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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구군[楊口郡]
정의
강원특별자치도 중앙부에 위치한 군.
개관
동쪽은 인제군, 서쪽은 화천군, 남쪽은 춘천시, 북쪽으로는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북한의 창도군 · 금강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동경 128° 10'∼127° 51', 북위 37° 59'∼38° 19'에 위치한다. 면적은 701.53㎢이고, 인구는 2만 4089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1개 읍, 4개 면, 83개 행정리(60개 법정리)가 있다. 군청은 강원특별자치도 양구군 양구읍 하리에 있다.
자연환경
태백산맥의 여러 연봉들이 남북으로 종관한다. 양구군은 화천댐과 소양강댐 건설로 많은 평야지역이 물에 잠겨 전체 면적의 85%가 임야와 호수로 되어 있다. 금강산의 뿌리가 서남쪽으로 뻗으면서 지맥이 양구와 회양을 경계로 하는 마비령으로 내려가 광록산(800m)을 이루어 산세가 험준하다. 군의 동단부는 가칠봉(加七峰, 1,242m) · 대우산(大愚山, 1,179m) · 도솔산(兜率山, 1,148m) · 대암산(大巖山, 1,304m)을 연결하는 높고 험준한 대암산맥이 남하해 소양호에 접한다. 중앙부에는 지혜산(智惠山, 1,024m) · 봉화산(烽火山, 875m)을 연결하는 비봉산맥(飛鳳山脈)이 있다. 서단부에는 어은산(魚隱山, 1,277m) · 백석산(白石山, 1,142m) · 사명산(四明山, 1,198m)을 연결하는 어은산맥이 있다. 이렇게 군 전체가 험준한 내륙산간지역을 이룬다. 이들 연봉 사이를 북한강(北漢江)의 지류인 수입천(水入川)과 서천(西川)이 남류하다가 남서부의 파로호(破虜湖)로 흘러든다. 서부에는 금강산에서 발원한 금강천이 북한강으로 흘러들며, 남단부를 소양강(昭陽江)이 서류한다. 북동부의 해안분지는 소양강 유역권에 속하는 전형적인 침식분지이고, 양구읍에는 대규모의 산록완사면이 발달하였다. 지질은 대부분 시 · 원생대의 변성퇴적암 내지 화강편화암이나, 해안분지는 중생대에 관입된 화강암지역이다. 토양은 대부분 잔적토이고 비옥한 충적토는 하천 주변에 좁게 분포할 뿐이다. 이 군은 태백산맥의 분수령 일부를 차지해 한반도의 서부와 동부 식생계의 경계가 되므로 희귀한 동식물이 많다. 냉수성 어류인 열목어 · 잉어름치 · 황쏘가리, 딱새과에 속하는 쇠올딱새 등이 있다. 그리고 콩과인 개느삼과 다년초인 금강초롱 및 비로용담 · 칼잎용담 · 끈끈이주걱 · 큰비다분취 · 북통발 · 장백제비꽃 · 물이끼 등 식물종들이 자생한다. 호수로는 인공호인 파로호와 소양호가 있어 내수면어업이 활발하고 수상교통과 관광적 가치가 크다. 기후는 산간분지와 1,000m 이상의 고산지가 많아 대륙성기후를 나타내며 같은 위도상의 어느 곳보다도 기온이 낮고 강수량도 적다. 연평균기온 12.3℃, 1월 평균기온 -5.℃, 8월 평균기온 24℃이며, 연강수량은 1,395.5㎜이다.
역사
구석기시대의 유적은 발견된 적이 없으나 이 지역에서 가까운 홍천군홍천강 유역의 유적에서 5만∼10만 년 전의 중기구석기시대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이는 유물이 출토되었다. 횡성군 둔내에서도 1만∼2만 년 전의 후기구석기시대 유물이 발견되어 이 지역에서도 발굴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서기전 108년 위만조선이 무너지고 한나라가 4군을 정했을 때 이곳은 낙랑군에 속했다. 고구려의 건국 후 본격적인 남하정책이 전개된 광개토왕 때까지 약 100년간 동안 고구려의 세력권에 속했으며, 당시에는 양구군(楊口郡) 또는 요은홀차(要隱忽次)라고 불렸다.
757년(경덕왕 16) 이 군을 양록군(楊麓郡)으로 개칭해, 태수(太守)를 두고 삭주도독부에 소속시켰다. 그리고 희제현(稀蹄縣) · 치도현(馳道縣) · 삼령현(三嶺縣)을 영현으로 두었다. 940년(태조 23)에 양구현(陽溝縣 또는 楊溝縣)으로 고쳤고, 1018년(현종 9)에 춘주(春州 : 지금의 春川)의 속현이 되었다. 1106년(예종 1) 감무를 임명해 낭천감무(狼川監務)를 겸임시켰고 이 때 양구(楊口)로 고쳤다. 삼령현은 방산현(方山縣)으로 개칭되어 회양부(淮陽府)에 속했다. 1393년(태조 2) 낭천으로부터 분리되어 따로 감무를 두었다. 1413년(태종 13) 관례에 따라 현감을 두었다. 1424년(세종 6)에는 방산현과 춘천에 속했던 해안소(亥安所)가 양구현에 통합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당시의 호구는 양구가 297호 641인, 방산이 20호 50인이었다고 한다.
1895년 춘천부 양구군으로 개편되었고, 1896년 강원도 양구군으로 되어 군내(郡內) · 방산(方山) · 수입(水入) · 해안(亥安) · 북(北) · 서(西) · 남(南) · 하동(下東) · 상동(上東) 등 9개 면을 관할하였다. 1907년 정미의병이 일어나자 11월 2일양구면 연포와 학포 두 곳에서 양구의병과 왜군이 공방전을 벌였다. 11월 21일에는 방산면 선안리에서 김덕흥(金德興)과 김경화(金敬和)가 이끄는 300여 명의 의병이 일본군과 접전해 총기와 탄약 및 군마 · 인장 · 군도 등을 노획하였다. 그 해 12월 중순 이래 최천유(崔千有)가 의병 600여 명을 인솔하고 양구 · 화천 · 인제 사이를 내왕하면서 일본군과 여러 차례 공방전을 벌였다. 동면 덕곡리 출신의 의병대장 최도환(崔道煥)이 이끄는 양구의병은 1908년 1월 2일 일본군과 동면 임당리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패하였다. 1908년 일시 화천군에 병합되었다가 복구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서면과 군내면을 합해 군내면으로, 춘천군 북산외면 수산리를 이관받아 남면으로, 상동면을 동면으로 개칭하였다. 1917년군내면을 양구면으로 개칭하였다. 1940년 화천댐 건설로 북면 일부가 수몰되자 1941년북면을 폐지하고 양구면과 방산면으로 각각 분할, 편입시켰다. 1945년 광복과 더불어 남면의 일부인 하수내리를 제외한 전지역이 공산 치하로 들어갔다가, 1953년 국군의 진격으로 탈환, 수복되었다. 이후 휴전협정으로 수입면을 제외한 수복지구에 군정이 실시되었다. 1954년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이 시행되고, 해안면이 인제군으로 편입되었다. 1973년 7월 남면 상수내리와 하수내리가 인제군으로 편입되고, 인제군 남면 두무리와 서화면 현리 · 오류리 · 만대리 · 월산리 · 후리 · 이현리가 양구군에 편입되었다. 같은 해 양구와 춘천을 잇는 소양강댐이 준공되었다. 1979년 5월 1일양구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ㅜ1980년 행정구역 조정으로 양구읍 상5리를 상5리와 상6리로, 중리를 중1리와 중2리로, 하1리를 하1리와 하3리로 분할하였다. 1981년에는 동면 오류리를 오류1리와 오류2리로, 현1리를 현1리와 현3리로 분할하였다. 1983년 2월 15일동면 해안출장소가 해안면으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른다. 2021년 1월 남면은 국토정중앙면으로 개칭하였다.
유물 · 유적
양구군의 지정유산은 9건인데, 국가지정유산으로는 천연기념물 3건, 강원도지정유산으로는 유형문화유산 1건, 기념물 1건, 무형유산 1건, 문화유산자료 3건이다. 1987년 강원도 양구, 상무룡리파로호 상류에서 출토된 선사유적은 당시 국내 각 박물관에 소장된 구석기유물의 양보다 많은 4천여 점이 발굴되었는데 이중 249점이나 되는 흑요석의 발견으로 선사시대 문화와 사람들의 이동경로를 알 수 있게 되었으며, 이밖에도 구석기인의 불씨사용을 입증하는 발화석, 희귀유물 이암, 찍개, 주먹도끼, 사냥돌, 밀개, 돌날 등 석기와 함께 30여기의 북방식 고인돌도 발견되었다. 소양강변에서 신석기시대의 빗살무늬토기가 발견되었다. 청동기시대의 고인돌은 양구읍의 고대리지석묘군(강원도 기념물, 1971년 지정) · 양구고대리2지구지석묘군 · 양구공수리지석묘군을 비롯해 동면 지석리에 1기, 국토정중앙면 송우리에 2기, 국토정중앙면 죽리에 5기 등이 있다. 양구고대리2지구지석묘군, 양구공수리지석묘군은 1989년 강원도 문화재자료(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다. ㅜ송우리에서 발견된 석관(石棺)에서는 간돌칼 · 간돌화살촉이 출토되었고, 고대리의 고인돌 주위에서도 간돌도끼와 민무늬토기가 출토되었다. 산성지로는 삼한시대에 쌓았다고 하는 국토정중앙면 가오작리의 비봉산성지(飛鳳山城址)와 축성 연대를 알 수 없는 양구읍 군량리의 노고성지(老姑城址)가 있다. 봉수대는 국토정중앙면 죽리 · 심포리 · 원리에 있었다.
불교 유산으로 양구읍 송청리의 심곡사는 879년(헌강왕 5)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한 절로서 6 · 25사변 때 불타고 목불상 3구가 남아 있었는데, 수복 후 동면에 있었던 것을 지금의 대웅전을 재건해 불상을 봉안하였다. 그 밖에 양구읍 웅진리의 금강사(金岡寺) · 선정사(宣正寺), 정림리의 의선사(義銑寺) 등이 있다. 유교 유산으로 양구읍 중리에 있는 양구향교(楊口鄕校)는 1405년(태종 5)에 창건되었는데, 그 뒤 퇴락된 것을 1963년과 1972년에 중수하였다. 동면 후곡리의 서암사(書巖祠)는 1587년(선조 20)에 양구현감 김현도(金玄度)의 덕을 기려 지방유림들이 건립한 사우(祠宇)이다. 6 · 25사변으로 소실된 것을 1959년에 중건하였다. 정자로는 양구읍 안대리 서천 옆에 세웠던 송암정지(松巖亭址)와 비봉산 산정의 봉황대(鳳凰臺)가 있다. 양구읍 공리에 유인석(柳麟錫) 격전지가 있다. 을미사변 후 의병을 일으켰던 의병장 유인석이 왜군과 격전한 곳으로 전적비가 세워져 있다. 분묘로는 동면 덕곡리에 의병장 최도환묘(崔道煥墓)가 있다. 비석으로는 동면 원당리에 애국지사 동창률(董昌律)의 묘비와 방산면 송현리에 백석산지구전투전적비 등이 있다. 천연기념물로 양구읍 한전리와 동면 임당리에 걸쳐 양구개느삼자생지(천연기념물, 1992년 지정)가 있다. 군 동쪽에 대암산 · 대우산천연보호구역(천연기념물, 1973년 지정)이 있는데, 대암산 산정부의 늪지는 희귀한 동식물이 많은 것으로 유명하며, 한랭하고 습한 환경에서 형성된 고층습원(高層濕原)으로 남한에서 유일한 것이다. 희귀 동식물은 열목어 · 어름치 · 개느삼 · 황쏘가리 · 금강초롱 · 산줄점팔랑나비 · 쇠솔딱새 등이 있다. 동면 팔랑리의 수령 300년 된 소나무와 방산면 현리 산악골의 수령 500년 된 소나무가 강원도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교육 · 문화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으로는 1405년(태종 5) 비봉산 아래에 창건된 양구향교가 최초이다. 이 향교는 1737년(영조 13)에 양구읍 하리로 이전했다가 6 · 25사변 후 다시 중리비봉산 기슭에 건립되었다. 동면 후곡리에 있는 서암사는 준서원격으로 1587년(선조 20)에 현감 김현도의 덕행과 치적을 추모하기 위해 봉향하였다. 이곳은 한때 유림들의 시회장(詩會場)으로 이용되었다. 신교육기관으로는 1911년의 양구보통학교가 최초이다. 이어 공립으로서 1913년수입면 문등리의 일본어강습소가 1926년에 문등보통학교로, 동면 임당리의 일본어강습소가 1921년에 임당보통학교로 설립되었다. 사립으로는 국토정중앙면 창리에 창일학교가 설립되었으나 일본어강습소에 불과하였다.
광복 전까지 방산면의 장평보통학교(1929), 국토정중앙면의 용화보통학교(1932), 동면의 매동보통학교(1933), 양구읍의 무룡보통학교(1935) 등이 신설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특히, 1928년에 양구공립농민학교가 개교해 초등교육을 마친 이들이 진학할 수 있었다. 1955년 양구중학교를 시발로 중등학교가 건립되었다. 사립학교로는 성애고아원생들의 진학을 위해 성애중고등학교를 설립했으나 운영난으로 폐교되었다. 영한중학교(榮翰中學校)가 주샌프란시스코 영사인 주영한(朱榮翰)의 지원으로 1960년에 설립되어 21년간 유지되었다.
교육기관으로는 2015년 현재 초등학교 10개교, 중학교 6개교, 고등학교 3개교가 있다. 1966년에 개원한 양구문화원은 매년 10월에 양록제(楊麓祭), 구국의 이념으로 수많은 피를 흘리신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고 과거의 역사적 비극을 오늘의 문화예술로 승화시켜, 평화통일에 대한 염원을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새롭게 되새기고자 하는 뜻에서 매년 개최되는 도솔산전적문화제, 국내 최고의 대표적 겨울 민속예술축제로 우리의 민속놀이 문화를 다양하게 펼치는 대회로서 매년 설날 전에 금강산 가는 길목에 위치한 양구군 양구읍 정림교 레포츠공원 옆 특설링크에서 개최되는 동계민속예술축제 등 각종 문화예술행사를 주관하고 있다. 또한 자료의 연구결과를 출판해 향토문화의 계승과 개발에 공헌하고 있다. 기타 문화 시설로는 양구도서관, 양구향토사료관, 양구선사박물관, 박수근미술관 등이 있다. 공연장은 4곳이 있으며, 지역문화 복지시설로는 복지회관 4곳, 문화원 1곳, 청소년회관 2곳이 있다. 또 체육시설로는 실내체육관 5개소, 종합운동장 1개소, 테니스장 35개소, 수영장 2곳 등이 있다.
민속
이 고장의 민속놀이로는 기줄싸움이 있다. 조선 중엽 김현도가 현감으로 왔을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해마다 정월 보름에 주민의 대동단결과 상무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관에서 권장하였다. 면 단위로 할 때는 각 동리를 남북으로 나누어 했으며, 군 단위 때는 동면 · 국토정중앙면 · 해안면을 한 조로, 북면 · 방산면 · 수입면을 한 조로 했다.
진 편이 술과 음식을 준비하고 그 해의 도로 부역을 맡게 되므로 물질적 이해관계가 있어 모든 마을사람들이 참가하는 놀이이다. 이 놀이는 1910년대까지는 대성황을 이뤘으나 지금은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없고 초등학교 운동회 등에서나 볼 수 있다. 이 밖에 가창골의 베틀놀이와 지게놀이가 있다. 돌산령 지게놀이는 당시 나무를 하러가는 팔랑마을 나무꾼들이 돌산령을 오르며 하던 놀이이다. 나무를 하러가는 한 젊은이가 지게장단을 치며 동네를 한 바퀴 돌면 나무꾼수가 점차 늘어나게 되고 장단은 점차 흥겨워진다. 40여명의 나무꾼들이 산을 오르다가 지게 상여를 꾸며 편을 갈라 싸움을 하기도 하고 장례 절차를 그대로 흉내내는 등 장난을 치다보면 어느덧 목적지에 이르게 된다. 잘 살지는 못했지만 여유와 풍류가 가득한 산간생활 문화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는 놀이이다. 이 고장의 동제로는 동두보제(東頭洑祭)가 있다. 보는 농사의 관개수를 끌기 위해 만든 것이다. 동두보는 지금부터 약 300년 전에 이 고장 장사였던 박제룡(朴齊龍)이 처음 만든 것으로, 매년 4월 8일에 방산면 송현리와 장평리 자월(自月, 응달말)에서 동두보를 수축하고 여기서 마을사람들이 보제를 지낸다. 주신은 산신 · 수신 · 박신(박제룡의 신위)을 모시며, 헌관은 박제룡의 후손이 하게 되어 있다. 기우제를 지내던 곳으로는 도솔산과 대암산 용연(龍淵)이 유명하다. 도솔산기우제는 선조 연간의 양구현감 김현도 때부터 이미 행해졌고 한문으로 쓴 장문의 기우문이 남아 있다. 이 고장의 서낭당은 신목만으로 만든 곳도 있고 큰 마을에는 신목과 사당이 함께 있는 곳도 있다. 제를 지내는 날은 일정하지 않다. 이 밖에도 방산면 천미리에서 행해지는 강신놀이가 있는데, 100년 동안이나 계속되던 행사이다. 음력 9월 그믐날 온 동네 주민이 준비한 음식을 당목인 자작나무 고목 밑에 진설하고 악질이 돌지 않기를 바라는 제를 지낸다.
설화 · 민요
이 고장의 설화는 지명유래담과 인물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다. 지명설화가 인물설화보다 훨씬 더 많은데, 이것은 양구의 지정적 조건이 궁벽한 협지인데다가 경색(景色)을 가지고 있는 곳이 많은 데에 연유한다. 그 가운데 「대정리전설」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 마을에 포악한 지주가 살고 있었는데, 중으로 가장한 도사가 시주를 청하자 소똥 한 삽을 떠주었다. 그러자 청천백일에 별안간 폭우가 쏟아져 지주의 기와집은 물론 가족까지 몰살하고 그 자리에 큰 샘[大井]이 생겼다고 한다. 이 전설은 큰 호수 주변 마을에 흔히 전해지는 장자못전설과 내용은 비슷하나 다른 곳의 호수가 여기서는 큰 샘(우물)으로 설정된 것이 다를 뿐, 그 화소는 장자못전설과 다를 바 없다. 이것은 이 곳의 지리적 특이성 때문에 생긴 설화이다. 이렇게 지세의 특이성이나 지명에 얽힌 설화로는 국토정중앙면 용하리의 「몰구지전설(沒龜池傳說)」이 있다. 이 곳 용소에 용과 거북이 함께 살다 거북이 용에게 쫓겨 국토정중앙면 청리의 샘물골로 가려다 봉황대에서 나는 봉의 울음소리를 듣다 그곳 땅이 꺼져 거북이 죽었다는 이야기이다. 이렇듯 지명과 지세가 이 군의 설화에서 화소의 핵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설화로는 청리의 「상통석굴전설(相通石窟傳說)」이 있으며, 「방산(方山)의 감사구렁이」 · 「실학(失鶴)고개와 학조리전설」 · 「방산의 김등매(金登梅)아가씨와 강선대전설(降仙垈傳說)」 · 「소문치(小門峙)와 한씨부인」 · 「잔바위와 등천선녀」 · 「옥녀탄금대」 등이 있다. 인물설화로는 유교사회에서 생활규범으로 권장한 효행 · 정절의 설화와 장수설화가 있다. 효행설화로는 효성이 지극한 현감 김현도가 꿈에 신의 계시를 받아 병석의 어머니를 찾아가는 도중에 솔개가 하늘에서 가물치를 떨어뜨려 주어 그것을 달여 드려 어머니를 소생시켰다는 「김현도현감의 효행설화」가 있다.
또한 남편이 호랑이에게 잡아먹히는 것을 본 부인이 호랑이와 싸워서 부부가 함께 호랑이에게 죽임을 당한 뒤 그 무덤에서 두 가지 소나무가 자라났다는 「열녀박씨와 송아현(松芽峴)의 정렬설화」가 있다. 장수설화는 장수와 용마에 얽힌 우리나라 곳곳에 있는 설화와 다를 바가 없다. 이 고장의 민요는 『한국민요집』에 채집되어 있는 편수가 13편이고 『양구군지』에 수록되어 있는 것이 10여 편 있다. 『양구군지』에 실린 민요는 최근 작사되어 작사자까지 밝혀져 있는 것을 빼면 7, 8편이 된다. 양구지역은 북한강 상류지역으로 옛부터 농경문화가 발달했던 곳으로서 특히 이 고장 양구쌀은 임금님께 올리던 진상미로도 유명하여 "양구 흙 한 섬과 다른 지방 쌀 한 섬하고도 바꾸지 않았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또한 이곳은 대암산을 비롯한 수많은 산들이 있어서 산전을 일구며 살았던 산간 마을이 많이 남아 있다. 양구바람골농요는 산전(山田)을 갈며 소와 함께 대화 하듯 불리는 밭갈이 소리는 토속적인 멋과 맛이 짙게 배어있는데 밭매기 소리인 메나리와 얼러지 타령은 강원도 민요 선율인 메나리 소리로 이루어진 가락이고, 도리깨질 소리는 타작을 할 때 앞소리를 선소리꾼이 메기고 뒷소리를 여럿이 받는 선후창 형식으로 역동적이고 노동의 힘겨움을 극복하는 기능을 지닌 소리이다. 고사판 소리는 추수가 끝나고 천신과 농신 그리고 토지신께 간단한 예를 올려 풍년을 감사하고 제액과 발복을 비는 소리다. 이렇듯 바랑골 농요는 산간문화의 한 단면을 알 수 있게 하는 이 고장 특유의 신명과 한이 어우러진 가락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양구 지역에 현전하는 민요 가사 중 산수보다는 시사성이나 사상성을 지닌 가사가 의외로 많다. 그 예로 “흰 저고리 검정치마 입고싶어 입었나/소화(昭和)가 죽었다니 반몽상(半蒙喪) 입었네/……”라고 한 것은 일제에 항거하던 민중의 의식을 노래한 것이다. 또한 “개명세계 위반마라 연구종신 징역된다/깎고깎고 머리깎고 개명세계 나가보세/……”라고 한 것은 개화를 부추기는 개화의식을 노래한 것들이다. 이 밖에도 이러한 유의 민요가 몇 편 더 있다. 산간고을의 민요가 흔히 산수의 경색이나 산과 물에 붙인 정회를 노래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강원도 양구에는 시사적이거나 사상성이 잠재한 민요가 많이 전한다. 국권 상실 당시 이 고장에 의병활동이 활발해 여러 번 접전이 있었고, 국권 상실 후에는 매동학교(梅東學校)의 항일교육과 양구신사불경사건 등이 있어 은연중에 이 고장 사람들이 이러한 사상에 감화되어 민요로 표현된 것으로 보인다. 산수나 지명을 배경으로 한 민요로는 “돌산령 명당구비엔 술 한잔 없어도/오가는 길손은 쉬어만 가네/……”의 가사로 되어 있는 「돌산령타령」이 한 편 남아 전할 뿐이다. 양구에는 민속놀이인 줄다리기에 곁들여진 「줄다리기노래」가 있다. 양구읍 상리 · 하리, 국토정중앙면 송우리 · 용하리 일대에서는 해마다 줄다리기를 할 때 “이겼네 이겼네 상리가 이겼네/졌네 졌네 용하가 졌네/……”라는 가사의 노래를 불렀다.
산업 · 교통
이 군은 내륙산간지역으로, 산업구조를 보면 1차 산업 48.0%, 2차 산업 2.0%, 3차 산업 50.0%이다. 농업이 주산업으로 총 경지면적 5,266㏊ 중 논 2,613㏊, 밭 2,613㏊이다. 농업인구는 2,379가구에 6,851명이다. 산간내륙에 있는데도 수입천과 서천이 북한강과 합류하는 곳에 평야가 전개되어 농업활동이 활발하다. 주요 농산물은 쌀 · 서류 · 잡곡 · 두류 등이 있는데, 양구쌀은 질이 좋기로 유명하다. 채소와 사과 · 포도 등도 양구읍 부근에서 널리 재배된다. 쌀은 국토정중앙면 · 양구읍 · 해안 · 동면 · 방산면, 잡곡은 양구읍 · 국토정중앙면 · 해안 · 방산 · 동면, 서류는 해안면 · 양구읍 · 국토정중앙면 · 동면, 채소는 해안면에서 60% 이상을 생산한다. 약초인 치커리는 해안면, 당귀는 해안면과 동면에서 많이 생산된다. 또한 초지와 산지가 넓어 목축업이 비교적 활발하다. 한우 사육은 양구읍 · 국토정중앙면 · 동면 · 방산면, 젖소는 국토정중앙면, 양계는 국토정중앙면 · 양구읍 · 동면, 양돈은 국토정중앙면 · 양구읍 · 동면, 사슴은 방산면 · 국토정중앙면 · 양구읍, 산양은 양구읍 · 국토정중앙면 · 해안면에서 각각 사육된다. 양봉은 방산면에서 50% 이상을 생산한다. 임야면적 5만 6,427㏊ 중 국유림 3만7,955㏊, 공유림 2,435㏊, 사유림 1만 6,037㏊이다. 임목지 5만 5,952㏊ 중 활엽수림 8,424㏊, 침엽수림 1만 7,192㏊, 혼효림 2만 6,605㏊이다.
주요 임산물은 종실류 중 밤이 50% 이상을 차지하고 도토리 · 잣 · 대추 등이 생산된다. 송이 · 표고 · 목이버섯류와 약초 등도 생산된다. 화천댐으로 형성된 파로호 연안에서는 내수면 어업으로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광공업은 미약하다. 상업 활동은 예로부터 정기시장을 중심으로 이 곳의 토산물인 자기 · 고령토 · 인삼 · 오미자 · 복령 · 꿀 · 송이버섯 · 잣 등의 한약재와 특용작물이 거래되었다. 1770년대 군 내에는 양구읍 읍내장만이 5 · 10일에 개설되었고, 1830년대에는 읍내장 외에 우망리장(牛望里場)이 1 · 6일에 개설되었다.
1912년대에는 양구장(읍내장)을 비롯해 우만장이 4 · 9일, 방산면에 장평장(長坪場)과 해안면에 만대장(萬垈場)이 2 · 7일, 국토정중앙면에 유목정장(楡木亭場)이 3 · 8일에 개설되는 등 5개로 늘어났다. 1923년대에는 5개 장시가 존속했으나 양구장 외에 장평장이 4 · 9일, 수입면에 문등장이 3 · 8일, 만대장이 1 · 6일, 동면에 임당장(林塘場)이 2 · 7일에 개설되었다. 1926년대에는 양구장 · 장평장 · 문등장 · 만대장 등은 그대로이나 임당장이 4 · 9일로 바뀌고, 수입면 점방장(占方場)이 2 · 7일, 북면에 허수원장(許水院場)이 1 · 6일에 개설되는 등 7개로 늘어났다. 1938년대에는 7개 장시가 존속되었으나 양구장이 4 · 9일, 장평장이 3 · 8일, 문등장이 1 · 6일, 점방장이 2 · 7일, 만대장이 2 · 7일, 임당장이 3 · 8일, 유목정장이 3 · 8일에 개설되었다. 그러나 6 · 25전쟁을 치르고 다시 수복된 이후인 1963년에는 양구장이 5 · 10일, 국토정중앙면 용하장이 2 · 7일에 개설되는 등 2개가 존속되었고, 1976년에는 양구장 1개가 상설로 개설되었다. 교통은 산간지대이고 파로호와 소양호 및 산맥에 둘러싸인 오지이므로 불편했으나 근래에 많이 개선되고 있다. 즉, 46번 국도가 소양호반을 끼고 완전확 · 포장되어 춘천∼양구를 연결하고 이는 국토정중앙면을 지나 인제의 신남에서 44번 국도와 이어지고, 31번 국도가 국토정중앙면 용하리와 인제군 인제읍에서 44번 국도와 연결된다. 그리고 460번 지방도가 양구읍 도사리에서 46번 국도에서 갈라져 방산면의 현리를 지나 평화의댐을 거쳐 화현읍과 연결된다. 또한 453번 지방도가 동면 임당에서 해안면 현리를 지나 인제군 북면 원통리까지 연결된다. 한편, 시 · 군도가 9개 노선이 있어 각 읍 · 면지역과의 교통이 이뤄지고 있다. 이들 노선을 보면, 1번 웅진∼월명, 2번 정림∼원리, 3번 한전∼덕곡, 4번 두무∼월명, 5번 팔당∼후곡, 6번 죽곡∼오미, 7번 임당∼고대, 8번 송현∼천미, 9번 월운∼비아 1등이다. 또한 소양호의 내륙수운을 이용해 1974년부터 춘천과 내왕하고 있다. 파로호에도 1983년부터 정기여객선이 운항되어 화천과 연결된다. 파로호와 소양호 주변에 경치 좋은 낚시터가 있고 계곡과 산악 등의 절경 및 6 · 25전쟁 때의 격전장 등으로 인해 관광객이 날로 늘어나 교통량이 증가하고 있다.
관광
군 전체가 높고 험한 산지를 이루며 파로호와 소양호 때문에 육상교통은 불편하지만, 호수들을 이용한 수운은 편리하다. 양구군의 관광은 역사 · 문화, 생태 · 자연, 안보전적지 등으로 나누어진다. 산으로는 특산식물이 자생하고 희귀 곤충이 서식하는 대암산, 열목어의 최다 서식지인 백석산, 전적비와 충혼탑이 자리한 양구의 진산인 비봉산, 태백산맥 중에서도 가장 험악한 산으로 남아의 기상에 비유되는 도솔산 등이 있다. 용의 머리에 폭포수가 떨어지는 것 같은 두타연(頭陀淵), 폭포수 떨어지는 소리가 지축을 울리는 듯한 직연폭포(直淵瀑布)와 벽초연 · 팔랑직연 · 후곡약수터 등이 있다. 이곳은 가장 긴 휴전선 지역을 갖고 있어 6 · 25전쟁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 있다. 도솔산지구전투 · 가칠봉지구전투 · 송현리지구전투 · 백석산지구전투 · 피의능선전투 등 많은 격전지에 당시를 말해주는 전적비가 세워져 있다. 영화나 연극으로 널리 알려진 ‘맹진사댁경사(孟進士宅慶事)’는 방산면 현리에서 일어난 이 고장의 실화라고 한다. 이곳은 소양호 · 파로호 등 큰 호수를 끼고 있어 좋은 경관을 자랑하며 낚시터가 많다. 특히 양구읍 서쪽 20㎞에 위치한 상무룡 낚시터와 서호 낚시터는 월척 붕어 낚시로 유명하다. 양구의 선착장을 정비해 춘천의 소양댐에서 양구∼인제를 잇는 정기여객선이 운항되며, 1983년부터 화천∼양구간 파로호 정기여객선도 왕복 운항하고 있다. 이와 같이 수상 교통이 편리해져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지만, 숙박시설이 미비해 민박해야 한다. 앞으로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호수관광순환도로를 개설하고, 양구∼원통간을 관광축으로 집중 개발하면, 동해안 관광권과 연계되는 국제 관광지가 될 것이다. 이 군은 산과 물이 아름다운 고장으로 양구팔경(楊口八景)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① 사명산(四明山) : 등정양호망 단풍만태파(登頂兩湖望 丹楓萬態派, 산 정상에 오르면 파로호와 소양호가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장관을 이루고, 가을에는 오색 단풍이 각양각태로 파도를 이룬다.)
② 비봉산(飛鳳山) : 욱일희망봉 석양산경정(旭日希望峰 夕陽山影改, 아침해가 산정에 떠오르면 읍민에게 밝은 희망을 주고, 석양에 해가 서산에 기울면 산 그림자가 달라지더라.)
③ 직연폭(直淵瀑) : 괴음지축오 낙조로연사(怪音地軸鳴 落照露煙似, 폭포수가 떨어지는 괴음은 지축을 울리고, 저녁 노을에는 이슬이 마치 저녁 연기와 같더라.)
④ 파로호(破虜湖) : 조어범선귀 산수명경호(釣漁帆船歸 山水明鏡湖, 낚시를 마치고 돛대를 단 배가 유유히 돌아오고 산수(山水)는 밝은 거울과 같은 호수(湖水)로구나)
⑤ 소양호(昭陽湖) : 내륙고해조 쾌속진파조(內陸孤海造 快速振波造, 내륙지방에 외로이 바다를 이루고 있으며, 쾌속선이 달리면 잔잔한 호수에 파도가 일어난다.)
⑥ 팔랑직소(八郞直沼) : 심곡직락폭 고송만고정(深谷直落瀑 孤松萬古情, 심곡사지에서 흐르는 물은 폭포수를 이루며 외로운 고송은 만고의 정을 전해주고 있다.)
⑦ 두타연(頭陀淵) : 용두직락폭 괴암병풍조(龍頭直落瀑 怪岩屛風造, 용의 머리에서 폭포수가 떨어지는 것 같고 주위를 둘러싼 괴암은 마치 병풍을 연상케 한다.)
⑧ 후곡약수(後谷藥水) : 유곡용천수 만병치료약(幽谷湧泉水 萬病治療藥, 깊은 골에서 용솟음치는 샘물은 만병을 치료하는 약수이다.)
북한의 금강산 댐건설에 대한 수공(水攻)에 대비하여 건설되었으나 홍수 발생시 하류댐의 피해를 예방하고, 수도권의 상수원 공급 기능을 하고 있다. 평화의 댐은 지난 1988년금강산댐 건설에 맞서 높이 80m 높이까지 건설한 뒤 공사가 중단되었다가 14년만에 다시 증축공사에 들어가 평화의 댐 높이는 125m로 높아지고 저수용량도 26억 3,000만 톤으로 늘어났다. 안보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향토음식으로는 오골계, 향어백숙, 메기찜, 붕어찜, 빙어튀김 등이 유명하다. 특히 호수가 인접한 지역이기에 민물고기 요리가 매우 풍성하다. 추운겨울 깨끗한 얼음 밑에서 산다하여 이름 붙여진 빙어는 뱅어 또는 백어라고도 하는데 소 · 대한 서북풍이 매섭게 불고 강물이 얼기 시작하면 비로소 나타난다. 가시가 연하고 크기가 여자의 손가락 정도여서 깔끔히 손질하여 초고추장에 찍어 한입에 먹을 수 있으며 맛은 담백하고 시원하다. 또 튀김 요리도 유명하다. 향어는 이스라엘 잉어라는 말로 잘 알려져 있으며, 민물회로 많은 인기가 있다. 특히 향어는 재래종 잉어와 같이 산모에게 좋다고 해서 여성들의 보신용으로도 많이 이용되고 있다. 향어를 백숙으로 푹 고아서 먹는 음식은 보신에도 좋고 귀한 손님에게도 대접할 수 있는 별미이다.양구군 정림리에 있는 박수근미술관은 2001년 10월 건립되었다. 박수근화백은 1914년 2월 21일양구읍 정림리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7세때 부친의 광산사업 실패로 가세가 기울었다. 양구공립보통학교시절 프랑스의 농민화가 밀레의 만종을 원색도판으로 보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박화백은 물감을 살 돈이 없어 쩔쩔맬 정도로 가난에 시달려 중학교진학을 포기하였으나 독학으로 화업에 전념해 18세인 1932년 처음 「봄이 오다」라는 작품으로 조선미술전 서양화부에서 수채화로 입선하기도 했다. 2001년 10월 박수근화백 생가터에 200여평 규모로 건립된 박수근미술관은 작가의 예술관과 인생관을 기리는 동시에 지역대표적인 문화공간으로 박수근 선생의 삶과 예술을 재조명하고 있다. 또한, 미술관은 작가의 손길이 담겨있는 유품과 스케치, 드로잉과 같은 습작, 판화, 삽화 등 여러 유작을 소장하고 있으며 이를 선별하여 상설 전시하고 있다. 미술관은 박수근 선생을 기리며 작품을 기증한 현역 작가들의 다양한 작품들(한국화, 서양화, 조각 등)을 소장, 시기별로 전시하고 있다. 팔랑민속관은 1994년 제35회, 1996년 제36회 전국 민속예술대회에서 종합우수상인 국무총리상을 수상한 "바랑골 농요"와 "돌산령지게놀이"의 전통 민속놀이를 보존, 전승하기 위하여 건립된 민속관으로써 영상, 음향, 디오라마, 판넬 등이 설치되어 있어 동면 팔랑리 지역의 전통 민속놀이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연출되어 있다.
읍 · 면
양구읍(楊口邑)
군의 남서부에 위치한 읍. 면적 173.61㎢, 4,830세대에 1만 2,203명으로 남자 6,224명, 여자 5,979명(2015년 현재)이다. 읍 소재지는 중리이다. 1895년양구현을 양구군으로 바꾸면서 군내면이라 하다가 1917년양구면으로 개칭되었다. 1940년화천댐 건설로 수몰된 북면의 일부를 1941년에 편입시켰다. 1945년 이후 38선 이북에 위치해 북한지역에 속해 있다가 1953년 수복되었다. 1963년북면이 전부 편입되고, 1979년 읍으로 승격되었다. 그런데 소양강댐의 완성으로 이 읍에 편입된 북면 전역과 대동리 · 용호리 · 함춘리 등이 완전 수몰되어 이름마저 없어지고 웅진리 · 수인리는 절반 이상이 수몰되어 지명만 남게 되었다. 2005년 현재 32개 행정리, 21개 법정리에 162개 반으로 편제되어 있다. 읍의 중앙부를 서천(西川)이 서류하다가 파로호로 흘러든다. 그 유역에는 중망평(中望坪)을 비롯한 비교적 넓은 흥적평야가 형성되어 예로부터 쌀 산지로 유명하다. 동수리∼안대리∼학조리에는 대규모의 산록완사면이 형성되어 농경지와 취락의 입지로 이용되고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 · 과일 · 채소 등이며, 한우 사육과 양계 · 양돈이 성하다. 또 군내 제조업체의 대부분이 입지해 있으나 영세한 편이며, 송이 · 잔디씨 등을 수출한다. 교통은 양구∼춘천간 46번 국도가 읍의 남부를 지나고, 북부의 도사리에서 460번 지방도가 방산면을 지나 평화의댐∼화천과 연결되며, 1 · 2 · 4 · 6 · 7번 군도가 있어 사방으로 연결된다. 한편, 파로호와 소양호의 내륙수호를 이용한 정기여객선이 운항되고 있어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고대리와 공수리에 지석묘군이 있고, 상리에 양구향교, 송청리에 심곡사, 고인돌, 팔효자각, 군량리에 노고성지, 중리에 비봉공원, 석현리에 항일의병운동을 벌인 유인석, 이강년, 최도환 의병장들을 추모해 건립한 항일의병전적비, 월명리에 함맹준(咸孟俊)송덕비 등이 있다. 천연기념물은 개느삼자생지가 한천리에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3개교, 중학교 2개교, 고등학교 2개교가 있다. 중(中) · 상(上) · 하(下) · 송청(松靑) · 수인(水仁) · 웅진(雄津) · 석현(石峴) · 공(恭) · 학조(鶴鳥) · 이(泥) · 안대(安垈) · 정림(井林) · 동수(東水) · 고대(高垈) · 죽곡(竹谷) · 한전(閑田) · 도사(都沙) · 군량(軍糧) · 공수(公須) · 월명(月明) · 상무룡(上舞龍) 등 21개 리가 있다.
국토정중앙면(南面)
군의 남동부에 위치한 면. 면적 135.25㎢, 1,587세대, 인구 3,835명으로 남자 2,020명, 여자 1,815명(2015년 현재)이다. 면 소재지는 용하리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하동면의 청동 · 용하 · 야촌 · 적동과 춘천군 북산외면의 수산리 일부를 병합하였다. 1973년상수내리와 하수내리를 인제군에 이속시키고, 인제군 국토정중앙면 두무리를 편입하였다. 2005년 현재 21개 행정리, 15개 법정리에 67개 반으로 편제되어 있으며,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 리가 1개 있다. 면의 서부를 남류하는 서천이 서쪽의 양구읍으로 흐르고 있다. 이 하천 연안의 야촌리 · 용하리 · 황강리 · 송우리 및 창리 일대에 비교적 넓은 충적평야가 발달하였다. 북동쪽 인제읍과의 경계에 광치령(廣峙嶺), 동쪽에 개골령, 남부에 봉화산이 솟아 있다. 봉화산 북쪽의 심포리 · 구암리 · 도촌리 일대와 적리 · 야촌리 · 용하리 일대에는 대규모의 산록완사면이 발달하였다. 곡저평야와 산록완사면에는 농경지와 취락이 분포해 주민의 생활무대로 이용되고 있다. 주요 산업은 농업으로 쌀을 비롯해 옥수수 · 콩 · 감자 등이 산출되고 채소의 생산도 많다. 또한 젖소 사육과 양계 · 양돈 및 한우 · 사슴 · 산양 등의 사육이 활발하다. 특산물로는 더덕 · 도라지 · 고비 · 고사리 · 싸리버섯 · 느타리버섯 · 송이버섯 등이 광치령 · 가리봉 · 봉화산 일대에서 많이 채취된다. 교통은 국도 31번과 46번이 용하리에서 갈라져서 인제읍과 인제군 신남에서 44번 국도와 연결되고, 시 · 군도 2 · 3 · 4번이 사방으로 이어져서 편리하다. 원리와 청리를 연결하는 양구터널이 있다. 문화유적은 봉화산 정상에 봉수대, 송우리와 죽리에 지석묘, 가오작리에 비봉산성지, 심포리에 필리핀군의 6 · 25참전전적비, 적리에 전기필(全箕弼)불망비, 안동권씨효열비, 용하리에 초대 양구군수 백기수(白冀洙)불망비옥천전씨열부비각, 용하리선돌, 구암리에 김익하(金翼河)선덕비 등이 있다. 청리에는 파평윤씨와 문화유씨, 구암리에는 용인이씨의 동족마을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3개 교, 중학교 1개 교가 있다. 용하(龍下) · 적(笛) · 가오작(佳伍作) · 야촌(野村) · 청(晴) · 송우(松隅) · 황강(黃崗) · 창(蒼) · 도촌(桃村) · 구암(九巖) · 죽(竹) · 심포(深浦) · 원(院) · 두무(斗武), 주민미거주지역인 명곶(明串) 등 15개 리가 있다.
동면(東面)
군의 북동부에 위치한 면. 면적 123.58㎢, 1,042세대 인구 2,500명으로 남자 1,335명, 여자 1,165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임당리이다. 본래 상동면(上東面)이라 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동면으로 개칭되었다. 1973년인제군 서화면의 현(縣) · 오류(五柳) · 만대(萬垈) · 월산(月山) · 후(後) · 이현리(泥峴里)를 편입해 동면 해안출장소를 설치하였다. 1983년동면 해안출장소가 해안면으로 승격됨에 따라 현 · 오류 · 만대 · 월산 · 후 · 이현리가 해안면이 되었다. 11개 행정리, 9개 법정리에 42개 반으로 편제되어 있으며, 2개 리가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 곳이다. 면의 동쪽에는 해안면과의 경계에 가칠봉 · 대우산 · 도솔산, 인제군 서화면과의 경계에는 대암산 등이 솟아 험준하다. 서쪽에는 방산면과의 경계에 두밀령, 양구읍과의 경계에 학령 등이 솟아 커다란 분지 형태를 이룬다.
서천이 면의 중앙을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 국토정중앙면으로 들어가면서, 임당리 · 원당리 · 지석리 일대에 비교적 기름진 평야를 이룬다. 도솔산 기슭인 팔랑리를 비롯해 원당리 동쪽, 후곡리에 이르는 지역에는 대규모의 산록완사면이 발달해 농경지와 취락이 입지하고 있다. 특히 대암산 산정에는 백두산과 이곳에만 존재한다는 작은용늪 · 큰용늪이라고 불리는 고층습원(高層濕原)이 발달해 있어 학술연구에 중요하다. 산간내륙이지만 논이 밭보다 많다. 주요 농산물은 쌀 · 옥수수 · 감자 등이고, 약초인 당귀와 산나물의 생산도 많다. 한우 사육과 양계 · 양돈도 한다. 교통은 31번 국도가 임당∼양구읍까지 이어져 44번 국도와 46번 국도로 연결되고, 453번 지방도가 임당∼해안면∼원통리까지 이어지며 시 · 군도 3 · 5 · 7 · 9번이 개설되어 사방으로 이어져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팔랑리에 심곡사지(深谷寺址), 지석리에 선사시대유적, 후곡리에 양구현감을 지낸 김현도(金玄度)를 봉안한 서암사(書巖祠), 임당리에 밀양박씨효열비, 펀치볼전적비, 홍호림 장군송덕비, 일제강점기인 1919년대동단 사건으로 연루되어 옥고를 치룬 독립운동가 동창률(董昌律)선생묘, 월운리에 피의능선전투전적비 등이 있다. 대암산 · 대우산천연보호구역과 임당리에 개느삼자생지가 있다. 관광지로는 후곡리에 약수터, 팔랑리에 팔랑직연소가 있다. 지석리에는 봉화정씨의 동족마을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 교(분교 1개 교), 중학교 1개 교가 있다. 임당(林塘) · 후곡(後谷) · 지석(支石) · 덕곡(德谷) · 원당(元塘) · 팔랑(八郞) · 월운(月雲) · 주민미거주지역인 비아(比雅) · 사태(沙汰) 등 9개 이가 있다.
방산면(方山面)
군의 북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206.88㎢, 715세대, 인구 1,623명으로 남자 887명, 여자 736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현리이다. 본래 고구려의 삼현현(三峴縣) 또는 밀파혜(密派兮) 지역이었다. 757년(경덕왕 16)에 삼령현으로 고쳐서 양록군(楊麓郡)의 속현이 되고, 고려 때 방산현으로 고쳐 회양부(淮陽府)에 속했다. 1424년(세종 6)에 다시 양구군에 편입되고, 그 뒤 방산면이 되었다. 7개 행정리, 9개 법정리에 31개 반으로 편제되어 있으며, 1개 리는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 곳이다. 북쪽에는 백석산 · 지혜산, 동쪽에는 매봉(1,290m) 등이 솟아 있다. 중앙부에 수입천이 남류해 양구읍을 지나 파로호로 흘러든다. 특히 하류부에는 곡류(曲流)가 발달했고, 취락과 농경지는 주로 그 주변에 분포한다. 산업은 농업이 중심이고, 주요 농산물은 감자 · 콩 · 옥수수이며, 각종 산나물이 유명하다. 양봉은 군내 1위로 50% 이상을 차지한다. 장평리에는 질 좋은 고령토가 생산되고 있다. 교통은 460번 지방도가 남부를 동서로 지나며 양구읍과 화천을 이어주고, 시 · 군도 6 · 8 · 9번이 각 방향으로 연결되고 있다. 방산면과 양구읍을 연결하는 도고터널이 뚫려 있다. 보호생물인 열목어가 천미리에, 수입천에는 황쏘가리 · 어름치가 서식하고 있다. 문화유적은 현리 선안(善安)이란 마을 어귀에 수령 400여년 된 노송 45그루가 있는데 이를 일컬는 송무정(松武亭), 송현리에 백석산전투전적비, 장평리에 6.25전쟁 중 산화한 66명의 영혼을 기리기 위한 위령탑, 천미리에 정규한장군공송비와 최종민군수공송비 등이 있다. 관광지로는 장평리에 직연폭포, 건솔리에 두타연폭포 등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 교, 중학교 1개 교가 있다. 현(縣) · 오미(五味) · 금악(金嶽) · 장평(長坪) · 송현(松峴) · 천미(天尾) · 칠전(漆田), 주민미거주지역인 고방산(古方山) · 건솔(乾率) 등 9개 리가 있다.
해안면(亥安面)
군의 동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61.52㎢, 542세대, 인구 1,433명으로 남자 758명, 여자 675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현리이다. 본래 양구군지역으로, 1945년 광복 이후 공산 치하에 들어갔으나 1954년 행정권의 수복으로 인제군에 편입되었다. 1963년서화면 소속의 해안출장소가 개설되었으며, 1973년양구군 동면에 편입되었다. 1983년 동면 해안출장소가 해안면으로 승격되었다. 6개 행정리, 6개 법정리에 20개 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면은 6 · 25전쟁 때의 격전지로서, 펀치볼(Punch Bowl)이라고 알려진 산간분지를 중심으로 하고, 주변에 가칠봉 · 대우산 · 도솔산 · 서희령(西希嶺) · 달산령 · 먼멧재 등을 연결하는 분수령으로 둘러싸여 있다. 분지는 변성암지역에 관입(貫入)된 화강암이 차별 침식(侵蝕)을 받아 형성된 것으로 주변의 산지와는 뚜렷한 지질구조상의 차이를 보인다.
분지 안에는 성황천과 만대천이 여러 수계를 모아 동쪽 당물골에서 만나 분지의 유일한 출구를 통해 동류하다가, 인제군 서화면 후덕리에 이르러 남류하는 소양강과 합류한다. 분지 주변에는 대규모의 산록완사면이 발달해 분지저(盆地底)는 논, 산록완사면은 밭으로 이용되나, 아직 미개척 경지가 많다. 분지 안의 평지가 해발고도 400m 이상에 이르는 내륙지역이므로 여름에도 냉해가 빈번하다. 주요 농산물은 쌀 · 옥수수 · 감자 · 메밀 · 콩 등이고, 특히 고랭지농업으로 생산하는 채소는 군 내 생산의 60% 이상을 차지하며, 치커리 · 당귀 등도 많이 생산된다. 특히, 봄철에 채취되는 산나물도 무공해 식품으로 유명하다. 면 전체가 민통선 북쪽에 있어 453번 지방도 1개 노선만이 서쪽의 동면과 동쪽의 인제지역과 연결되고 있다. 제4땅굴과 을지전망대가 있어 화천의 평화의댐과 연계된 안보관광지로 개발되고 있다. 문화유적으로는 오유2리에 불교사찰인 정안사, 백기수군수 불망비 등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 교, 중학교 1개 교가 있다. 현(縣) · 오류(五柳) · 만대(萬垈), 주민미거주지역인 월산(月山) · 후(後) · 이현(泥峴) 등 6개 리가 있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양구군통계연보』(양구군, 2008)
『지방항정구역요람』(행정자치부, 2000)
『강원향토대관』(강원도민일보사, 1999)
『강원도사』(강원도, 1995)
『한국지지』(건설부국립지리원,1984)
『한국지명요람』(건설부국립지리원, 1982)
『양록(楊麓)의 얼』(양구군, 1982)
『강원총람』(강원도, 1978)
『태백의 읍면』(강원일보사, 1975)
『한국민요집』(임동권 편, 집문당, 1974)
『태백의 설화』(최승순 외, 1974)
『한국지명총람』(한글학회, 1967)
양구군(www.yanggu.go.kr)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양구 이해인 시문학관과 박수근 미술관
문학과 철학, 미술이 어우러지는 예술의 고장
국토 정중앙에 자리한 강원도 양구군에 시와 철학의 공간이 생겼다. 지난 2012년 12월 1일 양구읍 동수리 파로호 호반 평지에 ‘이해인 시문학의 공간, 김형석·안병욱 철학의 집’(약칭 이해인 시문학관)이 들어섰다. 인근에는 20세기의 가장 한국적인 화가로 평가받는 박수근미술관이 있다.
이해인 수녀의 고향에 세워진 시문학관
이해인 시문학의 공간(1층)과 김형석·안병욱 철학의 집(2층)을 품은 건물
1945년, 양구읍 동수리에서 태어난 이해인 수녀는 첫 시집 [민들레의 영토]를 발표한 이후 [내 혼에 불을 놓아],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 등 다수의 시집과 산문집을 냈다. 그의 따뜻하고 서정적인 시들은 사람들의 마음에 맑은 영혼을 불어넣었다. 최근에 발표한 [꽃이 지고 나면 잎이 보이듯이]는 암 투병을 하는 동안 써내려간 산문집이다.
지상 3층 규모로 지어진 이해인 시문학관 1층에는 이해인 수녀의 시와 삶을 접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돼 있다. 2층에는 안병욱·김형석 철학의 집이 들어섰다. 인근의 양구읍 정림리에 박수근미술관이 있어 양구읍은 이제 미술과 문학, 철학을 아우르는 예술마을로 한층 풍성해진 느낌을 준다. 이해인 수녀는 “수도자로서의 삶과 시인으로서의 사색을 조화시키며 기도와 시를 통해 복음을 전하는 수녀 시인”이라고 김동수 학예사는 설명한다. 전시관 벽마다 이해인 수녀의 시가 씌어 있다. 한 편 한 편, 천천히 감상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1994년 인도 방문 당시 마더 테레사 수녀와 함께 찍은 기념사진 한 장이 한쪽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따뜻한 인간미에 바깥 추위도 까맣게 잊게 된다.
민들레 솜털처럼 날아가 희망이 되는 시
어린 시절 이해인에게 시는 꿈을 꾸게 만드는 하나의 놀이요 노래였다. 한국전쟁 동안 그는 가난하고 우울한 시절을 언니, 오빠가 읽어주는 시로 달랬다. 김소월과 한용운, 윤동주의 시어들과 접하면서 우리 언어의 아름다움에 눈을 뜨게 됐다. 매일같이 시와 함께 호흡하는 삶을 살아온 그에게 시 창작은 '또 다른 수도의 길'이었다. 독자들은 이해인 수녀의 시가 마음에 평온을 가져다 준다고 말한다. 그러한 정서를 전달하기까지 그는 문장력이 녹슬지 않도록 매일 꾸준히 습작을 하고, 자신의 글과 삶이 일치하도록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한 노력이 뒷받침되어 그는 시인으로서 독자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이해인 수녀는 "내 시가 민들레 솜털처럼 미지의 독자들에게 날아가 위로와 희망이 되어줌을 알게 되었을 때 정말 보람 있고 행복하다"라고 말한다. 전시실에는 영상으로 이해인 수녀의 시를 마음껏 읽을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시를 접하면 마음이 한없이 정화되는 느낌을 받는다. 감상실 옆에는 법정 스님을 비롯해 박완서, 박두진, 조병화 등 이 시대 최고의 문인들, 종교계 인사들과 주고받은 편지가 전시돼 있어 시인의 인간미를 엿볼 수 있다. 시인이 사용했던 몽당연필과 육필 원고, 낡은 필통 등이 창작 뒤에 숨은 인간적 고통을 느끼게 해준다.
이해인 수녀의 전시실을 나오면서 ‘새해를 맞이하며’라는 시를 몰래 가슴에 담아온다.
깊은 지성과 사색을 만나는 공간▼
철학자 김형석 선생의 전시실
이해인 시문학관 2층에 자리한 ‘김형석·안병욱 철학의 집’은 철학자 김형석과 안병욱의 지성과 감성을 접할 수 있는 공간이다. 왜 양구 땅에 두 철학자를 기리는 공간이 들어섰을까. 두 사람 모두 이북이 고향이라 북녘이 바로 지척인 양구에 자리잡게 되었다고 학예사는 설명한다. 안병욱과 김형석은 1920년 평안남도 출생이다. 젊은 시절부터 90세가 넘은 지금까지 끈끈한 우정을 나눠오는 사이로 익히 알려져 있다. 연세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다수의 철학서를 펴내고 제자들을 양성한 김형석 교수는 우리들에게 참다운 철학의 길을 열어준 철학자로 통한다. 에세이집 [김형석 전집](전10권), [오늘을 사는 지혜], [철학 입문] 등을 펴낸 그는 “90을 넘기면서 얻은 교훈은 ‘사랑이 있는 고생’이 가장 보람되고 행복한 인생의 길이다. 나보다 더 고귀한 것을 사랑했기에 내 인생의 의미를 찾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김형석 교수가 집필한 수많은 철학서를 살펴 보면, 그가 우리의 정신세계를 일깨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실감하게 된다. 김 교수는 요즘 세대에게 바라는 글에서 “꿈이 없는 20대는 죽은 인생이다. 이상이 없는 40대는 방황하는 사람이다. 젊은 세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열린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철학자 안병욱 선생의 전시실
철학자 안병욱의 인생과 철학을 재조명하는 공간도 깊은 사색에 빠져들게 한다. 안병욱은 1956년부터 10년간 <사상계> 편집위원과 주간을 맡으며 비판적이고 참여적인 언론 활동을 했다. 1963년부터는 흥사단 아카데미를 창설하고 도산 안창호 선생의 사상을 알리는 계몽 활동을 펼쳤다. 전시실에는 동양의 고전 철학을 담은 [철학의 즐거움]을 비롯해 수십 권의 저서가 전시되어 있다. 전시물과 그가 남긴 어록들을 둘러보면 평생 우리에게 철학을 전파하고자 노력했던 그의 향기로운 삶이 느껴진다. 안병욱의 인생관인 “생즉도(生卽道), 생즉학(生卽學), 생즉수(生卽修), 생즉동(生卽動)’이란 말에도 고개가 절로 끄떡여진다. “산다는 것은 자기 길을 가는 것이요, 죽는 날까지 배우는 일이요, 자기의 재능과 인격을 갈고 닦는 것, 가치 창조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이라는 뜻에 깊이 공감하게 된다. 그는 또 인생이 “운명과 자유의 조우”라고 역설한다. 운명과 자유가 서로 만나서 다양한 드라마를 전개하는 것이 바로 인생이라는 뜻이다. 그에게 자유란 무엇일까? “자유란 칼과 같다. 칼을 잘 쓸 줄 알아야 손을 베지 않는 것처럼 자유도 도덕과 양심, 정의가 있는 자유를 잘 구가해야 한다”고 말한다. 철학의 집에는 김형석, 안병욱 두 철학자의 서재도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김형석 교수의 서재는 창밖으로 파로호 상류가 시원스레 펼쳐진다. 안병욱 교수의 서재에는 ‘혼’, ‘청정심’과 같이 명상을 유도하는 글귀가 새겨진 목각이 있다. 전시실 곳곳을 장식한 명언과 마음에 새겨두면 좋을 어록들이 향기로운 공명을 일으켜 관람하는 동안 수시로 발걸음을 멈추게 된다.
가장 한국적인 박수근 화가의 일생을 엿보다▼
이해인 수녀의 문학세계와 한국 철학계 두 거두의 삶을 만나본 다음 찾아가는 곳은 박수근미술관이다. 화가의 작품에 주로 등장하는 화강암 질감을 모티브로 한 나선형 건물로 외관이 독특하다. 미술관 정원에는 사명산 자락 아래 차분하게 앉아 있는 박수근 화백의 동상이 놓여 있고, 오른편 개울에는 그의 작품 [빨래터]를 연상시키는 빨래터가 재현돼 있다. 개울 뒤로는 자작나무 숲이 무성하다. 20세기의 가장 한국적인 화가로 추앙받는 박수근 화백. 그는 서민의 삶을 소재로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드러내는 데 일생을 바친 화가, 우리 민족의 일상적인 삶의 모습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낸 화가로 추앙받는다. 화가의 유품, 가족들과 찍은 사진, 지인들과 주고받은 편지들로 구성된 상설전시실을 둘러보면 양구라는 곳이 군인들만 많은 고장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전시장을 나와 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올라가면 탁 트인 건물 옥상이 나온다. 해안분지를 거쳐 불어오는 겨울바람이 시원하기만 하다. 미술관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뮤지엄숍을 들른다. 나무와 두 여인, 빨래터, 소, 젖먹이는 아내, 절구질하는 여인 등의 그림을 담은 액자와 앉아 있는 두 남자, 춘일, 모란 등의 그림이 그려진 명함집, 그밖에 열쇠고리, 손수건 등을 구입할 수 있다. 박 화백의 숨결이 전해지는 소품들이다.
출처:(한국관광공사의 아름다운 대한민국 이야기, 한국관광공사, 유연태)
2025-03-06 작성자 명사십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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