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金正喜
필자는 1979년 만춘의 계절에 김정희 고택을 갔었다.
나는 00부대 사령부 작전처 작전장교 직책을 임무 수행 했다.
충청남도 해안 방어는 군부대 책임지역이다.
광천만(태안반도), 대천 , 당진, 삽교천 만리포 해수욕장,등 작전계획 수립 차 지형정찰의 목적이었다.
임무를 마치고 조치원, 부대로 복귀중, 김종서 묘역및 김정희 고택을 찾아 봤다.
고택은 충청남도 예산군 용궁리 있다.
용궁리에서 10 여리 남쪽으로 내려오면 예산읍이 있다.
읍에서 4,5km남쪽으로 내려오면 예산 저수지는 풍경이 볼만 했다.
국내 최대규모다.
저수면적은 1,088ha, 저수량은 4,607만 m2이다.
김정희 고택에는 백송이있다.
우리나라에 7 그루가 있다 한다.
넓고 평탄 한 지형이지만 나즈막한 평원지역에 자리잡고 있었다.
고댁 주위에는 황송이 부분적으로 숲을 형성하고 그 중심에 백송 한 그루가 있었다.
백송은 추사의 부친(김노경)은청나라사신으로 가는데 따라갔다가 백송 씨앗을 갖어 왔다 한다. (1809년)
백송의 나이는 약 200년에 높이는 14.5m 였다.
백송의 모양세는 몸체는 일반 소나무와 같으나 나무껍질은 다소 황색이었으나 껍질과 껍질사이
홉이 백색이라, 10여m 떨어져 보면 하야게 보인다.
솔잎은 일반 소나무와 같이 푸르다.
추사는 이곳에서 태어났다.
1819년에 문과에 급제, 암행어사등 여러 관직에 두루 종사했다.
1836년, 성균관 대사성에 올랐다.
1840년, 윤상도의 옥사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 9년을 지내면 세한도를 남겼다.
9년후에 풀렸으나,
철종 2년(1851)친구인 영의정 과 연루되어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 2년만에 풀렸다.
용궁리로 돌라와 학문에 귀의 하다 돌아갔다.
고택의 추사 사랑채(글방)에서 백송은 30m 의 이격거리였다.
서재 앞에는 꽃나무와 화초가 자라고 있었다.
고택은 99칸이면서
다소 "ㄱ" 자형 인데, 추사 사랑채만 구브러진 형태였다.
옹주와 부친 그리고 추사의 묘는 백송에서 동쪽 약 200m 덜어진곳에 있었다.
고택은 김한신이 지었다 한다.
그외는 한 줄로 길게 늘어선 모습이 웅장하기 보다 고풍이 물신 풍기는 단조로우면서도 아름다움이 있었다.
해설자의 얘기는 추사의 증조모인 화순웅주, 그의 부는 김한신(경주김씨)이다.
김한신의 아버지는 김흥경(이조판서)이다.
추사김정희 선생 고택과 묘역은 충청남도 유형과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있다.
글: 虎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