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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기아스의 비존재 강의후 질문.
박홍규, 형이상학 강의 2: 박홍규전집 3, 민음사, 2004 pp. 430-466. (P. 467)
박홍규(1919-1994), 1989. 6. 24.
벩송은 “고대철학 강의”에서 고르기아스의 불가지론(회의론)을 심리학적으로 읽으라고 권한다. 그리고 고르기아스의 “알맞은 때”(카이로스)를 온(ōn, existence)으로 보고, 현재라는 온을 찰라(un moment)로 읽으면, 그 찰라는 단면처럼 변하지 않고과거로 침잠한다. 그런데 삶에서 현재라는 순간(l’‘instant)은 과거와 미래로 분열한다는 함의를 지닌 짧은 지속이다. 찰라는 영원한데, 순간은 이중적 분화의 지속이다.
- 플라톤의 영원은 변하지 않은 사고에서 ‘있다’. 이 ‘있다’는 산다가 아니며, 불변하는 무엇이 있다 인데, 언어적으로 뭣‘이다’로 바뀌면서 대상화되었다. 그런데 스토아학자들은 현존하는 삶에서 영원은 거꾸로 돌아갈 수 없는 ‘그 자체적으로 있는 것’이라서 영원이며, 진행하는 현재는 끊임없이 과거와 미래로 분열하는 움직임이다(생성). 생성하는 영혼(생명)은 환원불가능한 지속의 덩어리이며, 개체는 자기대로 살다가 간다. 내재적으로 생명은 덩어리를 부풀려가는 과정이며 움직임이다. -
이런 의미화 작업을 소크라테스의 심층 계보인 퀴니코스학파에서 스토아학파로 이어지는 과정에서는 찰라는 영원으로, 순간은 시간(크로노스)으로 대비되었다. 이런 대비는 언어와 행위에 연관에서 해명하고자 하는 것이 스토아의 방식이다. 이에 비해 소크라테스의 상층 계보의 플라톤은 천문학을 동원하여, 영원은 하늘에 크로노스는 땅에, 유비적으로 설명하려 한다. 벩송에 따르면, 하늘과 땅 사이에 감각(오관, 상식)적으로 연대성이 있다는 것을 고대로부터 알았지만, 플라톤에서 구체적이고 당대의 상식적 실증적으로 탐구하였다고 본다. 그런데 플라톤은 천구의 운행에게 영원을, 지상의 운동에게 시간(크로노스)을 대비시켰고, 이런 대비에서 연대를 넘어서 상호연관을 학문적(에피스테메)으로 다룰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에서는 지상의 선형 위에서 움직임을 통해 운동의 개념을 만들었고, 운동의 길이를 시간으로 보는 측면에서 자연학이 성립한다. 그러나 갈릴레이에 와서야, 천구의 운행도 지구의 운동도 상대적임을 밝히고 같은 운동임을 밝히면서, 고대의 자연학으로부터 근대의 물리학이라는 학문이 성립한다.
* 하늘과 땅, 하늘의 원 운동과 땅이라는 평면 위에 선(線)운동, 천지현황(天地玄黃) 등은 고대 이래로 문제거리였다. 문제거리를 풀어서 해명하고 해소하는 것이 지혜(지식)의 학문이라고 하는데, 이 원과 직선의 양자의 관계를 고대의 상식(오관), 르네상스 이후의 양식(추론의 수식화)에서도 풀 수 없었고, 19세기 이후 현대와서야 둘 사이가 서로 사맛디 아니하다는 것을 증명하게 된다.
사람들이 일반화의 양식을 통해서 사용하는 용어 또는 개념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온 것일까? 하늘과 땅 사이의 관계가 대응적 또는 정합적일까? 라는 고민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죽 있어왔다. 그런데 하늘의 운행은 불변이고 땅위의 운동은 변화인가? 고르기아스는 움직임을 학문(에피스테메)으로 파악하지 못한다고 보고, 정지를 규정(정의)할 경우에 학문이 성립하는 것을 깨달은 것으로 본다. 그런데, 인간의 신체는 정지로부터 다음 정지를 설명할 수 있는데, 인간의 영혼은 언제 정지한 적이 있는가라는 의문이 제기된다. 이 정지한 적이 없는 것을 일반화하는 용어가 영혼일 것이다. ‘정지하지 않는 것’을 학문으로 다룰 수 없다는 것과 달리 ‘정지하고 있는 것’(규정)을 다루는 사고(로고스)에서 보면, ‘정지하지 않는 것’ 즉 변하는 것은 규정이 없고 정의할 수 없다. 변하는 것이, 알 수 없는 것, 표현(규정)할 수 없는 것,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할 때, 불가지론 또는 회의주의에 빠진다고 한다. 그런데 사람은 산다. 신체를 가지고 도구를 제작하고, 입말과 쓴글로 전승하며 산다. 유용과 이익의 도구를 다룸에서 움직이지 않는 대상이 있다고들 하고, 거기서 학문(에피스테메)이 성립한다고 한다. 그런 학문 규정에서, 움직이는 것은 일단 학문의 대상이 되는지 의심스럽고, 게다가 규정과 정의가 되지 않으니 학문으로 다룰 수 없고, 그 뿐만이 아니라 변화하면서도 현존하는 것이 대상도 규정도 안되니까 그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까지 상식을 토대로 추정한다. 우리가 보기에 상식은 비존재(무)라는 용어를 만들지 못한다. 왜냐하면 없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존재와 무라는 사고방식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용어를 만드는 것은 사고, 즉 인간의 상식(5관) 이상의 것이 있다는 것을 설정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런데 ‘움직이고 있는 것’은 학문(상식과 추정)으로 다룰 없다는 것을 왜 주장하기에 이르렀을까? - 사람의 인격의 정체성의 경우는 인식으로 다루지 못하더라도 도덕적으로 다루어야 한다는 발상이 소피스트인 고르기아스에서 제기된 것이 아닐까? 소크라테스는 변화면서도 자기완성의 길을 가는 영혼에 깊이 사유했을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영혼은 무언가를 생산하고, 기억하고, 유전하며, 또한 인간이 사는 동안에 한 번도 고정되지 않는다. 즉 그것은 움직이지 않고 불변하는 예[사례]가 없다. 비슷한 사례는 없을까? 하늘(천구)이 그렇다고 할 것인가? 천구는 끊임없이 움직이지만, 매년 동일하게 움직이는 것이다. 상식의 차원에서 일반화의 방식으로 ‘움직이면서도 불변하는 동일한 것’이 있지 않는가? 그래, 그 천구의 운동하면서도 불변하는 자기 자리로 오는 반복 운동처럼, ‘움직이면서도 불변하며 동일한 것을 유지하려는 것’이 영혼이 아닐까? 이 영혼을 우선의 우주의 운동에 비추어서, 우주 영혼이라 부르고, 운동하는 동일성(운동하면서도 동일성의 유지)가 있다. 이를 일반적 대상으로 스토아주의자들은 우주영혼이라 부른다. 영속하는 우주 영혼의 일부로서 천구의 수많은 별들이 영속하듯이, - 상식의 차원에서 과도한 추정이지만 연대를 넘어서 상호관계를 인정하는 것이 체계에 도움이 되니까 - 이를 본받은 인간영혼도 영속하지 않을까라는 추정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본받은(모방한) 영혼이 인간의 일생에서도 적용될 수 있을까? 난제이다. 그리스인들은 난제임을 알았다. 하늘과 땅 사이의 일치하는 정의와 원리가 없다는 것이 난제였다. 결국 천문학과 물리학으로 전개하는 방식에서와는 달리, 근대에 와서는 인간 안에서 문제로 바꾸어 영혼과 신체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려 할 것이다. - 그러나 그 조차도 영육의 설명은 착오였다. 실증적으로 기억과 유전의 개념작업이 도래해야 할 것이다.
* 여기서 고르기아스 시대에, 즉 소크라테스가 고르기아스에게 한 수 배웠다는 이 시기(카이로스)에, 학문의 성립은 어느 정도 되었다는 시기에, 왜 플라톤은 “고르기아스”편에서 ‘있지 않은 것’, 멈춰 있지 않은 것, 변하고 있는 것, 운동(지속)하고 있는 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 쓸모 없는 것, 순간에도 있지 않고 말로서 찰라처럼 있는 것으로 다루어야 했을까? 달리 말하면 마치 비존재, 무, 없는 것, 모자란 것, 결함 있는 것 등으로 다루어야 했을까? 게다가 중세의 종교적 독단에 의해 죄진 것, 원죄, 악 등으로 다루었고, 근대의 주체가 성립하면서 대상으로 다루어질 수 없는 것을 무지, 허무, 비진리, 비존재로 다루어지고, 21세기 제국에서는 제국에 저항하는 나라를 “악의 축”이라고 하였겠는가. 왜 벩송이 이런 사고를 네오스콜라주의라고 했겠는가. 그런데 현 윤석열 정권은 미제와 일제에 줄서지 않는 이들을 악마라고 하는 가에는, 당연히 크리스트교 독단과 근대의 주체를 이어받아 제국의 마름으로 사는 것이라고 보는 것인데, 스피노자의 독해에서 왜 자발적 종속이 있는가를 물을 필요도 없다. 자발적 종속은 소크라테스의 사유를 플라톤주의로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로고스로 읽고 따르고자 하는 종속에 있다. 벩송은 소크라테스로부터 플라톤으로 이행과정을 잘 들여다보고, 플라톤에서 로고스에 대립되는 방식을 찾은 플로티노스의 누스를 보라는 것이다.
플로티노스의 누스, 그것은 천구의 움직임과 같은 것이 지구 중심에도 있다는 추론을 한 것이다. 사고 밖에가 아니라, 사유 안에 있다는 추론을 하였다. 이 중심에는 운동(지속하는 덩어리) 즉 변화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를 누스라고 보는 것이다. 이 누스를 플로티노스보다 일찍이 고민하면서 해명해 보고자 한 이들은 이오니아의 학파들이었다. 이들이 신화를 배격했고, 게다가 고르기아스와 소크라테스가 사는 아테네 시대에 공동체에서 참주제를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윤석열 집단은 어쩌면 아테네 40인 참주 시대의 참주제를 닮아간다. 민주파들의 사유가 무엇인지를 성찰하는데, 소크라테스를 들여다보는 길이 있을 것이고, 여기서는 박홍규의 설명, 즉 플라톤의 <고르기아스>편을 읽는 방식이 제시되어 있다. (56NK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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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르기아스의 비존재 강의후 질문(1989Q) 430-466.
[줄, 꺽쇠, 견고딕, 굵은 글자 등은 천야가 표시한 것이다.]
문성원: 시원을 갖지 않는다와 시초를 갖지 않는다는 것하고 한정되지 않았다(unlimited) 하는 것하고 관계가 있다는데...? (430)
박홍규: 응 아르케(archē)가 없다는 애기지? 우선 비존재가 있느냐 없느냐가 왜 문제가 되느냐 하면 말이야, 우리나라 말로 있다, 없다고 하잖아? 그런데 서양말로 메 온(mē on, 비존재), [번역어로] <What is not>, <nothing is>[이지] .. 그러니까 말의 관점, 즉 문법적 차원에서 보면 둘다 <is>가 들어간단 말이야. (431) [아르케를 원인 또는 기원으로 읽으면...]
단순히 수사학(rhetoric)의 차원에서만 문제가 되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 <nothing>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의 함축(implication)으로 보면 그 자체는 아무것도 없는 것 아냐? 우리에게 주어질 수가 없는 것이지? 그런데 아무리 없는 것도 뭐든지 간에 정의(definition)하면 우리에게 로고스(logos, 말, 논리)의 대상으로서 주어져. 없는 것으로서 정의된다는 말이다. .. 가령 물리학에서 쓰는 운동이니 공간이니 하는 것은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인식되지 않아. 하나도 안돼, 직접적으로 무엇이 주어지냐는 말이야.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흰 색깔이나 만지면 단단하다 같은 것이거든. (431)
그러면 무(無)라고 하는 것은 그 자체로 보면 우리에게 주어질 수 없는 것인데 어떻게 주어지는냐? 그것은 설명이 안돼. (432)
그것[무(無)]이 무엇이냐? 뭔가 있는 것이야. 적극적으로 뭔가 내용이 있는 것과의 관계에서 간접적으로나마 정의하게 돼. .. 그러면 없다는 것은 무엇이냐? 색깔도 없고, 나무도 없고, 뭣도 없고 등등 해서 끝까지 가면, 완전히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되고, 거기서 뭔가 없다는 것이 정의 되어서 나와. ... 로고스(logos)의 대상에서는 정의하면 다 주어져.
없다고 하는 것은 어떤 무엇에 대해서, 즉 있는 무엇에 대해서 없다는 것이지. 그러면 무엇이 있다는 것은 무엇이냐는 문제가 생기지. 그것은 가장 어려운 문제인데, 무엇을 있다고 하나?
박정하: 없다고 정의한다는 것은 뭡니까? (432)
박홍규: 없다고 하는 것은 어떤 무엇에 대해서, 즉 있는 무엇에 대해 없다는 것이지. 그러면 무엇이 있다는 것은 무엇이냐하는 문제가 생기지. 그것은 가장 어려움 문제인데, 무엇을 있다고 하나? 인식론적으로 본다면 우리에게 주어지는 어떤 내용이 있어야 할 것 아냐? 내용이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저항해 오는 대상이 있다는 말이야. .. 인식 주체에 부딪혀서 오는 것이고, 그렇지? 그러니까 대상(Gegenstand)야, 대상(objet)란 말이야 (432-433)
박정하: 없는 것이라는 말 자체가, 무라는 것 자체가 모순을 함의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박홍규: 아니야. 자기모순이라는 것은 그것을 있다고 하면 빠지게 되는 것이지. 모순이라는 것은 그런 뜻이야.
좁은 의미에서 있다는 것과는 다르지. 대상화하면 벌써 하나, 둘, 셋, 넷, 내가 지금 생각하는 무(無), 그 사람이 생각하는 무(無), 오늘 생각하는 무(無), 하나 둘 셀수가 있지. 그러니까 왜 우리 인식의 대상이 되느냐는 것부터 우리 학문이 모조리 다 설명할 수 있다고 하는 것 자체가 문제지. (433) [여기서 학문은 로고스로서 에피스테메]
좌우간 우리는 로고스(logos)로써 정의한다. 정의함으로써 대상화한다는 거야 정의하지 않으면 무라는 것이 무엇인지 도대체 모를 것 아냐?
강상진: 로고스 차원에서만 무가 대상화될 수 있다[?].
박홍규: 그렇지. 감각의 세계에서는 무라는 것이 감각되지 않아.
강상진: 아르케를 안 갖는다는것하고 무한정자[아페이론]라는 것하고 어떻게 연결되느냐?
박홍규: 아르케 라고 하는 것은 시초를 의미해. 시간이나 공간이나 뭐든지, 출발점을 말해. 무슨 얘기냐 하면, 시초라는 것은 연속적인 것이 끊어질 적에 나오는 거야. .. 그런데 연속적이라는 것은 무한정자야. 그것이 연속적인 것 밑에 깔려 있어. 시초가 나오려면 무한정자가 끊어져야 돼. 연속적인 것이 딱 끊어져야 시작이 있을 것 아냐?
무(無) 속에는 아무것도 없어.시초도 없고, 허허허. 시초라고 하면 무엇인가 적극적인 것이 나와야 할 것 아냐? 무라고 하는 것은 모든 규정이 그 속에서 소멸되는 거니까, 무 속에는 시초가 없어. 그러나 무한정자[아페이론]는 그것이 끊어져서 시초를 받아들일 수도 있어 그러니까 무한정자가 시초가 아니야. 무는 아무것도 안 받아들여. (435-436)
박홍규: 응, [무한정자는] 무와 달라. 아페이론(apeiron)의 아<a->라는 것은 결여(privation)야. 시초의 결여인데, .. 채울 수 있다는 말이지. 결여의 반대는 충만, 메울 수 있다는 말이야. (436)
*
박홍규: 이 책에서 <exister(존재하다)[현존하다]>라고 하는 것은 무슨 얘기냐 하면, 본능이야. .. 철학적 의미에서 우리 사고[논리, 로고스] 밖에 있는 것을 <exister>라고 해. 사고 속에 들어있는 것은 <exister>라고 하지 않아. 나중에 <exister>라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갖게 되지만, 여기서는 기본적인 의미야. ... 그러니까 <existence[현존]>이라는 것은 허구적인 것이 아닌 것, 혹 주관적인 것이 아닌 것, 즉 주관 밖에 있는 것을 말해.
밖에 있는 것을 <existentia[현존]>라고 해. 그것을 여기서는 <pragma(사물)>라고 해.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이지만 <essentia(본질)>, <existentia>라고 할 적에도 실재적이라는 의미가 들어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existentia>라고 하는 것은 형상(Form [eidos])인데, 그 자체는 가능성 밖으로 나가는 것은 현실태(energeia)가 된다는 말이야. .. 우리 의식 밖에 나가 있으면, 내가 보든 말든 성립한다는 말이야. 그것을 실재성(reality)이라고 해. (436-437) [고중세의 실재성은 상층이며, 벩송의 실재성은 심층이고 상층은 상징성이다.]
우리 사고 속에는 있지만 밖에 없는 것이 많잖아. (437)
박홍규: [<고르기아스> 편에서 <existence>란] 본래적 의미에서 내 사고 속에 들어있는 것과 밖에 있는 것은 다르다는 거야.
속에 있는 것은 <exister>하지 않고, 밖에 있는 것이 실재적(real)이라는 거야. 달라, 밖에 있는 것은 실재하는 것이고, 속에 있는 것은 허구적이야. (438) [고르기아스가 속에 있는 것을 알 수 없다고 했다. 현대에 와서 벩송이 고대 상층론과 달리 속에 있는 것이 실재적이고 밖으로 대상화하는 것이 상징이라 한다.]
밖[안]에 있는 것을 어떻게 해서 우리가 파악한다고 할 수 있느냐, 파악이 안된다는 얘기야. (439) [밖이 아니라 안이리라 필사의 오류, 고르기아스의 첫째 불가지가 안에 있는 영혼의 활동성이다. 벩송에 와서야 안에 있음(기억)이 실재성이라 한다.]
이봉재: 고르기아스의 논변 전체가 맞느냐 틀리냐하는 것이 의문스러운데요. (440)
박홍규: 자꾸만 읽어봐. 어디가 틀렸느냐를 해결해야만 고르기아스 사상의 허무주의[불가지론]를 평가할 것 아냐? (440)
박홍규: 원자론에 따르면 감각하고 머릿 속의 사고는 원자(atom)이 들어와야 되는데, 거기[원자]에는 미세하냐 둥그냐의 차이밖에 안 들어가. 감각하고 사고하고 [사이에는] 원자가 미세하냐 조잡하냐, 크냐 작냐의 차이밖에 없어, 원자론의 입장에서는 그 차이 밖에 안 들어가. 왜냐하면 물질적인 설명 밖에 하지 않으니까. (441) - [벩송의 원자론 비판에는 정도의 차이라고 하지, 게다가 원자론자들은 원자들의 종합이 자발성이나 창조성을 갖는 것을 설명하지 못한다. 챗AI도 생명의 생성(devenir)는 안된다. 벩송은 그렇게 생성이 되려면 신의 개입(deus ex machina)를 끌어들여야 한다고 한다. - 거울효과인 원자론자와 관념론자는 완전성으로부터 불변성을 만들 수 있다고 착각적 사고를 한다. 그 불변성이 만들어지면, 새로운 창조는 없을 것이 아닌가? 제논의 나는 화살의 정지만큼 부조리하다. (56NKH)]
박홍규: 그러니까 이 영어 번역은 <pure mind(순수한 마음)>라고 했잖아? <pure mind>는 희랍어에 없거든. 본문에는 <phronesthai(사유하다)>라고 했으니까. <phronesthai>를 고르기아스가 당시에 어떻게 생각했느냐 하면, 감각보다는 한층 더 허구적인(fictive) 것이라고 생각했어. (441) - [벩송이 그리스시대는 오관의 상식을 중심으로 사유했다고 강조한다. 그 사고는 신들의 얘기정도로..]
박홍규: ... 그러니까 지금 <로고스> <프로네시스(phronēsis), 사려>의 기관은 따로 있다는 얘기야. <phronēsis, 사려>의 기관이 무엇이냐 하는 것은 다시 찾아봐야 될 거야. 감각하고 <phronēsis>의 기관을 따로 설정한 사람이 누구냐 하는 말이야. (441-442) [감관기관과 운동기관이 다르고 이를 중계하는 두뇌기관이 다르다.]
박: 신체적인 물리 현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에서는 한국 사람과 중국 사람은 다 달라. 그러나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한에서, [종적 측면] 자꾸 같아져. .. 일반적(algemaein)인 것이나 공통(koinōnein)되는 게 문제가 되겠지? (442)
보편적인 것이 나온다는 것은 하나의 면, 일면이야. 그것만 있다고 생각하면 큰 잘못이야. 내 개인적인 생활하고 저 사람의 개인적인 생활하고 내면에서는 내용이 달라. 왜냐? 기억이 다른데? ... 자기 내면적인 세계는 끝도 없이 내용이 다 달라. 그것이 쌓여서 사람들을 형성하기 때문에 체엄 내용이 달라. (433) - [고르기아스 불가지론 1, 내면세계(영혼) 잘 알 수 없어.]
박: 파르메니데스가 말한다는 행동 그 자체가 전부 무의하다는 것이지.
강상진: 그러니까 파르메니데스가가 여신의 말(logos)로부터 출발할 때 말한 그 새로운 어떤 학문의 규준을 다시 한 번 반성해보면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는 식의 논변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박: 파르메니데스가 여신의 말을 들었지만, 여신의 말을 듣고, 글을 썼다는 것, 그 행동 자체가 고르기아스에서는 모조리 의미가 없어. 파르메니데스의 글을 읽어보면 추상적인 차원에서 논의되었는데, 이 책은 추상적인 차원에서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추상적인 차원에서 이야기하는 행위 자체가 전부 무의미하다는 말이야. (443-444), - [고르기아스 불가지론 2, 안다고 해도 형용[표현]할 수 없어.]]
박: 한차원 더 나가. 그 책을 써서 남한테 전달하려고 하는데, 그것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거야. 그러니까 판단을 중지하자는 얘기야. (444) - [고르기아스 불가지론 3, 타인에게 설명할 수도 없어, 무의미한 것이야.]
박: 그런데 우주[지구]에는 운동도 있고 다(多)도 있잖아? 그런데 그런 것은 존재했다가 무로 갔다 하니까, 파르메니데스 입장에서는 있을 수 없다는 말이야. .. 그러니까 있는 것은 세 개가 있어. [1] 존재이거나 [2]무이거나, 그 다음에 [3] 존재에서 무로 가거나 무에서 존재로 가거나. 그러니까 존재라고 하는 것은 이념적(ideal)인 것하고 생성된 것(gēneton)하고 둘 뿐이야. (445) - [나로서는 이 헷갈린 설명..]
응, 존재와 무에서 놓고 보니까, 존재에 속한 것은 그 둘 뿐이야. 무는 이제 따로 떨어지니까. 그러니까 이것도 이분법이야. 그런데 그것도 무한정자(아페이론), 즉 연속적인 것이 들어가지 않으니까,양자택일로만 나와. 존재에서 무[비존재]로, 무[비존재]에서 존재로 갔다해. 이념적인 것이거나[관념], 존재에서 무로 갔다, 무에서 존재로 갔다 하는 것이거나 있는 것은 둘 뿐이야.이것 외에는 없어. (445) - [여기서 무는 (비)존재이다. 이 (비)존재가 기억이며, 들뢰즈에서는 부정형으로서 동사 원형으로 보았다.]
이봉재: 언어가 단순한 물리현상, 물리적인 차원을 떠나 있는 건 분명하지만 언어적인 능력을 기례로 복제하는 가능성은 열려 있거든요. (445) .. 인공지능이라고 하는 가능성이 아직 열려 있어서... (446)
언어가 인간의 특별한 <logos>로서 오관과 분리된 것이라고 과연 얘기할 수 있을지‥… (446)
박: 그것을 설명하려면 말이야, 물질은 무엇이냐에 대한 정의로부터 출발해야 돼. .. 물질이 무엇이냐에 대한 정의가 나와야 돼. 그리고 물질이 아닌 것은 우리 인식과 어떻게 다르냐는 정의도 나와야 되고. ... (447)
[둘째로] 거기에 [물질에] 우리 의식 현상 같은 것이 들어가느냐, 그것 가지고 설명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돼.
[셋째] 투입한다(input)고 하지? 외부에서 넣어야만 운동이 주어져. 생명[자연, 퓌시스]현상은 그렇지 않아. 플라톤은 외부에서 넣는 것이 아니라 자체 운동한다고 해. .. 아무리 해봐도 기계는 기계지, 사람이 되지 않아. (447)
박: 그것[생명, 사람도]은 투입하지 않아도 속에서 자기 운동을 하는데, 그런 능력을 개발하자는 얘기야, 강화시키자는 얘기야. 그렇지만 물리학은 처음부터 투입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없어. .. 그러나 [생명]은 가만 내버려둬도 달달해. 생명은 기계하고 그 점에서 달라. 생명은 성장한다고 하지. 기계가 살아있으면 아무 쓸모없어. 우리 마음대로 못하잖아? 허허허. 이용 못하잖아? (일동웃음) 기계가 자기 멋대로 하면 뭐하러 사람이 그걸 만들어내, 제멋대로 하는데? 우리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으니까 기계를 만들어내고 이용하지. 그러니까 그게 우리 손발의 연장이지 뭐야? (447) - [AI(인공지능)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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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종현: 여기서 존재 개념이 시초도 없고 영원하고 모든 곳에 있다고 하니까요. 외적인 형식으로 보면 기독교의 신(神) 정의하고 좀 비슷한 느낌이 들거든요.
박: 여기서 존재라고 하는 것은 초월적 기능이라고 하는데, 무슨 뜻이냐 하면, 류나 종이 아니라는 얘기야. ... 어떤 속성 등은 모조리 빼버린 것이다. 그런 것만 있는 게 아니니까. 그러면 존재에 대립되는 것은 없다는 것이지. (449)
여종현: 없는 곳이 없으니까 모든 곳에 있는 거죠. (449) - [두 ‘곳’의 의미는 다르다. 앞의 곳은 일반화인데, 신의 보편편재로부터 모든 ‘곳’은 추상화이다. 그 곳에는 시간도 포함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시간과 공간에 연관이 없다. 순수 추상이다.]
박: 그것이 다 멜리소스의 견해라니까. 독일어 번역한 사람이 시간의 계열하고 공간의 계열이 어떻게 같냐고 하거든? 어제 말한 것처럼 파르메니데스나 멜리소스에서 존재는 어떤 특성[들]을 다 빼버리기고 존재일반을 갖고 논하니까. 거기서는 지금 말한 거처럼 시간이나 공간이 구별되지 않아. (449-450)
박: 형상은 자체적인 것(kath’ hauto)이라고 해, 자체적인 것인 한에서 형상은 전부 하나야. 시간도 빠지고 공간도 빠지고 ‥… (450) [순수 사유에서만 형상이 있다. 벩송은 이 형상이 상징이라고 하지.]
박: 형상에서는 모든 것이 하나야. 수학적 공간에서는 항상 되풀이돼. 되풀이 되면 연산(operation)이 돼. 그러나 [플라톤의] 형상은 연산의 대상이 되지 않아. (451)
수학적인 수는 더하고 나누고 곱하고 쪼개고 할 수 있지만, 형상은 그렇게 되지 않아 하나밖에 없잖아. 자체적인 것(kath’ hauto)은 안 돼, 일자성(oneness)은 연상의 대상이 되지 않아. 일(the one)은 연산의 대상이지만, 하나 자체는 아냐. 그것이 파르메니데스의 일자야. (451) [사람들이 존재는 ‘하나’다와 수학에 일이 ‘하나’라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전자의 선전제이다. 후자는 연산과 함수를 연관을 설명하기 위한 기호(수)이다.]
박홍규: .... 아까 말한 상식적인 물리학이라는 것은 현대 과학의 산물이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과학의 산물이 아니거든. 그러면 현대과학에서 물질이 무엇이냐늘 찾아야지.
이봉재: 거기서 물질 개념을 찾아야 된다고요? (452)
- [프랑스와즈 발리바르(Françoise Balibar, 1941-)는 물질(hylē)의 개념이 물리학이 다루는 실체로서 실재하는 물질의 개념이 아니라고 한다. 물질 개념은 아직 밝혀지지 않는 무엇으로 남아있기에, 휠레가 물리학을 추동한다고 한다.]
박: 응, 거기서 항상 되풀이 되는 개념을 찾아내야 돼. 그래서 자꾸 분류하고(classify), 또 분류해. 그러면 정의가 나올 것 아냐? .. 희랍에서 형이상학(metaphysic)은 근본적으로 <physics>, 물리학이야. <meta>는 <그 뒤에>를 뜻해. (452)
설명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 있고, 없는 것이 있어. 될 수 없는 것이 무엇이냐 문제야. 아까 무(無)도 함축(implication)을 가지고는 설명이 되지 않았어.(453)
우주의 기원같은 것도 설명이 되지 않는 것의 일종이지.
실증과학이라면 우리가 그것을 검증할 수 있어야 하는데, 어떻게 검증을 해? 인간이 몇 천년 전 어디로가?
이런 무(無)도 선험적으로 설명이 안 돼. (453)
그러나 사실이 아니라 선험적으로 설명이 안 되는 것이 있어. 그것을 학문에서 회피해. 빠져나가 버려. 학문은 그런 것을 우회해. 그러니까 학문에는 한계가 있어. (454)
박홍규: 의식에 대한 모든 것들이 데이터로서 주어져야 돼. 그런데 영혼은 데이커로서 주저지지 않아. 그런데 정의하면 설명이 돼. 선험적으로. 그러면 정의를 어떻게 내리느냐? 영혼이 있는 것과 영혼이 없는 것의 기능을 살펴보니까 그 기능이 다르더라는 거야. 거기서 차이(differentia)가 나오지. 영혼이 없는 단순한 물질[물체] 영혼이 있는 생물체의 기능이 다르다면 다른 점이 나와야 되겠지? .. 생명현상에 관한 정의는 전부 다 그렇게 나와. 물리학이나 생물학이나 그런 점에서는 다 똑같아. 다른 점이 있다면 물리학과 생물학의 대상이 다를 뿐이야. (454)
박정하: 요청되는 것‥…
박홍규: 요청이라는 것은 또 의미가 다르지. 완전한 정의(定意 definition)는 없어. 완전한 정의가 없는 경우에 이런 정의를 우리가 요청한다면, 그때는 <가정한다 postulate>고 해. 모든 것을 다 파악할 수 없을 때, 우리가 이렇게 놓고 나가자고 해서 놓는 것을 공리(axiom)라고 하지. (455) [어떻게 해서 나왔지를 묻지 않는다. 요청은 전제 위에 있어서 선전제(présupposition)이라 한다.]
이봉재: 선생님 말씀을 들으면 데이터가 먼지인지 정의가 먼저인지 계속 의문스럽거든요.
박홍규: 데이터에서 정의(定意)를 끄집어내야지. .. 학문은 항상 정의에서 출발하지, 해석이 출발점이 되지 않아. ... 처음부터 해석에서 출발하지 않아. (455) - [여기서 해석은 헤르메노이틱일 것이다.]
생명 현상, 내부 현상을 해석학자들은 해석의 대상이라는 거야. 옳아 직접주어지면 해석할 필요가 없어. ... 그러니까 해석이라고 해서 맘대로 이렇게 저렇게 해놓는 것은 소용없어. 학문이 되지 않아. 정의에 의해서 해석을 해야 되고, 그래서 소정의 결과로서 데이터가 우리한테 딱 나와야 돼. (456)
과학은 해석이라고 할 수 없어. 과학은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니까. 해석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은 데서 출발해. 해석의 대상은 우리에게 직접 주어지지도 않고 출의 대상도 아닌 것이다. .. 문자는 해석의 대상이지? 왜 그래? 사람 인(人)자를 써놓고 아무리 봐도 거기서 사람이란 말뜻은 안 나와. 추리한다고 해서 나와? 안 나오지? 그것은 우리가 약속한 것이야. 약속한 사람들끼리만 알아듣지. (456)
그야말로 우리 지식이 무한히 발달하면, 언젠가는 우주의 질서가 어떻다는 것을 알 수도 있어. 이론적으로는 불가능한 것이라고 배제하지 않잖아? 그런 것은 해석이라고 하지 않아. 지금 우리가 모르니까 다만 현재의 지식수준에서 우리가 추리한다고 그러지. 해석이라고는 하지 않아. (457)
*
강상진: 우리 학문이 설명할 수 없는 대상을 피해나간다고 말씀....
피해 나가는 방식으로 수학이 건설된다고 말씀하신 겁니까?
박홍규: 그렇지. 이태수 선생 설명을 들어봐야 되는데‥… 수학적인 조작(operation)은 모순을 배제하고 나간다는 말이야. 모순된 것은 설명이 되지 않아. 설명되지 않는 것은 일단 피해, 아까 무(無)가 나왔는데 이것도 모순이야. (457) - [박선생님은 여러 곳에서, 철학은 난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이라 하신다.]
그렇지, 모순이 있다는 얘기야. 있는데, 모순을 피해나가는 방식도 있더라. 그런 측면도 있더라는 얘기야. 학문은 그것을 피해 나간다는 거야. (457)
강: 모순이 있다는 것 자체가 모순 아닙니까?
박: 모순이 있지, 왜 모순이 없어? (457) - [나로서는 단하나의 모순은 순수논리에서만 성립한다. 실재에서는 모순이 없다. 현실에서는 대립, 반대, 부조리, 불합리, 착오, 오류, 착각이 있을 뿐이다.]
박홍규: 그런데 고르기아스는 고도의 추상적인 논리를 갖고 지금 논하고 있어. (458) [벩송은 심리학적으로 읽으라고 한다.]
박홍규: 하이데거는 희랍철학을 중요시 하지만, 후설은 좀 다르지. (458)
강상진: 아까 모순이 있다고 그러셨는데요, 그게 사실로서 주어진 겁니까, 아니면 선험적으로 주어진 겁니까? (458-459)
박홍규: 선험적으로도 있고, 사실로도 있고. (459) [나로서는, 사실 즉 사태에서는 판가름이 나거나, 차이가 다른 정도이기 때문에 모순은 없다. 아무리 극한이라도, 남극과 북극은 모순이라고 할 수 있을까? 두 힘의 반대방향, 즉 벩송이 말하는 두 질서가 있을 뿐이다.]
박홍규: 잘 읽어보게. 현대 사상하고는 다르니까. 차이가 많아. 현대 철학에서 누가 의사소통(communication)이 안 된다, 그러니 남하고 대화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해? 안하지? [말 안하고 말지]. 그러나 그런 것을 고대 철학에서는 논의했거든. 절실한 어떤 현실적인 측면이 있기 때문에 이런 소리 하는 거야‥…(테이프교체) (459) - [전쟁에서 삶과 죽음이 모순이라고 하는데, 사실은 삶과 죽음을 동시에 놓을 수 없기 때문에 과정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현실에서 죽은 자가 더 이상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그와 관련된 해결을 위하여, 복잡하다. 모순의 해결이라기보다, 사태의 복잡성과 난문제를 더 많이 생산한다는 것이다. - 그렇지 않으면 통시칸에서 웃는 자들이 있다. 윤석열 정권이 거의 모순에 가까운 불합리한 결정을 내리는 것은 그 속에서 웃는 자들이 있고, 개돼지 취급받는 자가 있다는 것이 현실이지 모순이 아니라. 이 불의에 대해 전쟁을 담보로 전쟁을 위협으로, 현실의 불합리를 공정과 상식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을 뿐이다.]
박홍규: [전혀 다른 예로서] 불교에서도 선(禪)이라는 것이 있지? 말도 안하고, 말로 전해줄 수도 없고, 목탁을 치는 수밖에 없다는 거지. 허허(일동 웃음) 선에서는 일체 의사소통을 하지 않으려고 하지. 그런 세계가 있어. (460)
문성원: ... 사고할 때에는 누구나 다 보편적인 것을 생각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 건가요?
박홍규: [인식과 같은] 그런 기능이지. 기능만 따진다면 추상적인 사고가 어떻게 발달했느냐 하는 문제야. (460) - [ 수학은 산술의 더하기에서 연산규칙, 함수기능 등으로 발달한다.]
박홍규: [문제를 풀려는데] 의사소통이 안 되는 거야. 그 문제는 말이야. 현대사에 대한 각자의 생각, 그러니까 분단과 관련해서 역사의 이해가 어떤가에 따라 달라지겠지. 그런 차이가 왜 생기느냐를 생각해야겠지. 같은 한국 사람이라도 기후라든지 신체적 조건, 처해진 환경 같은 것들이 달라. (461) [차이의 발생에서 정태적 발생과 역동적 발생이 다른데, 대부분은 정태적 발생을 추억들, 기념비적 사건들에 의존한다. 그럼에도 차이는 이미 추억과 사건에 대한 과정을 달리 알고(표상, 교육)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홍규: 갈등이 있지. 갈등은 철학적으로 모순의 대표적인 예야.
문성원: 학문으로는 어떻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까?
박홍규: 아, 학문? 학문은 갈등이 된 것을 피해가려는 거야. 갈등이 없다는 것이 아니야.
그런 문제는 말이야, 국민의 합의(consensus, [교감])가 나와야 될 것 아냐? 그러니까 의사소통 방법이 발달해야 돼. 의견이 다르다는 것은 우리 한국 사람들 각각의 의견이 합의점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얘기가 아냐? 그러면 왜 안 가지고 있는지 그 원인을 파악해야지. .. 무슨 특별한 이데올로기나 원칙을 따지게 되면 잘 안 돼. 그런 사회는 잘 안 돼. 타협이 안 돼, 절대로 안 돼. 원칙이라는 것은 타협이 되지 않는 거니까. 그래서 분열이 있게 되고, 갈등이 나와.
문성원: 상식하고 학문하고 관계가 있지 않습니까? (461) - [벩송에게서는 오관을 통한 상식은 물체적 일반화에서 합의가 이루어지는데 비해, 양식은 물리적 사실들에 적용되는 것을 사회적 관계에서도 적용될 것이라고 확장하고 있지, 그런데 고등양식은 과거를 포함하여 미래로 다음측정을 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박홍규: 상식은 그때마다 다르지.
사실 상식도 여러 가지거든. ... 그러니까 국민들이 고도의 상식을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어야만 사회는 발달해. 민도가 높아져. 몇 사람의 학자가 있다고 해도 소용없어. (462-463)
건전한 상식을 갖는 사회가 제일 좋은 사회야, 영국처럼. 갈등이 없어. 그런 국민이 되어야 돼. 민도가 높아져야지. 착실하게 생각해야지. 착실하지 않고 혼란(chaos) 속에서는 상식이 안 통해. (463) - [1989년 강의인데, 1987년 이후의 민주화의 합의가 이루졌다고 생각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1988년 노태우 정부를 갈등으로 보고 있었을 것이다. 군부 후신인 노태우 정권은 안정을 위해 1990년 김영삼과 합작하여 3당 합당을 한다.]
*
강상진: 선생님, 어제 차이(Unterschied)를 말씀하실 때, 희랍 비극 갈등은 감성 수준에서 얘기 하고, 지적 수준에서 갈등을 얘기하는 것이 희랍철학이라는 건가요?
박홍규: 둘이 다 비극이라는 얘기야. 둘이 고르기아스 사상이야.
[고르기아스 사상도] 갈등 아냐? 하나의 기준(criterium)을 놓으니까 그와 반대되는 기준이 부정적으로 나오더라. 가장 확실한 파르메니데스의 논리는 가장 불확실한 허무주의(nihilism)를 낳더라는 거야. (464) [박선생님도 독일 근대철학의 영향인지 무, 니힐리즘으로 설명하시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 근데, 왜 벩송은 니힐리즘보다 회의주의와 불가지론적으로 설명했을까? 그래야 착각(l’illusion)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강상진: 구별되는 한에서만 존재는 존재고, 무는 무라는 원리가 성립하는 거죠?
박홍규: 그렇지 한계가 딱 지워질 때문 무는 무고, 존재는 존재라는 원리(principle)가 나오지. 그 원리를 놓고 나가니까 반대되는 모순이 나와. (464) - [아마도 앞 강의에서, 박선생님은 파르메니데스의 반대 입장으로 고르기아스를 설명했을 것 같다. 고르기아스를 소크라테스와 연결해서 읽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 ]
박홍규: 허무주의를 넘어서려면 모순율로, 즉 파르메니데스로 다시 돌아가야지. 그게 플라톤이야. 기독교도 모순을 극복하는 사상이지. 거긴 더 심각해.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인간의 힘으로 모순을 극복할 수 없다고 할 때, 기독교가 나와. 막다른 골목에서 나오니까 심각한 거지. (464)
강상진: 학문은 모순을 피해가는 입자이고.
박홍규: 기독됴는 모순을 도저히 피할 수 없더라. ... 그래서 모순 때문에 믿는다는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 약155년-240년경)의 유명한 말이 있지. 모순되지 않으면 무엇 때문에 믿어? (465) - [그리스 철학의 장점은 문제거리를 풀어야하고 아니면 아니라고 증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원과 직선 사이의 환원 불가능은 19세기 중반에 와서야 불가능하다고 결론지었다. - 무한에서는 하나가 될 것이고 바랐지만 말이다.]
박홍규: 학문하고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앙하고 달라. 똑 같은 허무주의의 극복이라고 하지만 둘이 달라. [곳곳에서 강조했지, 왜 허무주의 일까? 부조리와 불합리 등도 있는데...] ..
신앙은 정의를 찾지 않아. .. 정의를 찾는 것은 희랍사상이야. 그것은 절대로 기독교 사상이 아니야. (465) [정의가 조화일 수도 있고, 정의가 숫적 관계일 수 있다.]
지금. 옛날에 한국 기독교장로회하고 예수교장로회를 구분하잖아? 해방 직후에는 세력이 비슷했어. 기독교장로회가 조금 더 많았지. 예수교 장로회는 번영하는데 기독교장로회는 그렇지 못해. 거기 가면 마음이 편하지 않아. 마음이 안정이 안되. 신아의 세계는 학문의 세계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돼. ... 내가 항상 지켜보는데, 지금은 두 교회 차이가 굉장히 많이나. 신앙과 학문을 구별하자는 것이 서양사람들의 특징이야. (466)
박홍규: 인간 사회는 갈등 속에, 모순 속에 들어가. 파르메니데스는 학문을 위해 모순율을 놓고 나가. 그러나 정반대되는 갈등들이 생기더라는 얘기야. 지식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도 파악할 수도 없고 [전달할 수도 없고], 그러니 학문을 다 그만 두자는 허무주의의 문제는 거기에 있어. 그러나 이런 논리가 다 옳다는 것은 아니야. (466) - [허무주의의 문제가 아니라, 영혼 또는 인격의 생성과 과정의 문제로 보아야 할 것이다.]
(11:32, 56NKH)
# 등장인물 ***
1919 소은(素隱) 박홍규(朴洪奎, 1919-1994) 서울대 교수, 플라톤 전문, 철학자.
[1944 이태수(李泰秀, 1944-) 서울대 서양고전철학, 아리스토텔레스 전공.]
1958 이봉재(李奉宰, 1958-)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교수, <과학적 실재론의 새로운 모색-반 프라센의 경험론을 넘어서, 서울대, 1993, 김여수.>
1960 문성원(文晟源 1960R ) 7월 27일, 현 대학교수 현 부산대학교 인문대 철학과 조교수 (1995 서울대)
1960 여종현(1960-) 서울대. <시간지평에서의 '세계'이해 -후설과 하이데거의 현상학을 중심으로, 1993, 서울대, 소광희.>
1961 박정하(朴正夏, 1961N) 성균관대 교수, 1961.03.31, 「칸트의 인과 이론에 대한 연구; [순수이성비판]의 '제2유추의 원칙'을 중심으로」(1998) 영문 Kant's Theory of Causation 백종현
1965 강상진(姜相溱, 1965) 서울대 철학과, 독일 프라이부르크대, 서양 고중세철학, 서울대 교수
# 소크라테스 연관 인물들***
* 소크라테스와 그 제자들, 그리고 주변 인물들을 참조할 수 있다.
[전525 아시스킬로스(Eschyle, Αἰσχύλος, 전525경-456년경) ]
[전495 소포클레스(Sophocle, Σοφοκλῆς, 전495-전406) ]
전480 고르기아스(Gorgias, Γοργίας, 전480경-375경), 시실리 출신 아테네 활동 철학자. 카이로스(καιρός). 비존재 즉 자연에 대하여(Du non-être, ou de la nature) 소크라테스보다 열 살 정도 많다.
전469 소크라테스(Socrate, Σωκράτης, 전 469-399; 70세)
전465 유리피데스(Euripide, Εὐριπίδης, 전480경-전406경) 3대 비극작가 중의 하나(avec Eschyle et Sophocle). 니체에 따르면 유리피데스의 연극 발표 후에 소크라테스의 평에 대해 주의했다고 한다.
[전465 투키디데스(Thucydide, Θουκυδίδης, 전465경-전400경)가 쓴 펠로폰네소스 전쟁사(Ιστορία του Πελοποννησιακού Πολέμου)는 아테나와 스파르타 사이에 기원전 431년부터 411년까지 싸운 전쟁을 기록한 것이다.]
[460년경 데모크리토스(Démocrite, Δημόκριτος, 전460경-370), 53권의 저술이 있다고 하는데 남아있지 못하다.]]
[460 히포크라테스(Hippocrate, Ἱπποκράτης / Hippokrátēs, v. 460-v. 377) 그리스 의사이다. 그는 데모크리토스(Démocrite)와 고르기아스(Gorgias)와 더불어 공부했다고 한다.]
전450 알키비아데스(Alcibiade, Ἀλκιβιάδης, 전450-404) 클리니아스(Clinias)의 아들, 연설가, 아테네의 국가인물, 장군. 페리클레스의 양자이다. 소크라테스의 영향을 입었다.]]
전444 안티스테네스(Antisthène, Ἀντισθένης / Antisthénês, 기원전 444-365)(79살) 고르기아스와 소크라테스 제자(25살 어렸다, 플라톤보다 17살 많다), 키니코스학파 창설자. (스토아의 제논보다 109년 즉 한 세기 앞섰다.) -
전440 크세노폰(Xénophon, Ξενοφῶν, 전440경-전355경) 소크라테스 제자
전431 펠로폰네소스 전쟁(Πελοποννησιακός Πόλεμος)은 기원전 431년에서 404년까지 고대 그리스에서 아테네 주도의 델로스 동맹과 스파르타 주도의 펠로폰네소스 동맹 사이에 일어난 전쟁이다. - 투키디데스(Thucydide, 전465경-전400경)가 쓴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썼다(내용은 전411년까지이다)
전429 페리클레스 사망: 페리클레스(Periclès, Περικλῆς, 전495-전429)
전427 플라톤(Platon, Πλάτων, 본명 아리스토클레스 Aristoclès 427-347; 80살) 플라톤이란 ‘어깨가 넓음’을 의미한다. 소크라테스 제자. (이 때 소크라테스 나이 42살이었고,), 그는 펠로포네소스 전쟁중에 태어났고, 소크라테스에게 배운 10여년도 전쟁상황 중이었다. [- 박홍규도 전쟁을 두 차례 목격하면서 전쟁이 추억들 속에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전403 (소크라테스 66살), 플라톤(24살), 9월 30인 참주 전복되다. 민주파의 트라시불로스(Thrasybule, Θρασύϐουλος)가 [아뉘토스(Anytos, Ἄνυτος)와 더불어, 이는 소크라테스 고발자의 한사람이다] 그의 추총자들을 이끌고, BC 403년 1월 페레우스(파이라이에우스)에서 크리티아스군과 싸워 승리를 거두고, BC 403년 6월 아테네의 민주정치가 부활되었다. - [아테네의 주요 항구 도시 페이라이에우스(Le Pirée, ὁ Πειραιεύς / Peiraieús, en gr. moderne ο Πειραιάς / Pireás)]
전401? 크세노폰 아테네를 떠나 페르샤의 퀴로스 왕자에게 가다. 그는 30년간(전369년까지) 아테네에 들어오지 못했다.
전399 소크라테스(일흔) 재판 후, 사형선고로 독배를 마시다.
*
155 테르툴리아누스(Quintus Septimius Florens Tertullianus, 약155년-240년경) 터툴리안(Tertulian)은 기독교의 호교론자, 철학자.
(13:13, 56NKH)(13:37, 56NK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