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까지 초의선사 입상과 좌상, 한마음선원의 대행 스님 좌상 등 4종, 그리고 용운 스님의 원력에 따라 우리나라 차인 350여명의 수인을 본떠 좋은 경험을 했고, 지금도 마음이 뿌듯하다. 사실 얼굴에 냄새나는 크림을 바르고 석고를 묻히면 갑갑한 것은 물론이고 재채기나 기침을 해도 안 되고, 근육도 움직이지 못해 몹시 불편한데 고승께서 참고 견디신 것이 너무 고마워 작가로서 모델료 30만원을 올렸다.
성형을 해놓고 보니 손금이 아주 특별하셨다. 운명선과 명예선이 모두 뚜렷하게 손가락 위까지 올라가셔서 부처님 홍법에 대성하실 손금이었다. 재물선이라는 새끼손가락 아래 손금도 불사하실 때 재물이 많이 모이실 운이시고 제자들도 많이 거느릴 손금이었다. 한 가지 아주 특이한 것인 두뇌선과 감정선 사이에 십자가가 그려져 있어 영성이 높으신 분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3) 만경사 비로자나불 점안식
2년쯤 지난 뒤 스님들이 강원도 영월 만경사에 비로자나불을 모시고 싶다고 하셨다. 아마 법신 . 보신 . 화신 3불을 모두 모시고 싶으셨던 모양이다. 망경산사에 화신인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셨고, 여래선원에 보신인 아미타 부처님을 모셨기 때문에 만경사에는 법신인 비로자나불을 모시려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등원 스님이 말씀하셨다.
“해인사 비로자나불이 수인도 잘 표현되어 있어 그렇게 조성했으면 좋겠습니다.”
해인사 부처님을 원형으로 해서 비로자나불 조성에 들어갔다. 해인사는 신라 애장왕 때 순응과 이정이 세운 사찰로 의상의 화엄 10찰 중 하나이며,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법보사찰로서 유명하다. 불상은 팔만대장경이 보관되어 있는 장경각 뒤편에 있는 법보전의 본존불로서 이마에는 반달 모양이 표현되었고, 얼굴은 갸름한 편이다. 귀는 어깨까지 길게 내려오고 목에는 3개의 주름인 삼도가 뚜렷하다. 불상이 입고 있는 옷은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있고, 주름은 평행 계단식으로 표현되었다. 손은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모습으로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일반적인 손모양이다. 필자가 이 불상을 바탕으로 만경사 불상을 조성할 때만 해도 이 불상이 조선 초기 불상의 특징을 잘 표현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2005년 개금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명문이 발견되어 통일신라 때인 883년 조성된 것으로 밝혀져 한국에서 가장 먼저 제작된 목조불상이 되었다.
조성을 마치고 영월의 만경사로 옮겨 2004년 10월 10일 점안식을 가졌다. 이 자리에 관정 큰스님이 참석하셨다. 당시 우리 나이로 81살이셨던 스님이 참석하셔서 자리를 빛내주셨고, 관정 스님보다 14살이나 많으신 만봉 스님도 참석하셨다. 94살이신 만봉 스님은 계단을 걸어 올라가실 수가 없어 내가 업고 갔던 기억이 새롭다. 필자가 조성한 불상 뒤에 바로 우리나라 탱화계의 최고 거장이신 만봉 스님이 그리신 탱화가 장엄하게 받쳐주고 있어 더욱 돋보였다.
점안식은 성대하게 진행되었다.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에서 모인 불자들은 법당은 물론 온 절 안에 가득 찼고, 인간문화재들이 직접 참여하여 여법하게 의식이 진행되었다.
의식이 진행 될 때도 나의 관심은 계속 관정 큰스님에게 쏠렸다. 얼굴과 손발은 본을 떠 놓았지만 앞으로 언젠가 틀림없이 큰스님의 상을 제작하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내가 작품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상대를 계속해서 관찰을 하는 것은 나뿐 아니라 모든 작가들의 공통적 습관이라고 생각한다. 흉상을 하면 어떻게 하고, 좌상을 만들면 어떻게 하고, 입상을 만들면 어떻게 할까? 이런 직업의식 때문에 아마 아무리 많은 제자들이 있어도 큰스님의 특징은 나만큼 자세히 뜯어본 사람도 없으리라고 본다. 가까운 장래에 꼭 큰스님의 상을 제작할 날이 오길 기다린다.
끝으로 큰스님 손바닥 사진을 공개하니 여러분 자신의 손금과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모아미따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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