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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반창고 역할을 해주었으면” | ||||||
<土 曜 隨 筆> 수필가 박종희, ‘베란다’ | ||||||
새 탁자에 밀려 화분받침대로 밀려난 분홍색 사각탁자 위로 봄 햇살이 금빛 무늬를 짠다. 휴가를 받아, 벼르던 대청소를 하면서 방치해 두었던 베란다 청소를 하려고 보니 유리창 틈새로 쌓여있던 먼지들이 제풀에 놀라 일어선다. 아파트로 이사하면서 볼품없고 쓸모없는 물건들을 버리긴 아깝고 두자니 눈에 거슬려 보이지 않게 창고에 두다 보니 베란다는 온통 홀대받은 살림들이다. 주택에 살 때보다 큰 베란다가 두 개나 되고 다용도실도 두 개가 있으니 묵은 살림을 정리하기엔 아파트가 참 편리한 것 같다. 비록 안주인의 눈 밖에 나서 베란다로 내몰린 물건들이지만 겨울 한철엔 남편의 총애를 받던 스키장비는 그 안에서도 가장 좋은 자리에 제법 큰 터전을 잡고 앉아 새로 들어오는 물건들에게 텃새를 하며 좀처럼 자리를 내주지 않으려 한다. 남편과 함께 몸살 나도록 시원한 공기와 아름다운 잔디 위에서 호사를 누리며 뒹굴던 골프채와 공도 이젠 구석진 자리에 시무룩하게 앉아 있다. 몸보다도 마음이 앞서 하루도 놓치지 않고 운동을 하겠다며 눈앞에 두고 살았던 분홍색 아령도 퇴물이 되어 여행 가방 안에 호흡을 멈추고 있는 것도 보인다. 거기에 오늘은 서재를 뒤져 다 읽은 책이며 지나간 잡지까지 모두 끄집어 내 놓았다. 시어머님이나 친정엄마가 늘 쓰지도 않는 허드레 살림을 신주 모시듯 쌓아두고 하다 못 해 신문지 한 장과 구멍 난 비닐봉지까지도 버리지 않고 서랍가득 넣어둔 것을 보면 연륜을 쌓아온 분들만큼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어릴 때 외할머님 댁에 가면 안채와 떨어진 곳에 큰 자물쇠로 잠긴 "광"이라는 지금의 창고 같은 곳이 있었다. 어린 마음에 도대체 저곳엔 무엇이 있 길래 저렇게 큰 자물쇠를 채워둘까 싶어 궁금했는데 한 번은 할머니 따라 광에 들어가 보니 광 안에는 없는 것이 없었다. 그야말로 할머니만의 보물창고였다. 존재하는 것은 모두 나름의 가치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준 곳이었다. 솜씨 좋은 할머니와 젊은 날을 고스란히 같이 보낸 할머니의 분신 같은 앉은뱅이 재봉틀을 비롯하여 한번도 입지 않는 옷과 시집올 때 해오셨다던 옷감들, 아직 찧지도 않은 곡식들, 알이 촘촘히 박힌 육 쪽마늘, 제사를 지내고 나서 남은 음식들과 침을 담근 감항아리, 엿기름을 넣고 가마솥에 고을 때면 하루 종일 군침을 돌게 하던 호박 엿 등, 아까워 버리지 못하는 것들과 귀하게 여기시던 물건들이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도 가득했었다. 장례식을 마치고 할머니의 가시는 길에 같이 보내 드리려고 내 놓았다가 딸들이 다시 나누어 들고 오게 되었던 할머니의 애장품들은 내게 흔하다고 모두 천한 것이 아님을 말해 주려는 듯했다. "버리는 거 너무 좋아하지 말고 놔둬라, 돈 주고 산건데 나중엔 다 찾을 때가 있다"고 하신 어머님 말씀처럼 놓아두면 언젠가는 다 쓸 때가 있고 찾을 때가 있다는 말씀이 맞는 것 같다. 그 말씀 얼마만큼 유념하며 살아왔던가. 살다보면 한 번쯤은 꼭 필요하게 되니 말이다. 다시는 안 쓸 것 같아 베란다 구석에 넣어두고 잊어버렸던 아령을 어머님께 드리려고 며칠을 찾으며 화를 내던 남편 앞에 내놓으니 흐뭇해 입이 벌어진다. 쓰지도 않으면서 자리만 차지한다고 하나, 하나 끄집어 내놓았던 물건들이 반듯 반듯하게 다시 베란다 수납장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이리 저리 굴러다니다 맨 나중에 손에 잡힌 테니스공들도 안도의 숨을 쉬며 좁은 공간을 메우고 누어버린다. 버릴 요량으로 내놓았던 생각과는 달리 오늘도 우리 집 베란다는 넘치도록 차버렸다. 결국 아무것도 버리지는 못하고 자리만 바꾸어 정리한 셈이니 오늘밤엔 위치가 바뀐 물건들이 나 몰래 웅성이며 자리싸움이라도 벌일지 모를 일이다. 목에 걸린 가시처럼 베란다를 볼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았는데 깔끔하게 정리를 하고 나니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 든다. 베란다가 없었다면 이 많은 물건들을 어디다 두었을까. 오랜만에 정리를 하고 베란다에 서니 갖가지 추억과 상념들이 꼬리를 잇는다. 어떤 것은 막 결혼을 하고 나와 같이 신혼집을 꾸몄던 것들이라 내 뒷모습을 보는 듯하다. 집 안 구석구석 쌓아두어 먼지만 쌓였을 것을 생각하니 집 안에 없어서는 안 될 베란다처럼 우리의 마음속에도 이런 공간 하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큰맘 먹고 베란다 청소를 하면서 오늘 나는 내 마음 속에도 베란다 하나를 만들었다. 그리고 할머니가 채우신 곳간 열쇠처럼 아무도 들여다 볼 수 없도록 비밀번호도 만들었다.
아름다운 추억을 음미할 수 있는 마음의 빈터가 되어 주는 이 넉넉한 공간을 어찌 은총이라 아니할까. 새삼스레 내 삶의 어두운 편린들을 뜨거운 애정으로 보듬고 싶어진다. 나이가 들수록 부질없고 쓸데없는 생각들로 가슴이 아려올 때, 소매치기 당한 마음처럼 아릿한 통증들로 잠 못 이루는 밤이 많아진다. 올해 고등학교를 들어간 딸애의 진로와 몇 년 전 병고로 아쉽게 떠나신 아버님의 생각, 연세는 많지 않지만 거동이 불편하신 시어머님의 일도 내겐 풀리지 않는 숙제이다. 좀 더 높은 곳을 향하여 질주하다 값진 대가를 치르기도 하고 어른들 말씀처럼 삶은 녹록하지가 않았다. 이렇듯 별것도 아닌 일들이 가슴에 상처를 남기고 생활에 얼룩을 만들며 좀처럼 가슴 속에서 떠나려 하지 않아 밤을 지새우고, 예기치 않은 슬픈 일들이 나를 범람할 때마다 베란다가 마음의 반창고 같은 역할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세월은 누구에게나 지나간 시간을 되돌아 볼 수 있게 하는 선물이 아닌가. 별것도 아닌 그저 무미건조한 일들도 내 마음 속 베란다에 저장이 되어 먼 훗날 아름다운 기억으로 되돌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인간에게 있어 기억이란 것이 없다면 어제의 나는 없고 늘 오늘뿐인 인생이 리라. 그렇게 생각하면 기억할 수 있는 뇌를 가진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지금 당장은 기억하고 싶지 않고 괴로운 일들이지만 거짓말처럼 많은 세월이 흐른 후 가끔씩 기억의 필터를 열어보면 지금 나에게 일어났던 일들이 나중에 어떻게 각인되어 있을까. 살아가다 잠시 필요해 베란다를 뒤져 보듯 내 마음을 방문 했을 때 지금은 씁쓸한 일들도 세월과 함께 여과되어 추억이란 소중한 이름으로 디자인되어 있을 것 같다. 기억의 필터에 끼인 먼지를 열심히 문질러 닦다 보면, 어느새 내 얼굴도 이슬 머금은 새벽의 화초처럼 윤기를 띠겠지. 이 모두가 내 마음 속 추억의 장소를 만나 볼 수 있는 베란다를 벗할 수 있는 덕이 아닐까싶다. ◇ 박종희 프로필 충북 출생. 現 KT 근무 월간문학세계 등단(2000년) 충북여성문인협회 사무국장 충북수필문학회 회원 청주문인협회 회원 제천문학회 회원 |
첫댓글 전에도 읽었었는데. 다시 읽어보니 또다른 색다른 느낌이 드네요. 늘 박선생님의 조용한 성품의 목소리로 다정하게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서울 잘 다녀오셨는지요? 오늘도 날이 참 좋네요. 갑자기 연락받고 동인지에 실었던 글을 여러군데 수정을 했어요. 급하게 수정해서 아직 어색한 부분이 눈에 띄네요. 주일 잘 보내세요.
박선생님, 회장님 말씀이 맞아요. 다시 한번 작품을 읽어보니 그 조용한 울림이 전해지네요. 좋은 작품을 만난 많은 독자들이 좋아할 거에요.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