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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 추억을 돌아보며
최 계 선
나의 출생과 초등학교 시절
내가 태어나 자란 고향은 성춘향과 이도령의 러브스토리로 유명한 춘향골 남원이다.
나의 엄마는 엄마나이 5살 되던 해 엄마의 엄마(외할머니)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한다. 위로는 언니(큰이모)가 있었고, 후에 새어머니(현재의 외할머니)가 들어오셔 낳으신 7남매의 동생을 모두 엎어서 키웠다 했다. 그리고 엄마는 시집을 왔고, 시어머니는 엄마를 예뻐해 주셔서, 친정엄마처럼 의지했다고 하셨다. 시집 온 지 3년이 되도록 아이소식이 없어 걱정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꿈에서 친구들과 산으로 들로 놀러 다니고 있는데, 주변사람들이 하늘을 손으로 가리키며 우르르 산으로 올라가더란다. 그래서 인파에 섞여 나지막한 뒷산에 올라갔다 한다. 사람들이 바라보던 장면은 온통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해가 땅으로 땅으로 내려오고 있었단다. 그리고 그 빨간 해가 엄마가 있는 쪽으로 낙하 하길래 엄마는 순간 재빠르게 해를 치마폭으로 받았다 한다. 엄마는 너무나 어리둥절하고 신기해하며 치마폭의 해를 고히 품고 집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그게 나의 태몽이란다. 그렇게 고대하던 첫아이는 범상치 않은 태몽을 꾸고 주위의 관심과 기대 속에서 태어났다.
아들이 아니어서 아쉬움은 조금 있었지만, 귀한 딸을 위해 좋은 이름을 지어주고 싶어 부모님은 작명소에 가셨다고 한다. 훗날 나는 내 이름이 발음하기도 어렵고, 여자 이름으로는 예쁘지도 않다고 투덜거리며, 이름을 바꾸고 싶다고 항의를 했다. 부모님도 어찌 예쁜 이름을 지어주고 싶지 않으셨겠는가! 작명소에서 나온 내 이름이 맘에 들지 않아, 또 다른 작명소에 갔다고 하셨다. 하지만 이번에도 같은 이름이 나오더란다. 두 군데 작명소에서 나온 아이의 이름은 그렇게 심사숙고 끝에 내게 숙명처럼 붙여졌다.
엄마는 내가 어려서부터 말귀를 잘 알아들어, 천방지축인 아이들과는 사뭇 달랐다고 늘 말씀하셨다. 3살짜리 아이인 나를 집에 놓고 잠깐 바깥일을 보고 오셔도, 엄마가 있으라고 말한 그 방안에서 꼼짝 않고 있었다고 한다. 첫아이에 대한 부모님의 사랑과 애정은 그 시절 흔하지 않은 유모차를 태워 읍내 마실을 나가면 이웃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었다고 했다. 이름을 작명하면서 내 사주는 공부를 무척 좋아하고 잘할 거라 했고, 성장기 조심할 주의사항까지 알려줬다 한다.
그 사주풀이 그대로 나는 밖에서 뛰어노는 것보다 집안에서 책을 끼고 지냈다. 그래서 나는 내 나이 또래가 했던 고무줄놀이 등을 해본 기억이 없다.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부터 엄마와 학습지를 풀었고 그때부터 공부하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도 공부 잘하고, 부모님의 간섭이 없이도 자신의 일을 스스로 해결하는 자립심이 강하고, 똘똘한 아이로 자라는 나를 부모님은 늘 자랑거리로 생각하셨다.
내 아래로 동생들이 태어나고, 여기 저기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난리 속에서도 방바닥에 엎어져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이런 나에 대해 엄마는 평생 동안 단 한 번도 큰딸에게 일어나라고 깨워본 적 없고, 공부하라고 말해본적 없다고 칭찬하셨다.
간절한 그리움이 기적으로
중학교 시절 내가 무척 좋아했던 선생님이 계셨다. 지금은 그분의 얼굴도 가물가물 흐릿해졌지만 내 어린 시절의 기적 같은 일 중에 한 장면으로 기억되는 주인공이시다.
그분은 음악선생님으로 중학교 1학년, 2학년 담임이셨고, 여성분이셨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음악시간, 노래 부르기가 제일 어려운 일중에 하나였다. 그런 내가 음악선생님을 좋아했던 것은 음악선생님 이셨음에도 불구하고, 내 눈에 비친 선생님은 공부를 좋아하고, 무척 박식한 분이셨다.
학교수업 일과가 끝나면, 우리반 친구들을 모두 책상위에 올라가서 무릎을 꿇고, 눈을 감게 하시고, 그날 수업시간에 있었던 교과목의 퀴즈를 내셨다. 특히 국사과목이 퀴즈내기에 좋으셨던지 역사문제는 단골 메뉴였다. 퀴즈를 맞춘 학생만 하교를 할 수 있었고, 못 맞춘 친구들은 교실청소를 하게 하셨다. 이 시간을 싫어했을 친구들도 있었겠지만, 나는 담임선생님으로서 직접 교과목을 챙기시는 열정과 카리스마를 존경하게 되었다.
중학교 2학년 수학여행 철이 되었다. 배를 타고 제주도를 가는 여행 일정이었는데 나는 수학여행을 가지 못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가 아니었다. 그 옛날 내가 태어나 이름을 지어줄 때, 내 사주에 15, 16세에 먼 길을 가면 화를 당할 수 있다는 사주풀이 때문에 엄마는 수학여행을 가지 못하게 하셨다.
나는 그런 미신 같은 이야기를 어떻게 담임선생님께 얘기해야 할지 창피함이 앞섰다. 수학여행 불참자에 손을 들고, 선생님이 교무실로 불렀다. 선생님은 내가 못가는 이유를 궁금해 하셨고, 나는 “엄마가 못 가게 하세요. 그 이유는,,.” 머뭇머뭇 망설였다.
“제 사주에 이 시기에 먼 길을 가면 크게 다친 데요”
갑자기 교무실은 웃음바다가 됐고, 나는 얼굴이 붉어졌다.
하지만 정작 담임선생님은 너무나 진지하게 내 어깨를 토닥이며, “그랬구나. 그러면 위험한 모험을 할 수는 없지…….” 하시며 나의 창피함을 감싸주셨다.
그렇게 다른 아이들은 수학여행을 떠난 동안, 학교에 남은 몇 명의 아이들과 반공영화를 보며, 반나절을 학교에서 보냈다.
음악선생님과 함께한 1, 2학년이 가고, 고등학교 입시 준비로 바쁜 3학년이 됐고, 학교에서 오며 가며 음악선생님을 뵐 수 있었다.
중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3학년을 대상으로한‘고교입시 특별관리반’10명에 선발되어 교장실에서 공부하는 그룹이 되었다. 그 시절 만 해도 여름철 냉방시설이 시원찮았던 때로, 우리는 시원한 교장선생님 집무실에서 공부하는 특혜를 받았던 것이다. 그 해 여름은 나에게 자부심과 뿌듯함을 안겨주며 빠르게 지나갔다.
학교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집에 오면, 나는 가방을 놓고 다시 독서실로 향했다. 하지만 독서실에서는 열심히 공부했던 기억보다는 휴게실처럼 마련된 간이주방에서 친구들과 라면을 끓여먹고, 좁은 독서실 바닥에서 잤던 기억이 더 많다. 그리고 새벽이 되면, 다시 집으로 돌아와 등교 준비를 하던 그 시절은 내 삶의 기조인 근면, 성실 그 자체였다.
3학년 가을, 선생님이 결혼한다는 소식과 함께 학교를 떠나신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고, 교정에서 더는 선생님과 우연하게라도 마주쳐지지 않았다. 선생님을 보지 못한 시간들이 하루, 이틀, 그리고 며칠씩 늘어갔다. 숫기가 없던 때라 선생님께 제대로 작별인사도 못 드렸는데 더는 선생님을 볼 수 없다는 생각을 하니 너무나 그리웠다. 나는 선생님을 다시 한 번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고 또 빌었다.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마친 늦가을, 나의 간절한 바램이 기적처럼 내 눈앞에 나타났다.
입시도 끝나고, 겨울 방학이 얼마 남지 않은 스산한 가을 오후, 나는 교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그렇게 뵙고 싶었던 음악선생님이 그곳에 계셨다. 나는 너무나 놀랍고 반가움에 눈물이 핑 돌았다. 울먹울먹 선생님을 부르며, 뛰어 들어갔다. 나는 그날의 우연한 해후를 감히 기적이라고 떠올릴 정도로 감격스러웠다. 나는 선생님께 잘 가시라는 작별인사를 할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그 후 선생님을 다시 보지는 못했지만, 선생님의 부드러운 카리스마는 영원한 나의 롤모델이시다.
선생님과의 마지막 만남 이후에도 누군가를 향한 간절한 그리움과 바램은 기적같이 이루어졌고, 그래서 난 항상‘간절함은 이루어진다’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남원에서 전주로 유학
4남매의 맏이였던 나는 교육열이 높으신 젊은 부모님 덕에 고등학교는 남원에서 전주로 유학을 가게 됐다.
그 당시 완행버스 교통편으로, 남원과 전주는 2시간 거리였으며, 부모님은 공부 잘 하는 큰딸의 입신을 위해, 큰 도시에서 공부하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다.
도시로의 유학 프로젝트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진행되었다. 부모님은 내가 4학년이 되면 서울로 전학을 시켜, 서울에서 공부를 시킬 계획이셨다. 그래서 나는 초등학교 시절, 방학을 하면 으레 서울에 사시는 큰 이모님 댁에서 서울 적응훈련을 위한 방학생활을 보냈다. 이모님 댁에는 사촌오빠, 나와 같은 나이의 사촌누이, 그리고 사촌동생이 있었다. 시골아이인 나는 방학동안 서울물을 먹고, 개학을 하면 남원으로 내려왔다.
그렇게 전학이 계획된 4학년이 다가왔다. 그런데 서울 이모부께서 갑자기 몸이 편찮아 지셨고 간암 판정을 받으셨다.
엄마의 형제는 구남매였다. 하지만, 큰이모와 엄마를 낳으신 외할머니는 엄마가 어렸을 때 일찍 돌아가셨다 한다. 그래서 큰이모와 엄마의 우애는 남달랐다. 암에 좋다는 식품과 민간요법을 부지런히 구해서, 큰형부의 병구완을 위해 이제는 엄마가 서울에 자주 다니셨다. 자상하고 인정이 많으셨던 이모부의 갑작스런 병환으로, 초등학교 시절 나의 서울 유학프로젝트는 훗날 전주로 고등학교를 가는 것으로 종결되었다.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전주로 올라온 나는 지금의 전주 한옥마을 부근에서 하숙생활을 시작하였다. 객지에 큰딸을 혼자 올려 보내는 게 걱정되셨던 엄마는 친구분 딸이 있는 하숙집으로 거처를 정하고 안심하셨다.
내가 배정받은 학교는 시내와 멀리 떨어진 곳에 있어서, 시내버스가 다니는 큰길에서 30분은 걸어 들어가야 하는 외진 곳에 있었으니, 그나마 학교에서 가장 가까운 시내인 그곳에 하숙집을 정한 것이다.
그렇게 처음 본 엄마친구 딸인 대학생 언니와 같은 방을 사용했고, 그 집에는 우리 둘 외에도 몇 명의 하숙생이 더 있었다.
새로운 환경은 외로움도 느낄 사이 없이, 새로운 일상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그 대학생 언니와는 한 달쯤 같은 방을 사용했을까.... 그 언니의 얼굴을 자주 볼 수가 없었다. 객지에서 그나마 말벗이 되었던 대학생 언니는 왜 집에 들어오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하던 그 무렵의 어느 날, 하숙집 마루에 앉아 있는데 가까이에서 많이 듣던, 아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그 소리가 나는 곳으로 문간방을 지나 돌아서니, 그 목소리는 다름 아닌 중3때 같은 반이였던 지연이라는 친구였다.
우리는 너무 놀랍고 반가움에 뛸 듯이 기뻐했다. 한 반에서 2~3명 가량이 전주로 고등학교 진학을 하던 그 시절, 친구는 성심여고에 배정받아, 여고 근처에서 당시 전북대학교에 다니던 언니와 자취를 할 거라 했는데, 그 곳이 한 지붕 아래였다니,, 세상 참 작게 느껴졌다.
무슨 영문인지도 몰라도 같이 살던 언니는 더는 하숙집에 나타나지 않았고, 이래저래 혼자 독방 생활을 하던 나는, 중학교 동창이라는 오아시스를 만나 매일 밤 친구 자취방에서 수다 떨고, 공부하고, 자취방 하숙생처럼 지냈다. 그렇게 나의 여고 1학년은 같은 처지에 있는 친구라는 버팀목과 함께 외로움 없이 지낼 수 있었다.
하지만 본의 아니게 혼자 하숙방을 사용하게 된 나는 하숙비가 부담스러웠고 그래서 고2때 작은 이모님 댁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사촌동생들은 어렸고, 이모, 이모부가 잘 대해 주셨지만, 말벗이 없어진 환경이며, 소심하고 내성적인 그때의 나는 이모 집에 있는게 많이 불편했다.
주말이면 부모님이 계신 남원으로 달려갔고 일주일에 한번 보는 엄마, 아빠의 품은 너무나 따뜻해서 나는 전주로 올라와야 하는 일요일 오후가 너무나 싫었다. 하지만 부모님 앞에서는 애써 웃으며 전주행 버스에 올랐고, 전주로 올라오는 2시간여 동안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부모님과 함께 하지 못하는 현실은 외톨이가 된 것 같은 외로움으로 다가왔으며, 도시로 나온 뒤 예전만 못한 성적은 나를 더 힘들게 했다. 남원에서도 공부 잘 할 수 있다고 전주로 고등학교를 가기 싫다던 나를 엄마는 설득했고, 나는 늘 그랬듯이 순종적으로 엄마의 말을 따랐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일요일, 엄마는 내가 좋아하는 떡을 모락모락 김이 나게 쪄주셨는데, 그 뽀얀 김을 보며, 나는 결국 애써 참았던 눈물을 엄마에게 보이고 말았다. 본래 어린 양 할 줄도, 불평하지도 않던 내가 “엄마 나 전주가기 싫어.......! ” 그 한마디가 얼마나 포괄적인 말이었는 엄마는 아셨을 거고, 나 또한 그 말이 엄마에게 얼마나 충격적인 말일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 눈에서 떨어지는 닭똥 같은 눈물은 엄마 가슴에 창처럼 파고들었을 것이다. 엄마는 한입 베어 물던 떡이 목에 걸렸고 가슴을 턱하니 막히게 한 그 순간! 엄마의 식도는 화상을 입었고, 나는 엄마가 평생 고생하시게 된 가슴병을 안겨드렸다.
외로움을 끝까지 혼자 삭히지 못하고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한, 사춘기 그날은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는 회한으로 남는다.
새로운 출발선에서 새로운 각오로
고등학교를 객지에서 다니면서 나는 일찍 부모님과 떨어졌고, 또래보다 철이 빨리든 것 같다. 그렇게 흡족할 만한 결과는 아니었지만, 대학생이 되었다.
이제껏 지내온 학창시절과는 다른 출발선에 선 듯했고, 새로운 시작은 나에게 희망의 하이라이트를 비추고 있는 것 같았다.
대학에 들어가면서 나는 내 자신에게 다짐했다.
“앞으로는 공부가 내 앞길에 걸림돌이 되는 일이 없게 할 것이다.”
그리고 내게 주어진 4년을 알차게 보내기 위해 입학과 동시에 졸업할 때까지의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전공과 관련된 모든 자격증을 따기, 전공 분야에서 최고가 되기 등
내 자신에게 선언한 목표와 계획은 나를 자발적으로 움직이게 했고, 주도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으로 변화시켰다.
대학생이 된 나의 첫 거처는 고향이웃 아주머니의 딸이 같은 학교의 3학년이여서, 1학년 때에는 그 자취집에 합류해서 지내게 되었다. 대학에 들어간 내가 맨 먼저 한 일은 영어공부 동아리에 가입하는 것이었다. 영어공부 동아리는 매일 아침 1교시 시작 전에 모여 공부를 하고, 신입생에게는 순번을 정해 돌아가면서 영자신문 사설을 해석하고 발표하게 하였다. 동아리 생활은 즐겁기도 했지만, 돌아서면 내 차례인 발표시간을 쫒아가기 버거웠다. 같이 지냈던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내가 얹혀살던 언니들은 공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선배들 같았고, 시험기간에도 도서관에 가는 일이 없었다.
초여름으로 들어서던 어느 날, 내일은 동아리에서 내가 영어발표를 하는 날인데, 발표준비를 다 마치지 못했다. 하지만 밤늦게 들어와서 또 스탠드를 켜고 앉아 선배들의 밤잠에 방해를 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옥상으로 올라갔다. 가끔 답답하면 올라갔던 옥상은 작지만 앉을 곳이 있었고, 골목길을 비추는 가로등이 있었다. 나는 그날 밤 주경야독, 형설지공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며 가로등 불빛에 영자신문을 비추고, 영어사전을 찾아가며 외우고 발표연습을 했다. 초여름의 이슬이 온몸에 내려앉았고, 새벽의 여명을 바라보면서, 내 자신에 대한 연민과 대견함에 뿌듯해했다.
정수장학회는 내 인생의 드라마
나는 매일 아침 6~7시에 집을 나섰고, 밤 10~11시에 도서관에서 귀가하였다. 도서관은 학교 앞 나의 자취집에서 걸어서 30분 거리였고 수업이 있는 날도, 없던 날도 도서관에서 살았으며, 막간의 빈 시간이 생기면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고, 미래 준비를 하였다. 중앙도서관은 가정대학 건물 바로 옆에 있어 내가 가장 애용하는 곳이 되었다. 나는 칸막이 있는 열람실보다는 툭 트인 넓은 테이블이 있는 자료실이 좋았다. 궁금한 것을 바로 바로 찾아 볼 수 있고, 책상을 넓게 쓸 수 있는 자료실은 내게 마음의 평화를 주는 장소였고, 나의 계획을 실행하는 도장이 되었다.
이런 나의 노력으로 정수장학회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1학년 2학기부터 졸업할 때 까지 전액장학금을 받았다. 정수장학회는 내 인생에 있어, 정신적, 경제적인 도움 외에도 배우자를 만나게 해주었다
처음 정수장학생 후보로 추천된 것은 다른 친구였으나, 그 친구가 면접 등 선발과정을 통과하지 못하게 되어, 내게 기회가 온 것이다.
전북지역에서 선발된 장학생은‘오뚝이 훈련’이라는 통과의례를 거쳐야 했다. 오뚝이 훈련은 지도교수 면접, 구보 행군, 모락산 등반 등 극기 훈련이 포함되어 있는 정수장학회 전북지회의 전통이었다. 당시 지도교수는 우석대학교 정순량 교수님이셨고, 훗날 나의 결혼식 주례를 해주셨다.
장학생 선발과정은 정수장학생으로 추천된 소감 발표 및 20년 후의 자화상에 대한 서술, 그리고 면접 순으로 진행됐다. 교수님은 요즘 무엇을 배우고 있는지, 재미있게 공부하고 있는 부분은 무엇인지 물으셨다. 1학년이 받는 수업이라는게 교양과목인데,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일반화학을 배우고 있고, 원자, 분자 등 화학과목이 재밌다고 답했다. 그러자 교수님은 ‘기체운동 이론’에 대해 설명해 보라고 했다. 아뿔싸 그 순간 나는 화학과 교수님 앞에서 화학이 재밌다고 말한걸 알아채고, 머리가 번쩍 깼다. 이미 내입을 떠난 말은 주워 담을 수도 없고, 당시에 실제로 나는 화학에 흥미를 느끼던 때였다. 나는 브라운 운동 등 기체운동 이론에 대하여 내가 이렇게 잘 알고 있었나 싶을 정도로 거의 초능력을 발휘해 설명했다. 나는 교수님이 나의 설명에 만족해하신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장학생 재추천 선발과정에서 나는 별도로 면접을 받았고, 몇 단계는 건너뛴 것을 다음해에 알게 되었다. 여하튼 무사히 선발과정을 통과했고, 서울 정동 MBC홀에서 장학증서를 받았으며, 그 날 행사는 밤 9시 뉴스에도 나왔다.
정수장학생으로 선발된 후, 나는 2학년 때부터 장학회 재학생 모임인‘청오회’의 전북지역 총무를 맡게 되면서 더욱 바빠지고 발이 넓어졌으며, 작은 집단의 리더가 되어 사회성을 키우는 연습을 하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정수장학회는 부모님과 내게 큰 자부심을 안겨주었으며, 내 인생의 드라마틱한 중대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대학시절 전공관련 자격증을 모두 따겠다는 내 계획은 차질없이 실행됐고, 아무도 자격증에 대한 관심이 없을 때 식품기사 자격증을 따놓았고, 미리미리 준비하는 나의 습관은 몇 년 뒤 바로 결실을 맺었다. 결과적으로 식품기사 자격증으로 인해 제한경쟁(전공과 자격증 소지 요건을 갖춘 자만 응시할 수 있도록 한정하는 시험)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보건복지부 소속‘국립부산검역소’에서 사회생활의 첫 발을 내딛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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