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사람, 그리스도의 사람, 성령의 사람들께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 50주년 축사
성염 요한 보스코
전 주교황청 한국대사, 교수
빼앗긴 성당, 명동에서 지난 9월 23일에 미사를 집전하시던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신부님들의 50주년은 너무도 존경스럽고 감동적이었습니다. 사제의 직무가 예언직, 제관직 그리고 왕직으로 알려져 있는데 5천명으로 합계되는 우리나라 사제들 가운데 2%, 적어도 100여명 신부님들이 앞으로도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예언자의 기풍을 이어가시겠다는 다짐을 들을 수 있었고, 교회의 사회복음에 귀 기울이는 낯익은 교우들을 한 자리에 만나 뵈어 반가웠습니다.
자칭 선량한 신자들 다수가 신부님들을 미워하는 까닭이 신부님들에게서 퀴퀴한 양우리 냄새가 나기 때문이라고들 하더군요. 저 어렸을 적 나환자촌 미사에 복사하러 갈 적마다 맡았던 싸한 냄새가 그런가 봐요. 어떤 사랑이든 체취와 생채기를 남기기 마련이지만, 샤넬파이브를 뿜는 유복한 교우들은 ‘신부님, 우리 신부님’이 교회의 ‘가난한 살들’과 한국사회가 ‘폐기물’ 취급하는 사람들을 별나게 가까이하시는 광경을 보면 자칫 눈이 뒤집힙니다. ‘있는 사람도 천당 좀 가자!’는 심술마저 나옵니다.
스승이 가신 길, 제자들의 숙명
더구나 뼛속에서 타오르는 열기를 견딜 수 없다 보니 신부님들 강론에서 간간이 울려 나오는 쇳소리를 천년 넘게 ‘삼구三仇 영성’(영혼의 원수는 무엇이뇨? 마귀, 세속, 육신이 바로 삼구니라)으로 그루밍 당한 신자들이 못 견딥니다. 예컨대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첫 회칙 『복음의 기쁨』에서부터 사제들더러 “아예 밖으로 나가라! 사회 불의의 공범자가 안 되려면 사회적 경제적 종교적 불의와 모순에 항거하여 목청을 높여라!”는 격려를 보내셨다가 많은 주교들에게 짜증을 듣고 밖에서는 ‘순수한 마르크스주의자’, ‘지구상의 가장 위험인물’로 지탄받고 계시지 않던가요?
아무튼 1974년부터 신부님들이 한국 기득권층이며 그들에게 절한 교회 인사들로부터 ‘반대 받는 표적’으로 걸어오신 외로운 길을 떠올리노라면, “제명에 죽는 예언자 없다”, “예언자는 예루살렘 밖에서 죽는 일 없다”는 두 명제는 신부님들네 피치 못할 숙명임을 우리가 목격해 온 바입니다. 스승께서 기득권자들의 ‘집단적 부마’를 치유하시려다 ‘마귀 우두머리’라고 딱지 받으신 터에 신부님들 신세가 나을 수는 없겠지요?
"그리스도의 사람아!"
지난 반세기 동안 철근콘크리트 십자가를 지고 한반도에서 저질러지는 온갖 유혈과 불의를 블랙홀처럼 온몸으로 빨아들여 온 사제단의 모습은 신부님들이 ‘그리스도의 사람’임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그 길은 ‘자비의 길’이어서 예루살렘 성밖으로 이어집니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가엾어서 택할 수밖에(et miserando et eligendo)”라는 표어로 살면서,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성직자들에게 “우리, 하느님의 자비 좀 배웁시다” 하소연하는 데 교종직 10년을 보냈습니다. 구체적으로 성사혼이든 관면혼이든 열 쌍 중 세 쌍이 이혼하는 세태며, 그 ‘조당거리들’이 그래도 ‘아버지의 집’이랍시고 찾아오거든 떡 한 쪽(영성체) 줘서 보내는 선심은 보이라고 타일렀습니다. “성체는 선량에게 주는 포상 아니고 앓는 사람에게 주는 약”이라면서. 그러고서 교종이 무슨 답을 들으셨죠?
교황청 장관 추기경들과 교황립 대학들을 주름잡는 신학 교수들이 들고 일어나 “성하, 지금 무슨 짓 하시오? 자비가 계명을 못 이깁니다!”라고 규탄했고, ‘이단 교황’을 들먹이기까지 하는 판이니 사제단이라고 온전하겠어요? “자비가 계명을 못 이긴다”는 추기경들의 선언에서 저는 구원사업의 근간을 뒤집어 엎는 메피스토의 고함을 들었습니다. 제게는 그 고함이 “하느님도 나한테 까불면 죽어!”라는 어느 목사의 엄포랑 종교인들의 심중이 까발려진 ‘가장 솔직한’ 신앙고백으로 들렸습니다.
스스로 창을 열고 밖으로 나가라
한반도 언덕마다 앞으로도 세워질 십자나무에 ‘구리뱀’ 형상으로 줄줄이 매달리시더라도 신부님들이 다음 한 가지를 염두에 두십사 부탁드립니다. 신부님들은 ‘성령의 사람’이어서 그분의 입김이 불어가는 방향에 예민하십니다. “노아가 방주로 들어가자 주님께서 밖에서 문을 닫아 거셨다.”(창세 6,16)는 구절이 있습니다. 교계는 이 구절을 역사신학의 보도寶刀로 채택하여 하느님의 백성을 됫박 밑에다, 양우리 속에다, 방주 안에다 가둬 순치했습니다. 구원의 창문은 위로만 냈습니다. 보다 못한 성령께서 17세기부터 평신도들 귀에 ‘모세의 교좌에 묻지 말고 알아서 역사를 건설하라’며 회리바람을 일으키셨습니다만, 그 ‘바람’에 덜컥 Laicisation(탈교계화)라는 이름이 달라붙고 말았습니다. 계몽 사상가들이 성령께로부터 ‘사회계약 국가론과 주권재민’(로크), ‘공동선과 의회민주주의’(몽테스키외), ‘인간과 그 존엄성이 사회제도와 윤리도덕의 마지막 준거’(칸트) 등을 받아 적었는데 교황청은 그 저서들을 죄다 ‘금서목록’에 올려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계몽주의 평신도들은, 천국문 쇳대(‘자물쇠’ 아닌 ‘열쇠’입니다)는 자기네 손에 있다고 쩔렁거려 보이는 교계의 방해를 무릅쓰고 프랑스혁명, 노동운동, 현실사회주의 70년 실험을 거쳐서 현대 민주주의와 복지국가를 확립하고, 모두 세금을 모아 국민 모두의 교육, 의료, 복지를 법제화하는 중입니다. 저는 이것을 ‘국민사도직國民使徒職’이라고 부릅니다. 다만 근자에만 보더라도 대한민국에서 교우 박 율리아나(근혜)와 윤 암브로시오(석열)가 국민사도직을 실행하는 방식이 교우 노 유스티노(무현)나 문 디모테오(재인)의 노선과 어쩌면 그리도 다를까요? 세계적으로 급속히 쇠퇴하는 사제 성소와 수도 성소는 어쩌면 성령께서 참신한 교회상을 마련하신다는 증표일지 모른다는 추측 하에, 평신도들에게 올바른 국민사도직을 고무하는 일이 사제단의 과제로 정립될 듯합니다. 사실 사회복음을 선포할 십자군은 단기필마의 장수들로만 결성되지 않습니다. 지금 로마에서 열리는 시노달리타스가 그걸 배우자는 모임 아닌가요?
2024.10.25. 정의구현 사제단 50주년 축하 메시지
(빛두레 - 열린 교회로 가는 길 - 1675 (2024.10.25)
첫댓글 특별한 부르심의 길을 가시는 신부님들과 좋은 글로 기념 축사를 해주신 성염 교수님께 감사를....
제목 올리는 것을 깜빡하고...뒤늦게..."보신 분들과 써 주신 분께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