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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49 편
두 번째 전도 여행
. 중도자 위원회
. 활동시기 : 서기 28년 10월 3일 ~ 12월 30일
. 장소 : 갈릴리의 여러 도시
149:0.1 갈릴리의 두 번째 대중 전도 여행은 서기 28년 10월 3일 일요일에 시작되어, 거의 3개월 동안 계속되었고, 12월 30일에 끝났다. 이 여행에는 예수와 열두 사도가 참여했고, 새로 모집된 117명의 전도사들 및 다른 많은 관심 있는 사람들이 보조했다. 이 여행에서 가다라, 프톨레마이스, 야피아, 다바리타, 메기도, 예즈릴, 스키토폴리스, 타리케아, 히포, 가말라, 벳세다 줄리아스, 그리고 기타 여러 도시와 마을을 방문했다.
149:0.2 이 일요일 아침 출발 전에, 안드레와 베드로는 예수에게 새로운 전도사들에게 마지막 책임을 주는 말을 부탁했지만, 예수는 다른 사람들이 충분히 행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해서는 그의 몫이 아니라고 거절했다. 충분한 토의 끝에, 야고보 세배대가 책임의 말을 전하는 역할로 결정되었다. 야고보의 말이 끝났을 때 예수는 전도사들에게 말했다: “이제 너희가 책임을 받은 대로 일을 하고, 나중에 너희가 능력과 신실함을 보이면, 나는 하늘나라 복음을 전파할 수 있도록 너희를 세울 것이다.”
149:0.3 이 여행에서 오직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와 함께 길을 떠났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은 각각 약 12명의 전도사들을 데리고 다니며, 그들과 밀접하게 연락을 유지했다. 신자들이 하늘나라에 들어갈 준비가 되면, 사도들이 세례를 주었다. 예수와 두 동료는 이 석 달 동안 널리 여행하며, 자주 하루에 두 도시를 방문하여 전도사들의 일을 살피면서 하늘나라를 세우는 노력에 격려를 해 주었다. 이 두 번째 전도 여행 전부가 새로 훈련받은 전도사 117명의 무리를 위하여 주로 실질적 체험을 제공하는 노력이었다.
149:0.4 이 기간에, 그리고 이후에, 다윗 세베대는 예수와 열두 사도가 예루살렘으로 떠날 때까지 뱃세다에 있는 아버지의 집에서 하늘나라 일을 위한 고정적 본부를 운영했다. 이곳은 예수가 땅에서의 사역을 위한 중추적 역할을 하였고, 다윗은 팔레스타인과 인접 지역의 사역자들 간의 연락을 담당한 전령 봉사의 중계소 역할을 했다. 그는 이 모두를 안드레의 승인을 받아, 자신의 주도하에 진행했다. 다윗은 급속히 확장되는 하늘나라 사무의 정보 분과에서 40~50명의 전령들을 고용하여 일을 했다. 이 일을 하는 동안 다윗은 부분적 시간에 예전의 낚시를 하며 자신을 부양했다.
1. 널리 퍼진 예수의 명성
149:1.1 벳세다의 캠프가 해산될 때가 되자, 예수의 명성은 특히 병 고치는 자로서, 팔레스타인의 구석구석, 그리고 시리아와 그 주위의 여러 지역 전체를 통해서 알려졌다. 그들이 벳세다를 떠난 뒤에 몇 주 동안, 병자들이 계속 도착했다. 주를 발견하지 못했을 때, 그가 어디에 있는지를 다윗에게 알아내고 예수를 찾으러 가곤 하였다. 이 여행에서 예수는 의도적으로 소위 치유의 기적을 행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수많은 고통받는 사람들이 고침받기 위해 강렬한 믿음의 힘에 이끌려서 건강과 행복을 회복했다.
149:1.2 이 사명을 수행하던 무렵에―그리고 땅에서 예수의 삶 동안 내내―특이하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치유 현상이 계속하여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석 달 동안 여행하는 과정에서 유대, 이두미아, 갈릴리, 시리아, 두로, 시돈에서, 또 요단강 건너에서, 1백 명이 넘는 어른과 아이들이 예수의 이러한 무의식 치유의 수혜자였고,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면서 예수의 명성을 더욱 퍼뜨렸다. 뜻밖에 병 고침 받은 이 경우를 지켜볼 때마다, 예수가 “아무에게 말하지 말라”고 수혜자들에게 직접 당부하곤 했는데도 그리했다.
149:1.3 이러한 자발적 또는 무의식적 치유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우리에게 결코 드러나지 않았다. 주는 그의 사도들에게 어떻게 치유되었는지 설명하지 않았으며, 그 외에는 여러 차례 “능력이 나에게서 나간 것을 느꼈다.”고만 말했다. 한번은 그가 아픈 아이에게 손을 댔을 때 말했다: “생명이 내게서 나간 것을 느꼈다.”
149:1.4 주가 이러한 자연적 치유 사례들에 대해 직접적인 말씀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 치유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설명하려는 우리의 시도는 주제넘은 추정일 수 있지만, 모든 그런 치유 현상에 대한 우리의 의견을 기록하는 것은 허용될 수 있다. 우리는 땅에서 예수의 사역 중에 일어난 많은 병 고침의 기적들이, 다음의 세 가지 강력하고 유효한, 서로 연관된 영향력들이 함께 작용한 결과라고 믿는다:
1. 치유를 지속적으로 구한 인간의 마음에 강하고 지배적인 살아 있는 믿음이 있는 것, 그러한 치유가 순수한 육체적 회복이 아닌, 영적인 이익을 바란 사실이 함께 작용한 것이다.
2. 그러한 인간의 믿음과 함께 존재한 것은, 실제로 예수 안에 거의 무한하고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창조적인 치유 능력과 특권을 가진, 육신화된 자비로 가득한 하나님의 창조 아들의 큰 동정심과 연민이 있었다.
3. 인간의 믿음과 창조자의 생명과 함께, 아버지의 뜻이 성격으로 표현된 이 하나님-사람을 또한 주목해야 한다. 인간의 필요와 이를 채우는 신성한 힘이 만날 때 아버지가 달리 뜻하지 않으면, 그 둘이 하나가 되고 인간 예수가 의식하지 않고서 치유가 일어났지만, 즉시 신성한 본성이 이를 인식했다. 그러면 많은 병 고침 사례의 설명은 우리에게 오랫동안 알려진 큰 법칙에서 찾아야 하는데, 이렇다: 창조 아들이 바라고 영원한 아버지가 뜻하시는 것은 동시에 존재한다.
149:1.8 따라서 우리의 의견은, 예수가 친히 있는 데서 특정 형태의 깊은 인간의 믿음은, 우주에서 그 당시 인자(人子)와 밀접하게 관련된 특정 창조적 힘과 성격자들에 의해 치유가 나타나도록 실제로 강력하게 작용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는 자주 아픈 사람들에게, 그들의 강력한 개인적 믿음으로 그의 존재 앞에서 그들 스스로 치유되게 한 것은 사실적인 기록이 된다.
149:1.9 많은 다른 이들은 온전히 이기적 목적으로 병 고침을 구했다. 두로의 한 부유한 과부는 질병을 고치려고 일행과 함께 찾아왔다; 그녀는 갈릴리를 거쳐 여기저기 예수를 따라다녔고, 마치 하나님의 능력이 가장 높은 값을 내는 사람에게 팔릴 수 있는 것처럼 점점 더 많은 돈을 내놓았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하늘나라의 복음에 관심이 없었고, 오직 자신의 육체적 질병의 치유만을 구했다.
2. 사람들의 태도
149:2.1 예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했다. 그는 인간의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았고, 땅에서 사신 그의 삶에 의해 제공된 유일한 흔적은 영감을 받은 해석뿐인데, 그의 가르침이 그가 제시한 대로 남겨졌더라면, 세상의 모든 민족과 종교가 빨리 하늘나라 복음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초기 추종자들이 그의 가르침을 특정한 국가, 인종, 종교가 잘 받아들여지도록 노력을 기울인 의도는 좋았지만, 결국 그러한 가르침이 모든 다른 나라, 인종, 종교에서 받아들여지기 어렵게 만들었다.
149:2.2 사도 바울은 예수의 가르침을 당대에 특정한 집단에게 유리하게 알리기 위해 많은 편지들을 쓰며 교훈과 훈계를 전달했다. 예수의 복음을 전파한 다른 선생들도 똑같이 하였다. 그러나 이런 기록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담은 것이라고 발표하려는 자들이 후일에 이 중에 일부를 수집할 것을 아무도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이른바 기독교가 다른 어떤 종교보다 주의 복음을 더 담고 있지만, 거기에는 또한 예수가 가르치지 않은 많은 내용도 포함하고 있다. 초기 기독교에 페르시아의 신비주의와 많은 그리스 철학의 가르침이 포함된 것을 제외하고도, 두 가지 큰 실수가 있었다:
1. 기독교의 속죄 교리―예수가 아버지의 엄격한 정의를 만족시키고 신의 진노를 달래기 위한 희생된 아들이라는 가르침―에서 볼 수 있다. 이러한 가르침은 하늘나라 복음을 불신하는 유대인들에게 잘 받아들여지도록 하려는 칭찬할 만한 노력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노력들은 결국 유대인들을 설득하는 데 실패했고, 그들은 이후 세대의 많은 정직한 혼을 혼란스럽게 하고 소외시키도록 만들었다.
2. 주의 초기 추종자들이 저지른 둘째 큰 잘못, 모든 후일의 세대가 영구하게 지속한 큰 잘못은, 기독교의 가르침을 예수라는 인물 중심으로 완전히 체계화한 것이다. 기독교 신학에서 예수의 personality를 지나치게 강조한 결과, 그의 가르침은 흐려졌고, 그 결과 유대인, 무슬림, 힌두교인, 그리고 기타 동방 종교의 신자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기 점점 더 어려워졌다. 우리는 예수의 인물이 그 이름을 따르는 종교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폄하시키려는 것이 아니지만, 그렇게 한 것이 영감을 받은 그의 생애가 빛을 잃게 만들거나 구원하는 그의 말씀 : 하나님이 아버지요 사람이 형제임을 대신하도록 허용하는 것은 안된다.
149:2.5 예수의 종교를 가르치는 선생들은 다른 종교를 대할 때,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진리들(그중 많은 것들이 예수의 말씀에서 직접, 간접으로 유래한 것들)을 인식하면서, 차이점에 지나치게 강조를 두지 말아야 한다.
149:2.6 그 당시 예수의 명성은 주로 치유자로서의 평판에 의존했지만, 계속 그랬다고 할 수는 없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영적 도움을 받으려고 그를 찾았다. 그러나 육체의 치유는 일반 대중에게 가장 직접, 즉각적인 호소력을 가졌다. 도덕적으로 종살이하고 정신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예수를 더욱 찾았고 그는 항상 구원의 길을 가르쳤다. 아버지들은 아들들을 어떻게 다룰지에 대한 조언을 구했고, 어머니들은 딸들을 어떻게 인도할지에 대한 도움을 구했다. 어둠 속에 앉아 있던 이들은 그에게 와서 생명의 빛을 얻었다. 그의 귀는 항상 인류의 슬픔에 열려 있었으며, 그는 항상 그를 찾는 이들을 도와주었다.
149:2.7 바로 창조자가 필사 육체의 모습을 입고 육신화하여 땅에 있을 때, 어떤 특별한 일이 일어나는 것은 불가피했다. 그러나 너희는 결코 이른바 기적의 사건들로 예수를 접근해서는 안 된다. 기적을 통해 예수를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통해 기적에 접근하는 법을 배우라. 나사렛 예수가 땅에서 초물질 행위를 연출했던 유일한 종교 창시자였지만, 이러한 경고는 정당한 근거가 있다.
149:2.8 땅에서 미가엘의 사명 중에 가장 놀라운 혁신적 특징은 여자에 대한 태도였다. 공적인 자리에서 남자가 자기 아내에게도 인사를 건네지 않기로 되어 있던 시절과 세대에, 예수는 셋째 갈릴리 여행과 관련하여 감히 여자들을 복음을 가르치는 선생으로서 데리고 갔다. “율법의 말씀을 여자에게 전하는 것보다 불에 태우는 것이 낫다”고 선포했던 율법학자들의 가르침 앞에서 이렇게 행하는 최고의 용기를 가졌다.
149:2.9 한 세대 만에, 예수는 여성들을 경멸과 시대의 노예적 고된 일에서 끌어올렸다. 그리고 예수의 이름을 내세운 종교가 그 후 여성들에 대한 태도에서 이 고귀한 모범을 따르지 못한 것은 그 종교의 부끄러운 일 중 하나이다.
149:2.10 예수가 사람들과 섞이는 동안, 사람들은 예수가 도무지 그 시절의 미신에 메어 있지 않음을 발견했다. 그는 종교적 편견이 조금도 없었고, 결코 관대함이 모자라지 않았다. 사회에 대하여 적대감과 비슷한 아무것도 마음속에 지니지 않았다. 조상의 종교에 있는 좋은 것에 순응했으나, 미신과 속박과 같은, 사람이 만든 전통을 서슴지 않고 무시했다. 자연의 재난, 뜻밖의 사고, 기타 재앙은 신이 내리는 심판이나 섭리의 신비로운 작용이 아니라고 감히 가르쳤다. 의미 없는 예식에 종처럼 헌신하는 것을 비난했고, 물질적 예배의 잘못됨을 밝혔다. 그는 용감하게 사람의 영적 자유를 선포했고, 육체를 가진 필사자가 정말로, 진실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대담하게 가르쳤다.
149:2.11 깨끗한 손이 아니라 깨끗한 마음이 참된 종교의 표시라고 했을 때, 예수는 조상의 모든 가르침을 초월했다. 전통 대신에 현실을 존중하였고 허영과 위선이 가득한 모든 허식을 치워버렸다. 그래도 두려움이 없는 이 하나님의 사람은 파괴적인 비난을 퍼붓거나, 그 시대의 종교, 사회, 경제, 정치 관습을 철저히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그는 싸우기 좋아하는 혁명가가 아니었다. 그는 점진적 진화를 부르짖는 이였다. 그가 단지 그것을 파괴하는 일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동시에 동료들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더 우월한 것을 제시했다.
149:2.12 예수는 강요하지 않고서 추종자들로부터 복종을 얻었다. 그가 친히 부른 사람 중에서 세 사람만 제자 직분의 초대를 거절했다. 그는 사람들을 독특히 이끄는 힘을 가졌지만, 결코 독재적이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의 신뢰를 얻었고, 아무도 그의 지시에 불만을 품지 않았다. 그는 제자들에게 절대적 권한을 행사했지만, 누구도 항의하지 않았다. 그는 추종자들이 그를 '주'라고 부르도록 두었다.
149:2.13 주는 모든 만난 사람으로부터 찬미를 받았으나, 오직 뿌리 깊은 종교적 편견을 가진 이들, 그의 가르침에 정치적 위험이 있음을 감지한 이들은 예외였다. 사람들은 그의 가르침의 독창성과 권위에 놀랐다. 그들은 뒤처지고 성가시게 구는 질문자들을 다루는 그의 인내에 감탄했다. 예수는 그의 사역에 참여한 모든 이들의 마음에 희망과 신뢰를 불어넣었다. 오직 그를 만나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했고, 그를 미워한 이들은, 자신들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마음속에 고수하려는 악과 오류를, 그가 무너뜨릴 운명을 가진 진리의 투사일 것이라 간주한 자들이었다.
149:2.14 그는 친구와 적, 모두에게 강하고 특이하게 매혹적인 영향력을 미쳤다. 군중은 그의 은혜로운 말씀을 듣고 그의 간소한 삶을 보려고 몇 주 동안 따르기도 했다. 헌신하는 남녀들은 거의 초인적인 애정으로 예수를 사랑했다. 그를 알면 알수록, 더욱 사랑했다. 이 모두가 여전히 사실이다. 오늘날과 앞으로 모든 시대에서 사람들이 이 하나님-사람을 더 알게 될수록, 그들은 더 많이 그를 사랑하고 따르게 될 것이다.
3. 종교 지도자들의 적개심
149:3.1 예수와 그의 가르침이 일반 사람들에게 좋게 받아들여졌음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은 점점 더 놀라고 적대적이었다. 바리새인들은 체계적이고 교리적인 신학을 정립했다. 예수는 상황에 맞게 가르치는 선생이었지, 체계적인 선생이 아니었다. 예수는 율법보다는 삶을 바탕으로, 비유를 통해 가르쳤다. (그가 말씀을 설명하기 위해 비유를 사용할 때, 그 목적은 그 이야기의 한 특징만을 사용하려 계획했다. 예수의 가르침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갖게 되는 이유는, 그의 비유를 알레고리로 해석하려 할 때 발생한다.)
149:3.2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은 최근 젊은 아브라함이 전향한 사건과, 베드로에게 세례받은 세 첩자가 도망하여, 이제는 갈릴리에서 두 번째 전도 여행에 함께 다는 것 때문에 거의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유대인 지도자들은 점점 더 두려움과 편견으로 눈이 멀었고, 하늘나라 복음이 전하는 매력적인 진리를 계속 거부함으로 마음이 굳어졌다. 사람들이 자기 안에 깃들어있는 영의 호소를 차단할 때, 그들의 태도를 바꾸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149:3.3 벳세다 캠프에서 전도사들을 처음 만났을 때 예수는 연설을 마치면서 말했다: “너희는 몸과 mind에서―감정적으로―사람들이 서로 다르게 반응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사람들에게 오직 한 가지 한결같은 것은 깃드는 영이다. 비록 신성한 영들이 어느 정도 체험의 본질과 범위가 다를지라도, 그들은 어떤 영적 호소에도 한결같이 반응한다. 오직 이 영을 통해서, 그리고 이 영에게 호소함으로 인류는 언제라도 통합되고 형제 사랑을 성취할 수 있다.” 그러나 유대인의 많은 지도자가 복음의 영적 호소에 마음의 문을 닫았다. 이날부터 계속, 유대 지도자들은 주의 파멸을 계획하고 일을 꾸미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를 체포하고 유죄판결을 받고 유대교의 신성한 율법의 기본적인 가르침을 위반하는 종교범으로 처형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4. 전도 여행의 진행
149:4.1 예수는 이 전도 여행에서 대중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지만,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머무는 대부분의 도시와 마을에서 많은 저녁 수업을 열어 신자들과 함께 했다. 이 저녁 수업 중에 한 젊은 전도사가 예수에게 분노에 대해 질문했고, 주는 그에 대해 여러 가지를 말씀하며 대답했다:
149:4.2 “분노는 일반적으로 영적 본성이, 결합된 지적이고 육체적 본성을 통제하지 못했음을 나타내는 물질적 표현이다. 분노는 너희의 관용적인 형제 사랑과 자존감과 자제력의 부족을 나타낸다. 분노는 건강을 해치고, mind를 저하시키며, 인간 혼의 영적 스승을 방해한다. 성서에 ‘분노는 어리석은 사람을 죽인다.’, ‘분노로 자신을 찢는다.’고 하였다. 또한, ‘분노가 느린 자는 큰 이해를 하는 자이며,’ ‘성급한 자는 어리석음을 높인다.’고 했다. 너희는 모두 ‘부드러운 대답이 진노를 거둔다.’는 것과 ‘심한 말은 분노를 일으킨다.’는 것을 알고 있다. ‘신중함은 분노를 늦추며,’ ‘자신을 통제할 줄 모르는 자는 성벽이 없어 방어할 수 없는 도시와 같다.’고 하였다. ‘분노는 잔인하고, 분노는 격렬하다.’ ‘분노한 자는 싸움을 일으키며, 격노한 자는 죄를 더한다.’ ‘성급한 마음을 갖지 말 것은, 분노가 어리석은 자의 가슴에 쉬기 때문이다.’” 예수는 말씀을 마치기 전에, 이렇게 덧붙였다: “신성한 아들 신분 상태에 어울리지 않는, 동물처럼 분노를 터뜨리는 성향에서 너의 영 안내자가 너희를 구원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도록 사랑으로 너희의 마음을 다스리라.”
149:4.3 바로 이 기회에 주(主)는 그 무리에게 균형 잡힌 성품을 갖는 중요성에 대해 말씀하였다. 대부분의 사람은 어떤 직업을 통달하기까지 헌신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예수는 인정했지만, 지나치게 전문화되고, 삶의 활동에서 좁아지며 한정되는 성향에 대해서는 한탄했다. 예수는 어떤 미덕도 지나치게 극단에 치우치면 결국 악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예수는 늘 절제와 일관성을 강조하며, 삶의 문제를 균형 있게 조정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는 지나친 동정과 연민은 심각한 정서적 불안정으로 변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열정이 광신주의로 발전 될 수 있다. 예수는 그들의 이전 동료 중 한 명이 공상에 이끌려, 비현실적이고 실현 불가능한 일에 빠졌던 이야기를 언급하면서, 동시에 지나치게 보수적인 평범함의 위험성에 대해서도 경고했다.
149:4.4 그 후 예수는 용기와 믿음의 위험을 설명하였는데, 때때로 이것들이 생각 없는 사람들을 무모함과 자만으로 이끌 수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또한 신중함과 분별력이 과도하게 될 경우, 그것이 비겁과 실패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는 청중들에게 독창성을 추구하되, 엉뚱한 성향으로 흐르지 않도록 경계하라고 권하였다. 그는 감성이 없는 동정심, 신성함이 없는 경건함을 주의하라고 부탁했다. 그는 두려움과 미신으로부터 해방된 경배를 가르쳤다.
149:4.5 예수가 균형 잡힌 성품에 대해 가르친 내용보다 그의 동료들에게 더 큰 인상을 남긴 것은 바로 그가 자신의 가르침대로 사는 모습이었다. 긴장과 폭풍 한가운데서 살았지만, 결코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적들은 그를 잡으려고 계속 덫을 놓았지만, 결코 그를 옭아매지 못했다. 지혜롭고 학식 있는 자들이 그를 넘어지게 하려고 애썼지만, 넘어지지 않았다. 그를 토론에 말려들게 하려 했지만, 그의 대답은 언제나 사람을 깨우치고 위엄이 있고 단호하였다. 강론하다가 여러 가지의 물음으로 중단되었을 때, 그의 대답은 언제나 의미가 깊었고 확실하였다. 적들의 계속된 압력과 맞서면서, 한 번도 비열한 술수를 쓰지 않았고, 그들은 서슴지 않고 온갖 종류의 거짓되고 부당하고 불의한 방법으로 공격을 퍼부었다.
149:4.6 많은 남녀가 생계를 위한 직업에 열심히 헌신해야 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인간이 땅에서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폭넓은 문화적 친숙함을 기르는 것이 전적으로 바람직하다. 진정으로 교육받은 사람들은 다른 이들의 삶과 행동에 대해 무지한 채로 남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5. 만족에 관한 교훈
149:5.1 열심당원 시몬의 감독 하에서 일하는 전도사 무리를 예수가 찾아보았을 때, 시몬은 저녁 회의에서 주께 물었다: “왜 어떤 사람들은 남보다 훨씬 더 행복하고 만족합니까? 만족은 종교적 체험의 문제입니까?” 무엇보다도 예수는 시몬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149:5.2 “시몬, 어떤 사람들은 남보다 자연히 더 행복하다. 많은 것이 사람이 자신 안에 사는 아버지의 영이 이끌고 지도하심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인간의 의지에 달려 있다. 성서에서 너는 현자의 말씀을 읽지 않았느냐?, ‘사람의 영은 마음속의 모든 구석을 훑어보는 주의 촛불이다.’ 또한 영의 인도하심을 받는 필사자들이 말한다. ‘경계선이 그어져 기쁨이 넘치는 곳 안에 내가 들게 되었다. 옳거니. 나는 값진 유산을 물려받았구나.’ ‘의로운 자의 작은 재산이 악한 자 여럿의 재산보다 낫다’ 왜냐하면 ‘착한 사람은 마음속에서 만족할 것이다.’ ‘즐거운 마음은 얼굴 빛을 밝게 하며 또한 계속되는 잔치이다. 주를 경외하고 조금 가진 것이 큰 보물과 아울러 골칫거리를 가진 것보다 좋다. 사랑이 있는 곳에서 쓴 나물로 저녁 먹는 것이, 미워하면서 살찐 송아지 고기를 먹는 것보다 낫다. 올바르게 조금 가진 것이 옳지 않게 큰돈을 버는 것보다 낫다.’ ‘즐거운 마음은 약처럼 좋다.’ ‘평온하게 한 줌을 가진 것이, 슬퍼하며 영이 괴로운 가운데 넘치게 풍부한 것보다 낫다.’
149:5.3 “사람의 많은 슬픔은 포부를 이루지 못하여 실망함으로, 그리고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데서 생긴다. 사람은 이처럼 성실하게 노력하여 땅에서 최선을 다해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지만, 이렇게 성실하게 힘쓴 뒤에 사람들은 즐겁게 제 운명을 받아들이고 그들 손에 들어온 것을 최선으로 이용하는 독창성을 발휘해야 한다. 사람의 많은 문제가 모두 평상시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두려움의 토양에서 발생한다. ‘사악한 자는 아무도 쫓아오지 않는데 달아난다.’ ‘사악한 자는 사나운 바다와 같으니, 쉴 수 없다, 그 물이 더러운 것과 쓰레기를 던져 올리는 까닭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되, 사악한 자에게는 평화가 없다.’
149:5.4 “그렇다면, 거짓된 평화와 일시적인 기쁨을 찾지 말고, 오히려 마음의 여유, 만족, 최상의 기쁨을 만들어 내는 믿음의 확신과 신성한 아들 신분이 보장되는 것을 찾으라.”
149:5.5 예수는 도저히 이 세상을 “눈물의 골짜기”로 여겼다고 할 수 없다. 그는 이 세상이 오히려 파라다이스로 올라가는 영원한 불멸의 영들이 태어나는 구체, “혼을 만드는 골짜기”로 보았다.
6. “주를 두려워하는 것”
149:6.1 가말라에서 저녁 회의 동안에, 빌립은 예수에게 말했다: “주님, 성서는 우리에게 ‘주(Lord)를 두려워하라.’ 가르치는데, 왜 당신은 우리가 두려움 없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바라보아야 한다고 하십니까? 어떻게 이 두 가르침을 조화시켜야 합니까?” 예수는 빌립에게 대답했다:
149:6.2 “자녀들아, 너희가 그렇게 묻는 것에 나는 놀라지 않는다. 처음에는 오직 두려움을 통해서 인간이 경외심을 배웠지만, 내가 아버지의 사랑을 드러내려고 온 것은, 너희가 아들의 깊은 사랑과 아버지의 깊고 완전한 사랑에 대한 응답을 통해 영원자를 예배하도록 이끌고자 함이다. 나는 노예처럼 두려워서, 질투하고 진노하는 왕 하나님을 억지로 섬기는 너희를 속박에서 구원하고자 한다. 너희가 사랑하고 공정하며 자비로운 아버지-하나님을 향한 숭고하고 초월적인 자유로운 예배로 기쁘게 인도될 수 있게, 나는 너희에게 하나님과 인간, 아버지-아들 관계를 가르치겠다.
149:6.3 “‘주(Lord)를 두려워하는 것’은 시대마다 다양한 의미를 가져왔다. 두려움에서 시작해 고통과 공포를 거쳐 경외심과 존경으로 발전해 왔다. 그리고 이제 나는 너희를 존경에서 사랑으로, 인식하고, 실현하고, 감사함을 통해 사랑으로 나아가도록 이끌고자 한다. 인간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만을 인식할 때는 Supreme(최상위)를 두려워하게 된다; 인간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격과 성품을 이해하고 체험하기 시작할 때는 점점 더 그렇게 선하고 완전하며 보편적인 영원한 아버지를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 인간과 하나님 간의 관계 변화는 땅에서 인자(人子)가 이루어야 할 사명이다.
149:6.4 “총명한 아이들은 아버지의 손에서 좋은 선물을 받는데 정말로 아버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들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버지가 주신 좋은 것들을 이미 풍부히 받았기 때문에, 사랑을 많이 받은 이 아이들은 아낌없이 베푸는 그런 은혜를 민감하게 인식하고 이해함으로 아버지를 사랑하게 된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사람을 뉘우치게 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을 봉사하도록 인도한다; 하나님의 자비는 구원으로 인도한다; 한편 하나님의 사랑은 지적으로 자유로운 마음으로 예배하도록 인도한다.
149:6.5 “너희의 선조들이 신을 두려워한 것은 그가 크고 신비로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희는 그가 사랑으로 위대하고, 자비가 풍성하며, 진리 안에서 그가 영광 가운데 있기에 그를 경배해야 한다. 하나님의 능력은 인간의 마음에 두려움을 일으키지만, 그 personality의 고귀함과 의로움은 사람의 존경과 사랑을 얻고, 즐거이 그를 예배하게 한다. 충실하고 애정 어린 아들은 강력하고 고귀한 아버지를 두려워하거나 겁내지 않는다. 나는 세상에 사랑을 두려움의 자리에, 기쁨을 슬픔의 자리에, 확신을 두려움의 자리에, 사랑의 봉사와 감사의 예배를 노예처럼 얽매인 속박과 의미 없는 의식들의 자리에 두기 위해 왔다. 그러나 여전히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는 ‘주(Lord)를 두려워하는 것은 지혜의 시작이다’라는 것은 아직도 사실이다. 그러나 빛이 더 온전히 비추게 되면, 하나님의 아들들은 그가 하시는 일로 두려워하기보다는 그가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 찬양하게 된다.
149:6.6 “아이들이 어리고 생각이 없을 때는 부모를 존경하라고 반드시 훈계를 받아야 하지만, 아이들이 나이가 들고 부모의 보살핌과 보호가 유익함을 얼마큼 더 이해하게 될 때, 그들은 공경하는 마음과 늘어나는 애정을 통해서 부모가 한 일보다 부모이기 때문에 부모를 실제로 사랑하는 체험 수준까지 올라가게 된다. 아버지는 자연히 자식을 사랑하지만, 아이는 무슨 일을 아버지가 할 수 있는지 두려워하다가 경외하고 무서워하고 의존하고 존경하는 수준을 거쳐서, 사랑을 이해하고 깊이 존중하기까지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을 길러야 한다.
149:6.7 “너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의 계명을 지켜라, 그것이 사람의 온전한 의무이다’라고 가르침 받았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새롭고 더 높은 계명을 주려고 왔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뜻을 행하기를 배울지니, 이것이 하나님의 해방된 아들들의 최고 특권이다.’라고 가르칠 것이다. 너희의 조상은 ‘하나님―전능한 왕―을 두려워하라’고 가르쳤다. 나는 너희에게 ‘하나님―온통 자비로운 아버지―를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149:6.8 “나는 하늘나라를 선포하러 왔으니, 거기에는 높고 강력한 왕이 없다; 이 나라는 신성한 가족이다. 방대한 이 지적 존재인 형제들의 중심, 보편적으로 인정받고 아낌없이 섬김받는 중심이자 머리는 내 아버지이고, 너희의 아버지이다. 나는 그의 아들이요, 너희도 또한 아들들이다. 그러므로 하늘의 지위로 보면 너희와 내가 형제인 것이 영원히 진리이며, 땅에서 사는 인생에서 육체를 입고 우리가 형제가 되었으므로 더욱 그러하다. 그러니 하나님을 왕으로 두려워하거나 주인으로 섬기는 것을 멈춰라; 창조자로서 그를 존경하기를 배우라; 너희의 영적 젊음의 아버지로 그를 존경하라; 자비로운 변호자로서 그를 사랑하라; 궁극에 너희가 더 성숙하게 영적으로 깨닫고 감사하며 사랑하고, 모든 지혜를 갖춘 아버지로서 그분을 예배하라.
149:6.9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 대한 잘못된 개념에서 너희의 거짓된 겸손 개념이 자라나고, 많은 위선이 생긴다. 인간의 본성과 기원은 먼지 속의 벌레일 수 있지만, 내 아버지의 영이 그에게 깃들면 그 사람은 운명에서 신성해진다. 내 아버지가 주는 영은 반드시 그 신성한 근원으로, 기원이 있던 우주 수준까지 돌아갈 것이며, 이 깃드는 영에 의해 다시 태어난 인간의 혼은 반드시 신성한 영과 함께 영원한 아버지의 바로 그 앞에 올라가게 될 것이다.
149:6.10 “하늘나라의 영원으로 올라가는 모든 그러한 믿음의 후보자에게 비록 신성한 위엄이 부여될지라도, 겸손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부터 모든 선물을 받는 인간에게 정말로 어울린다. 허영과 거짓된 겸손의 무의미하고 하찮은 행위들은 너희가 구원의 근원을 인식하고 영적으로 태어난 혼들의 운명을 이해하는 것과 모순된다. 마음속 깊이, 하나님 앞에 겸손함은 아주 적절하다; 사람들 앞에서 온유함은 칭찬받을 만하다; 그러나 자기 의식적이고 관심을 끌려는 겸손의 위선은 유치하고 하늘나라를 깨달은 아들들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149:6.11 “너희는 하나님 앞에서 온유하고 사람들 앞에서 자제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온유함이 영적 기원으로부터 나오게 하고, 혼자만 옳다는 우월감을 스스로 의식하여 속이며 과시하지 말라. 선지자가 ‘하나님과 함께 겸손히 걸으라’고 하였을 때 지혜롭게 말하였으니,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무한자요, 영원자이며, ‘뉘우치는 지성과 겸손한 영을 지닌 자에게’ 깃든다. 내 아버지는 자만을 멸시하고 위선을 몹시 싫어하며 불의를 혐오하신다. 그리고 내가 필사 인간이 하늘나라의 영적 실체로 들어가는 데 아주 필요한 지성의 태도와 영의 반응을 보여주는 예로서 어린아이를 무척 자주 언급하였던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 사랑의 지원과 성실한 인도를 향한 진실성과 완전한 신뢰의 가치를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149:6.12 “선지자 예레미야는 사람들을 이렇게 잘 묘사하여 말했다: ‘너희가 입으로는 하나님께 가까이 있으나, 마음은 그에게서 멀다.’ 선지자가 경고한 그 끔찍한 경고를 읽지 않았느냐: ‘그들의 제사장은 돈을 받고 가르치며, 그들의 선지자는 돈을 받고 점을 친다. 그들은 경건을 주장하며, 주가 그들과 함께 있다고 선포한다.’ 또한 너희는 ‘이웃에게 평화를 말하나, 마음속에 해악이 있는 자들과', ‘입으로는 칭찬하나, 마음에서 두 생각을 품는 자들’에 대하여 경고를 받지 않았느냐? 신뢰하는 사람의 모든 슬픔 중, ‘믿었던 친구의 집에서 상처를 입는 것’만큼 끔찍한 것은 없다.”
7. 벳세다로 돌아가다
149:7.1 안드레는 시몬 베드로와 상의하고 예수의 승인을 얻어서, 벳세다에 있는 다윗에게 여정을 마치고 12월 30일 목요일 아무 때나 벳세다로 돌아오라는 지시와 함께 전도 집단들에게 전령들을 파견하라고 지시했다. 비가 오는 그날 저녁때가 되자, 사도 일행과 가르치는 전도사들은 모두 세베대의 집에 도착했다.
149:7.2 그 일행은 안식일 동안 함께 지내며, 벳세다와 가버나움 근처 집들에서 묵었다. 그 뒤에 일행 전부가 집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거나, 친구들을 찾아보거나, 물고기를 잡으러 가도록 2주 동안 휴가를 얻었다. 함께 벳세다에서 지낸 이삼일은 정말로 상쾌하고 기운을 북돋아 주었다; 고참 선생들조차 새로운 전도사들이 자기 체험을 이야기할 때 교훈을 얻었다.
149:7.3 이 둘째 갈릴리 전도 여행에 참여한 전도사 117명 가운데 오직 약 75명이 실제로 체험하는 시험을 견디었고, 2주 동안의 휴식이 끝날 무렵, 봉사에 배치되도록 준비되어 있었다. 예수는 안드레,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함께, 세베대의 집에 남아, 하늘나라의 복지와 확장에 대해 회의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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