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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고국으로 돌아왔다. 돌아오자 구루 파파지께서
“바가바드 기타를 읽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마음이 평화로울 것입니다.” 바가바드 기타가 나의 삶에 들어왔다. 스승님의 말씀은 말씀이 아니라 명령이시다.
몇 편의 번역본이 있었지만 나는 원서가 좋았다. 수십 권을 구입하였다. 읽을 아름다운 책을 만들고자 했다. 그런데 너무 어렵다. 번역하고 고치고 번역하고 고치고. 나는 신 크리슈나의 메시지를 알아야 한다.
시간을 전적으로 투자하는 것이 나의 성미다. 모르는 것은 누구의 잘못이 아니라 나의 잘못이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35년이나 흘렀다.
우주는 무엇인가? 우주 안에서 인간은 무엇인가? 신은 또 무엇인가? 진리는 우주 안에 있는가, 바깥에 있는가? 무엇을 해내야 진리에 이를 수 있는가? 그것들에 대한 큰 그림을 바가바드 기타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아, 이제야 알겠습니다. 전체의 그림을. 구루께서는 그것을 주고자 하신 것 같다.
아직도 부족하지만 편저를 내놓는다. 진리로 가는 길을 완벽하게 제시하고 있는 간결하고 놀라운 책이다.
2024 아쉬람에서
차례
편저자의 글 • 11
제1장 아르주나가 슬퍼하다. • 19
제2장 실재 • 31
제3장 행위의 길 • 51
제4장 영적 지식(갸나)의 길 • 65
제5장 행위의 포기의 길 • 79
제6장 명상의 길 • 89
제7장 영적 지식과 깨달음 • 103
제8장 빛의 길과 어두움의 길 • 113
제9장 신 • 125
제10장 무엇을 명상해야 합니까? • 137
제11장 우주: 신의 현현 •159
제12장 헌신의 길 • 175
제13장 들판을 아는 자 • 185
제14장 현현의 세 표현(구나)들 • 199
제15장 세상이라는 나무 • 209
제16장 신성한 성품과 신성하지 않은 성품 • 217
제17장 세 유형의 믿음 • 227
제18장 모든 다르마들을 그만두고 나에게 돌아오라 • 237
제3장
행위의 길
아르주나의 혼란: 영적 지식과 행위 중 어느 것이 더 나은가?
아르주나
1. 하지만 오, 자나르다나시여! 당신께서는 영적 지식이 행위보다 더 우수하다고 가르치십니다. 오, 케샤바시여! 그런데 왜 당신께서는 저에게 이런 끔찍한 행위를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2. 당신의 말씀들은 서로 모순되는 것 같습니다. 그것들은 저의 지성을 혼란스럽게 하십니다. 제가 최종적인 (해방의) 희열을 얻을 수 있는 하나의 확실한 길을 말씀하여 주십시오.
영적 지식과 행위의 길
크리슈나
3. 이 세상의 처음에 나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두 길들을 말했다. 오, 죄 없는 이여! 영적 지식의 길(예리하고, 아주 지적이고, 대범한 이해를 지닌 자에게 맞는, 제2장 11-38수트라)과 행위의 길(가슴을 정화시켜 지식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제2장 40-53수트라)이다.
행위의 길은 행위로부터 자유로 나아가게 한다.
4. 아트만 지식이 수반되지 않고 단지 행위들을 포기하는 것만으로는 아무도 완성(행위로부터 자유, 아트만의 상태)에 이를 수 없다.
무지한 사람들은 자연에 의해 흔들린다.
5. 사실 아트만(자연의 구나들 너머에 있다.)에 대한 지식이 없는 보통의 사람들은 잠시 동안일지라도 행위를 하지 않고 있을 수 없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자연에서 나온 구나들(속성들인 삿트와는 조화와 빛과 순수의 내용. 라자스는 열정과 움직임의 내용. 타마스는 무기력과 어두움의 내용. 삿트와는 해방에 이르는데 도움이 되며, 라자스와 타마스는 세상에 묶이게 한다.)에 의해 행위 하도록 강요당한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행위의 길을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6. 행위의 기관들은 행위를 하지 않고 있지만 마음으로는 감각의 대상들을 생각하면서 앉아 있는 사람은 자신을 속이고 있다. 그는 위선자이다.
7. 그러나 오, 아르주나! 마음으로 감각들을 통제하면서 행위의 결실들에 대한 기대 없이, 자아 없이 행위의 기관들로서 행위를 한다 면, 그는 위선자들보다 진정 더 훌륭하다.
8. 주어진 의무를 행하라. 행위는 무행위보다 낫다. 더구나 행위 없이는 그대의 신체를 유지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다.
9. 희생(숭배. 순수한 동기 혹은 얏나, 즉 신을 위하여 하는)으로 행해질 때를 제외하고는, 이 세상의 사람들은 행위로 묶인다. 따라서 오, 쿤티의 아들아! 그대는 모든 행위들을 희생으로 해야 한다.
10. 창조주는 처음에 각자에게 의무를 주면서 인류를 창조했다. 그는 말했다. “이것을 하라. 그러면 너희는 번성할 것이다. 의무를 다하는 것은 소원을 이루어주는 카마데누(인드라의 소)처럼 되어 바라는 대상들을 이루어준다.”
11. 이러한 희생으로 너희는 데바(우주적 일을 하고 있는 빛나는 존재)들을 기쁘게 한다. 데바들 또한 너희를 풍요롭게 할 것이다. 서로를 풍요롭게 함으로, 그대는 최고의 선을 얻을 것이다(적당한 때에 신에 대한 지식이나 천국에 이를 것이다.).
12. 데바들을 기쁘게 하라. 그대의 기도는 허락될 것이다. 하지만 감사를 표하지 않고 데바들이 주는 것을 즐기기만 하는 사람들은 데바들로부터 도둑질을 하고 있다.
13. 희생(신들에게 희생을 바친 뒤) 후 남은 것을 먹는 의로운 사람들은 모든 죄들로부터 풀려난다. 그러나 자신만을 위해서 요리하는 죄스러운 사람은 정말이지 죄를 먹는다.
14. 음식으로부터 모든 존재들이 생겨난다. 비로부터 음식이 자란다. 비는 희생과 봉사에서 나오는 생명의 물이다. 숭배는 행위를 함으로 생긴다.
15. 행위의 기원은 브람마(프라크리티)에 있음을 알라. 브람마는 불멸의 존재인 신으로부터 나온다(일어난다). 그러므로 모든 것에 만연하고 있는 신은 영원히 희생에 자리하고 있다.
16. 모든 생명들은 이 법칙에 의존하고 있다. 만약 사람이 세상에서 움직이고 있는 바퀴를 따르지 않고, 감각들에만 기뻐하며 사는 사람들은 죄에 있다. 그의 삶은 헛되다.
행위의 길은 진리를 아는 사람들을 위한 길이 아니다.
17. 아트만을 깨달은 사람은 항상 만족한다. 그는 기쁨과 충족의 근원을 발견했다. 그는 해야 할 의무들이 도무지 없다.
18. 그때 그는 드디어 행위를 통해 얻을 것이 없으며, 행위를 하지 않음으로 잃을 것이 없다. 그는 이루어야 할 목표가 없기에 누구에게 의존하는 일도 없다.
행위의 길에 적합한 아르주나
19. (그대는 모든 곳에 가득 차 있는 큰물에 이르지 않았다.) 그러므로 애착이 없이 그대에게 주어진 의무를 항상 하라. 애착이 없이 신을 위하여 행위를 함으로 사람은 목샤에 이른다.
현자들은 대중에게 모범을 보여주어야 한다.
20. 자나카 왕과 다른 이들이 행위만으로 아트만에 대한 완전한 지식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그들은 대중들에 대한 본보기를 세우기 위해서 행위들을 했다.
21.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 위대한 사람이 무엇인가를 하면, 보통 사람들도 따라 한다. 그가 세운 본보기를 세상 사람들은 따른다.
22. 오, 프리타의 아들아! 나를 생각해 보라. 나는 우주의 주인이다. 따라서 나는 행위를 해야 할 필요는 없다. 나는 세 세상들에서 얻어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해서 행위를 한다.
23. 내가 행위를 멈추면, 사람들 역시 나를 모방할 것이다. 오, 프리타의 아들아!
24. 내가 행위를 멈추면 어떻게 될 것 같은가? 그들은 모두 길을 잃을 것이다. 그 결과는 창조물들의 파괴가 될 것이다.
무지한 사람들의 행위와 대조되는 현자들의 행위
25. 무지한 사람들은 결실들을 기대하면서 행위를 한다. 오, 바라타! 아트만을 아는 현자들은 사람들의 발이 자신의 의무의 길을 향하도록 하면서 일을 해야 한다. (그러면 그들은 가슴이 정화되어 때가 되면 평화를 얻을 것이다.)
26. (무지한 사람들은 나는 이 행위를 하고 행위의 결실을 즐길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명한 사람들은 행위들에 굶주린 무지한 사람들의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도록 조심하라. 일하는 사람의 가슴이 가장 높은 것에 고정되었을 때 일이 얼마나 신성한지 그들에게 본보기를 보여주라.
27. 모든 행위들은 실제로 구나들(세 구나의 균형이 교란되었을 때 창조가 시작이 된다. 그래서 몸, 감각들, 마음 등이 만들어진다. 자아로 미혹된 사람은 아트만을 몸, 마음, 생명의 힘, 감각들과 동일시한다.)에 의하여 일어난다. 그러나 자아로 마음이 흐려진 사람들은 “나는 행위자다.”라고 생각한다.
28. 오, 힘이 센 자여! 구나(에너지)들의 종류와 그들 각각의 기능을 잘 아는 사람은 아트만이 아니라 감각 기관들로서의 구나들이 감각 대상들로서의 구나들 사이에서 움직인다고 본다. 그렇게 생각하므로 그는 행위들에 대한 어떤 애착도 갖지 않는다.
29. 어리석은 사람들은 “우리는 그 결실을 위해 행위를 한다.”고 믿는다. 행위에 애착하는 이 사람들은 오직 그들이 한 행위의 결실만을 목표로 삼는다. 모든 것 곧 아트만을 아는 사람은 스스로 그런 사람들을 동요시키지 않아야 한다. 즉, 그들의 확신을 어지럽히지 말아야 한다.
해방을 열망하는 사람은 어떻게 행위를 해야 하는가?
30. “나는 신을 위하여 모든 행위들을 한다.”라고 생각하면서 나에게 모든 행위들을 바쳐라.
31. 트집 잡지 않고 완전한 믿음으로 나의 이 가르침을 항상 행하는 사람은 행위의 굴레를 벗어나게 된다.
32. 그러나 나의 가르침에 투덜거리고, 그것을 행하지 않는 사람들은 아무 분별력이 없는 사람으로 알라. 그는 파멸한다.
행위에 미치는 인간의 성품의 영향
33. 현명한 사람조차도 그 자신의 물질적 성품에 따라 행위한다.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은 자신의 물질적 성품을 따른다. 강제로 금지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개인적인 노력의 여지가 없는 듯이 보인다. 다음 수트라를 보면 그렇지 않다.)
개인적인 노력의 여지
34. 감각들이 감각의 대상들에 대한 애착과 혐오는 자연스럽다. 그러나 그대는 그런 느낌들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 그것들은 그대의 적들이다.
35. 다른 사람의 의무를 잘하는 것보다는, 이점이 없더라도 자신의 의무를 하는 것이 더 좋다. 자신의 의무를 다하다 죽는 것이 좋다. 다른 사람의 의무를 하면 위험하다. (자신의 가능성을 나타나게 하지 않는다. 지옥으로 가게 한다.)
욕망은 인간의 적이다.
아르주나
36. 그러나 오, 바르슈네야시여! 자신의 바람에 반하여 마치 힘에 강제된 듯, 사람이 죄를 범하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크리슈나
37. 그것은 라자스 에너지로부터 생긴 욕망과 분노이다. 그것은 모든 것을 삼키고 죄로 가득하다. 이것들은 이 세상의 여기에 있는 그대의 적이다.
욕망은 진리를 덮고 있다.
38. 불이 연기로 싸여 있듯이, 거울이 먼지를 쓰고 있듯이, 태아가 자궁으로 감싸여 있듯이, 아트만은 욕망으로 덮여 있다.
39. 오, 쿤티의 아들아! 아트만은 인류의 영원한 적인 탐욕스럽고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으로 덮여 있다.
욕망의 자리
40. 그것이 자리하는 곳은 감각들(보거나 들음으로 욕망이 일어난다.), 마음(그것들을 생각함으로) 그리고 지성(식별)이다. 그러면 이것들은 자신의 지혜를 가려 그 신체의 거주자를 미혹시킨다.
욕망을 없애는 방법
41. 그러므로 오, 바라타족의 최고인 자여! 먼저 감각들을 통제하라. 그다음에 그대는 지식과 아트만의 깨달음을 오지 못하게 하는 욕망이라는 이 사악한 적을 내버려라(없애라. 죽여라).
42. 감각들은 감각 대상들보다 더 뛰어나고, 마음은 감각들보다 더 뛰어나고, 지성은 마음보다 더 뛰어나다고 한다. 지성보다 더 뛰어난 것은 무엇인가? 아트만(절대적 목격자, 절대적 의식)이다.
43. 그대는 지성보다 더 우수한 것(아트만)을 알았으니, 아트만으로 그대의 자아를 다스려라. 그런 다음 욕망의 형태를 하고 오는 이해 하기 힘든 그대의 적을 무너뜨려라.
편저자 소개
편저 : 크리슈나다스(김병채)
1989년 뉴델리의 슈리 오로빈도 아쉬람에서 저녁을 끝냈을 때 하늘은 물론이고 땅까지 찬란한 빛을 만들고 있었다. 큰 나무 아래에 서 서성이다가 숄을 걸친 머리카락이 긴 성자풍의 외국인에게 물었다.
“제가 어디로 가면 좋습니까?” 인도인을 불러 말을 나누더니 “알란디로 가세요.”
알란디의 게스트하우스 주인은 나를 지하 서고로 데려갔다. 그 곳에서 갸네쉬와르가 주석을 단 바가바드 기타를 보여주었다.
푸나에서 오쇼를 만났다.
“그대는 붓다입니다.”라고 청중들에게 자비로운 말씀을 주셨다. 길거리에서 길을 물었다. “플리즈! 오픈 유어 하트.”
그 이름을 모르는 성자는 나의 하트를 가리키셨다. 성자 요겐드라지를 만났다.
“마음이 무엇입니까?”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 마음이 없다니, 그럼 나는 어떻게 해....
봄베이의 한 요가 연구소에서 외국인에게 물었다.
“인도에서 가장 성스러운 곳이 어디입니까?”
“티루반나말라이에 있는 아루나찰라산입니다. 그곳에 라마나스라맘이 있습니다.” 찾아갔다. 아쉬람에 들어서자 평화 그 자체였다. 줄을 즐겁게 타는 원숭이들, 한가로우면서 이방인을 따르는 군살이 없는 개들, 건물 아래 위 할 것 없이 돌아다니는 공작들, 아름다운 정원 속에 묻힌 아쉬람을, 아아! 식사는 얼마나 좋은가.........바바나 잎사귀 위에 남인도의 음식들이 놓이고 손으로 음식을 먹는다. 손대기에 뜨거운 라이스, 달, 차파게티 등. 우유, 버터밀크, 차이, 커피. 모두가 영혼의 음식이다. 행복에 잠겼다. 말이 필요 없는 곳.
아쉬람의 주인께서는 우리말로 이미 돌아가셨다. 내가 두 살 때. 이제는 큰 홀에 걸린 사진들로 방문객들을 만나고 계셨다. 큰 홀의 왼쪽 편에 있는 사진을 보고 무언의 대화를 나누기도 하였다. 같이 사진도 찍었다. 많이 아쉬워했다. 이 할아버지와 눈인사라도 했었더라면......만나고 싶었다.......정말......
어느 날 3호실의 나의 방으로 가는 도중에 한 성자 분이 오셨다. 그분께서 한 무리의 헌신자들과 무언의 대화를 나누는 신기한 모습을 보고 나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이것은 또 무엇인가.....원 세상에, 심지어 그 성자 분께서 나를 오게 하시고는 나의 눈 속을 바라보셨다. 나는 둔하였는가 보다.
이가타푸리의 명상 아카데미에서 명상을 했다. 호흡에 나의 마음을 온통 주게 되었다. 그렇게 하라고 하셨다. 나는 그 말을 따랐다. 내가 무엇을 준다면 그것은 나에게 없다. 나는 호흡에 나의 마음을 주었다. 놀라운 체험이 곧 왔다. 너무나 놀라 고엥카님에게로 달려갔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사마디입니다.” 나는 그 당시에는 그 체험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콜카타에서 마더 데레사님을 찾아갔다.
‘저를 축복하여 주십시오.’
2층, 확 트인 베란다에서 성녀의 두 손은 나의 머리 위에 있었다.
하리드와르에서 드디어 라마나의 제자 파파지를 만났다.
“저는 피곤합니다.”
“아래의 게스트 하우스로 가서 쉬십시오.”
“저는 몸이 아니라 마음이 피곤합니다.” “그대는 마음이 아닙니다.” 하! 앞의 성자 분께서 나를 보고 나는 마음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나는 그 말씀을 따랐다.
사마디에 떨어졌다. 자아도, 세상도 지워졌다. 빛나는 하늘이 나다. 사마디에서 돌아온 나에게
“그대는 붓다입니다. 당장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여정을 서둘러 마무리를 해야 했다.
다람살라에서 달라이 라마 성하를 친견하였다.
“저는 누구입니까?” “그대는 대나무 안의 빈 공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