게 하려면 얼마든지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절대 강제로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인격적인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강제라는 것이 얼마나 인간의 자유의지를 짓밟는 것인지 가장 잘 아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우리는 그래서 ‘자유의지’를 통하여 하나님과 주도권 싸움을 할 수 있는 위치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하나님과의 주도권 싸움을 내려놓고, 자신의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선택하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기쁨으로 하나가 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을 보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일은 정말 쉽게 일어나지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주도권 싸움을 하고 있는 인간을 머릿속으로 그리다보면 하덕규 집사님과 함춘호 집사님이 함께 만든 팀인 ‘시인과 촌장’의 노래 ‘가시나무’란 곡이 떠오릅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내’가 너무도 많습니다. 하나님이라고 하는 ‘유일한 신’이 아니라 ‘자신’을 더욱 의지하고 신뢰합니다. 실로 우리의 신앙을 가장 위협하는 이단은 신천지도 구원파도 아닌 ‘자신(自神)’이라는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과 하나 되기 위하여 인간은 ‘예배’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 주도권 싸움은 도무지 예배를 드릴 마음도 없게 만들고, 예배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을 만들고, 산 제물로 드려져야 할 예배를 아무 의미 없는 제사로 전락시키기도 합니다. 예배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예배가 예배가 되지 않으니 하나가 되는 길을 아예 시작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가 너무도 중요한대 주도권싸움은 이 예배자체를 하잖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왜 수 십년 동안이나 신앙생활을 했어도 제자리일까요? 그토록 많은 예배를 참석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아직도 하나님과의 인격적이고 구체적인 만남이 없을까요? 혹시라도 지금 예배를 드리고 계시는 여러분 중에서도 여전히 신앙생활에 대한 의문과 의심만이 존재하고, 믿음에 대한 확신이 없는 분이 계시지는 않으십니까? 몸은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정말 중요한 중심은 예배와 아무 상관도 없다면 지금도 여전히 그 주도권 싸움 중에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하나님! 내가 생각하는 구원! 내가 생각하는 예배! 내가 생각하는 신앙생활!’ 이렇게 주체가 ‘내’가 되어 있다면 하나님과 하나 될 생각을 해야 할 때가 아니라 자신의 믿음의 순수함을 점검해야 할 때입니다. 조금도 하나님께 양보할 마음이 아직은 없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자신의 삶이 소중하고, 자신의 의견이 중요하고, 자신의 생각, 경험, 방법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산다는 말에 오히려 화가 날 지도 모르는 상황입니다.
열왕기하 5장에 등장하는 엘리사를 만나러 온 나아만 장군을 기억하십니까? 그는 시리아 왕의 군 사령관이었습니다. 왕이 너무도 아끼는 사람이었습니다. 큰 인물이었습니다. 존경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시리아를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도 나아만을 들어 쓰시기도 하였습니다. 한 마디로 그 시대의 영웅이었습니다. 자기애와 자신감이 얼마나 넘치는 사람이었겠습니까? 그런데 그에게 주도권 싸움을 벌여야 할 일이 찾아온 것입니다. 아마 처음에는 그런 주도권 싸움을 해야 하는 것조차도 스스로 용납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시리아 왕의 군사령관 나아만 장군은, 왕이 아끼는 큰 인물이고, 존경받는 사람이었다. 주님께서 그를 시켜 시리아에 구원을 베풀어 주신 일이 있었다. 나아만은 강한 용사였는데, 그만 나병에 걸리고 말았다. <열왕기하 5장 1절, 새번역>
나병(한센병)은 당시에는 더욱 더 ‘저주받은 병’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나아만 장군의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내기에 충분한 병이었습니다. 그토록 자기애와 자신감이 넘치던 나아만 장군은 점점 은둔형 외톨이로 변해 갔을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첫 번째 주도권 싸움을 걸어온 사람은 바로 이스라엘에서 잡아온 어린 여종이었습니다. 나아만 장군의 아내를 통해 나아만 장군의 병이 나을 길이 있다는 것을 말하게 된 것입니다. 과연 나아만 장군은 이 어린 여종의 말을 믿어야 할까요? 자존심이 있지 어떻게 잡아온 포로, 그것도 어린 여종의 말을 믿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리고 시리아에서도 고칠 수 없는 병을 어떻게 그 작은 이스라엘의 이름도 모르는 선지자가 고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믿을 수가 없는 말이라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 이 때 포로의 말이라고, 어린 여자 아이의 말이라고 무시했다면 성경은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를 기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마음이었던 나아만은 어린 여종의 말을 믿어보기로 하였습니다. 사실 밑져야 본전입니다. 그냥 한 번 주도권 싸움에서 져 준것입니다. 그런데 그 양보가 정말 큰 복으로 다가온 것입니다.
그리고 진짜 본격적인 주도권 싸움은 엘리사를 만난 다음부터였습니다. 감히 시리아에서 나아만 장군이 직접 왔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사람 엘리사는 문 밖에 나오지도 않습니다. 한 술 더 떠서 엘리사는 자기의 사환을 시켜 요단강으로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라고만 전했습니다. 이 얼마나 무례한 일입니까? 엘리사가 신도 신지 않고 달려 나와 자신을 정중히 맞이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상처 위에 직접 안수해 줄 줄 알았는데, 나아만 장군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습니다. 그래서 발길을 돌렸습니다. 당장이라도 이스라엘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싶었을 것입니다. 심지어 요단강은 시리아 다마스쿠스에 있는 아마나 강이나 바르발 강보다 훨씬 작고 볼품없는 강이었습니다.
여기서 두 번째 주도권 싸움이 일어납니다. 그렇게 화가 나서 발길을 돌린 나아만 장군을 향해 충성스러운 부하들이 부탁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렇게 화까지 냈는데 엘리사의 말을 듣자니 너무 자존심이 상했을 나아만입니다. 자신의 편을 들어주어도 모자랄 자신의 부하들이 오히려 엘리사의 말대로 해보자고 했을 때 더 큰 화가 났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나아만 장군은 평소 부하들이 자신을 얼마나 위하는지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부하들의 말을 듣기로 합니다. 두 번째 주도권싸움도 양보합니다. 평소에는 자신의 말을 듣고 행하던 부하들이었는데, 오늘만큼은 부하들의 말을 듣는 나아만 장군입니다. 정말 멋진 선택이었습니다.
요단강에서 일곱 번째 몸을 씻고 나오자 나아만 장군의 피부는 어린 아기의 살결처럼 새 살로 돌아와 깨끗하게 낫게 되었습니다. 나아만 장군은 당장 엘리사에게 다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엘리사 앞에 와서 서서 좀 전과는 180도 다른 태도를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제야 나는 온 세계에서 이스라엘 밖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부디, 예언자님의 종인 제가 드리는 이 선물을 받아 주십시오." <열왕기하 5장 15절b, 새번역>
그런데 이번에도 엘리사는 사양하였고, 나아만 장군의 몇 번의 권유에도 끝내 거절을 하고 말았습니다. 부하들 앞에서 이 정도로 했으면 엘리사도 나아만 장군의 체면을 봐서라도 좀 받아주지 참 냉정합니다. 그런데 나아만 장군은 마지막 주도권 싸움에서 완전히 주도권을 내어주기로 결심한 듯 보입니다. 엘리사를 자신의 주인처럼 대하기 시작했고, 자신을 엘리사의 종이라고 칭하기 시작합니다. 더 이상 자존심 강하고, 자기애로 가득한 나아만 장군은 없습니다. 실로 엘리사를 통하여 ‘하나님’에 대해서 새로운 마음을 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에 등장하는 ‘삭개오’ 만큼이나 멋진 고백을 하게 됩니다.
예언자님의 종인 저는, 이제부터 주님 이외에 다른 신들에게는 번제나 희생제를 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예언자님의 종인 저를 주님께서 용서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모시는 왕께서 림몬의 성전에 예배드리려고 그 곳으로 들어갈 때에, 그는 언제나 저의 부축을 받아야 하므로, 저도 허리를 굽히고 림몬의 성전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제가 림몬의 성전에서 허리를 굽힐 때에, 주님께서 이 일 때문에 예언자님의 종인 저를 벌하지 마시고, 용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열왕기하 5장 17절b~18절, 새번역>
포로로 잡아온 어린 여종과의 주도권 싸움도, 부하들과의 주도권 싸움도, 엘리사와의 주도권 싸움도 모두가 다 하나님이 주신 기회들이었습니다. 그 주도권 싸움에서 이기려 했다면 나아만 장군은 한센병 환자로 일생을 마무리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아만 장군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어린 여종을 만나게 하셨고, 좋은 부하들을 만나게 하셨고, 엘리사를 통해 일하셨습니다. 그러니 나아만 장군은 더 이상 주도권 싸움을 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놀랍게도 하나님 이외에는 다른 신들에게 예배를 드리지 않겠노라 결정하게 된 것입니다. 엘리사처럼 하나님 안에 거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기에 이제는 예배자의 삶을 살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예배 안에 하나님과 하나가 된 것입니다. 이런 은혜는 나아만 장군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에게도 동일합니다.
혹시 여전히 주도권 싸움 중에 있으십니까? 하나님 앞에서 자존심과 자기애를 무기 삼아 여전히 버티고 계시는 중이십니까? 사랑으로 권면합니다. 그 주도권 싸움은 하루라도 더 빨리 끝내는 것이 좋습니다. 솔직히 지금 당장 그 싸움을 멈추는 분이 가장 축복 받은 사람입니다. 더 이상 해야 할 필요가 없는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주인이 되려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더욱 더 풍성한 삶으로 초청해 주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아버지를 찬양합시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온갖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에베소서 1장 3절, 새번역>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간섭하려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나쁜 것을 버리게 하고, 좋은 것으로 채워주고 싶어 하십니다. 무엇이 우리에게 필요한지 가장 잘 알고 계시는 우리의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나의 하나님께서 자기의 풍성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영광으로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을 모두 채워 주실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19절, 새번역>
하나님은 우리를 그저 사랑하십니다. 사랑하심으로 사랑을 친히 보이셨습니다.
사랑은 이 사실에 있으니, 곧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아들을 보내어 우리의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 10절, 새번역>
하나님은 우리와 하나가 되길 원하십니다. 오직 우리 죄악이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내었기에 그 죄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육신으로 말미암아 율법이 미약해져서 해낼 수 없었던 그 일을 하나님께서 해결하셨습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아들을 죄된 육신을 지닌 모습으로 보내셔서, 죄를 없애시려고 그 육신에다 죄의 선고를 내리셨습니다. <로마서 8장 3절, 새번역>
하나님과 하나 되기 위해서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예배 안에 하나님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주도권 싸움을 끝내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 주도권 싸움이 계속 이어진다면 예배를 드리는 것도, 예배 안에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것이라는 시작점에 설 수조차 없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망설이고 계십니까? 무엇이 여전히 주도권 싸움을 하게 만들고 계십니까? 그 ‘무엇’을 돌아보아야 할 주일입니다. 그리고 그 ‘무엇’조차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결심이 있어야 하는 주일입니다. 그 ‘무엇’을 두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습니다. 바로 이 순간 성령님이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주도권 싸움을 시작한 것은 나 자신이지만, 주도권 싸움을 끝낼 수 있는 힘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이미 너무 멀리 왔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성령님께 도움을 요청하셔야 하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그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우리가, 각 자가 직접 해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실 것입니다. 오셔서 변화를 시작하실 것입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듯, 사울이 바울 되듯!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 친히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여 주십니다. <로마서 8장 26절, 새번역>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는 예배자 여러분, 이제는 주도권 싸움을 끝내고 하나님과 하나 되어 이렇게 살아가야 할 때입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안에 있다고 하는 사람은 자기도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과 같이 마땅히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요한일서 2장 6절, 새번역>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살아가야 할 때입니다. 마땅히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자리에 앉았으니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길이 열린 것입니다. 더 이상 고민할 필요도 주저할 필요도 없습니다. 거저 주신 은혜를 거저 받아 누리시면 됩니다. 엄청난 은혜인만큼 엄청난 감사를 통해 멋진 삶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하며 살아가도 됩니다. 하나님께 주도권을 맡긴 삶은 결코 비겁하거나 억울한 삶이 아닙니다. 오히려 진정한 자유의 길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이 말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오늘날까지도 그들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그 마음에 너울이 덮여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주님께로 돌아서면, 그 너울은 벗겨집니다." 주님은 영이십니다.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어버리고, 주님의 영광을 바라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점점 더 큰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은 영이신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고린도후서 3장 15~18절, 새번역>
결단찬양 - 너무 멀리 왔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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