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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카락 흰 서리를 새롭게 만나며
강병철
나는 때리지 못한다. 78-80년 한탄강 군대 막사에서 고참들에게 무차별 몸세례를 받으면서 쫄병에게 기합 한번 주지 못했으며 수십 년 교단의 곡절 속에서도 결국은 아이들에게 손을 대지 못했다. 그렇다고 비체벌 행위에 대한 휴머니즘을 내세우는 스타일은 아니다. 천태만상 교실 탓으로 돌리는 건 더욱 아니지만 가끔은 ‘쟤는 한번 손을 봐야 정신을 차릴 텐데’ 하며 몇 차례 벼른 적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못 때렸던 이유는 천성적으로 심약하기 때문이요 또 하나는 체벌 행위에 대한 ‘가해자적 굴욕감’을 감당하기가 싫어서 실행에 옮기지 않았을 뿐이다. 가끔 반듯반듯한 바둑판 교실을 꿈꾸는 마초 스타일 동료들이.
“선생님 교육관 때문에 내 수업이 힘들어집니다요. 잉. 제발 때리쇼.”
하지만 그건 교육적 가치관이 아니라 타고난 체질이다. 각종 공구를 동원하여 조립식으로 짜맞춰진 몸의 행태는 바꿀 수 있을지 몰라도 몸 안에서 태생적으로 이어진 수맥의 흐름은 바꿀 수 없다.
그렇다고 악동들이 우유부단한 교사의 심정을 어엿비 감싸면서 너그럽고 넉넉한 공동체를 이루었던 것도 전혀 아니다. 위기일발의 난장 수업 풍토는 내가 평생 감당해야 할 업보였다. 아이들은 군대 쫄병들과 달리 아직 성장기인지라 만만한 선생을 골라 끊임없이 ‘막힌 숨통 틔우기’를 시도한다. 그랬다. 과시용으로 의자를 박차거나 사소한 일에도 돌발적으로 식식대면서 아이들은 호박덩쿨처럼 무럭무럭 자랐다.
실제로 다른 선생님들에 의해 내 교실까지 평정되기도 했는데 그런 물리력에 의한 길들여짐을 지켜보는 건 쓸쓸한 일이었다. 혼수상태로 바글대던 나의 교실이 노크 소리와 함께 호랑이 얼굴이 등장하자마자 부동자세로 반짝 변하기도 했고 하이에나처럼 크르렁대던 반항아가 몽둥이 임자를 만나면 무르팍으로 교무실 바닥을 박박 기어다니기도 했다.
아주 오래된 관성이었다. 나의 학창 시절, (순둥이 선생님도 있긴 했지만) 대개의 선생님들은 열악한 교실 환경을 매타작으로 해결하려 하셨다. 우리들은 손바닥, 엉덩이, 싸대기까지 아예 내놓고 다녔었다. 떠들거나 도망치거나 훔치거나 납입금을 못내거나 준비물을 챙기지 못했다는 이유로 엉덩이나 허벅지가 불이 나곤 했다. 방법도 다양했다. 자기 뺨을 자기가 때리게도 시켰고 친구끼리 마주보며 서로 싸대기를 때리게도 시켰다. 그뿐이 아니었다. 선배들뿐만 아니라 동급생끼리도 맞고 때리는 먹이사슬 구조가 얽혀 있었다. 반장은 떠드는 아이들에게 막대기를 휘둘렀고(주로 약한 아이들에게만) 선도부는 복장 불량이라며 교문에서 낚아채기도 했고 이도저도 아닌 애들한테도 단지 힘이 약하다는 이유로 동네북이나 심부름꾼이 되었다.(요즘 표현으로 ‘왕따’나 ‘빵셔틀’이랄까.) 그리고 세월이 흘러서 매 맞은 기억은 상처가 되기도 하고 그냥 쓰뭉하게 지워지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2010년 여름 교육계 이슈 중의 하나인 ‘체벌 금지법’을 보며 만감이 교차한다. 얼마 전(2010.8)이었던가. 진보 성향으로 서울시 교육청의 수장이 된 전직 곽노현 교수가 체벌의 후진성과 새로운 교육 패러다임을 설법하자 강연을 듣던 교장님의 일부가 항명성 퇴장을 시도했다 한다. (강연이 끝난 후의 상황이지만) 상급 관청의 지향점을 교육 관료들이 거부한 아이러니 현상에 대해 보수 신문들은 일제히 깨소금 카드를 뽑아들었다.
예전에는 그런 풍경이 주로 반대의 경우로 나타났었다. 80년대 중반쯤, 보수 논객들의 강의 도중 젊은 교사들이 반발성 질의를 하거나 항의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보수 논객들은 ‘문제 교사’를 징계해야 한다며 부지깽이를 쑤셔대었고 실제로 교사들이 징계를 받기도 했다. 그 후 세월이 흘렀고, 이례적 상황에 거꾸로 부채질하는 인쇄물 사태를 보며 뜨악해하는 것이다.
또 있다. 이번에는 교장님이 선생님들을 회초리로 때린 사건이다. (오마이뉴스2010.9.16)교장님이 학생들 앞에서 선생님들을 바닥에 엎드리게 해서 명찰을 달지 않은 학생 수만큼 때렸다니 ‘야만적’이란 수식어조차 먹해진다. 그 중에는 여교사도 두 명 포함되어 있었다고 하니 이런 ‘말도 아니고 막걸리도 아닌’ 게 소위 체벌 해결론자의 인성교육이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역사의 나선형 진보가 순리인 것 같지만 수시로 예상 가능한 암초가 돌발 지뢰처럼 표출되는 것이다. 틈입자의 관성에 우리들의 공든 탑은 언제든지 ‘거꾸로 도는 시계추’를 만날 수도 있고.
나는 점수를 별로 올리지 못한다.
단지 자아도취형 칠판쟁이 유전자를 타고나서 즐거웠을 뿐이다. 그랬다. 첫 발령지였던 소도시의 여자고등학교에서 나는 단가 높은 총각 선생이었다. 발령장 들고 교문을 들어설 때 앞치마와 청소 모자를 쓰고 교정에 몰려다니던 수수꽃다리 소녀들의 모습이 가슴을 뭉클하게했다. 차임벨이 울리자 빗자루 든 소녀들이 총총총 계단을 밟더니 그림자처럼 사라졌다. 아름다웠다. 청년 교사는 운동장에 몸을 묻겠다고 결심하며 몇 가지 원칙을 정했다.
‘참교육에 목을 건다.’ ‘죽어도 때리지 않는다.’ ‘낮에 읽고 밤에 쓴다.’ ‘민족을 위해 몸을 바친다.’ 그렇게 벽보처럼 붙여놓고 지성껏 다리미질했다.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위하여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청사진을 날마다 그렸다가 지우며 행복에 취할 뻔했다.
하지만 인문계 시스템이 모두 그랬듯 건물 구조는 복잡다기했다. 학교는 꽉 짜여진 ‘일사분란’에서 볼펜심 하나 들어갈 틈을 주지 않았다. 주로 보충수업과 야간자습과 우열반과 합숙소까지 감당하다가 점심시간 중간체조 시간에 늦게 집합했다는 게 이유였다. 운동장에 오그르르 모인 천사들이 선글라스와 호루라기의 신호 따라 오리가 되고 수레바퀴가 되었고 가끔씩은 알타리무 종아리에 시퍼런 반점이 생기기도 했다.
‘대학 가서 미팅 할래 공장 가서 미싱 탈래’
어느 게시판 액자에 실렸다는 대구법 문장 때문에 노기가 서렸던 즈음이다. 설왕설래 여부를 떠나서 구조적으로도 불가능한 얘기였다. 80년대 중반 대학 진학 비율이 25% 수준이었으므로 나머지는 이탈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경제력이건 성적이건 대학 진학을 포기한 아이들도 보충 수업과 야간자습의 급류에 쳇바퀴처럼 적응해야 했다. 그 사제동행 학습 집중 작전은 고혈을 쥐어짜는 한계력의 시험대였지만 심약한 교사는 ‘스스로의 이중성’을 자책하며 속으로만 낑낑 앓았다. 그 폭폭한 가슴으로 글쓰기를 시작한 게 그나마 다행이었는데.
그러다가 어느 무크지에 소설을 게재했다는 이유로 학교를 쫓겨났다. 돌발적 괴물이 브라운관에 올라 빵빠레를 터뜨리는 바람에 구경꾼들이 바싹 오그라들면서 고개를 조아렸다. 그 날벼락을 해석할 수 없었다. ‘지방 대학을 졸업한 청년이 사립학교에 취직을 하려다가 금품이 오고가는 모습을 보고 회의를 느껴 교직을 포기함’이란 게 당시 ‘ㅈ일보’에 실린 게 해직 죄목(85.8.12)의 전부다. 당대 관료들로부터 ‘소설의 내용이 허위 사실이고 그런 허위 사실 유포로 인하여 국론이 분열되면 적을 이롭게 하기 때문에 이적 행위가 된다.’는 공허한 해몽만 솛도록 들었을 뿐이다. 그해 여름. 말로만 듣던 신새벽 초인종 소리와 함께 호송차에 실렸다.
사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남보다 늦게 광주를 만났다. (80년 여름까지 군대에 있었다.) 골방에서 틀어주는 비디오 화면과의 첫 만남에서 나는 절망하고 자해했다. 계엄군들이 트럭에서 내리자마자 시가지를 거침없이 돌진하면서 장발족 청년들을 곤봉이나 개머리판을 뒤흔드는 영상이었다. 총성과 돌멩이, 사망자와 부상자의 혼돈 속에서 광주는 ‘군중의 분노와 군중의 질서’를 동시에 감당하는 중이었다. 리어카에 실린 시체와 태극기 덮인 망자의 관 사태에서 ‘폭력과 정당 방위’란 단어가 선명하게 대비되기 시작했다. 늦깎이 청년은 깨어있는 영혼이 되고자 했다. ‘삶의 문학’ 선배들을 만나 ‘김대중 옥중서신’이나 ‘전태일 평전’ 그리고 ‘신동엽의 시’를 만났다. 식민지 시대의 독립투사를 오버랩시키며 조금은 들뜬 마음도 있었던 것 같다.
어느 날 눈을 떴는데 내 몸의 색깔이 바뀌었다든가. 그 경력이 몇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력서로 붙어 다니는 중이다. 그래도 이웃들의 반복적 물음에 지성을 다하여 해명하며 공중파와 지상파에 대응했다. 어려웠다. 아니라고 실상을 얘기해주면 그게 빨갱이 수법이란다. 인간의 실체는 얼마나 다양한 객체로 세분화될 수 있는 것일까? 옷 색깔이나 눈빛까지 빨갛게 규정하는 보수 언론 직수입자들에게도 논리적 설득을 포기하면 안 되는 거였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해본다. ‘민중교육 당신의 자녀를 노리고 있다.’며 착한 교사들의 가슴에 못을 박던 브라운관 제작팀들은 지금쯤 어떤 표정으로 쓸쓸하게 쇠어갈까 하고.
그랬다. 고즈넉함을 깨우는 새벽 초인종 소리에 자벌레처럼 벌떡 일어섰었다. 끌려가는 와중에 가장 두려웠던 것은 물리적 공포에 대한 기우 같은 예감이었다. 벗들의 체험담이 몸에 익은 상태였고 ‘고문기술자’ ‘포승줄’ 그런 단어에 대한 가위눌림으로 새벽잠 화들짝 깨던 시국이다. 후일담이지만 몇몇 동료 교사들과 달리 나는 물리적 고초가 없었으며 오히려 깍듯한 대우를 받으며 조서를 받았다.
-깡패나 사기꾼도 아니고 ‘민중’이란 단어 조사는 처음이요.
경찰서 직원의 소박한 고백을 들으며 적이 안심했지만 이박삼일 조서가 끝나던 저물녘 나는 학교를 쫓겨났다. 소도시 운동장으로 땅거미가 시커멓게 덮어버렸고 나 혼자 우울히 서 있었다.
그런 풍경이 있었다. 담쟁이 넝쿨이 담벼락을 푸른 색 보자기로 폭싹 덮어버린 여름의 뒤끝이었고 매미 소리 쟁쟁히 울리던 개학날 아침이었다. 나는 쫓겨난 몸이 되어 이삿짐 리어커를 밀다가 담벼락 너머로 새로 오신 선생님의 부임 인사를 들어야 했다.
‘초롱초롱한 눈망울들을 새롭게 만나니 가슴이 떨립니다. 여러분들의 아름다운 학창 시절을 도와주는 좋은 선생님이 되겠습니다.’
청각의 시각화.
마이크 소리가 물수제비처럼 둥그렇게 퍼진다는 사실을 체득하면서 울멍울멍 수십 편의 시를 쓰기도 했다.
늪 속에 빠졌다. 구들장에 등 붙이면 천장으로 지렁이의 맨살이 퍼렇게 떠오르기도 했다. 지하 공간은 암흑이었다. 그리고 두더지와의 싸움에서 머리통을 제압당한 지렁이의 가련한 몸부림이 투영되는 것이다. 두더지는 지렁이를 먹잇감으로 비축하기 위해 발목을 들어 머리를 으깨버린다. 지렁이는 앞으로 나아갈 동력을 상실했으므로 박살난 머리를 축으로 해서 동그랗게 원을 그리며 뺑뺑이를 돌 뿐이다. 그 수렁을 벗어나기 위해 어금니 갈다가 에너지 불쑥 치솟는 주먹을 쥐어보았다. 고지를 넘으면 ‘국밥과 희망의 공동체’가 잡힐 것도 같았다. ‘해직 동료’들과 ‘두고 떠나온 소녀’들이 오래도록 지켜줘서 사랑의 눈을 각인하기도 했다.
해직 이후 학원 강사로 입문하면서 가학적 수준의 수업 분량을 감당하면서 다시 칠판 앞에 존재함만으로 안도했다. 체질만큼은 천상 선생이었다. 숟가락 들다가 옷걸이에 걸린 양복 소매 끝의 분필자국을 보고 ‘내가 지금도 선생이구나’ 위로하며 히죽히죽 웃기도 했다. 포장마차에서 튀김을 먹던 검정고시생들이 일열횡대로 쪼르르 고개 숙일 때 아스팔트로 쏟아지는 머리카락 그림자를 떠올리며 정체성을 다듬었다. 그랬다. 나는 자다가도 부스스 일어나서 분필을 만지면서 종소리 젖어있는 운동장 풍경을 그려보곤 했다.
시내버스 10분 거리의 검정고시학원과 대입학원 두 개를 동시에 직장으로 택했는데 차비를 아끼기 위해 아예 걸어다녔다. 검정고시 학원 수업이 일단락되면 대전 중앙통을 통과하여 대입학원 수업 종소리를 맞춰 간신히 입실했고 거기서 수업이 끝나면 다시 검정고시학원 야간반 입실을 위해 총총 옮겨야 하는 주당 오십 시간의 상황을 잘도 견뎌내었다. 학원은 업무보다 수업 폭탄의 비중이 더 컸는데 오히려 그게 다행이었다. 수업에 몰입하면 잠시라도 고단함을 잊을 수 있었으므로.
식물성 이미지.
검정고시생들은 수시로 붙박이 나무가 되었다. 경로당 쪽에서 딱 한 그루 쭈욱 삐져나온 느티나무. 우리들은 먼 훗날 느티나무 커다란 그늘 자락을 꿈꾸며 까무라치는 형광등 불빛을 지켜보곤 했다.
- 선생님 속세가 뭐지요.
표정을 열지 않는 복희씨가 노천명의 ‘사슴’에서 슬그머니 손을 들면서 딸꾹질이다. ‘공장에서 미싱 타는’ 복희씨는 ‘대학 가도 미팅을 못하는’ 나이 삼십 아낙네다. 딸꾹질 소리와 민망한 질문이 겹치면서도 그녀는 인내심으로 내 입술을 쳐다본다.
- 속세요.
목이 메어 아무 말도 던질 수 없었다. 담벼락 너머 정규학교 야간 자습 불빛을 바라보면서 사실 다음 문장도 조금은 생각해 봤었다.
‘시인의 세상과 우리들의 세상은 다를 수도 있습니다.’
우물쭈물 입술만 옹무는데.
- 속세가 나쁜 건가요.
되묻는다. 아니다, 아니라고 부인하지 못했다. ‘노동을 끝내고 부나비처럼 모여있는 바로 이 자리입니다. 후끈한 거름 모아 채마밭 기름 지우는 우리들의 자리가 바로 속셉니다.’ 라고 말하지도 못했다. 바보같이.
그 검정고시 학원생들도 나에게 몽둥이를 갖다 주어서 난감했었다. 국어 선생은 수업 중에도 사도와 예의 범절을 가르쳐야 하며 그 매개체가 몽둥이라고 손수 가르쳐 주었다. 실제로 학원 선생님들 중에는 스무 살 넘은 성인들에게 매를 댄 적도 있었고 성인이 된 그네들도 배운다는 명목으로 기꺼이 따라주었다. 어지럽다.
‘ㄷ신문사’ 비정규직으로 몸을 옮기면서 시국은 막바지로 수상해졌다. 그해 1월, 박종철군이 죽었다. 당시 서울대 언어학과 1학년생인 박종철군이 남영동 대공실에 끌려가 무차별 심문을 받는 과정에서 물고문을 당한 채 숨을 거둔 사건이다. 처음에는 그냥 ‘탁’하고 치니까 ‘억’하고 죽었다고 했다. ‘ㅎ신문’ 사설에서는 “왜 아픈 시국을 만나 이 땅의 젊은이가 밤새도록 울분의 술을 마셔야 하며 왜 분노한 형사가 책상을 ‘탁’ 쳐서 ‘억’하고 죽게 만들었냐.”며 엉뚱한 물타기를 시도했다.
헤어지기 위한 사람들이 끼리끼리 모여 강가에 서성거렸다. 그니의 아버지가 재가 된 아들의 몸을 강물에 뿌리며.
‘종철아 잘 가그래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대이.’
흐느껴서 배웅 나온 민초들이 합창으로 꺼이꺼이 울었다. 가랑잎으로 남은 청년이 이따금 물거품을 햇살 위로 올려보냈고 남은 사람들은 그 사내 이름을 불러내며 소줏잔을 비웠다. 강 건너 물푸레나무 잔가지로 펼쳐진 그니의 흰이빨이 너는 살아있다고 우느냐며 낄낄대었던가. 나는 가끔 아무데서나 ‘강변에서’ ‘기지촌’ 같은 김민기 노래를 부르면서 가슴을 누르곤 했다. 기십 년 전 일이다.
세월이 흘렀고 세상은 무시무시하게 바뀌었다. 시인 박노해가 출옥 후 ‘핸드폰의 등장’을 보고 가장 놀랐다는 고백처럼 세상이 변한 것이다. 오늘날 학교 사회에서의 체벌 문제는 영화 ‘친구’나 ‘말죽거리 잔혹사’의 같은 그런 과장된 실루엣류(類)는 아니다. 오히려 선생님들이 당하기도 한다. 나이를 먹으면서 물리적으로 유리한 고지에 이른 아이들이 점차 버거워진다. 그러거나 말거나 장년의 평교사들은 교실의 변혁을 기꺼이 감당해야 하므로 ‘나이를 먹을수록 힘이 더 세어지는 세상은 없을까’ 하는 망상에 빠지기도 한다. 운명이다.
나중 얘기지만.
기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예전의 제자들과 만남의 자리를 갖기도 한다. 때까치처럼 재잘대던 단발머리 소녀들이 사십대 중반의 아줌마가 되어 수탉처럼 구구거리며 소주잔을 건네받는다. 가끔 이렇게 꿈결에 취해 잠들고 싶다. 그러다가 예전의 ‘매 맞던 교정’을 화들짝 들이밀면 잠시나마 아늑했던 가슴이 철렁 내려앉기도 한다.
“그때 여고생들이 왜 그렇게 맞아야 했지요?”
어느 새 재단사나 미용사가 되고 파출소장이나 동사무소 공무원이 된 그 옛날 소녀들이 젓가락으로 깻잎전을 들다가 불쑥 묻는다.
“선생님은 말고.”
마트 주인이나 장학사가 된 제자들이 막아주면 안도의 표정을 짓기도 하지만 때로는 지나간 기억들이 찢겨진 그물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사랑과 절망의 곡예에 빠지다 보니 어느 새 머리칼에 하얀 서리가 내렸다. 오십대 중반에 진입하면서 벗들은 더러 교장이 되었고 더러는 명퇴를 신청해서 교단을 떠났고 나는 평교사 정년 퇴임을 꿈꾸며 칠판 앞에 서 있다. 첫 발령 때 제자들의 아들딸들이 칠판 아래서 예전의 그 먹머루 눈빛을 반짝이고 있던가.
그게 ‘묵은 교사의 노래’였노라고 이제사 실감한다. 그렇다. 이빨이 흔들리고 등이 굽는 몸의 변화를 새로운 에너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표현할 수 없다. 해마다 첫 수업이 찾아오지만 장년의 평교사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고백하는 체질이 못된다. ‘의자를 넘겨줄 때까지 세상을 참견하며 몸으로 때우겠다.’라고 토로하지 못한다. 그저 첫 사랑을 놓치지 않기 위해 혼자서 운동화끈을 매는 중이다. 미안하다.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