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군의 참전과 서울의 재함락
10월 1일 국군이 38선을 넘었다.
10월 19일 국군 제1사단이 평양에 입성했고 압록강과 두만강을 향해 국군과 미군, 유엔군이 거의 무질서하다 싶을 정도로 북한군 패잔병을 쫓아 북진에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평양 입성과 같은 날에 중국군이 압록강을 넘었다. 그들은 연합군을 더욱 깊숙이 북쪽으로 끌어들었고 한반도의 중앙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낭림산맥에 은신했다.
10월 26일 국군 제6사단 제7연대가 압록강변의 초산에 이르러 수통에 강물을 담아 이승만에게 보내면서 통일이 눈앞에 온 듯했다. 하지만 곧 중국군은 연합군의 무질서한 북진으로 벌어진 틈으로 침투해 각개격파에 나섰고, 장진호의 미 1해병사단을 제외한 다른 부대들은 연전연패를 당해 북진 속도 못지않게 빠른 속도로 남쪽으로 도망쳐야 했다.
12월 말, 연합군은 38선 일대까지 밀려났고, 설상가상으로 8군 사령관 워커까지 어이없는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워커의 후임자는 2차 세계대전 때 미 육군의 최정예부대인 제82공수사단장으로 용명을 날린 매슈 리지웨이 중장이었다.
12월 26일 서둘러 짐을 꾸려 한국에 도착한 리지웨이는 미군과 국군, 유엔군의 사기가 형편없이 떨어진 것을 보고 크게 실망했다. 그는 수류탄 2개를 양쪽 가슴에 차고 다니며 병사들 사기를 높이려 애썼지만, 중국군의 개입으로 서울을 지킬 수 있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
12월 31일, 약 열흘 전에 조용하게 사라졌던 중국군은 석양 무렵 전 전선에서 대대적인 포격을 가하며 대공세에 나섰다. 패잔병으로 전락한 북한군 역시 놀라운 속도로 군단 규모로 재건되어 공세에 참가했다.
1951년 1월 1일 중국군 제50군의 주력이 38선을 넘어 임진강에 당도했고 2일에는 문산으로 밀고 들어왔다. 그날, 제50군의 일부와 제39군은 고랑포(연천군 장남면의 임진강변)의 국군 제1사단과 동두천의 제6사단을 덮쳤다.
중국군 40군의 선봉은 1950년 12월 31일 18시 30분 임진강을 건넌 후 1951년 1월 1일 동두천 서쪽 안흥리에서 제6사단의 퇴로를 차단하려 했다. 중국군 제38군은 포천의 미 제24사단을, 중국군 제42군은 가평을 지키고 있던 국군 2사단을 맹타했다. 춘천에서도 북한군과 중국군의 대부대가 남진을 시작했다.
미 제1사단은 고랑포와 적성(파주시 적성면)에서 집중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법원리로 후퇴했다. 중국군의 공격을 정면으로 받은 건 아니지만 측면이 노출된 미 제25사단은 서둘러 김포 쪽으로 후퇴했다. 노르망디에도 상륙한바 있던 영국 29여단은 크롬웰전차 11대를 버리고 고양에서 서울 쪽으로 후퇴했고 대대장 한 명이 포로가 되었다. 몇 시간은 잘 버텼던 제6사단과 미 제24사단은 동두천에서 덕정(양주시 덕정동)으로 밀려났다가 일부는 한강변까지 후퇴했다. 춘천의 국군도 홍천과 횡성으로 퇴각했다.
서울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리지웨이 장군은 전황을 알아보기 위해 고양 방면으로 떠났지만 얼마 가지도 못하고 패잔병들의 행렬 때문에 나아갈 수가 없었다. 리지웨이는 권총을 하늘에 쏘며 철수를 저지하려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미 제1기병사단은 사령부를 녹번동(은평구 소재)로 옮긴 상태였다. 일단 서울로 돌아온 그는 이승만과 함께 연락기를 타고 의정부로 가서 다시 전황을 살피고 병사들을 격려했지만 희망적인 조짐은 보이지 않았다. 중국군은 회룡(의정부시 소재) 부근까지 진출해 있었다. 이제 리지웨이는 서울을 사수하느냐 후방으로 내려가 후일을 도모하느냐 양자택일을 해야 했다.
1월 2일 전선은 현재의 서울-경기도 경계와 거의 비슷했다. 중국군은 활처럼 서울을 포위한 상태였다. 리지웨이는 수백 대의 전차와 상당수의 야포를 보유한 10개 연대를 서울 외곽에 배치하고, 근접 항공 지원과 장거리 함포사격을 결합해 서울을 지킬 계획을 검토했다. 이렇게 하면 중국군에게 막대한 타격을 입힐 수 있었다. 하지만 낮은 사기와 중국군의 기세를 감안하면 성공하기 쉽지 않았고, 잘못하면 미 8군의 주력이 무너질 우려도 있었다. 결국 환도식이 열린 지 백일도 되지 않아 맥아더는 후퇴명령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