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함풍이씨 대종회 원문보기 글쓴이: 함풍인/기성군손
始祖咸豊李公諱光逢行壯 及 後孫略史
始祖咸豊李公諱光逢高麗後期之宰臣也始祖之生涯今距七百餘載而世代久遠文籍湮滅當時無譜之時也然則始祖先系不可考也 謹按高麗史高麗史節要麗史提綱等各種史書證憑文籍譜牒傳聞而略叙始祖之行壯焉公生而潁異趣尙不群聰明過人勉學深究登婁遷陞從二品宰臣之班列矣忠烈王元年乙亥爲內史門下省所屬從二品政堂文學翌丙子年從行如元忠宣王五年癸丑二月甲寅日爲從二品上護軍兼參知政事月元武宗帝信任忠宣王而冊封瀋陽王位也五月忠宣王在朝大臣之歸還壓迫極甚而忠宣王不欲還高麗奏請元仁宗帝傳位于江陵大君世子燾是爲忠肅王也忠宣王愛姪子暠如王子養之宮中封延安君傳位于忠肅王時以暠冊封爲世子己有定命是爲後日王位繼承權賻與王位鬪爭誘發焉上王忠宣讓位後構萬卷堂于燕京邸召還李齊賢以後與大學者閻復姚遂趙孟頫等學文交流考究以自娛上王忠宣南遊江浙寶陁山時權漢功與李齊賢從之矣忠肅王元年甲寅四月庚寅日上護軍李光逢如元賀仁宗年祐改元忠肅王三年丙辰三月辛亥日上王忠宣奏于仁宗帝傳瀋陽王位於世子暠時爲危脅忠肅王位矣忠肅王六年己未二月戊戌日爲從二品同知密直司事忠肅王七年庚申四月丁巳日爲從二品評理是時上王忠宣元英宗之還國令拒否又被高麗人宦者伯顔禿古思之讒訴是歲庚申十二月戊申日元英宗以學佛經爲名流上王忠宣土蕃撤思結之地去京師萬五千里隨從宰臣唯評理李光逢直寶文閣朴仁幹大護軍張元祉等十八人從至流所矣庚申十二月乙卯日百官上書中書省訟上王忠宣之寃矣忠肅王八年辛酉二月丙寅日上王忠宣被流土蕃故忠肅王與侍從臣柳淸臣元忠漢渥等如元是時侍從百官王位不辭退忠言矣四月壬申日三司使金恂密直使白元恒密直副使尹碩金英甫大護軍李仁吉監察讞部官等杖權漢功蔡洪哲流于遠島是歲七月上王忠宣至西蕃獨知里寄書崔有渰權溥許有全趙簡等云了爾一身跋涉萬五千里向于土蕃辱我社稷矣寢不安食不知味勞心焦思深增惶愧國王年少無知肆其奸巧群小輩焉知不間我父子乎幸諸國老同心協力敷秦于帝俾予速還是時許有全與與閔漬等如元請王還國爲瀋陽王暠之黨所沮竟不能達而還辛酉十一月壬午日上王忠宣寄書於崔有渰權溥許有全趙簡等曰予以十月六日當到於土蕃撤思結元帝赦免許予還國傳聞而是言事實則卿等不念慮而若不然則相議於柳淸臣吳潛以後表請於元皇帝奏請於元丞相放免土蕃俾予無久於此也辛酉十一月丁未日白元恒朴孝修等上書中書省乞還上王忠宣矣忠肅王九年壬戌三月元英宗因讒訴責忠肅王而回收國王印是時瀋陽王暠被英宗之寵愛故曺頔蔡河中等欲擁立國王而讒訴忠肅王也壬戌六月忠肅王下命於司法府刑政局官員權漢功蔡洪哲裵廷芝等流配矣忠肅王十年癸亥正月壬子日閔漬許有全金구等如元請召還上王忠宣而繼以崔誠之李齊賢在元獻書元郞中及丞相拜住請召還上王忠宣矣癸亥二月戊子日元帝命量移配上王忠宣于甘肅省朶思麻之地而李齊賢往謁上王忠宣矣是歲八月權漢功蔡洪哲裵廷芝等忠肅王之於流配懷不滿之心呈書于元請欲立國王瀋陽王暠百官不書名焉其後九月召集百官書名以後呈書于元中書省元不受也又白元恒朴孝修等上書於元中書省也基後九月丁巳日泰定帝大赦免上王忠宣還國而元帝之召還命令上王忠宣如元燕京邸也遂行上王忠宣之流所而側近輔弼李光逢朴仁幹張元祉等三宰臣謂之曰三忠臣而後日忠肅王策勳任命官職時李光逢爲三重大匡左命功臣三司使朴仁幹爲翊贊功臣密直使張元祉爲勁節功臣密直副使而三忠臣策勳事實載錄於孋興君閔漬偏年綱目與韓山君李穡金鏡錄也 壬申政月忠肅王復歸于王位矣而四月壬午日爲瀋陽王暠欲謨立王署名者皆罷職之時忠肅王於公陞秩正二品宰臣三司使任命也此始祖李光逢上王忠宣之流所侍從宰臣非署名確然之事也始祖李光逢旣爲忠宣王舊臣扈從國王惟以格君心爲本而所務者分別淑慝進退賢邪盡忠輔弼故遂策封正一品壁上三韓三重大匡輔國崇錄大夫佐命功臣咸豊府院君後孫因爲咸豊李氏得貫始祖也崇禎癸酉草譜澐氏序文咸豊族譜譜咸豊李氏之族也是故癸酉草譜載錄宗人皆咸豊附院君之後孫也配位通義郡夫人錦城羅氏三韓功臣聰禮與懷遠大將軍裕之后也兩位之生卒年代及墓所失傳香火久闕而憾愴不勝其極癸卯年僉宗詢謨設壇奉祀而戊辰年六月京鄕諸宗合議光逢之孫子昆季墓域上原錦城山下取土招魂成墳立神道碑銘石儀具備然後每歲十一月第一土曜日歲一祭奉享焉嗣子諱延文科正順大夫密直提學判禮賓寺事長孫諱安柢文科奉翊大夫密直副使進賢館學士次孫諱安相匡靖大夫僉議贊成事副元帥也始祖李光逢祖及子與長次孫三世四位永豊祠配享焉曾孫淑文科禮部典書兼春秋館事襲文科禮儀判書玄孫仁左中郞將仁衡注簿舊傳家乘有從兄弟七人云云記錄矣俊成文科執義六世孫天柱文科典客令判書英進士七世孫熙林入朝鮮太祖朝文科淸州判官孫茂楊根縣監八世孫유文科景福宮提擧承顔慶尙道都事有承根九世孫浩初諱岡生員進士岸號潁波薦擧除南部參奉世祖簒位時棄官與弟崑及妻姪歸來申末舟歸鄕構享於咸平箕山潁水之上以自號名其亭隱遁悲痛而終節臣之餘生焉崑文科尙衣院直長同正崙訓導巖進士皆유之五子也好仁生員侍墓大孝好義僉知也十世孫吉元別座桂享武科副司直桂芳文科典籍鳳年桂貞文昌訓導文幹南原敎授益生員也十一世孫守誠習讀官碩司馬試進士而敎子七名皆得成就磵應斗碔鐸國樹封直長樹墀依堤進士侍墓大孝旌閭依蕃文科刑曹正郞務安縣監依樹生員依禎生員參奉千壽也至十二世孫分爲派而謂之曰蕃及春齡弼善派千榮及興舜生員派萬榮及玉璥珖竹陰派億榮及瑜浪谷派兆榮及琮璘竹村派長榮及琨璇瑨竹谷派泰榮及鵬生員派恬及泰信都事派偪及泰聖泰淳學生派東榮及時華日華益華敬華司果派宇永及柱道持平派春壽及克誠參奉派希白及大邦待敎派嶷及德懋德輿生員派巑及德龍樂正派巑及德鳳遜進士派岑及挺玉相玉崗玉景玉崑玉參奉派嶪及德老德宇訓導派岌及德行訓導派訔及德一漆室派岦及德仁僉樞派是分派也 始祖李光逢祖潛德發光科宦功臣忠義道德文章學行孝烈繼世連綿而穎波岸約谷文幹竹陰萬榮浪谷億榮竹谷長榮草齊春齡桃谷瑜漆室德一等顯孫輩出而爲湖南關東之望族後裔大昌數今累萬散居京鄕各處而鄕則咸平靈光長城光州務安高敞扶安井邑扶餘公州連山安城襄陽束草江陵洪川原州密陽等地是也生進文武科宦後孫不擧其數而高麗朝文科則延密直提學判禮賓時事安柢密直副使淑禮部典書春秋館事襲禮儀判書俊成執義天柱典客令朝鮮朝文科則熙林淸州判官유景福宮提擧岸以薦擧制南部參奉春齡世子侍講院弼善聖節使襄陽府使依蕃刑曹正郞務安縣監萬榮成均館司成長榮重試甲科大司諫璥黃海道觀察使景華弼善僉知中樞府事景蕓注書宜章禮曹正郞彙晉世子侍講院司書承旨判決事彙恒獻納中權禮曹佐郞衡弼兵曹佐郞衡宅吏曹正郞贈吏曹參議東埴左副承旨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光埴獻納贈吏曹參判舜範左承旨奉常寺提調贈參判也武科則德一壬辰丁酉亂時以義兵將入東幕山擊退倭敵然後與再從兄德龍族兄克誠入忠武公陣營協贊軍務唐浦庫島海戰勝捷之功爲折衝將軍虞候而當時黨爭熾烈仁穆廢妃之事棄官隱遁於漆室而作憂國黨爭悲歌二十八首也漆室與李忠武公月山祀配享焉岡玉奉事崑玉宣傳官得良司僕淵白副護軍泰亨忠翊衛益晟都事寶城郡守鐘應虞侯同知中樞府事啓玉宣傳官僉知中樞府事也功臣則興舜扈從功臣克誠宣武原從功臣揚烈靖社原從功臣忠節義士則崐류岌德龍德行德秀丁酉再亂時倡義守護矣晅暉建中弘誡李适亂時倡義獻穀矣錫範大克載勳種奎己未年獨立運動時愛國志士也道德文章學行則文幹萬榮億榮長榮春齡珖益彬益聲晛濩師尙師曾師倡師伋師稷師恪秉圭徵圭大圭采圭紳圭南圭喜圭宅圭漢圭鼎圭光鎭舜鎭絅鎭粹鎭扈鎭東埴範植潤埴鐘泰種德種禧種玉龍模啓澈章煥啓煥季煥昌煥禹範勛範陽範正範鍾宅載春載煥鍾進載斗宅聖也孝烈則六孝旌閣等繁多不盡記也 浩範財務部次官民選國會議員謹範保健所長熙範郵遞局長載震서울 市副議長基洙서울副市長慶南道知事灯寅香林寺祖室康洙民選高敞郡守建榮警察署長建周海軍大總長建榮陸軍中將三軍師令官國會議員庸燮行政自治部及建設交通部長官民選國會議員喆換全南大法科大學院長奎成佛國寺住持有一漢醫院長奎玉近現代榮達後孫而又碩煥文煥來範漢範陶範守範享範旻範光範宗範鍾範可範錫鎔昇範良範壽範昌範瞳烈孟烈鍾大鍾河載用載丁載龍載明載福周行時行康洙璥行判行南京年洙權行建柏建翊宗聖容任奎南崇祖睦族之後孫也 始祖李光逢祖之偉蹟及賢孫略記以俟後日君子之攷訂焉
2009年 月 日
後孫 壽範 謹撰
시조함풍이공 휘 광봉 행장 급 후손약사
함풍이씨 시조이신 광봉祖는 고려후기 재신(宰臣)이다. 시조께서 살아오신 생애가 지금으로부터 700여년이 흘러갔으니 세대가 오래되어 문적이 다 없어졌으며 당시는 족보가 없던 시절이어서 그 선대의 조상을 알 수 없다.
삼가고려사와 고려사절요 여사제강(麗史提綱) 등 각종역사서와 증빙 되는 문적 그리고 보첩과 전문(傳聞)을 가만히 살펴서 선생의 행적을 간략하게나마 기술하려고 한다. 시조 이광봉조께서는 태어나면서부터 영특하고 취미가 출중하셨고 학문에 열중하여 등과한 뒤에 여러 관직을 거쳐 종이품 재신(宰臣)의 반열에 올랐다.
충렬왕원년 을해 년에 내사문하성(內史門下省)소속의 종이품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되고 다음해에 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다. 충선왕 5년 계축2월 갑인 일에 종2품 상호군겸참지정사(上護軍兼參知政事)가 되었다. 같은 해 2월에 원(元)나라 무종(武宗)의 신임을 받아 충선왕은 심양왕위(瀋陽王位)에 책봉(冊封)되었다. 같은 해 5월에 충선왕은 고려조정에 있는 대신들의 귀환압박이 너무 심하였는데 충선왕은 고려에 돌아가고자 아니하여 원나라 인종(仁宗)에 주청(奏請)하여 강릉대군 세자도(世子燾)에게 전위(傳位) 하였는데 이분이 충숙왕이 된다.
충선왕은 조카인 고(暠)를 왕자처럼 사랑하여 궁궐의 안에서 길러 연안군에 봉하고 충숙왕에게 전위할 때에 고를 세자로 책봉하여 이미 정해진 운명이 있었다. 이것이 뒷날 왕위 계승권을 부여하여 왕위에 대한 투쟁이 유발(誘發)되었다. 상왕충선(上王忠宣)은 충숙왕(忠肅王)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만권당(萬卷堂)을 연경(燕京)의 사저(私邸)에 짓고는 이제현을 소환한 뒤에 대학자인 염복(閻復) 요수(姚遂) 조맹부((趙孟頫) 등과 함께 학문을 교류하고 연구하면서 스스로 즐겁게 지냈다.
상왕 충선은 남쪽으로 강절(江浙)과 보타산(寶陀山)에 유람할 때에 권한공과 이제현이 함께 따라갔었다. 충숙왕원년 갑인 4월 경인 일에 상호군 이광봉은 원나라에 가서 인종이 연우(延祐)로 개원(改元)한 것을 하례하였다. 충숙왕3년 변진 3월 신해 일에 상왕충선은 인종에게 주청하여 심양왕위를 세자 고에게 전해주었는데 이것이 충숙왕의 왕위를 위협하였다. 충숙왕 기미 2월 무술 일에 종2품 평리(評理)가 되었다.
이 무렵에 상왕충선은 원나라 영종(英宗)의 환국령(還國令)을 거부하고 또 고려인 환자(宦者) 백안독고사(伯顔禿古思)의 참소(讒訴)를 입어 같은 해 경신 12월 무술일에 원나라의 영종은 불경을 배우고 오라는 명목으로 상왕 충선을 토번(土蕃)의 살사결(撒思結)이라는 곳으로 유배하였다. 연경에서 일만 오 천리나 되는 먼 거리였다. 상왕 충선을 따라가는 재신으로는 오직 평리(評理) 이광봉, 직보문각(直寶文閣) 박인간, 대호군(大護軍) 장원지 등이 따라가 유배된 곳에 이르렀다.
같은 해 경신 12월 을묘 일에 백관이 원나라 중서성(中書省)에 상서(上書)하여 상왕 충선의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충숙왕 8년 신유 2월 병인 일에 상왕 충선이 토번에 유배를 입은 까닭으로 충숙왕은 시종신(侍從臣)으로 유청신(柳淸臣) 한악(韓渥) 등을 데리고 원나라에 갔다. 이때에 시종한 백관들이 왕위를 사퇴하지 말라고 충언 하였다. 같은 해 4월 임신 일에 삼사사(三司使) 김순(金恂) 밀직사(密直使) 백원항(白元恒) 밀직부사(密直副使) 윤석(尹碩)과 김영보(金英甫) 대호군(大護軍) 이인길(李仁吉) 감찰언부관(監察讞部官) 등이 권한공 채홍철에게 곤장을 때리고 먼 섬으로 유배 시켰다.
같은 해 7월 상왕 충선은 서번(西蕃)의 독지리(獨知里)에 이르러 최유엄(崔有渰) 권부9權溥) 허유전(許有全) 조간(趙簡) 등에게 편지를 부쳤다. 이르기를 “외로운 한몸으로 일만오천리나 되는 먼길을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돌아다니면서 토번으로 향하여 가고 있노라고 우리 사직(社稷)을 욕보이고 있다. 잠을 자려고 하여도 불안하고 음식을 먹어도 맛을 모르겠다. 노심초사(勞心焦思) 하면서 황송하고 부끄러움만 더 깊어간다. 국왕이 연소하고 아는 것이 없으므로 간교(奸巧)함을 베푸는 군소배들이 어찌 우리 부자를 이간(離間)질 하지 않으리라고 믿겠는가. 다행이 나라의 여러 노신들이 동심협력(同心協力)하여 원나라 황제에게 나(충선왕)를 빨리 환국시켜달라고 주청을 펴주시오” 라고 하였다.
이 무렵에 허유전(許有全)과 민지(閔漬) 등이 원나라에가서 상왕 충선의 환국을 주청했으나 심양왕 고의 패거리가 방해를 부려서 마침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환국 하였다. 신유11월 임오일에 상왕충선은 최유엄(崔有渰) 권부(權簿) 허유전(許有全) 조간(趙簡) 등에게 편지를 부쳐 이르기를 “내가 10월 6일에서야 토번(土蕃) 살사결(撒思結)에 당도하였다.
원나라의 황제가 사면하여 나의 환국을 허락 했다고 전언으로 들려오는데 이 말이 사실이라면 경들은 염려할 것이 없거니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유청신(柳淸臣)과 오잠(吳潛)에게 상의한 뒤에 표문(表文)을 지어 원나라 황제에게 주청하고 원나라의 승상에게 아뢰어 토번에서 방면하여 내가 여기에 오래도록 머무는 일이 없도록 해달라.” 고 편지에 썼다. 신유11월 정미일에 백원항 박효수 등이 원나라 중서성에 상서하여 상왕 충선의 환국을 빌었다. 충숙왕 9년 임술3월에 원나라의 영종은 참소로인하여 충숙왕을 인책(引責)하고 국왕인을 회수하였다.
이 때에 심양왕 고(暠)는 원나라의 사랑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조적과 채하중 등이 국왕으로 옹립하려고 충숙왕을 참소하였다. 같은 해 임술 6월에는 충숙왕이 사법부 형정국 관원에게 명령을 내려 권한공 채홍철 배정지 등을 유배 시켰다. 충숙왕 10년 계해정월 임자일에는 민지 허유전 김구 등이 원나라에가서 상왕 충선의 소환을 주청(奏請)하였고 이어서 최성지와 이제현이 원나라에 있으면서 원의 랑중(郎中)과 승상(丞相)에 헌서한뒤 배알(拜謁)하고 머물면서 상왕 충선의 소환을 주청 하였다.
계해2월 무자일에는 원제가 명량(命量)하여 상왕 충선을 알현(謁見) 하였다. 같은 해 8월에는 권한공 채홍철 배정지 등이 충숙왕의 유배(流配)에 불만을 품고 원나라에 글을 올려 심양왕 고(暠)를 국왕에 세우기를 주청하였는데 백관의 서명을 받지 못했다. 그 뒤 9월에 백관을 소집하여 서명을 받은 뒤에 원나라의 중서성에 글을 올렸으나 원나라는 받아 들이지 아니하였다.
또 백원항 박효수 등이 원의 중서성에 글을 올렸다. 그 뒤 9월 정사일에 원나라의 태정제(泰定帝)가 대 사면을 내려 상왕 충선은 환국하였는데 원제(元帝)의 소환하라는 명령이 있어 상왕충선은 원나라의 연경저(燕京邸)로 갔다. 상왕충선의 유배소(流配所)에 수행하여 측근에서 보필한 이광봉, 박인간, 장원지, 등 삼재신을 3충신이라고 일컫는다.
뒤날 충숙왕이 책훈(策勳)하여 관직을 임명할 때에 이광봉은 삼주대광(三重大匡) 좌명공신(左命功臣) 삼사사(三司使)를 삼았고 박인간은 익찬공신(翊贊功臣) 밀직사(密直使)를 삼았고 장원지는 추충경절공신 밀직부사를 삼았는데 삼충신의 책훈사실이 여흥군 민지의 편년강목과 한산군 이색의 금경록에 재록 되었다. 임신 정월에 충숙왕은 왕위에 복귀하였는데 4월 임오일에 심양왕 고를 왕위에 옹립하려고 서명한자를 파직(罷職) 시킬 때 충숙왕은 이광봉에게 승질(昇秩)된 삼사사에 임명했다.
이것은 이광봉조가 상왕 충선의 유배장소까지 시종한 재신으로 서명을 아니한 것은 확실하게 드러나는 일인 것이다. 이광봉조는 상왕충선의 구신으로 국왕을 호종(扈從)하여 바르게 모시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고 힘쓴 것은 잘잘못을 분별하고 정도와(正道)와 사특(邪慝)함을 가려내어 진충보필(盡忠輔弼)한 연유로 해서 마침내 정1품상계인 벽상 삼한 삼중대광 보국숭록대부 좌명공신 함풍부원군에 책봉되었다. 후손들이 군봉으로 인하여 함풍이씨의 득관시조를 삼아 받들어 모시고 있다.
조선의 인조11년 숭정계유초보(崇禎癸酉草譜)에서 운(澐)씨가 쓴 서문에 “함풍족보는 함풍이씨의 씨족을 보책으로 만든 족보이다.” 라고 썼다. 이러한 까닭으로 계유초보에 재록된 종인들은 모두가 다 함풍부원군의 후손인 것이다. 통의군부인(通義郡夫人) 금성나씨(錦城羅氏)는 삼한공신(三韓功臣) 총례(聰禮)와 회원대장군(懷遠大將軍) 유(裕)의 후예(後裔)이다. 양위(兩位)의 생졸연대와 묘소를 실전하여 오래도록 제사를 지내지 못하여 슬픔을 이겨낼 수 없었다.
계묘년에 첨종(僉宗)이 상의한 뒤에 단(壇)을 만들어 제사를 받들어 오다가 무진년6월 경향의 제종이 이광봉조의 손자형제 묘역위에 묘소를 모시기로 합의 하고는 금성산 아래에서 흙을 파가지고 와서 초혼성분(招魂成墳)하고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세우고 석물(石物)로 의식을 갖추었다. 그런 뒤로는 매년11월 첫째 토요일에 세일제(歲一祭)를 받들어 모시고 있다. 아들 이연(李延) 祖는 문과한 뒤에 정순대부(正順大夫)로 밀직제학(密直提學)과 판예빈시사(判禮賓寺事)를 지냈다.
장손(長孫) 이안저(李安柢) 조(祖)는 문과한 뒤에 봉익대부(奉翊大夫)로 밀직부사(密直副使)와 진현관학사(進賢館學士)를 지냈으며 차손 李安相 祖는 광정대부(匡靖大夫)로 금오위대장군(金吾衛大將軍)과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그리고 부원수(副元帥)를 지냈다. 시조(始祖)이신 이광봉 祖의 아드님 그리고 장 차손 삼세사위(長 次孫 三世四位)는 영풍사(永豊祠)에서 배향한다.
증손자인 숙(淑)은 문과한 뒤에 예부전서 겸 춘추관사(禮部典書 兼 春秋館事)를 지냈으며 습(襲)은 문과(文科)한 뒤에 예의판서(禮儀判書)를 지냈다. 현손(玄孫) 인좌(仁佐)는 중랑장(中郞將)을 지냈고 인형(仁衡)은 주부(注簿)를 지냈는데 옛날부터 내려오는 가승에는 인자항렬로 형제가 7인이 있었다. 라고 내려오는 기록이 있다. 현손(玄孫)으로 준성(俊成)은 문과한 뒤에 집의(執義)를 지냈다. 그리고 6세, 천주(天柱)는 문과한 뒤에 전객령 판서(典客令判書)를 지냈으며 영(英)은 진사(進士)였다.
7세, 희림(熙林)은 조선왕조에 들어 태조 때 문과한 뒤에 청주 판관을 지냈으며 손무(孫茂)는 양근현감(楊根縣監)을 지냈다. 8세, 유는 문과한 뒤에 경복궁제거(景福宮提擧)를 지냈으며 승안은 경상도도사를 지냈고 또 승근(承根)이 있다.
9세, 호(浩)의 초휘는 강(岡)이었는데 생원과 진사였고 안(岸)은 호(號)가 영파(穎波)로 천거제(薦擧制)에 의하여 남부참봉(南部參奉)에 제수(除授)되었다.
세조가 왕위를 찬탈했을 때 벼슬을 버리고 아우 곤(崑)과 처질(妻姪) 귀래(歸來) 신말주(申末舟:신죽주 아우)와 함께 귀향하여 함평고을 기산영수(箕山穎水)의 위에 정자를 세우고 자신의 호 영파(穎波)로 그 정자의 이름을 짓고 은둔 비통해 하면서 충절신으로 여생을 마쳤다. 곤(崑)은 문과한 뒤에 상의원(尙衣院)에서 직장동정(直長同正)을 했으며 윤(崙)은 훈도(訓導)였고 암(巖)은 진사였는데 모두 유( )의 다섯 아들들이다. 호인(好仁)은 생원으로 시묘대효(侍墓大孝)를 했으며 호의(好義)는 첨지(僉知)를 지냈다.
10세, 길원(吉元)은 별좌(別座)였고 계형(桂亨)은 무과(武科)한 뒤에 부사직(副司直)을 지냈으며 계방(桂芳)은 문과한 뒤에 전적(典籍)을 지냈으며 봉년(鳳年)과 계정(桂貞)이 있고 문창(文昌)은 훈도(訓導)를 지냈고 문간(文幹)은 남원교수(南原敎授)를 지냈고 익(益)은 생원이었다.
11세, 수성(守誠)은 습독관(習讀官)을 지냈고 석(碩)은 사마시(司馬試) 진사였는데 일곱명의 아들을 잘 가르쳐서 모두 성공하였다.
간(磵), 응두(應斗), 무(碔), 탁국(鐸國)이 있으며 수봉(樹封)은 직장(直長)을 지냈고 수지(樹墀)가 있으며 의제(依堤)는 생원과 진사로 시묘정려(侍墓旌閭)한 대효자였으며 의번(依蕃)은 문과한 뒤에 형조정랑과 무안현감을 지냈으며 의수(依樹)는 생원이었으며 의정(依禎)은 생원과 진사로 참봉을 지냈으며 또한 천수(千壽)가 있다. 12세,에 이르러서야 계파를 분류하고 있다.
이르기를 번(蕃)과 춘연(春齡)의 후손을 필선공파(弼善公派)라 하고 천영(千榮)과 흥순(興舜)의 후손을 生員公派라 하고 만영(萬榮)과 옥(玉), 경(璥), 광(珖)의 후손을 죽음공파(竹陰公派)라 하고 억영(億榮)과 유(瑜)의 후손을 낭곡공파(浪谷公派)라 하고 조영(兆榮)과 종(琮), 인(璘)의 후손을 죽촌공파(竹村公派)라 하고 장영(長榮)과 곤(琨), 선(璇), 진(瑨)의 후손을 죽곡공파(竹谷公派)라 하고 태영(泰榮)과 붕(鵬)의 후손을 生原公派(생원공파)라 하고 념(恬)과 태신(泰信)의 후손을 도사공파(都事公派)라하고 핍(愊)과 태성(泰聖) 태순(泰淳)의 후손을 學生公派( 학생공파)라 하고 동영(東榮)과 시화(時華), 일화(日華), 익화(益華), 경화(敬華)의 후손을 사과공파(司果公派)라 하고 우영(宇永)과 주도(柱道)의 후손을 지평공파(持平公派)라 하고 춘수(春壽)와 극성(克誠)의 후손을 참봉공파(參奉公派)라 하고 희백(希白)과 대방(大邦)의 후손을 대교공파(待敎公派)라 하고 의(嶷)와 덕무(德懋), 덕여(德輿)의 후손을 生員公派(생원공파)라 하고 찬(巑)과 덕용(德龍)의 후손을 악정공파(樂正公派)라 하고 덕봉(德鳳)과 손(遜)의 후손을 진사공파(進士公派)라 하고 잠(岑)과 정옥(挺玉), 상옥(相玉), 강옥(崗玉) 경옥(景玉) 곤옥(崑玉)의 후손을 참봉공파(參奉公派)라 하고 업(嶪)과 덕로(德老), 덕우(德宇)의 후손을 훈도공파(訓導公派)라 한다.
은(訔)과 덕일(德一)의 후손을 칠실공파(漆室公派)라 하고 입(岦)과 덕인(德仁)의 후손을 첨추공파(僉樞公派)라고 이른다. 이와 같이 系派(계파)를 나누고 있다.
시조 광봉祖의 음덕(陰德)이 빛을 드러내 과거와 공신과 충신과 의사 도덕가와 문장가 학자 효자 열부가 대를 이어 줄줄이 태어났다. 영파 안, 약곡 문간, 죽음 만영, 낭곡 억영, 죽곡 장영, 초재 춘영, 도곡 유, 칠실 덕일, 등 훌륭한 후손이 무리를 지어 태어나서 호남과 관동의 망족이 되었다.
후손들이 크게 번창하여 지금은 수 만 명인데 경향의 각처에서 흩어져 살아가고 있다. 곧 함평, 영광, 장성, 광주, 무안, 고창, 부안, 정읍, 부여, 공주, 연산, 안성, 양양, 속초, 강릉, 홍천, 원주, 밀양 등지에서 살고 있다. 생원 진사문무과 그리고 출사한 후손은 그 수를 헤아리지 못한다. 고려조에서의 문과 급제인즉 연(延)은 밀직제학과 판예빈시사를 지냈고 안저(安柢)는 밀직부사를 지냈고 숙(淑)은 예부전서 겸 춘추관사를 지냈고 습(襲)은 예의판서를 지냈고 준성(俊成)은 집의(執義)를 지냈고 천주(天柱)는 전객령을 지냈다. 조선조에서의 문과인즉 희림(熙林)은 청주판관을 지냈고 유는 경복궁 제거를 지냈다.
안(岸)은 천거제롤 남부참봉을 지냈고 춘령(春齡)은 문과에 급제하여 세자시강원의 필선과 성절사 그리고 양양부사를 지냈다. 의번(依蕃)은 형조 정랑과 무안현감을 지냈고 장영(長榮)은 중시에서도 갑과로 급제한 뒤에 대사간을 지냈고 경(璥)은 황해도 관찰사를 지냈고 경화(景華)는 필선과 첨지 중추부사를 지냈고 경화(景蕓)은 주서를 지냈고 의장(宜章)은 예조정랑을 지냈고 휘진(彙晉)은 세자시강원의 사서와 승지 그리고 판결사를 지냈으며 휘항(彙恒)은 헌납을 지냈고 중권(中權)은 이조좌랑을 지냈고 형필(衡弼)은 병조좌랑을 지냈고 형택(衡宅)은 이조정랑을 지낸 뒤에 이조참의에 증직 되었고 東埴은 좌부승지겸 경연참찬관과 춘추관 수찬관을 지냈고 광식(光埴)은 헌납을 지낸 뒤에 이조참판에 증직 되었고 순범(舜範)은 좌승지와 봉상시제조를 지낸뒤에 참판에 증직 되었다.
무과 급제인즉 덕일(德一)은 임진정유왜란이 일어났을 때 의병장으로 동막산에 들어가 왜적을 물리친뒤 재종형 덕용(德龍)과 극성(克誠)과 함께 충무공 이순신의 진영에 들어가서 군무를 협찬하여 당포와 고도의 해전에서 승리하였다. 칠실덕일은 그 공으로 절충장군 우후가 되었는데 당시에 당쟁이 치열하고 인목대비를 폐비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의 칠실에 은둔하여 살면서 우국당쟁비가 28수를 지었다. 칠실공은 이충무공과 함께 월산사에서 배향한다.
강옥(岡玉)은 봉사를 지냈고 곤옥(崑玉)은 선전관을 지냈고 득량(得良)은 사복을 지냈고 연백(淵白)은 부호군을 지냈고 태형(泰亨)은 충익위였고 익성(益晟)은 도사와 보성군수를 지냈고 종응(鍾應)은 우후와 동지중추부사를 지냈고 啓玉(계옥)은 선전관과 첨지 중추부사를 지냈다. 공신인즉 흥순(興舜)은 정유재란때 호종공신이었고 극성(克誠)은 선무원종공신 양열(揚烈)은 정사원종공신이었다.
충절신과 의사인즉 곤(琨), 유(瑜), 급(岌), 덕룡(德龍), 덕행(德行), 덕수(德秀)는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지켰다. 훤(喧), 휘(暉), 건중(建中), 홍계(弘誡)는 이괄의 난이 일어 났을 때에 의병을 모집하여 싸우고 군량을 바쳤으며 석범(錫範), 대극(大克), 재훈(載勳), 종규(鍾奎)는 기미년 독립운동에서 나라를 위하여 싸운 애국지사였다.
도덕 문장학행이 뛰어난 후손인즉 文幹, 萬榮, 億榮, 長榮, 春齡, 光, 益彬, 益聲, 晛, 濩, 師尙, 師曾, 師昌, 師伋, 師稷, 師恪, 秉奎, 徵奎, 大奎, 采奎, 紳奎, 南奎, 喜奎, 宅奎, 漢奎, 鼎奎, 廣鎭, 舜鎭, 絅鎭, 粹鎭, 扈鎭, 東埴, 範埴, 潤埴, 鍾泰, 鍾悳, 鍾禧, 鍾玉, 龍模, 啓澈, 章煥, 啓煥, 系煥, 昌煥, 禹範, 勛範, 陽範, 正範, 鍾宅, 載春, 載煥, 鍾進, 載斗, 宅聖(문간, 만영, 억영, 장영, 춘령, 광, 익빈, 익성, 현, 호, 사상, 사증, 사창, 사급, 사직, 사각, 병규, 징규, 대규, 채규, 신규, 남규, 희규, 택규, 한규, 정규, 광진, 순진, 경진, 수진, 호진, 동식, 범식, 윤식, 종태, 종덕, 종희, 종옥, 용모, 계철, 장환, 계환, 계환, 창환, 우범, 훈범, 양범, 정범, 종택, 재춘, 재환, 종진, 재두, 택성)이 있다.
효열인즉 육효정각 등 너무 많아 다 기록하지 못한다. 浩範(호범)은 재무부차관과 민선 국회의원을 지냈고 謹範(근범)은 보건소장을 지냈고 熙範(희범)은 우체국장을 지냈고 載震(재진)은 서울시 부의장을 지냈고 基洙(기수)는 서울부시장과 경상남도지사를 지냈고 灯寅(정인)은 향림사 조실로 있고 康洙(강수)는 민선고창군수이고 建榮(건영)은 경찰서장을 지냈고 建周(건주)는 해군대 총장을 지냈고 建榮(건영)은 육군중장으로 3군사령광과 국회의원을 지냈다. 庸燮(용섭)은 지방 자치부 및 건설교통부장관을 지내고 민선국회의원으로 있으며 喆煥(철환)은 전남대법과학원장으로 있으며 奎玉(규옥)은 유일한의원 원장으로 있으며 奎成(규성)은 불국사 주지를 지냈는데 이들은 근현대사에 영달한 후손들이다.
그리고 또한 숭조목족하는 후손들로 碩煥, 文煥, 來範, 漢範, 陶範, 守範, 亨範, 旻範, 光範, 宗範, 鍾範, 可範, 錫鎔, 昇範, 良範, 壽範, 昌範, 瞳烈, 盟烈, 鍾大, 鍾河, 載龍, 載丁, 載龍, 載明, 載福, 周行, 時行, 康洙, 璥行, 判行, 南京, 年洙, 權行, 建栢, 建基, 建翊, 宗聖, 容任, 奎南 (석환, 문환, 내범, 한범, 도범, 수범, 형범, 민범, 광범, 종범, 종범, 가범, 석용, 승범, 양범, 수범, 창범, 동열, 맹열, 종대, 종하, 재용, 재정, 재룡, 재명, 재복, 주행, 시행, 강수, 경행, 판행, 남경, 연수, 권행, 건백, 건기, 건익, 종성, 용임, 규남)등이다.
시조 이광봉조의 위적과 현손을 간략하게나마 기록하고 후일에 훌륭한 군자가 나와서 고정하여주기를 기다리겠노라.
2009 년 월 일
후손 수범 근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