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영주암 정관스님
“매일 정성스럽게 사는 것이 최대 행복”
<산책중인 정관스님>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구속으로부터 해방입니다. 빵이냐 자유냐 하는 진부한 질문이 있지만
인간의 전부인 것은 바로 모든 구속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새장에 갇혀있을 때 새는 새가 아닙니다. 새는 허공을 만나야 비로소 새가 됩니다.”
얼마전 무기형을 받은 조직폭력배 부두목이 출소를 위해 AIDS에 고의로 감염되었다.
현대의학으로는 치유할 수 없는 이 병은 인간의 목숨을 서서히 뺏아가는 죽음 같은 고통을 준다.
이것이 죽음 같은 고통과 맞바꾼 자유의 실체다.
인간에게 구속은 곧 죽음보다 더 심한 고통을 준다.
“자기로부터 탈피해야 합니다.
우매한 자신을 곧바로 쳐다볼 수 있는 진지한 자기성찰이 있을 때
구속으로부터 탈출은 시작됩니다.
한걸음 더 나아간다면 그것이 곧 진정한 삶으로 회귀하는 첫 출발일 것입니다.”
#자기의 적은 무감각
현대인들에게 가장 큰 적은 무엇인가.
“무감각입니다. 꽃을 보고도 달을 보고도 진실한 감응을 하지 못하는 무감각이 가장 큰 적입니다.
지식은 있을지 몰라도 감성이 없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축생에 가까운 무감각이 이 시대의 혼란을 부추기고 있는 것입니다.
월드컵이 열립니다. 한 골을 넣으면 모든 사람들이 짜릿한 흥분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 뒤에 뭐가 있습니까.”
무감각은 인간을 물질화시킬 뿐만 아니라 폭력화시킨다.
욕망의 최대치를 끌어올린 동물적 삶의 끝은 언제나 ‘허무’를 동반한다.
현대인들의 정신적 공동화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이다.
“앞선 큰 스님들은 감수성이 풍부했습니다.
대부분 사람의 죽음을 보고 출가했을 만큼 풍부한 감성을 소유했습니다.
선사들은 풍부한 감성을 최대한 끌어올려 자연과 동화되어 자신의 깨달음을 표현해 냈습니다.
깨달음을 노래한 선시들을 보십시오.
얼마나 풍부한 감성을 소유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겁니다.
” 풍부한 감성을 소유할 때 인간은 자신의 내부에 잠재해 있는 영적인 힘을 발현할 수 있다.
이같은 변화를 담당할 주역은 바로 불교와 그 동력원인 스님이다.
#지식지에서 지혜지로 나가야
많은 편차는 있겠지만 현대인들에게 지식은 평준화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지식에 대한 균등한 기회가 주어져 있을 만큼 보편적인 가치로 누릴 수 있게 됐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지식지(知識知)를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풍부한 감성이 거세된 지식지는 오늘날 인류의 문제를 증폭시키는 원인이 됐다.
“지식지의 한계를 우리는 지금 볼 수 있습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지식인들이 이러한 한계를 목도하고
새로운 학문으로 불교의 가르침에 눈을 돌리고 있잖습니까.
지식지는 무감각을 낳고 그 무감각은
국가간의 폭력으로 지도자들의 부패와 타락을 도출해내고 있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무슨 무슨 게이트의 실체는 바로 지식지에 중독된 지도자들의 수준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인류의 문제는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대로
이제 지식지에서 지혜지로 나아갈 때 해답이 있습니다.”
#선사들 중생 삶 지표
이 시대 본분종사(本分宗師)는 누구인가. 왜 본분종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인가.
<어린이들을 사랑하는 정관스님>
“본분종사는 인천(人天)의 사표(師表)로 불립니다.
선사들은 신심과 계를 지킴으로써 그 공덕으로 중생들의 삶을 맑게 하는 향기가 있습니다.
매일 매일을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살아온 선사들의 삶은
또한 중생들에게 삶에 대한 믿음을 줍니다. 그 믿음은 인류의 불신병을 치유할 수 있습니다.
” 동과 서, 동과 북, 북과 남 등 동서남북은 서로 끌어당기기도 하고 밀어주면서 균형을 이룬다.
썰물과 밀물, 공간과 땅 역시 마찬가지다.
균형과 조화를 통해 가장 이상적인 공존을 모색하고 있다.
그곳에는 인간의 창조적 생명력을 끌어올릴 수 있는 내적 에너지가 충만할 뿐만 아니라,
균형과 조화를 통한 공존의 참 의미가 무엇인지를 일깨우는 것이 있다.
선사들의 삶은 이같은 자연의 흐름과 함께 한다.
#참 보시는 기쁨 주는 것
인간에게 가장 큰 행복은 기쁨이다.
그 기쁨은 사랑을 통해서나 물질적 소유를 통해서 아니면 종교적 희열 등 다양한 측면에서 온다.
“인간에게 가장 큰 보시는 상대방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능력자가 되는 것입니다.
즉 환희지 보살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는 환희지 보살이 필요한 시대라고 봅니다.
불교의 목적은 이고득락(離苦得樂)아닙니까.
참선을 통해 우리는 낙을 얻을 수 있지만 세속에서는 오욕을 통해 낙을 얻을 수 있습니다.
불교가 왜 좋은 것일까요. 진실로 나를 볼 수 있으면 늘 행복하고 기쁨이 넘치기 때문입니다.
인위적인 기쁨이 아닌 자연스러운 법열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자신에 맞는 참선, 즉 수행을 해야 합니다.”
인간의 전부는 사랑과 희망이다.
바람같이 흐르는 세월을 붙들 수도 없고 떠나가는 인연을 붙들 수도 없을 때
인간은 가장 처연한 밑바닥에서 자신에 대한 사랑과 희망을 발견한다.
그리고 지옥같은 고통 속에서도 그 사랑과 희망으로 자신의 삶을 끌어올린다.
그 속에 기쁨이 있다.
“삶은 번뇌다/ 동천(冬天)엔 그리움이 산다/
때론 하늘을 이고 /때론 땅을 딛고/
그 속에 그리움이 산다/겨울 가고 봄 온다”
시퍼런 바다 위로 떨어지는 눈물 한 방울. 중생의 아픔이다.
李相均 기자
내 마음 일생토록
섬기는 불사 계속해야
마음의 주인이 되는 법
우리스님(동산스님) 말입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가리지 않고 열반하시기 전까지 손수 마당을 꼭 쓸었습니다.
스님은 도량이 청정해야 하고 대중들이 살고 있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
마당쓰는 법이라고 했습니다.
마당 하나 쓸어내면서 행복을 느낄줄 알아야 큰 행복도 찾을 수 있는 것이라 했습니다.
잘 쓸린 마당위로 여름비가 오면
한폭의 명화보다 더 아름다운 적요와 청정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바로 그 무욕의 청정함을 스님께서는 보라 하셨지요.
작은 것을 손수 가꾸고 나누는 그런 순수한 승가의 풍토가 이제는 없어져 버렸습니다.
마음이야기를 한번 해 보겠습니다.
마음은 죽지 않는 법(法). 마음은 없어지지 않는 법(法).
마음은 퇴색하지 않는 법. 마음은 섞이지 않는 법.
마음은 어디로 가도 펄펄한 법. 마음은 항상한 법.
마음은 변하지 않는 법. 마음은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는 법.
마음은 안도 겉도 아니다. 마음은 높은 것도 아니고 낮은 것도 아니다.
마음에는 눈도 없고 귀도 없다. 마음은 더러운 것도 아니고 깨끗한 것도 아니다.
마음은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니다. 마음은 묘해서 무처소(無處所)이다.
처소(處所)가 없으면서 귀에 필요할 때는 귀에 나타나고
눈에 필요할 때에는 눈에 나타나고 입에 필요할 때는 입에 나타나고
뜻에 필요할 때는 뜻에 나타나는 것이 묘(妙)한 마음이다.
도대체 마음이 무언지 마음을 깨달으면 정(正)이고 마음 깨달음이 도(道)이고
오탁악세에서 오탁악세에 물들지 않는 것이 마음의 위신력(威信力)이다.
마음 깨달음이 종(宗)이고 불(佛)이다. 마음을 깨닫지 못하면 습(習)이고 업(業)이고 사(邪)이다.
마음이 있으면 사람이고 마음이 없으면 송장이다.
없어진 마음은 또다른 몸의 주인(主人)이 되니 땅 위에 하늘 아래 마음이 주인(主人)이다.
아니 삼계(三界)의 주인이다. 눈도 없고 코도 없는 삼계의 주인 내 마음을
내 일생토록 섬기고 섬기는 것이 내 한평생 큰 불사(佛事)이다.
아니, 다음 생(生)에도 내 마음 내가 섬기는 불사(佛事)의 계속이다.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마음이야기입니다.
불교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