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대제사장이 되신 그리스도를 내가 구주로
모시고 영광나라의 임금이신 그 분을 앙망하며 나아가는 믿음이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상을 얻는 살아 있는 믿음입니다(히11:6)
2절 “아브라함이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누어 주니라
그 이름을 해석하면 먼저는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믿는 자에게 의가 되시는 왕이시며 평강의 나라 왕이다 이 말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천사들의 찬송이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입니다(눅2:14)
평강의 왕이 오셨다는 겁니다. 살렘의 왕이 오셨다는 말입니다. 이런 걸로
봐서도 멜기세덱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가 아니냐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이 사건이 아주 중요합니다. 율법에 의하면 대제사장에게
십일조를 바칩니다. 아브라함은 율법 이전에 십일조를 바쳤습니다. 아론의 반차인
대제사장에게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드린 것이 아니라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아론의 반차가 아닌 멜기세덱이라는 대제사장에게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그런 다음에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아브라함을 축복해 주었습니다.
떡과 포도주가 뭔지 이해되지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떡과 포도주를 주십니다.
이것이 이미 멜기세덱을 통해 그 그림자가 나타났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3절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구약의 기록이 없다는 겁니다. 성경에 대한 멜기세덱의 자증이 없습니다.
다만 시편 110편에서 다윗이 자신의 죄가 소나 양이나 염소의 피로서는
자신의 양심이 완전히 깨끗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앞으로 멜기세덱의 반차와 같은 제사장이 나와야만 인간의 모든 양심을
깨끗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예언적으로 말씀하신 것이 바로 시편 110편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다’ 이 말은 아들과 같은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신 분을 향해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르는
제사장이라고 노래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분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멜기세덱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요8장 56절에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하시므로
아브라함이 예수 그리스도를 봤다는 하십니다. 언제? 바로 멜기세덱을 만난 겁니다.
그리고 또한 58절에 보면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이미 아브라함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멜기세덱은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이라고 볼 수 있는 겁니다.
예루살렘의 왕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분이 아브라함을 축복하고 또 창세기 18장 10절에
의하면 명년 이때에 네게 아들이 있으니라 그 약속으로 말미암아 드디어
아브라함의 혈통 속으로 예수님이 들어오셨습니다. 그래서 구약은 그림자입니다.
왜 그림자냐 하면 실체가 아브라함 속으로 흐르고 그 분이 육신의 몸을 입고
사람으로 역사적으로 나타나셨으니 예수 이전의 이야기는 그림자였다는 겁니다.
다만 그 실체인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가 이 역사 속에 나타나시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계시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신 목적은
사람이어야만 사람의 속죄 제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율법에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는 것이기 때문에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의 죄는 반드시 사람이 갚아야 하는데 거기서 또 죄 있는 자는 안 되고 죄 없는
자라야 되기 때문에 사람의 모습으로 오셔서 율법을 온전히 지키시고
죄 없는 제물이 되시기 위해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멜기세덱 반차는 유다로 연결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나뉘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야곱인데 유다지파는
야곱의 열 두 아들 중에 왕족의 지파가 됩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을 보세요.
나라는 이스라엘이고 민족은 유대민족이라고 합니다. 유다의 나라라 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정해준 그대로 받아서 이루어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이고 유다는 ‘다스림, 통치, 찬송’의 뜻이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그렇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레위지파 제사장이 유다지파로 옮겼습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 중에
장자는 르우벤입니다. 그러나 르우벤은 장자에서 떨어져 나가고 맙니다.
넷째 아들 유다에게 장자권이 주어지고 역대상 5장에서는 르우벤은 아예 족보에서
빠져버리고 맙니다. 그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넘어갑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명분은
요셉에게 넘어갔습니다. 그리고 주권은 유다에게로 넘어갔습니다. 이스라엘과 유다,
이스라엘은 정통이고 유다는 변칙입니다. 유다의 혈통이 아슬아슬하게 예수님까지
내려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 의해 유다 족보가 끊긴 후에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구원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게 바로 “영접하는 자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입니다.
드디어 계시록 7장의 십 사만사천에는 유다지파가 장자로 등극하기 시작합니다.
유다지파가 12지파 중에 제일 먼저 나옵니다.
요3장 31절 부터 보면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그가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되 그의 증언을 받는 이가 없도다 그의 증언을
받는 자는 하나님이 참되시다는 것을 인쳤느니라” 여기에서 ‘하나님을 참되시다 하여
인 쳤다’는 말도 맞는 말이긴 하지만 ‘하나님이 참되시다 하여 인을 쳤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하십니다(요3:34)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합니다. 이건 당연한 일입니다.
다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다고 말을 하긴 하지만 이땅에 오신 예수를
바로 영접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개념적으로 영접한 것 같기는 하겠지요.
가상 임신도 입덧을 한다고 하더군요. 또 어떤 이들은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다시 산
자리까지 따라가는 사람들이 있으나 제대로 된 영접은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시고
승천하신 후에 보혜사 성령을 보내 새 언약으로 우리와 함께 하신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하는 겁니다. 따라서 마1:21절의 예수를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자라는
말씀과 1:23절의 임마누엘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말씀 사이에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살아난 후 승천하심과 보좌에 앉으심과
성령을 보내심이 끼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유언한 자는 유언한 자가 죽어야
그 유언이 효력이 발생하듯 요14-16장의 새 계명은 십자가 이후에 이뤄집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3:36)
하나님께서 인을 치신 자의 수가 계시록에서 십사만사천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참 되다 하여 인을 친 자’가 십 사만사천입니다. 그러면 왜 유다지파가
장자가 되는가? 증거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이 인을 친다고 말씀했습니다. 증거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원래 다니엘 때부터 인봉된 상태로 있었습니다.
이 말씀을 계5장에 보면 ‘유다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 그리스도가 이 인을 뗐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유다지파의 사자 예수 그리스도가 장자가 되신 겁니다.
그러므로 유다지파가 장자가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에 일 세대로는 오직 갈렙과
여호수아만 들어갑니다. 실제로 여호수아는 장차올 예수의 모형입니다. 유다지파
혈통은 갈렙입니다. 거기에 실세는 여호수아가 아니고 갈렙입니다. 하나님의 혈통은
여호수아로 이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수아는 에브라임지파입니다. 갈렙이
유다지파이면서 실세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역사는 실세를 전면에 세우지 않습니다.
항상 복선을 두십니다. 그래서 갈렙이 가나안 땅에 산 채로 들어가잖습니까.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로 산 채로 들어간다는 그림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참 유다지파만 되면 그렇게 됩니다. 유다지파가
실세입니다. 유다지파가 되어야 됩니다. 그래서 히3장, 4장에 여호수아가 안식을
주었으면 그 후에 다른 날을 정하여 안식할 때가 남았다고 했겠느냐 하십니다.
여호수아는 예수라는 구원의 그림자입니다. 여호수아나 예수는 구원이란 뜻입니다.
실세는 유다지파인 바로 갈렙입니다. 갈렙을 통하여 메시아의 혈통을 이끌고
가나안에 들어가는 겁니다. 갈렙 속에 이미 하나님의 씨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걸
알아야 됩니다. 교회에서 여호수아처럼 대단한 일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 중에는 갈렙과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 여호수아처럼 들어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갈렙과 같이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구원이 유대로부터 나오리라고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이 수가성 사마리아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구원이 유다지파로부터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유다로부터 난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빌라도가 예수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이 ‘맞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유대인의 왕이 맞는데 왜 유대인의
왕이면서 유대인을 보호하지 않고 죽습니까? 그러면 예수님이 거짓말 하신 겁니까?
분명히 유대인의 왕인데 로마의 학정을 받고 있는 동족을 그냥 놔두고 죽느냐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내 나라는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다’라는 겁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신 다음에 진정 이면적 유대인의 왕이 되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눈앞에 보이는 육적인 유대인의
왕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다지파의 왕권 혈통을 가졌는데 그 분은
그 분의 혈통을 받은 새로운 유다지파의 왕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왕이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누구의 지파인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장자의 회에 참여할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시온산(히12장)을
성지 순례할 수 있습니다. 시편처럼 시온 산을 답습하는 것이 바로 성지순례입니다.
가장 좋은 성지순례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시온 산에 올라가는 겁니다.
유다지파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런 복의 길을 열어주었는데 왜 가만히 있느냐는 겁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히브리서는 율법과 인간의 제사장에게
묶여 있는 사람들을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제사장으로 인도하시는 책입니다.
지금도 목사가 제사장 역할을 합니다. 자신이 레위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목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역할은
목사에게만 맡길 것이 아니라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모두가 다 해야 됩니다.
만인 제사장이라고 말로 떵떵거리지만 이 일을 할 수 없다면 그건 안 된 겁니다.
|
첫댓글 아멘!
할렐루야 멜기세덱 반차의 대제사장이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감사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