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로아 (트로이 유적지)

알레산드리아 드로아 (출처- http://blog.daum.net/wonsunbe)
현재명은 Odun Iskelesi이다. 에게 해 해안의 항구도시로서 옛 지명 이름은 ‘시기아’였고, 고대 유적이 발견된 곳이다.
에게 해안 북서 소아시아의 ‘미시아’(Mysia)에 위치, ‘테메도스’(Themedos)섬 맞은편에 있었고, ‘트로이’(Troy, 지금의 ‘일리움’)의 남쪽 지점에 위치한 성읍으로 소아시아 북서쪽에서 중요한 항구 역할을 하였다.
주전 4세기 아티고누스(Antigonus, 알레산더의 장군중 한 명)에의하여 건설되어 주전 133년에 로마의 지배를 받게되었다.
따라서 이 항구는 안티고누스의 이름을 따라 안티고니아 드로아라고 명명했다.
그 뒤, B.C. 300 경에 드라게의 ‘리시마쿠스’왕이 확장 발전시켜 알렉산드리아 드로아로 개칭하였다(드로아는 본래 고대 트로이 주변 지역의 명칭이었다.). 원래 ‘드로아’는 특색 있는 별명이었는데, 아우구스투스가 이곳을 로마의 식민지로 삼은 후에 이 도시의 통상적인 지칭이 되었다. 한 때, 이 곳은 셀류커스 왕들의 주재지였으며, 자유도시로 발전하였다.
B.C. 133에는 로마 통치권 내에 들어갔고, 크고 중요한 도시로 발전하게 되었다.
드로아는 육로로 로마로 가기 위해 마게도냐에서 네압볼리로 가는 교차점이었다. 2C 초에는 ‘이라’산에서 드로아로 물을 끌어 들이기 위하여 수로가 건설되었고 인공적 항구 갑문들을 중심으로 급속히 발전했다. 이 인공 갑문들은 ‘헬레스폰트’(Dardanelles)와 밀접한 해로의 중요한 접촉점에서 강력한 북풍을 막아주는 은신처 역할을 했다. 도로아의 해변에는 로마시대의 유적이 조금 남아 있으며 내륙에는 고대도시의 유적들이 땅 속에 묻혀 있으나 긴 성벽의 일부와 체육관, 목욕탕, 수로의 유적들이 넓은 밀밭 사이에 있다.
여기서 아시아쪽을 전도하고 싶어하던 바울이 마게도니아 사람 환상을 본 뒤 유럽으로 넘어간 지점이고, 3차 전도 여행을 거의 마쳤을 때 밤늦게까지 강론하다 위층에 졸다 떨어져 죽은 유두고를 살린 곳이다. 또한 다른 사람들을 모두 보내고 매우 먼거리를 혼자 육지를 걸어 다음 항구(아소)까지 간 곳이다.
후에 콘스탄틴이 로마 수도를 삼으려다 비잔티움으로 결정한 뒤 도시가 급속도로 쇠퇴하였다.
주후 1세기 헤로데스 아티쿠스가 증여한 목용탕이있으며 펴허가 된 성벽들이 남아있다.
대부분의 석조물들은 새 수도 건설물로 이용되었다. 현재는 많은 폐허가 해안을 덮고있고 숲이 우거져있다.

트로이에서 바라본 에게해 만 (출처- http://holyland.maru.net/)

트로이 유적지
트로이 유적은 에게해에서 6km 정도 떨어져 있으며 스카만드로스강과 시모이스강이 있는 평야를 내려다 보는 히살리크 언덕위에 있다. 이러한 지리학적 위치는 바다와 너무 근접하여 침입의 위협을 받지도 않으며 너무 멀지도 않아 교역의 어려움도 없기 때문에 문명이 발달하기에는 매우 적합하다. 그래서 트로이는 기원전 4000년전부터 인간이 살기 시작했다.
지금의 트로이는 호머의 일리아드로만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이 도시는 과거 여러 문명이 거쳐갔던 중요한 도시였던 것이다.
이는 독일의 백만장자이자 고고학자였던 슐리만에 의해 파해쳐진 9개층에 이르는 유적에 의해서 증명된다.
슐리만은 독일에서 목사 아들로 태어나 빈곤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그는 어릴적 아버지가 들려주시던 일리아드 이야기를 믿으며 언젠간 꼭 트로이를 찾겠다는 신념을 다지며 자수성가 하여 중년에 이르러서는 백만장자가 된다. 돈이 모이자 슐리만은 바로 트로이를 찾기 위한 작업에 착수한다.
1870년에 발굴에 들어가 슐리만은 1871년에 트로이 유적을 발견하게 된다. 3년에 걸친 발굴로 인해 슐리만은 엄청난 양의 유물을 발견한다. 그 때 보물상자도 발견하게 되는데(이 때 발견한 보물상자는 트로이보다 1000년전의 유물이다.) 이 상자에는 16000여개의 금붙이로 만든 왕관까지 있었다. 이 유물들은 슐리만이 많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독일로 가져와 그의 사후에 박물관에 기증하나 1945년 독일로 진주한 소련이 탈취하여 지금은 러시아에 있다.
초기 발굴에서 슐리만은 자신이 발견한 9개층에 달하는 유적 중 2번째 층이 트로이 유적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후에 밝혀지듯이 트로이 유적은 6번째 층이다. 밝혀진 트로이성은 일리아드에 나와 있듯이 견고하고 튼튼한 성이었다. 비록 규모가 작기는 하지만 그 당시의 무기체계로는 쉽게 공략 할 수 없는 난공불락의 성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트로이 유적들은 발굴해 본 결과 대규모 지진으로 뒤틀려 있었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추론하길 트로이의 10년 전쟁은 지진으로 인한 성벽의 붕괴와 도시의 파괴에 많은 이유가 있을 것이라 한다. 트로이 목마 이야기는 지진의 신인 포세이돈을 상징하는 것이 말인 연유에서 비롯된 전설일 것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트로이를 받치고 있는 평야에 서서 메넬라우스 군이 되보기도 하고 트로이 성곽 위에 서서 헬렌을 차지하기 위해 10년 전쟁을 한 파리스 왕자가 되보기도 할 수 있는 트로이는 1998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유적지 안내문

트로이 난공불락의 성벽

트로이 난공불락의 성벽

트로이 난공불락의 성벽

복원중인 성벽 (출처- http://holyland.maru.net/)

트로이목마

트로이목마

영화 트로이의 소품으로 사용했던 트로이목마

트로이 유물과 유적

트로이 유물과 유적

트로이 유물과 유적

토관과 토기 유물 (출처- http://holyland.maru.net/)

발굴된 동전

네로황제 동전
| 디셉과 아벨므홀라 |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열된 후 가장 유명한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인 엘리야와 그 후계자 엘리사의 고향을 답사하기로 하고 암만을 출발해 성서에 나오는 ‘왕의 대로’를 따라 북쪽으로 향했다.
성경에 나오는 왕의 대로는 오늘날 요르단의 35번 도로 중 수도인 암만 북쪽으로는 가장 중심된 도로로 암만 남쪽으로는 사막으로 난 15번 도로 다음으로 중심을 이루는 도로다. 암만을 출발해 50km를 달리면 요르단에서 가장 큰 유적이 남아있는 제라쉬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다시 20번 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가다 안자라(Anjara)에서 북서쪽으로 올라가면 그릿 시냇가에 도착하게 되는데, 바로 시냇가 위 언덕에 엘리사의 고향인 아벨므홀라가 보인다.
그릿 시냇가는 북이스라엘의 아합왕 때 가뭄이 들어 엘리야가 잠시 머문 곳으로 오늘날의 와디 알 야비스(Wadi al Yabis)이다. 그릿 시내에서 잠시 멈춘 후 도로를 따라 올라가자 바로 위에 야비스의 푯말이 있어 이곳이 그릿 시냇가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시내라고는 하지만 우기 때만 흐르는 와디(건천)인지라 도착했을 때도 물이 없어 엘리야 때의 가뭄을 상기시켰다. 엘리야는 이곳에서 까마귀가 가져다 주는 떡과 고기로 연명했으나 가뭄이 계속되어 이곳을 떠나 오늘날 레바논 지역에 있는 사르밧으로 가서 가뭄이 끝날 때까지 그곳 과부의 공궤를 받았다(왕상17:1∼9).
엘리야의 후계자 엘리사의 고향인 아벨므홀라는 바로 이 시내 계곡에서 서쪽으로 바라보면 오른쪽 언덕의 산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본래 이곳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입주하기 이전부터 사람들이 거주한 곳으로 경사진 산 언덕에 위치해 있지만 밭을 경작할 수 있는 비교적 비옥한 지역이다.
오늘날 텔 엘 마클룹(Tell el-Maqlub)인 아벨므홀라가 성경에서 처음 등장한 것은 사사 시대에 미디안 사람들이 기드온 300명 군사의 기습을 받고 스레라와 아벨므홀라 평원의 경계를 경유해 도망하는 사건에서 언급되었다(삿7:22). 그리고 엘리야는 호렙산에서 아벨므홀라에 있는 엘리사를 후계자로 삼으라는 명령을 받고 이곳까지 와서 엘리사를 후계자로 삼았다(왕상19:16, 19∼21).
오늘날 별다른 유적이 없지만 그 옛날 엘리사가 12겨리소로 밭을 갈다가 엘리야의 부름을 받고 그의 제자가 되었던 아벨므홀라 가까이서 사진을 찍고 얼마 떨어지지 않은 엘리야의 고향 디셉으로 갔다. 디셉은 아벨므홀라가 보이는 그릿 시냇가에서 포장도로를 따라 오르막길의 산을 넘어가다가 다시 비포장길을 따라 조금만 올라가면 산 꼭대기에 위치해 있다.
엘리야는 성경에서 여섯 번이나 디셉 사람으로 나오고 있다(왕하3:1). 그리고 디셉의 지명에 대해서는 독립적으로 나오고 있지 않고 확실한 자료도 없기 때문에 디셉의 위치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약간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 이전까지 디셉은 그릿 시내(와디 엘 야비스) 지류 중 하나인 와디 엘 마스쿠프(Wadi el-Masquf) 근처에 위치한 리스팁(Listib)으로 주장되어 왔다. 그러나 글루엑은 왕상17:1의 야베스 길르앗의 야베스 사람을 엘리야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는 엘리야의 활동 무대가 대체로 와디 엘 야비스(그릿 시내) 지역이었음을 감안하면 상당한 설득력을 가진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디셉은 얍복강과 야르묵강 사이의 길르앗 지역의 산악지대에 있는 성읍임에는 틀림이 없으며 일반적으로 오늘날 텔 마르 일야스(Tell Mar Ilyas)로 보고 있다. 내가 이곳을 방문했을 때는 발굴이 거의 끝나고 마무리를 하고 있었다. 마침 한국 사람이 이곳까지 찾아온 것에 대해 신기한 듯 나에게 엘리야와 관련된 모자이크를 가리켜 주었다. 현재 이곳에는 산 정상에 일부 바닥이 모자이크로 장식된 회당터로 보이는 60평 정도의 유적이 남아있어 그나마도 사람이 거주했던 곳임을 보여주고 있다.
엘리야와 엘리사의 고향인 디셉과 아벨므홀라.오늘날 별다른 유적은 남아있지 않지만 그럼에도 힘들게 이곳을 찾아 멀리 요단계곡 너머의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그 옛날 바알 숭배에 빠져 종교적으로 암울한 이스라엘을 일깨웠던 엘리야와 그 후계자 엘리사의 시대적 사명을 되새겨 본다.
이원희 목사 photobibl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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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인성 전경

나인성 기념 교회

나인성 교회 내부, 그림은 예수께서 나인성 청년을 살리시는 모습이다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 쌔 제자와 허다한 무리가 동행하더니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하시고 가까이 오사 그 관에 대시니 관을 멘 자들이 서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 하더라 (눅7:11~17)
단

단 성읍 터

단 성읍과 신당 터

단 보아스 성문 터

단 여로보암 산당

단 여로보암 산당

단 여로보암 산당 물두멍
단은 고대 이스라엘 북단에 있던 도시로 헬몬선 남쪽 기슭에 있으며 두로에서 다메섹으로 가는 길중 남북으로 갈라지는 지점으로 텔 단(T. Dan)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993년 7월 21일 이스라엘 북부의 중요한 유적지 텔 단의 한 발굴자는 성문 밖 광장의 나지막한 돌담을 파헤치던 중 잘 다듬어진 새카만 돌 조각 하나를 발견했다. 대부분 구조물들이 냇물에 다듬어진 매끈한 석회암이기 때문에 이 조각은 쉽게 눈에 띄었다. 하지만 이 돌을 들쳐낸 순간 지금까지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그 뒷면에는 히브리어와 모양이 비슷한 고대 아람어 기록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기록문화가 발달했던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발굴에서도 이러한 기념비의 발견은 대단한 일인데 기록물이 매우 드물게 나타나는 이스라엘에서 그것도 석비의 형태이기 때문에 커다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 석비가 발견된 단은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북쪽 경계를 이루는 도시였다. 원래 단 지파는 중부지역을 분배받았는데 해안에 이미 정착해있던 블레셋 사람들 때문에 그곳에 자리잡을 수 없었다. 할수없이 그들은 북쪽으로 올라가서 맑은 물이 흐르고 숲이 우거진 도시 레셈(수 19:47), 또는 라이스(삿 18:29)를 점령하고 자신들의 지파 이름을 따서 이 도시를 단이라 명명했다.
요단강의 이름은 원래 단으로부터 흘러 내려온다는 뜻인데 세 군데의 원류 중에서 단의 샘이 가장 규모가 크기 때문에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길이 32cm 폭 22cm 크기의 석비 조각에는 고대 아람어로 모두 13줄이 기록돼 있었다. 비록 부숴진 조각이기 때문에 전체 내용을 파악하기에는 한계가 있지만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아람의 한 왕이 이스라엘의 왕을 죽이고 정복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발굴자들은 곧 아람의 왕 벤하닷이 단을 정복했다는 열왕기상 15:16-22의 사건을 떠 올렸다. 서기전 9세기 초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는 치열한 세력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두 왕국의 끊임없는 전쟁은 유다의 아사왕이 아람 세력을 끌어들임으로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아사는 자신의 적 북 이스라엘을 징벌해 달라는 청탁과 함께 예루살렘 성전과 왕궁의 금고에 보관된 은과 금을 모두 끌어 모아 다메섹 아람왕에게 조공으로 바쳤다. 아람의 왕 벤하닷은 아사의 부탁을 받고 단을 비롯해서 이스라엘 북부지역을 유린했고 그 결과가 바로 단에 세운 승전비에 기록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석비를 더욱 유명하게 만든 것은 아홉번째 줄에 새겨져 있는 ‘베잇트 다비드’, 즉 ‘다윗 왕조’라는 단어 때문이다. 구약성서 외의 기록에서 다윗이 처음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이때부터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에 관심 있는 고고학자, 역사학자, 성서학자들 사이에 ‘역사적 다윗에 관한 논쟁이 오늘날까지 뜨겁게 이어진다.

마리아 방문교회

마리아 방문교회

마리아 방문교회 내부 벽화

엘리사벳을 방문하는 마리아
마리아 방문교회(Church of the Visitation)
“이 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 중에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눅1:39-40)
마리아의 샘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중간에 고아원이 있는 시온수녀원(Sisters of Zion)을 지나 높은 종탑과 더불어 마리아 방문 교회가 보인다. 콘크리트로 된 넓은 계단을 올라가면 교회입구에 넓은 철문이 있고 교회 정면 앞 벽에는 천사와 함께 마리아가 나귀를 타고 나사렛에서 이곳을 방문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어 마리아 방문교회임을 알 수 있다. 교회를 들어서면 교회 건물 맞은편 벽에 누가복음 1장 46-55절에 있는 마리아의 찬송이 45개국 이상의 말로 쓰여져 있다. 1980년에 한글로 쓰여진 것도 맨 윗부분에 있다. 이 건물은 세례요한의 부모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집터였었다는 곳에 십자군 시대부터 교회가 있어왔다. 현재의 교회는 1862년에 세워진 교회 위에 이탈리아의 유명한 건축가 발루지에 의해 설계되어 1955년에 윗층이 건축되었다. 아래층 교회 안에는 직경이 1m 가량되는 원판형 돌이 있는데 전승에 의하면 로마군인들이 두 살 이하의 어린 아이들을 죽일 때 세례요한이 숨었던 굴을 막았던 돌이라 한다. 정면에 있는 동굴 안에 우물이 있다. 교회의 세 벽에는 제사를 지내는 사가랴의 모습, 엘리사벳을 방문하는 마리아의 모습 그리고 사내 아이들을 죽이는 군인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윗층에는 오르간과 약 80석 정도의 예배실이 있고 아름다운 벽화가 그려져 있다.

마리아의 샘(가브리엘 기념교회)
마리아의 샘(Mary''''s Spring)
세례요한 탄생교회를 나와서 곧장 앞으로 200m 쯤 가면 마리아 방문교회로 가는 도중에 마리아의 샘이 있다. 이 샘이 있기 때문에 이 지역의 이름이
엔 케렘(포도원의 샘)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마리아가 세례요한의 부모를 방문한 것과 관련하여 십자군 시대분터 마리아의 샘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지금도 안쪽에서 물이 흘러나오고 있는데 먹지는 못하지만 손이나 발을 씻을 수 있어 잠시 피로를 풀 수 있다. 벽 위에는 다음의 구절이 적여 있다.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사55:1)
엔 케림(Ein Karem)
엔케렘은 4개의 산기슭 가운데 위치한 해발 650m의 계곡들 사이에 있는 동네이다. 예루살렘에서 이곳을 거쳐 삼손의 고행인 소라와 소렉 골짜기로 갈 수 있다. 초기에 정착했던 이곳 거주민들은 농작물을 생산해 4km 정도 떨어져 있는 예루살렘에 공급해 온 농부들이었다. 엔 케림이란 이름은 샘이라는 ‘엔’과 포도밭이라는 ‘케렘’으로서 이 곳의 좋고 단 물로 농사를 지었다. 예레미야서에서는 ‘벧학게렘’으로 언급되었다.(렘6:1) 엔 케렘은 유다의 한 성읍으로 제사장인 사가랴와 엘리사벳에게서 세례요한이 태어난 곳이다(눅1:39). 따라서 주후 4세기 이후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성지화 되었고 순례자들은 이 곳을 사가랴의 집이라 불렀고 후에 동정녀 마리아가 친족 엘리사벳을 방문했다는 곳에 교회를 지었다.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 중에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눅1:40) 현재 이곳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1949년 이후 북아프리카, 아시아, 그리고 동유럽에서 이민 온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주로 예루살렘에 직장을 가지고 매일 출퇴근하고 있다. 또한 경치가 좋고 조용하므로 많은 예술가들의 사무실이 이곳에 있다. 이곳에 이르는 길은 헤젤산(Mount of Herzel)으로부터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내려오면 교차점인 마을의 중심지가 나오고 주차장도 있다. 서쪽으로는 하닷사 의료센타가 있고 엔 케림 계곡인 오른쪽으로는 엔 케렘 농업학교가 있다. 이곳에 있는 주요 성지로는 시계요한 탄생교회, 마리아의 샘, 그리고 마리아 방문교회가 있다. 또한 엔 케렘에는 히브리대학의 의과대학이 있고 하닷사(Harassah)라고 하는 대학병원이 있다. 특히 하닷사 병원은 세계에서도 의료기술을 알아주는 이름있는 대학병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