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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회의 비밀(7)
카르마의 유대가 있어도 결혼을 권할 수 없는 경우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그런 인간관계의 문제보다 더 중요한 문제를
그 사람이 현생에서 배우고 해결해야 하는 경우 다음은 두 사람 중의 어느 한쪽
또는 두 사람이 다 영적으로 아직 지불할 수 없는 경우
즉 그 문제에 대처할 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경우,
그리고 하려는 결혼이 과거에 저지른 행위에 대해 너무나 극단적인 형벌이 되거나
또는 그 형벌이 저지른 죄에 맞지 않은 경우,
끝으로 배워야 할 영적 교훈을 결혼생활보다는 독신생활을 통해 더 잘 배울 수 있는 경우이다.
리딩에서는 결혼을 왜 권하지 않는지 일일이 밝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결혼이 적절하다고 인정될 경우에도,
하고 안하고는 완전히 개인의 자유이다.
리딩은 조언을 바라는 사람에게 느닷없이 단정적인 지시를 하는 일은 거의 없다.
이것은 어떤 것을 지도할 때에도 최상의 지도법이다.
이런 기본적인 태도는
다음의 예에서 분명히 볼 수 있다.
젊은 사람 둘이 서로 결혼을 하는 것이 좋겠는지를 물었다.
리딩은 그들이 과거 생에서 두 번 반려가 된 경험이 있음을 말했다.
한번은 페르시아에서,
또 한 번은 이집트에서였다.
둘이 서로 강하게 끌리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막상 그들의 결혼에 대한 리딩의 대답은 애매했다.
“만약 이상과 목적에 일치하는 점이 있다면 둘의 결혼은 아름다운 결합이 될 가능성이 있다.”
는 식이었다.
처녀는 이어서 자신이 그 남성 이외의 남자와 결혼하면
그 남자와 결혼한 것만큼 또는 그 이상으로 행복해질 수 있느냐고 물었다.
리딩은
“당신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런 사람은 얼마든지 만날 수가 있다.
만약 당신이 지금 그렇게 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서 쌓아야 할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조만간 당신은 그것을 해내야 하니, 하고 싶으면 그렇게 하는 것이 좋다.”
고 대답했다.
어떤 경우는 다음과 같은 단호한 대답도 나온다.
질문 : 제가 지금 약혼한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좋을 까요?
대답 : 아니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선택의 권리와 책임은 완전히 당사자인 개인에게 있다고 한다.
동시에 많은 경우에 선택의 기준을 말해준다.
질문 : R.W가 저에게 맞는 상대일까요?
대답 : 그것은 당신 자신이 결정할 일이지 남이 결정할 것이 아니다.
당신들 둘 사이에는 정신적·육체적 친화력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끌리는 힘도 있는가?
영혼이 영혼에 호응하고,
목적이 목적에 호응하고 있는가?
당신들의 이상은 같은가?
그렇지 안다면 조심하라.
네 사람의 결혼상대 후보자가 있는 여성이 그 중 누구를 선택하는 것이 좋겠는지를 물었을 때
리딩은 이 점을 아주 분명하게 강조했다.
대답은 다음과 같다.
“이 문제는 당신이 무엇을 이상으로 삼고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 네 사람은 모두가 과거 생에서 당신을 어떤 일로 도왔거나
또는 방해를 했거나 하는 관계가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당신에게 어떤 사람은 멀리하고 어떤 사람은 가까이 하라고 권하는 것은
당신의 입장을 나쁘게 하고 또 그들의 입장을 나쁘게 하는 결과가 됩니다.
선택은 당신 자신이 해야 합니다.
봉사적인 인생을 살기를 선택의 기준으로 삼으십시오.
모든 사람이 다 자유의지를 갖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서 결혼상대를 고를 때의 기준을 도출할 수 있을 것이다.
결혼이란 대개가 저항하기 어려운 육체적 매력 때문에 하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고 해도
잘못이 아니다. 그
러나 케이시의 리딩의 견해에 따르면,
두 사람이 육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신적이나 영적으로도 궁합이 맞아야 한다.
결혼이 성공하려면 이 세 가지를 밑변으로 한 기반 위에 서야 한다.
만약 이 세 가지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소홀히 한다면
결혼은 일그러진 꼴이 되고 만다고 리딩은 말하고 있다.
남녀의 이상이 이 세 가지 영역에서 대체적으로라도 같아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위험하고 비참한 결과가 나오기 마련이다.
선택에 즈음하여 잘 생각해 보지도 않고 무턱대고 결정해 버리는 것은 화를 자초하는 원인이 된다. 그러므로 이성에게 견딜 수 없는 매력을 느끼기 시작하면 스스로 경계해야 한다.
성적 애착을 느낄 때 그것을 훌륭한 결혼으로 발전시키고 싶다고 바랄만큼의 신중함이 있다면,
또한 언제든 폭발하려는 상태에 있는 카르마의 도화선에 불을 붙이는 짓을 하기 싫다면
충분히 조심해야 한다.
윤회라는 원대한 시야에서 결혼을 생각해 볼 때
반드시 부딪치게 되는 문제는 어찌하여 어떤 남녀에게는 결혼의 기회가 전혀 주어지지 않는가 하는 문제이다.
용모도 남들에게 뒤지지 않고 매력도 있으며 성질도 보통인데
결혼의 기회를 전혀 얻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여기에 대하여 케이시 리딩에서 주어진 예가 있을까?
프랑스에는 결혼을 한 상태와 안한 상태를 풍자하는 다음과 같은 멋진 경구가 있다.
“결혼이란 포위된 요새와 같은 것.
요새 밖에 있는 자는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하고,
안에 있는 자는 밖으로 나가고 싶어 한다.”
과연 이 통찰에는 나름대로의 진리가 들어 있다.
결혼은 어떤 사람에게는 굉장한 심리적 불행을 가져다준다.
그러므로
결혼을 그저 바람직한 일로만 여기고 그것이 마음의 평안을 위협하는 요소들을 많이 가지고 있음을 고려하지 못하여,
그저 그 행복의 약속만을 보려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더구나 결혼은 그 행위만으로도 상당히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 상식인데도,
일반적으로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은
뭔가 소중한 것을 손에 넣지 못한 것 같은 느낌과 욕구불만 내지 패배감을 품기 일쑤이다.
결혼생활에서는 말할 것도 없이 성적 요소가 중요한 몫을 한다.
그러므로 결혼을 하지 못했다는 욕구불만은 적어도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개 성적인 굶주림이라고 볼 수도 있다.
현재의 서구 사회적 구조 속에서 독신생활은 일종의 욕구불만의 상징이고,
그것을 보는 눈에는 어떤 경멸감마저 감도는 일이 많다.
이제부터 살펴보는 경우들은 모두가 여성에 관한 것들이다.
케이시에게 이런 문제로 도움을 청한 것은 남성보다 여성이 많았고 또 여성의 경우가 훨씬 복잡했기 때문이다.
외로움!
이 말에는 뭔지 모르게 쓸쓸하고 서글픈 느낌이 감돈다.
연인 사이에서는 “이것으로 이별이요.”하는 말이 온갖 말 가운데서 가장 슬픈 말인 것처럼,
“나는 외롭다.”고 하는 이 말은
아마도 인간의 상태를 표현하는 말들 가운데서 가장 슬픈 말일 것이다.
영적인 빛이 없다면,
연애를 한 뒤끝의 외로움이든 전혀 연애를 해보지 못한 외로움이든,
모든 인간 상황 가운데서 이처럼 삭막하고 비참한 상황은 없으리라.
이제부터 보는 경우는 이 외로움을 다룬 경우들이다.
첫째의 예는 뉴욕의 어떤 개인비서이고 상당히 육체적인 매력이 있는
성실한 노르웨이 태생의 여성이다.
그녀가 처음 케이시의 리딩을 받았을 때는 47세였다.
그때 그녀는 이미 두 번의 결혼생활을 경험한 뒤였다.
첫 번째의 남편은 결혼하고 얼마 안되어 죽었기 때문에 재혼을 했는데,
두 번째의 남편은 훨씬 연상의 남성이었다.
그 결혼생활은 아주 불행해서 곧 이혼을 했다.
아이는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친정 가족은 모두 죽고 없었다.
그야말로 의지할 데 없는 홀몸이었다.
직업관계로 많은 사람들과 교재가 있었지만 그 모두가 그저 의례적인 교재에 불과했다.
그녀는 다시 한번 결혼을 하고 싶었지만 기회가 전혀 올 것 같지 않았다.
리딩에 의뢰하면서 그녀가 한 말은 그녀가 얼마나 외로움에 지쳐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저는 왜 이렇게 언제나 홀로 있어야만 하는 걸까요?
제가 결혼상대를 얻지 못하는 데는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하고 물었다.
리딩은 “거기에는 까닭이 있다.”고 밝혀 주었다.
전전 생에서의 일인데,
그녀는 노르웨이에서 어떤 비극적인 경위로 지금의 외로운 상태의 원인을 지어놓은 것이다.
당시 그녀는 두 어린 자식의 어머니이고 한 남성의 아내였다.
그런데
그 남편은 공개하기 어려운 어떤 이유로 사회에서 지탄을 받는 불명예스러운 처지에 빠져 있었다.
두 번째 아이가 태어나고 얼마 안되어
그녀는 절망한 나머지 벼랑에서 바다로 몸을 던져 자살을 했다.
“그 때문에 그 영향이 지금 우울증으로, 그
리고 거의 견딜 수 없을 만큼 심한 고독감으로 이따금 나타나는 것.”
이라고 리딩은 말했던 것이다.
이 경우의 카르마의 유형은 아주 분명한 것 같다.
이 여성은 남편이 어려움에 빠졌을 때 자기의 목숨을 스스로 끊어
결과적으로 남편과 두 아이에게 꼭 필요한 사랑을 빼앗아 버렸다.
가족의 유대에 대한 감사의 결여,
명예와 책임감의 결여가 지금의 상태를 자아낸 원인인 것이다.
이 경우는
우리가 잘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를 보여주고 있다.
자살을 중대한 죄악이라고 하여 금지하는 종교적 교리가 건전한 것임을
이 경우가 증명해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일체의 행위 일체의 무관심,
일체의 태만,
생명이 베풀어 주는 것을 가볍게 보고 함부로 다루는 태도에 대한
궁극적인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다음의 경우는 영국계의 한 여성의 경우인데,
그녀는 유치원 보모이고 항상 결혼을 동경해 왔다.
그녀는 양친이 중년이 되어서 낳은 외딸이었고,
양친은 모두 그녀가 아주 어릴 때 죽어버렸다.
나이 든 고모 둘이 그녀를 맡아 엄격하고 보수적으로 키웠다.
그 때문에 같은 나이 또래의 친구들에 적응하지 못했고,
줄곧 외따로 고독감 속에서 지내왔다.
그래서 심히 내향적인 경향이 생긴 것이다.
그녀에게 단 한번의 연애 경험이 있었는데 그것은 순전히 육체적인 관계였다.
정신적으로 맞지 않는다는 것이 차츰 드러나면서 연애는 끝나고 말았다.
그 사건이 있은 다음부터 그녀는 자신의 인생이 실패작이고 공허한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하는 일을 즐길 수는 있어서 직업적으로는 성공한 셈이었다.
그녀는 일솜씨가 좋고 유능하고 영리했다.
그러나 과거를 회상할 때마다 시름에 빠질 수밖에 없었으며,
그런 상태가 몇 주씩 계속되다가는 겨우 가라앉곤 했다.
그런 슬픔이 발작하면 자살을 해버리려고 생각하는 때도 많았다.
그렇지만 그녀는 일하는 태도가 적극적이고 매력적이어서
누구도 그녀가 그렇게 큰 좌절에 빠지는 일이 있다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리딩에 따르면
그녀의 경험 가운데 두드러진 사건이 네 번째 앞의 전생에 있었다.
그것은 페르시아에 태어났던 전생에서인데,
페르시아에 베드윈족이 침략해 들어왔을 때 그녀는 자살을 했던 것이다.
그 때 그녀는 페르시아 통치자의 딸이었고,
침략해 온 베드윈족장에게 인질로 잡혀갔다.
그리고는 족장 바로 아래의 지위에 있는 자에게 주어졌으며,
그 사나이의 아이를 낳았다.
그렇게 계집아이를 낳고 얼마 안되어 그녀는 자살을 했던 것이다.
어미를 잃은 아이는 고아로 자라면서 난폭한 병사들의 노리개가 되고 심한 학대를 받았다.
리딩은 그 아기를 버리고 자살을 한 것은
다만 남에게 지기가 싫어서 죽어버린 것뿐이라는 것을 지적했다.
“그것은 자기방위나 조국 또는 어떤 이상을 지키기 위한 죽음이 아니다.”
리딩은 이 이상 자세한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짤막한 말을 미루어 그녀가 너무 자존심이 강하고 오만불손한 성질이어서
누구에게도 지기가 싫어 차라리 목숨을 끊는 쪽을 택한 것이라는 점을 짐작할 수 있었다.
현생에서도 그녀는 너무 무뚝뚝하고 독선적이며 남성보다 자존심이 강했다.
그리고 페르시아시대의 기질이 그대로 살아 있어
그 때 저지른 정신적 죄가 현생에서의 그녀와 남성들과의 사이에 장벽이 되어 있는 것 같다.
남성들이 그녀에게 접근하지 않는 것은
그녀에게 따뜻한 정이 없고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기질이 풍기기 때문인 것이다.
기묘하게도 현생에서 그녀는 아이를 갖고 싶어 했다.
후견인인 늙은 고모들이 반대하지 않았다면 벌써 양녀를 데려다 키웠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전생으로부터 이월된 또 하나는 지금도 때때로 자살을 하고 싶은 충동이었다.
그러나 리딩을 통해 자신의 현재에 대한 인과관계를 알게 되었기 때문에,
지금 과거의 행위를 보상하지 않으면
언제까지든 보상이 될 때까지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
자살로써 현실을 도피하려는 생각은 스스로 억제할 수가 있게 되었다.
그녀는 또 한번의 리딩을 통해 현생에서 결혼생활을 하게 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좀더 시간이 지난 다음의 일이고,
그때까지 모든 노력을 다해 상대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기를
스스로 다짐해야 한다는 충고를 받았다.
언제 그런 행복한 때를 맞이할 수 있겠느냐는 그녀의 물음에
리딩은
“당신이 그럴 준비가 되었을 때 그런 생활이 당신에게 찾아든다.”고 대답했다.
그녀에게는 여러모로 현생이 시련의 시기라고 리딩은 말했다.
“왜 저의 인생 최후의 기회인 이 시기에 이렇게도 남성들과의 교재가 막히는 것일까요?”
하는 그녀의 물음에 대한 리딩의 대답은
“그것은 당신이 이번에 태어난 근본 목적인 일을 시험해 보는 시기이기 때문이다”였다.
결혼을 하지 못하는 처지나 외로운 처지는 원인이 너무나 다양하다.
이 경우를 살펴보면 오스카 와일드의 말이 생각날 것이다.
그는 말하기를,
“인생에는 두 가지 비극이 있다.
하나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하는 비극,
또 하나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갖는 비극”이라고 했다.
이 기묘한 근본 원인은 인간의 빈약한 판단력이라고나 할까,
힌두교에서 말하는 아비드야 곧 무지(無知)에 있는 것이다.
옛날이야기에
산신령이 세 가지 소원1)을 들어 주겠다고 하자
아주 바보 같은 소원을 말하는 사람의 이야기가 있거니와,
자신의 행위의 결과를 뒤에 달게 받아야 하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그 자신인 것이다.
이 이야기는 두 가지의 문제를 상징하고 있다.
하나는 대다수의 사람이 자신의 삶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는 것,
또 하나는 인간의 고뇌의 대부분은 자기 자신이 한 어리석은 선택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결국 빈약한 판단력이나 편협한 유물론적 견해,
그릇된 이기주의,
근시안적인 욕심에서 선택을 한 결과인 것이다.
이 경우는 멀리 아틀란티스 시대에 결심한 결과가 현재에도 아직 그 여운을 남기고 있는 예이다.
이 40대의 여성은 몸매가 뚱뚱하고 아주 단단했다.
그러나 그것은 주로 운동부족과 나쁜자세 때문이다.
얼굴에는 전혀 화장을 하지 않고 머리도 파마를 하지 않았다.
옷은 곱게 보이려는 여자다운 배려가 전혀 없었고,
옷도 그저 실용적이고 경제적인 것만을 골라 입었다.
얼굴 생김새는 이목구비가 반듯하여 어여쁜 편이며,
무엇보다도 종교적 신념이 강하여 외향적인 태도가 몸에 익어 있으니,
화장을 하고 의상을 꾸민다면 그녀는 아주 아름답고 성숙한 여인으로
남의 눈을 충분히 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때까지 로맨스가 전혀 없었다.
그녀는 바로 전생에서 세례 요한의 근친이었기 때문에 짙은 종교적 분위기에서 자랐다.
그것이 현생에서 종교에 몰두하게 된 원인인 것이다.
그 전의 생애, 곧 팔레스타인 시대에는 그녀는 남성이었고
목공과 쇠붙이를 다루는 일을 했었다.
현생에서의 그녀의 기계적이고 현실적인 사고방식은 거기서 비롯된 것 같다.
그 전의 삶에서는 아틀란티스의 귀부인이었다.
그 때의 불행한 연애경험이 그녀의 마음을 크게 괴롭혔고 혼란시켰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리딩이 말해 준 바 두 번 실망과 골칫거리를 가져다주는
연애 같은 것은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거기에 연애의 모험이나 함정에는 빠지지 않겠다는 그녀의 결심의 출발점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의 현생에서의 외로운 독신생활은 보복적인 카르마의 작용은 아니다.
여기에는 앞에서 본 ‘자살’에서와 같은 작용·반작용의 관계는 없다.
오히려 연속의 원리가 욕망이라는 형태로 작용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녀는 일단 결심한 바에야 가족이나 친지에 본때를 보여 주기 위해서라도
태도를 절대로 버꾸지 않으려고 했다.
그 아틀란티스 시대 특유의 맹렬함을 가지고 그녀는
두 번 다시 남과의 애정관계 특히 이성과의 관계에 말려들지 않겠다고 결심을 한 것이다.
이 결심은 영적인 깨달음에서 보다 큰 사랑을 위해 한 것이 아니라,
사랑을 주고 난 다음 수치를 당하기 싫다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욕망에서 한 결심이었다.
그 동안 그녀는 그런 태도를 바꾸어야 할 이유가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녀는 그런 결심의 논리적·심리적 결과 모두를 달게 받아야만 하게 된 것이다.
그녀가 현생에서 결혼을 하게 될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리딩은 아무 말도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그녀는 이제는 남들에게 애정과 관심을 갖는 방향으로 돌아서고 있었다.
사랑을 잃음으로써 그녀는 사랑의 가치를 알았다.
자신의 외로움을 통해서 그녀는
자기가 남에게 사랑을 주기를 거부한 죄가 현실의 상황으로
자신의 신상에서 구체화되는 것을 본 것이다.
아무튼,
외로움이 어떤 카르마
-그것이 자살이든 사랑을 주지 않는다는 결심이든,
남성이었든 혹은 전생에서 발달한 남성적 특징이었든-
에서 온 것이든 결혼을 하지 못하는 상태는 다른 상태나 마찬가지로
오직 마음을 닦고 자기 변혁을 이룩하는 기회임을 인정해야 한다.
남자든 여자든 만약 삭막한 고독의 독방 속에 들어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면
이 지혜를 자기 자신에게 적용해야만 한다.
짝을 얻으려면 자신이 그만한 값어치를 지녀야 한다.
친구를 사귀려면 그에게 부드럽고 친절해야만 한다.
사랑을 얻으려면 사랑을 먼저 주어야 한다.
스스로 자기가 바라는 것에 어울리는 자기가 되게 함으로써 지금 외로운 사람들은
행복한 사랑의 보금자리를 보다 빨리 차지할 수 있는 것이다.
일단 배우자를 선택하여 결혼생활을 시작하면
그 부부는 서로의 카르마가 결합되어 그 영적인 상호작용 속에 들어간 것이다.
결혼문제에 관한 케이시 리딩을 잘 살펴보면,
배우자의 선택이 과거 및 미래에 대해 갖는 뜻에 대한 하나의 견해를 찾아 낼 수 있다.
이것을 연극에 비유하여 말해 본다면 조금 더 이해하기 쉬울 것 같다.
결혼하려고 결심함으로써 한 쌍의 남녀는
무의식 속에서 과거에 몇 번인가 공연한 적이 있는 특정 상대역과
다시 한번 주역을 맡겠다고 동의한 것이 된다.
그들은 결혼에 동의함으로써 이 세계에 자신들의 인생극을 위한 특별한 무대를 꾸며 놓은 셈이다.
그 무대는 어쩌면 몇 겹의 배경이 보이는 장치로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먼 배경에는 아틀란티스의 실험실이 있고,
거기에는 뭔가 번쩍거리는 정밀기계들이 주욱 놓여 있다.
조금 앞에는 그리스의 험준한 바위산 기슭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양치기의 움막집들이 보이고,
맨 앞에는 루이 16세 시대 궁전의 호화로운 응접실이 꾸며져 있을지도 모른다.
이제 두 사람은 그 현란한 프랑스의 궁전에서 그들이 함께 연기했던 극의 여러 장면을 되새겨 본다. 경쟁·불의·간통·반역 등 바로 앞의 막에서 펼쳐졌던 사건들일지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억제하기 어려운 증오와 살인의 충동으로까지 엉켜 절정에 달해 있을지 모른다.
혹은 이야기의 진행이 세월을 거치면서 차츰 그 격렬함이 줄어,
어쩌면 이제는 보다 미묘한 심리적 잔인성, 곧 이기주의·비웃음·교만·무관심 등으로
엉켜 새로운 막에서 갈등의 요소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 두 주역은
과거에 어떤 무대에서 어떤 이야기를 펼쳐왔든 이번의 새 연극에서 연기를 하면서
언제든지 마음대로 줄거리의 진행을 바꿀 수가 있다.
무대 장치는 되어 있지만 각본의 세부는 아직 확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극의 줄거리와 무대 장치는 미리 극단에서 정해 놓았지만,
주역들은 연기를 하면서 장면 장면을 즉흥적으로 바꾸어 나갈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앞의 막에서의 결점을 보완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또 다른 비유를 써 본다면,
모든 사람이 결혼 상대를 선택함에 있어서는 다른 인생사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의지의 자유를 가지고 있는데,
선택이라는 행위는 마치 버스에 올라타는 행위와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어떤 노선의 버스에 올라타면
그는 그 버스가 달리는 방향과 경로에 몸을 맡길 수밖에 없다.
그것은 다른 버스에 탔다면 지나갔을지도 모를 경로나 방향과는 전혀 다르다.
더구나 버스 안의 상태는 그에게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운전기사가 난폭하고 불친절할 수도 있다.
차 안의 공기는 탁한데 창문은 꼭꼭 닫혀있고,
더구나 옆에 앉은 사람은 짜증스러울 만큼 지껄여댈지도 모른다.
거기에 처음에 타려고 결심했을 때는 전혀 생각지 못한 온갖 요소들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
렇지만 역시 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 그가 취하는 태도나 행위는
그 스스로가 결정할 수 있다.
그리고 환경이야 어떻든 자신의 태도나 행동에 대해서는 결국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케이시 리딩에는 카르마의 원리에서 설명되는 결혼 생활의 예가 많이 있다.
어떤 복수의 여신도,
또는 어떤 그리스의 비극도 다음의 예와 같이 무자비하고 처참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녀가 지금의 남편과 결혼을 한 것은 23세 때였다.
그녀는 너무나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번쩍이는 갈색 눈동자, 얼굴 둘레를 감싸고 크게 물결치는 짙은 머리, 날씬한 몸매·····
여느 여배우 못지않은 외모였다.
케이시의 리딩을 받은 것은 41세 때이지만 아직도 거리에서 남들이 돌아다 볼 만큼
매혹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상류사회 사교계를 주름잡는 그녀의 숨겨진 이야기를
그녀와 사귀는 부유한 부인들이 얼마나 알고 싶어 했을까?
이름이 널리 알려진 쟁쟁한 실업가와 결혼하고부터 18년간을
그녀는 그야말로 참기 어려운 감정의 격동을 용케 견디어 왔다.
남편이 완전한 성적 불구자였던 것이다.
성에 대한 욕구도 쾌감도 느끼지 못하는 여성이라면 그런 것은 별로 비극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여성처럼 관능적이고 정이 많은 경우는
이것은 더없는 비극일 수밖에 없었다.
별거를 하거나 이혼을 해버리면 문제는 간단히 해결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남편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런 어떤 방법도 취할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남편에게 상처를 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결혼 초기 2,3년 동안에는 절망한 나머지 외도를 한 적도 몇 번 있었다.
그것은 남편을 배반하려는 뜻에서가 아니라 다만 육체적·감정적 욕구 때문에서였다.
그녀는 차츰 그런 충동마저도 신지학(神智學)을 공부하고 명상을 배우고 하면서 극복해 나갔다.
그렇게 겨우겨우 18년을 넘겼지만 드디어 위기가 닥쳤다.
그녀를 사랑했던 옛 남자가 나타난 것이다.
케이시에게 보낸 그녀의 편지를 보자.
“우리들이 다시 만난 순간 그의 마음에 맹렬한 기세로 정염이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저도 거기에 휩쓸릴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그대로 헤어지려고 애썼습니다.
저의 마음은 다시 신지학을 공부하기 전처럼 흔들리기 시작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가 만약 독신이었다면 저는 그와 관계를 맺기를 주저하지 않았겠지요.
그러나 저는 당신도 충분히 짐작하리라고 생각합니다만,
여러 가지 이유로 남편과 헤어질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더구나 저를 좋아하는 그 남성 역시 훌륭한 인격자가 되어있었고요·····.
그 남성에 대한 저의 감정은 아마 사랑이라기보다는
저의 결혼 생활의 특수한 사정에서 오는 반동이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그 남성도 훌륭한 인물입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저를 좋아했었습니다.
그때 저는 그것을 몰랐습니다만,
나중에 그의 어머니가 말해 주어 알게 된 것입니다.
그는 자기가 가정을 이루어 생계를 지탱할 수 있게 될 때까지는
저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하지 않으려는 결심이었던 것입니다.
그가 저에게 결혼을 하자고 한 것은
바로 제가 지금의 남편과의 약혼을 알리려고 집으로 돌아갔을 때였으니까요.
저는 몇 번 그와 데이트를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가 몸도 마음도 갈기갈기 찢어진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만나 주기라도 하면 그의 욕망이 달래지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정신적으로 깨끗해지고 싶다는 욕망도 가지고 있었지요.
그러나 그 후 그를 만나는 일도 중단하고 말았습니다.
그의 아내를 배신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의 아내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내를 좋아하기도 했습니다.
그녀에게 방해가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사회는 저의 행동을 비난할 것이고 그녀도 그것을 알면 비난할 것은 당연하니까요.
저는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남편도 그녀를 싫어하지는 않는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하기야 그녀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데서도 서슴지 않고 남편을 나무라기도 합니다만,
그녀에게는 장점도 많이 있습니다.
저의 남편은 제가 당신에게 건강에 대한 조언을 요청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저의 이런 사정은 전혀 모릅니다.·····.”
이상이 이 여성이 스스로 말한 자기 자신의 인생 문제의 줄거리이다.
이 경우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극적이다.
그러나 라이프 리딩으로 그녀의 문제에 얽힌 과거의 인연이 밝혀진 것을 볼 때는,
잘못을 저지른 두 영혼이 다시 만나 짊어지게 된 참으로 놀랄 만큼 적절한
천벌임이 깨달아져 저절로 숙연해지고 두려운 마음마저 일어나는 것이다.
리딩이 밝혀주는 이 비참한 아내와 남편의 전전생을 보자.
그들의 전전생은 십자군 시대의 프랑스에서였다.
그 때 그녀의 이름은 수잔,
그리고 그 때도 그녀는 현생의 남편과 결혼한 아내였던 것이다.
그 때 남편의 이름은 멜슈였고
십자군 운동에 열중한 모험적인 사나이였다.
그는 아내를 좋아하기는 하였으나 당시의 종교적 정열을 지닌 사나이들과 마찬가지로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구세주 예수의 무덤을
이교도들에게서 다시 빼앗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바로 그 구세주가 가르친 사랑을 자신의 아내에게는 베푸는 것을 생각도 못하는 상태였다.
십자군에 참가하여 아내를 남겨두고 고국을 떠나게 되자,
그가 가장 원한 것은 자기가 없는 동안 아내가 정조를 지켜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아내가 행여 외로움에 겨워 실수를 하지 못하도록,
믿음에서 위안을 찾는 대신 다른 남성에게서 위안을 얻을 수 없게끔 조치를 취했다.
‘정조대’라는 기묘한 기구는 이 때 발명된 것이다.
정조대는 유럽에서는 12세기 후반까지 쓰였고,
프랑스에서는 얼마 전 곧 1934년까지도 쓰인 일이 있다고 한다.
뉴욕에서는 1931년에 정조대를 아내에게 강제로 채워
법정 시비까지 일으킨 사건이 두 번씩이나 있었으니
그 때까지 그런 기구가 쓰였던 것이다.
정조대란 금속판에 가죽 또는 헝겊을 씌우고 자물쇠를 단 일종의 벨트이다.
그것을 아내에게 채우고 자물쇠를 잠가 버리면 열쇠를 가진 사람이 돌아오기까지는
성교가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멜슈는 그것을 수잔에게 채워놓고 떠났다.
리딩의 말을 이용해 본다.
“이 사람은 남편에게서 의심을 받아 남자와 관계를 하지 못하도록 벨트를 강제로 차게 된
아내들 가운데 하나이다.”
강제로 라고 했으니 멜슈 부인은 정조대를 차기가 싫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나중에는
“언제든 어떻게 벗어 버릴 수만 있으면 누구하고라도····”
하는 마음을 먹기에 이른 것이다.
“정조를 강요당하는 상태에 놓였기 때문에 이 사람은 좋지 않은 마음을 먹게 되었다.
따라서 이런 일이 현재의 이 사람이 겪는 경험의 일부가 된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이 지어 놓은 결과라 할 것이다.”
이제 여기서 이 케이스에서 드러나는 보복적인 카르마의 결과를 분석해 보자.
아내를 묶어 두기 위하여 교묘한 장치를 만들어 쓴 남성은
성적 불구자가 됨으로써 보복을 받았다.
이런 경우에 그보다 더 적절한 형벌은 없을 것이다.
얼핏 보기에는 남성의 비인간적인 처사에 희생된 부인이
두 번씩이나 성적 욕구불만의 인생을 보내야 되는 것은 부당한 일인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피상적인 관찰이다.
왜냐하면 죄는 외적 행동만으로 성립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의도·동기·마음의 상태·영혼의 태도로 성립된다.
과연 이 부인은 부당한 속박을 받았다.
그러나 자신에 대한 불신과 그 잔인한 처사에 대한 이 여성의 반응은
같은 정도의 증오와 복수심이었다.
그 증오와 복수심은 리딩이 말해준 말의 범위에서는 구체적 행동으로 표현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증오와 복수심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우리는 앞에서 무의식의 마음에 새겨진 강한 생각은
어떤 것이든 몇 세기라도 지속된다는 것을 보아 왔다.
이 여성이
“누구하고라도·····”라고 강하게 뜻한 것을 이제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그녀는 다시 없이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성으로 태어났다.
그녀는 전생에서 자신을 학대한 남성과 결혼을 한 자기를 발견했다.
그를 질투로 미치게 하고,
친구들 면전에서 그에게 수치를 주고,
이혼을 해버림으로써 그에게 완전히 보복할 수 있는 기회도 돌아왔다.
이 이상 그녀는 무엇을 더 바랄 수 있겠는가,
의기양양하게 그리고 떳떳하게 복수 하는 데 이 이상 적절한 환경이 있을까?
이 환경은 증오와 원한의 절정에 이르렀던 그녀가 마음에 그린
복수의 성취라고 여겨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녀는 그 동안에 영적으로 성장해 있었다.
그녀는 이미 어떤 사람에게나 상처를 주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녀의 편지에는 그런 심정이 한결같이 나타나 있다.
그녀는 다시 만나게 된 자기를 사랑하는 남성과 관계를 맺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남성의 아내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그
리하여 자제했다.
그녀의 건강한 육체와 감정은 어떤 모양으로든 성적 표현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남편을 사랑하고 있었으며 그리하여 그와 이혼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성욕과 아름다음과 젊음을 헌신적인 사랑에게 바친 것이다.
리딩의 말처럼 그것은 분명히 스스로 지어낸 결과였다.
말하자면 그녀는 그와 같은 환경에 놓임으로써 자기의 카르마를 보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6세기 전에 스스로 자신에게 지운 테스트를 통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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