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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자연, 생활
―서승현의 시세계
이은봉(시인, 광주대 문창과 교수)
서승현의 시는 지식이나 의식이 적절히 개입되어 있어 다소간 주지적으로 읽힌다. 아마도 이는 그의 시가 얼마간 지성에 의해 통제되는 정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지성의 작동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그것이 대상에 대한 그의 진술적 태도에서 연유하는 지도 모른다. 물론 진술적 태도는 대상에 대한 설명적 태도가 변형되어 드러나는 언술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시 역시 각각의 대상에서 비롯되는 이런저런 이미지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의 시의 주요 대상을 분류해보면 고향의 세계, 자연의 세계, 생활의 세계로 대별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고향의 세계는 유년 및 가족의 체험을 중심으로 펼쳐지고 있고, 자연의 세계는 숲이나 사물의 이미지를 중심으로 노래되고 있으며, 생활의 세계는 이웃들의 힘들고 어려운 노동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고향의 세계와 관련된 유년 및 가족의 체험을 담고 있는 시는 그리움의 정서를 토대로 하고 있고, 자연의 공간과 관련된 숲이나 사물의 이미지를 담고 있는 시는 삶의 지혜 및 진실을 다루고 있으며, 생활의 공간과 관련된 이웃들의 힘들고 어려운 노동을 그리고 있는 시는 연민의 정서를 기초로 하고 있다.
그의 시에서도 고향은 일단 기억과 추억의 공간으로 자리해 있다. 기억과 추억의 공간으로 자리해 있는 고향은 기본적으로 그리움의 원천으로 기능한다. 고향이 그리움의 원천으로 기능하는 까닭은 무엇보다 그곳이 대긍정의 공간으로 상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고향이 대긍정의 공간으로 상정되어 있는 이유는 그다지 복잡해 보이지 않는다. 그 역시 고향에서는 유년시절을 살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유년시절을 산 만큼 고향에서의 그의 삶에 상대적으로 괴리가 적었을 것은 자명하다. 괴리가 적었던 만큼 갈등이나 길항도 적었을 것이고, 그에 따른 고통도 적었을 것이다. 그가 특별히 고향의 세계, 나아가 유년의 세계에 집착하는 데는 이러한 면도 큰 몫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유년시절의 그의 고향이 실제로도 행복의 공간이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는 않는다. 한편으로는 까맣게 “석탄가루 날리는” 곳으로 기억되는 곳이 고향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에게 이러한 고향은 오랫동안 “겹겹의 빗장 속에 스스로를 가두”어 두고 “선뜻 떠나지 못”(「그 새벽의 기찻소리」)하는 곳인 것도 사실이다. 그에게도 고향은 일탈의 공간이면서 회귀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의식 속의 고향은 떠나려고 하는 곳이면서도 돌아가려고 하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 고향은 떠나려고 하는 곳이기보다는 돌아가려고 하는 곳으로 자리해 있다고 해야 옳다. 고향을 떠나 타향에 살고 있는 것이 오늘의 그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에게 고향이 끊임없이 회귀의 공간으로 존재하는 것은 무엇보다 그곳이 평안과 안식의 공간으로 기억되기 때문이다. 평화와 안식의 공간은 가족을 떠나서는 존재하기 어렵다. 고향이 자연과 더불어 기억되기도 하지만 가족과 더불어 기억되는 것도 이에서 연유한다. 가족은 언제나 집을 통해 구체화되기 마련이다. 집과 유리되어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 가족이다. 자신의 시에서 그가 끊임없이 집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내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한때는 “삼겹살을 안주 삼아/흰 막걸리 한 사발을 감로수처럼 비우던 곳”이 그의 고향집, 곧 ‘길 아랫집’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고향집, 즉 ‘길 아랫집’은 “꿈을 향해” “꾹꾹 옮기던 발걸음”들이 가득 했던 곳이다. 지금은 “폐광 뒤 모두 떠”나 “벌겋게 달아오르던 무쇠난로 하나”만 “삭아가고 있”는 곳이 이 집이지만 말이다.
이렇게 “허물어지고 있”(「길 아랫집」)는 것이 그의 고향집이기는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집과 관련해 그는 가장 먼저 어머니를 떠올린다. 이 집에서 살면서 육남매나 되는 자식들을 키워낸 것이 어머니이다. 물론 이들 육남매를 키워내는 동안 그의 어머니가 늘 “산과 산 사이/밭이며 골짜기에/둥근 별꽃 피우려 달음질”을 쳐야 했던 것은 사실이다. “초여름 늦은 저녁,/달빛 드는 마루에 앉아/대파 껍질 스타킹처럼 끌어”(「어머니와 파벌레」)내리기도 한 것이 그의 어머니이다.
한편으로는 “백반에 꽃물 내어 붉디붉게 물들인 손끝으로 장독대 윤나게 닦”(「만삭」)아내던 것이 그의 어머니이다. “새벽녘”이면 “정한수 한 사발 살강 위에 올려놓고/혼곤한 잠 다독여주던 손길”을 지니고 있던 어머니, “닳아빠진 조각 비누 문질러/쪼그라든 몸 굽힌 채 머리를 감”던 어머니, “칼바람이 소나무 잎 썰고 있어도 /찬물 쫙 끼얹어 흰머리 헹”(「소한 아침」)구던 어머니……. 어찌 보면 어머니는 성자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아버지 제사가 끝난 후
서둘러 돌아가는 친척들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 밝힌다
음복 후의 왁자지껄함은
성긴 별빛 몇 무더기
파리하게 젖어드는 대문간에 이르자
각자의 배웅으로 사잇길 가른다
주섬주섬 봉개를 싸다가
흐트러진 신발 뒤처져 신으며
아버지도 혼령으로 오셨다가
지금 가시는 걸까 생각해 본다
한 밤중 서느러운 길목을 나서며
어둠 속 서리 맞은 흰 들국화 흔들리는 모습에
순간, 눈시울 축축해지기도 한다
마른 대추같이 쪼그라든 늙은 엄마는
어린 가시내처럼 검은 실핀을
쇤 머리 오른편에 빼딱히 꽂은 채
어여 가, 조심해 가,
처진 국화잎처럼 손바닥 흔들며
외등 불빛 아래 까무룩히 잦아든다
혼자 남겨진 늙은 엄마는
오랜 쓸쓸함이 잠시 반짝였을
빈방 많은 낡은 집이며
닫아 건 문고리에 녹이 스는 시간과 함께
산기슭 짙은 어둠 속으로
첩첩히 고요해 갈 것이다.
―「어둠 속 흰 들국화」 전문
이 시에서 어머니는 무엇보다 희생으로 점철된 모습을 보여준다. “아버지 제사가 끝난 후/서둘러 돌아가는 친척들”을 행해 “어여 가, 조심해 가,/처진 국화잎처럼 손바닥”을 흔들고 있는 것이 어머니이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나 있는 어머니는 “마른 대추같이 쪼그라든” 모습을 하고 있다. “검은 실핀을/쇤 머리 오른편에 빼딱히 꽂은 채” “외등 불빛 아래 까무룩히 잦아”드는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어머니이다. 따라서 그가 보기에 “혼자 남겨진 늙”은 어머니는 이제 “문고리에 녹이 스는 시간과 함께” “짙은 어둠 속으로/첩첩히 고요해 갈” 수밖에 없는 안쓰러운 존재이다.
고향의 구체적인 표상인 집과 가족 가운데 어머니와 함께 빼놓을 수 없는 원형적인 존재가 아버지이다. 물론 이 시에서는 아버지가 제사를 마친 다음 “혼령으로 오셨다가/지금 가시는 걸까 생각해”보는 존재로 표현되어 있다. 그에게는 “말라가는 호박오가리”처럼 보이는 것이 “흑백사진 속 아버지”이다. 이러한 아버지를 그는 “기와지붕 비끼며/소리 없는 노래로” “날아오”는 “흰나비”(「아버지 기일」)라고 상상하기도 한다. 유년시절에 체험했던 아버지는 늘 노동에 지친 고단한 모습을 하고 있어 화자를 안타깝게 하지만 말이다.
아가야 등허리 좀 밟으려므나
햇빛 반사되는 호미날 따라
흙 묻은 감자알 툭툭 튀어 오르던 날
저녁 드신 아버지 고단한 몸 아랫목에 엎드리셨다
등 위에 간신히 올라섰지만 어린 발바닥은
마른 혀처럼 오그라들다 허둥대며 미끌어졌다
밟히는 자리마다 삭정이 꺾어지는 소리 들리던
얇게 마른 아버지
좀 더 세게 밟거라, 그 발목 힘으로 세상 어찌 살겠느냐
성마른 목소리로 붉게 역정 내셨다
척추 속 등뼈 알 같은 흰 감자가
마당에 둥글둥글 작은 언덕 이루던 밤
꼭꼭 밟지 못해 야단맞은 마음이
노곤한 신음 따라 숨 죽여 울음 울 때
달빛 아래 키 큰 오동나무는 쪼그려 앉은 어깨 위로
물기 마른 잎새 두엇 떨구어 주었다
감자포대 그득히 창고에 쌓이면
칼바람 몰아쳐도 겨울은 따뜻했다
광대뼈 검게 불거진 아버지가
손톱 밑 갈라터진 투박한 손으로 건네주던
찐 감자 속 뽀얗게 묻어나던 분덩어리 덕분이었다
까마득한 어제 밤에도 단발머리 어린 소녀는
따끈한 등뼈 속 하얀 뼛골 빼먹으며
발목이 조금씩 굵어져 갔고
산등성이 오르내리는
발바닥에는 차츰 굳은살이 딱딱해졌다.
―「등뼈를 밟다」 부분
이 시는 온종일 감자를 캔 뒤 저녁을 드신 후 “아랫목에 엎드”려 있는 아버지를 중심 대상으로 삼고 있다. 어린 그가 이렇게 엎드려 있는 아버지의 등허리를 밟는 일부터 진술되어 있는 것이 이 시이다. 따라서 이 시는 어린 시절로 돌아간 그가 그때의 일을 추억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등 위에 간신히 올라섰지만 어린 발바닥은/마른 혀처럼 오그라들다 허둥대며” 등의 구절이 이를 잘 말해준다. 궁극적으로는 아버지의 “하얀 뼛골 빼먹으며/발목이 조금씩 굵어져 갔”다고 반성하고 성찰하는 것이 이 시에서의 그이지만 말이다.
이처럼 그에게는 늘 아버지와 함께 하는 것이 가족과 집이다. 가족과 집은 말할 것도 없이 고향의 산물이다. 가족과 집을 잉태하고 있는 고향은 문명보다 자연에 가깝기 마련이다. 집, 가족, 고향은 항상 자연과 함께 하는 것들이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다. 그의 시에서 자연이 집, 가족, 고향에 따른 이미지들로만 이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삶의 지혜와 진실을 함축하는 것들로도 십분 존재하고 있는 것이 그의 시와 함께 하는 자연의 사물들이라는 것이다.
이들 자연의 사물들은 대부분 친화의 대상으로 자리해 있어 더욱 관심을 끈다. 물론 자연의 사물들이 존재하는 이러한 방식은 과거의 시에서도 익히 보아왔던 것들이다. 그렇다. 기존의 서정시에서도 자연의 사물들이 줄곧 사랑과 연민의 대상으로 존재해왔다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사랑과 연민의 대상으로 존재해왔다는 것은 감정이입의 대상으로 존재해왔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감정이입의 대상으로 존재해왔다는 것은 일치의 대상으로 존재해왔다는 것을 뜻한다. 시적 주체에게 자연의 사물들이 일치의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은 서정시의 보편적인 특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시의 “은단풍나무 살내음들/내 몸에 수혈되듯 낮게 퍼진다”(「암전(暗電) 」)라든가, “나는 듣는다, 딱따구리 따그르르 경 외는 소리를”(「푸른 현호색꽃 성채에 들다」) 등의 구절이 그 구체적인 예이다. “꽃물 든 손들어 가슴에 문지르자/온 몸으로 번지는 불그스름한 숨결”(「능소화」) 등의 구절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때 실감이 난다.
그의 시 가운데에는 이러한 일치가 죽음의 정서에까지 이르고 있어 두루 관심을 끈다. “흑나비 한 마리” “윤기로운 날개로/이불 한 채 온 몸으로 펼치고 있다./저 이불 끝 살짝 들추고 들어가” “길게는 말고 일 분간만, 죽었다 깨는 독약에 취한 듯/달콤 섹시하게 잠들고 싶다”(「여름 해찰, 흑나비」) 등의 구절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물론 이들 표현에는 “흑나비 한 마리”로 상징되는 어떤 존재와 일치를 이루려고 하는 깊은 열정이 담겨 있다. 이때의 일치에의 열정이 성애의 내포를 갖는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다. 그의 시에 함유되어 있는 성애의 표현은 “갈기털 흘러내리는 목덜미 어루만지며/탄력 좋은” 말의 “등에 훌쩍 올라탄 채/흰빛 평원 숨 가쁘게 달리고 싶은 밤”(「눈 오는 밤」) 등의 구절에 의해서도 익히 확인이 된다.
물론 이들 일치에의 열정을 반드시 성애의 표현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예의 표현이 실제로는 뿌리 뽑힌 채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는 저 자신을 바로 세우기 위한 의지의 한 형태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자꾸 마음 어두워져 밝은 날에도 헛발 짚기 일쑤인”(「동백꽃 피네」)인 것이 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끊임없이 세계와의 일치를 추구하는 것도 실제로는 저 자신의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다음의 시를 통해서도 익히 확인이 된다.
그가 내게로 왔으면
바람 불고 장대비 몰아쳐
오동꽃 마당에 즐비하게 떨어진 날
그가 내게로 와 넓은 잎새되어
비바람 가려주었으면
가슴 속 자욱이 하고 싶은 말
어지럼증으로 떠도는 날
그가 내게로 다가와 첫눈으로 붐비는
푸른 바다가 되어 주었으면
구멍 난 심장이 더욱 허전해지고
온몸에 열꽃 피어 호흡 가빠오는 날
그대 서늘한 손길로
내 뜨거운 이마 식혀 주었으면
어둔 잠 깊어지기 전
그가 내게로 다가와 내 잠을 일으켜 세워
새벽빛 운동화 신겨 주었으면
―「그가 내게로 왔으면」 전문
이 시에는 그가 처해 있는 고통스러운 현실이 “바람 불고 장대비 몰아쳐/오동꽃 마당에 즐비하게 떨어진 날”로 비유되어 있다. 물론 이는 자연의 사물들이 감정이입을 위한 객관상관물로 존재하고 있는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자연의 사물들이 고통스러운 그의 현실을 드러내기 위한 비유의 보조관념으로 자리해 있는 경우라는 것이다.
이처럼 고통스러운 현실과 마주 하게 되면 “구멍 난 심장이 더욱 허전해지고/온몸에 열꽃 피어 호흡이 가빠오는” 것이 그이다. 억압과 핍박이 “장대비처럼 몰아”치는 현실에서 그가 느끼는 감정은 당연히 불안과 초조일 수밖에 없다. 이처럼 불안하고 초조한 나날을 살고 있을 때 “그가 내게로 와 넓은 잎새되어/비바람 가려주”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렇다. 뿌리 뽑힌 자아로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그가 마음의 평화와 안식을 갖기를 원하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에게 자연의 사물들은 깨달음의 대상, 인식의 대상으로 존재하기도 한다. “풀벌레 날개 속 숨어 있는/연둣빛 현의 떨림”을 “허공을 빗질”하는 것으로 인식하기도 하고, “바람의 길이 허공중에 있듯이/소리의 길 또한 거기 있”(「소리로 길을 놓다」)는 것으로 인식하기도 하는 것이 그이다. “황금빛 봄날”, “우짖는 동박새 울음소리”에 “유폐의 핏톨들” “바깥으로 터져 나오는 듯해” 그가 “그만 현기증”(「동백꽃 피네」)을 일으키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뿐만 아니라 “뒷목덜미 부숭한 청년들 사이”에서 햇살이 “어룽대고 있”는 것을 “흰 손들의 음률”(「수화」)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그이기도 하다. 자연의 사물들에서 삶의 지혜나 진실을 발견하는 것은 다음의 시에서도 익히 확인이 된다.
천변 축대 뚫고 비스듬히 꽃 피우는
개복숭아 한 그루 관절통 앓듯
무르팍 껴안은 채 찬 바람 속
온몸 새카맣게 질려 있다.
저 메마른 몸뚱아리에도
연분홍 꿈 깃들여 있는 것일까.
꽃 피는 모습 보지 않았다면
검은 사색, 희망의 빛깔로 볼 수 없었으리.
추위에 질릴 대로 질린 한 시절 다 보내고
화르르 꽃 피우는 분홍의 시간이여
절명의 몸짓으로, 산목숨의 오르가즘으로
툭툭 터지는 환희의 빛살이여
빛살의 입자들 하롱대며
내 속으로 잦아들 때
슬픔의 아련함도 함께 찾아들리라.
만남과 떠남은
한 줄 그 끝을 물고 도는 쳇바퀴 같아
짧은 만남의 환희 속에
긴 이별의 고통 언제나 서려 있지.
작년 봄 꽃피웠던 물빛의 환희
분홍걸음 그림자 길게 드리웠는지
갑충처럼 갈라진 개복숭아 검은 몸뚱아리
뽀얀 입김 맑은 기운 엉키고 있다.
―「개복숭아, 꽃시간」 부분
이 시는 “천변 축대 뚫고 비스듬히 꽃 피우는/개복숭아” 나무를 중심 대상으로 삼고 있다. 이 개복숭아 나무는 지금 “무르팍 껴안은 채 찬 바람 속/온몸 새카맣게 질려 있다.” 그에게 개복숭아 나무는 이처럼 사람과 아무런 차이가 없이 존재한다. 따라서 개복숭아 나무는 그 자신의 감정이 이입되어 있는 객관상관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인물의 구체적인 이미지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이 시에서의 개복숭아나무라는 것이다. “추위에 질릴 대로 질린” 시절 다 보내고 지금은 “화르르 꽃 피우는 분홍의 시간”을 살고 있는 인물 말이다.
이처럼 그의 시에서 자연의 사물들은 인간을 알고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뿐만 아니라 이것들은 그로 하여금 성찰과 반성을 불러일으키도록 하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 이는 우선 “언덕 오르”다가 “푸드득 암꿩이 솟아오”르는 것을 보고 “놀라고 미안”(「슬픈 둥우리」)해 하는 마음을 담고 있는 시에 의해 확인이 된다. “어항 속 맴돌며 사는 동안/푸른 강줄기를 그리워할 줄도 모르는” “붉은툭눈붕어의 슬픔에 대해 생각”(「어둠 깊은 내 방에서」)하고 있는 시도 동일한 마음을 담고 있는 예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시에서 자연의 사물들은 이처럼 나날의 삶과 함께 하는 성찰적 지혜나 진실을 담고 있어 두루 관심을 끈다. “연분홍 꽃 시간”을 통해 “아직은 저 봄날, 버리기 힘”(「버리기 힘들다」)든 마음을 표현하기도 하는 것이 그이기 때문이다.
이들 논의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늘 자연의 사물들을 시의 질료로 삼아온 바 있다. 물론 한편에서는 나날의 삶 그 자체를 시의 질료로 삼아온 것이 그이다. 나날의 삶이라고 했지만 삶은 본래 고통으로 존재하기 쉽다. 특별히 예외적인 사람이 아니고서는 상처로 점철된 나날을 살아가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랭보는 “상처받지 않은 영혼이 어디 있으랴”라고 말했지만 상처 받은 영혼으로 세상을 살아가기는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법이다.
감수성에 따라 차이가 있기는 하겠지만 인간은 일정한 상처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이는 그의 경우에도 다르지 않다. 그 역시 “욕망 이루지 못해 상처 난 가슴”(「도마뱀」)으로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머리가 허전히 텅 빈 것 같은” 느낌으로 “빽빽한 시멘트 숲 한 귀퉁이에 세 들어 사는” (「푸른 현호색꽃 성채에 들다」) 것이 그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처럼 그는 저 자신을 늘 가난한 존재로, 아픈 존재로, 사소한 존재로 받아들여온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자신보다 작은 것들, 보잘 것 없는 것들, 소외되어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연민을 보여주는 것이 그이다. “눈 내리는 저물녘” “손수레 밀고” 가는 “한 여자”(「종소리」)에 대해서도, “무화과 담긴 함지박”을 “앞에 두고” “거뭇한 회한”을 앓는 “깡마른 노파”(「구계등」)에 대해서도 차마 어찌할 수 없는 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그라는 뜻이다. 작고, 보잘 것 없고, 소외된 것들에 대한 그의 연민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부스러지는 삶 그러모아/낡은 손수레에”(「생멸치 파는 여자」) 싣고 생멸치를 파는 여자에 대해서도, “한 평 도장집 귀퉁이에 앉아” “고개 숙여 손끝에 힘을 모두”(「회양목 여자」)는 여자에 대해서도 더없는 연민을 보여주는 것이 그이기 때문이다.
어째서 밑둥치 통째로 내어준 후
제자리 지키는 테두리가
한 잎새만큼만 될 수밖에 없는지
오늘도 여자는 되새김질하고 있다.
한 평 도장집 귀퉁이에 앉아
타박타박 걸어왔다가 가뿐히 가버리는
세상의 뭇 이름들과 씨름하고 있다.
별빛 돋아오는 어두운 하늘가
노란 전등불 밝힌 채
고개 숙여 손끝에 힘을 모두어
때로는 감옥처럼 때로는 운명처럼
회양목 갸름한 동그라미 몸통만큼
제 살을 저며 내듯 파내고 끌탕 친다
아이 낳을 수 없어 스스로 꺾어버린 결혼 생활
암팡한 회양목 작은 가지에
눈물방울 같은 잎새 종종 돋는 시간 속
세상 살며 배운 건 도장 파는 기술 뿐
여자가 자리할 수 있는 자리는
제 눈물자국만한 붉은 인주 묻은 자리
찾아오는 모든 사람 감싸 안아
서슴없이 손끝으로 한 몸 되는 여자
회양목 동글한 잎새 닮은 여자
기도하듯 등 굽힌 뒷모습이
이제 막 또 한 존재 낳으려는 듯
진통의 푸른 물이 설핏 어린다.
―「회양목 여자」전문
이 시는 “회양목 갸름한 동그라미” 위에 사람들의 이름을 새기고 있는 여자에 대한 그 나름의 연민을 담고 있다. 적잖은 그의 시는 이처럼 인물형상을 드러내는 데 바쳐지고 있다. 물론 이때의 인물형상은 생활력이 강한 여성 노동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의 시에 등장하는 인물형상이 모두 생활력이 강한 여성 노동자인 것은 아니다. 더러는 허약한 남성 인물이 연민의 대상으로 등장하는 경우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원주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창백한 낮달같이 서성이는 사내”(「휴가」), “베란다 한 귀퉁이”에 “쪼그려 앉”아 “담배연기”(「달팽이 사내」)를 피워 올리는 남자에 대해서도 차마 어찌하지 못하는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 그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둥근 갈쿠리”로 “바다의 옆구리”에서 “미역 한 다발” “날래게 끌어 올리는”(「경계를 넘다」) 건강한 어부에 대해서도 관심을 보여주고 있지만 말이다.
이처럼 그의 시에는 늘 사소한 것들, 보잘 것 없는 것들, 소외되어 있는 것들에 대한 크고 깊은 연민이 드러나 있다. 이들 존재에 대한 연민이 크고 깊다는 것은 그의 사유와 의식이 그만큼 공적이라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공적이라는 것은 그의 시정신이 도저한 평등의식에 기초해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예각들이 은밀하게 환해지고 있다
보이지 않는 손길이 어루만지는 대로
날선 각도가 차츰 둥글어지고 있다
분양과 임대 두 아파트 단지 사이
뻣뻣이 버티고 선 담장 쓰다듬어 주자
날선 시멘트 테두리가
비로소 긴장 풀고 단잠에 빠져든다
담장 위 손가락질 세우는 철조망 끝마다
흰 벙어리장갑을 끼워주는 저 섬세한 손길
곡선을 사랑하는 그 누가
시퍼렇게 벼린 각들을 감싸고 있다
알같이 둥근 마음 환기시키고 있다
세상이 정한 몹쓸 각 때문에
산산조각 조각난 무수한 가슴들
조용히 나지막이 다독이고 있다 .
―「숨은 손길」전문
이 시는 “분양과 임대 두 아파트 단지 사이/뻣뻣이 버티고 선 담장”을 중심 대상으로 삼고 있다. 오늘을 사는 도시인이라면 누구라도 이들 두 아파트 사이의 담장과 관련해 상당한 갈등이 존재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 시에 따르면 그러한 갈등을 몹시 아쉬워하는 것이 시인 서승현이다. “보이지 않는 손길이 어루만지는 대로/날선 각도가 차츰 둥글어지고 있”는 상황에 이 시의 초점이 있기 때문이다. 첫 행부터 “예각들이 은밀하게 환해지고 있다”라고 진술되어 있는 것이 이 시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때의 예각들은 당연히 “분양과 임대 두 아파트 단지 사이/뻣뻣이 버티고 선 담장”에서 비롯된다. 물론 예각들이 환해지고 있는 이유는 “보이지 않는 손길이” 그것들을 “어루만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이지 않는 손길”이 “어루만지는” 것은 담장의 “날선 시멘트 테두리”일 수밖에 없다. 지금 “날선 시멘트 테두리”에, 즉 담장 위 “철조망 끝”에 “보이지 않는 손길”이 “흰 벙어리장갑을 끼워주”고 있는 것이다. 물론 “보이지 않는 손길”이 상징하는 것은 하느님이고, 흰 벙어리장갑”이 상징하는 것은 흰 눈이다. 흰 눈이 “시퍼렇게 벼린 각들”을 감싸기 위해 하나님께서 내려 보낸 사랑의 징표라고 할 수 있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처럼 사람살이에 상존해 있는 예각을 무너뜨리는 일에 끊임없이 마음을 쓰고 있는 것이 그이다. 그의 시들에 다루어져 있는 인물들이 언제나 작고, 조그맣고, 버려진 존재들인 까닭도 실제로는 이에서 연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저 자신의 상처와 무관하게 남들의 상처를 감싸고 어루만지는 일에 항상 앞장을 서온 것이 그라는 것이다. 하느님이 흰 눈의 모습으로 “산산조각 조각난” “가슴들/조용히”다독이고 있는 것도 물론 그의 이러한 마음에서 비롯된다. 그만큼 풍성한 사랑을 갖고 있는 것이 시인 서승현이라는 얘기이다.(서승현 시집, 『푸른 현호색꽃 성채에 들다』, 도서출판 시와사람, 2010,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