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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여행팀들과 같이 반포유적지, 진시황 기념관을 둘러보고 오늘의 하이라이트 진시황 병마용 탐방이다.
입장권을 판매 하는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줄을서서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일종의 패키지 팀이라서 가이드가 일괄적으로 표를 샀기때문에 그리 큰 고생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입장권을 살려면 쾌 고생을 할듯..가격도 만만치 않을듯 하기도 하고..
우야튼 일단 들어가 봅시다.
요런 모습이네요.
일단 진시황 병마용 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1974년 중국 서안 외곽의 시골마을에서 우물을 파기 위해 땅을 파던 농부에 의해 발견되었다.
양취위안이라는 농부는 땅속에서 발견된 도기인형의 조각과 쇳조각을 보고 이 사실을 신화사통신 기자(린안인)에게 알렸다.
이후 인민일보을 통해 보도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산시성 고고학 발굴 팀은 1974년 7월 15일부터 본격적인 발굴작업에 착수하였으며,
7월 21일 진시황릉에 딸린 병마용갱임을 공식적으로 발표하였다.
발굴이 시작되어 현재까지 총면적 25,380m2에 달하는 4개의 갱이 발굴 되었으나 그 중 4호갱은 완성되기 전에 폐기된 빈 갱도였다.아직 완전히 발굴 되지 않은 1호갱은 길이 210m, 너비 60m, 깊이 4.5~6.5m의 총면적 12,000m2로서,
본래 이 갱 위에는 길이 210m, 넓이 9칸의 회랑식 건축이 있었으나 불타 없어졌다고 한다.
매장된 전체 도용은 약 6,000개로 추정되지만,
진나라로 쳐들어온 항우에 의해 많은 도용들이 파괴되어 정확한 개수의 파악은 어렵다.
도용의 크기는 1.75~1.96m, 도마용은 높이 1.5m, 길이 2m로 실물보다는 조금 크게 만들어졌다.
병사들은 겉옷만 입은 것과 겉옷 위에 갑옷을 입은 병사로 구분되어 있다. 무장한 무사의 엄격한 표정은 모두 다르게 생겼다.
도용들이 만들어질 당시에는 모두 컬러로 채색된 도용이었으나 발굴과정에서 햇빛에 노출되자 불과 몇시간만에 모두 색이 바래버렸다.
1976년 4월 1호갱의 동북쪽 20m떨어진 곳에서 또하나의 병마용갱이 발견되었다.
이 병마용갱을 2호갱이라고 부르며 약 6,000m2의 넓이이며 길이는 96m, 폭은 84m이다.
갱도는 정방형인 1호갱에 비해 L자 형으로 생겼다.
2호갱 역시 완전히 발굴이 완료되지 않았으며 부분적으로 발굴되었다.
89대의 목제 전차와 이를 끄는 마용 356건, 기병용 116건, 안마 116건,
보병용 2000건이 발견되었다. 병사가 도열해 있는 1호갱과 달리 2호갱은 궁노병, 기마병, 전차병이 포진하고 있다.
1976년 5월 11일에는 1호갱 서북쪽 25m 떨어진 지점에서 520m2 넓이의 3호갱이 발견되었다.
3호갱은 군사 지휘부로 추정되는데, 장군의 것으로 보이는 채색된 전차 1량과 갑옷 입은 보병용 64건, 마용 4건이 출토되었다.
이 밖에도 진시황릉 서북측에서 동마용과 동용이 딸린 대형 동전차가 1대 발견되었다.
일단 옆에 있는 중국 젊은이한테 부탁해서 인증샷,
세계의 8대 경이 중의 하나로 꼽히기도 하는 이 병마용들은 하나하나가 모두 훌륭한 예술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 이 병마용들은 진시황 친위군단의 강력한 위용을 과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진나라의 군사편제 ·갑옷 ·
무기 등의 연구에도 구체적인 자료를 제공하고 있으며,
이와 아울러 일부 도용에서 확인되는 북방 민족의 두발형식은 친위군단의 민족적 구성을 짐작하게 한다
중국 고고학자 그리고 학생들인지 젊은 친구들도 갱내에 앉아서 심각하게 무엇인가를 주고 받고 있다. 관광객들은 사방으로 둘러싸인 통로에서만 볼수 있다...
토기로 만들어서 인지 많은 병마용들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있다. 윗사진에 있는 사람들은 이것들을 연구하고 복원하는 사람들이다.
오른쪽말은 많이 깨졌네....
이것은 갱내에 있는것이 아니고 관광객들을 위하여 재현해서 만들은것. 유리 관안에 보관돼 있다.
이것도 관광객들을 위하여 사진을 찍을수 있도록 만들은것, 전문으로 찍어주는 사진사가 있다.
진시황!!!!! 그양반 과연 누구일까?
몇년전에 이연결이 나온 영화" 영웅" 을 보았다거나 삼국지 등등을 보신분은 대충 잘알겠지만 ....
6국을 합병하고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 왕 영정은 자신의 공적이 여느 성현보다 크며 심지어는
고대 전설 속의 삼황오제(三皇五帝)보다 더 월등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왕’보다 더 존귀한 칭호를 가지기로 했다.
그는 ‘삼황오제’에서 ‘황’과 ‘제’ 자를 따서 황제(皇帝), 거기다가 중국 최초의 황제이므로 ‘시’를 붙여서 시황제(始皇帝)라고 자칭했다.
자료에 따르면,
진시황의 탄생은 매우 위태로웠는데다 모종의 음모까지 깃들어 있었다.
그는 기원전 259년에 조나라에 인질로 가 있던 진나라의 왕족 자초(子楚)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자초는 조국 진나라에서 그리 세력이 크지도 않았고 관례상 죽을 때까지 조나라에서 벗어나지 못할 가능성도 컸다.
운명의 장난이 아니었다면 자초나 그의 아들 영정(嬴政)이나 역사에 단 한 줄도 채우지 못한 채 쓸쓸히 사라져야 했을 것이다.
진나라의 상인인 여불위가 조나라에 갔는데,
우연히 자초를 만나보고는 이렇게 소리쳤다고 한다. “특이한 상품(奇貨)이다. 사 놓으면 큰 이익을 보겠구나!”
그리고 한편으로는 자초에게 거금을 주어 조나라에서 인기를 끌도록 하고,
한편으로는 자초를 당시 진나라의 유력자였던 안국군의 양자로 들어가도록 공작했다.
여불위의 투자는 멋지게 성공,
안국군이 즉위하여(효문왕) 불과 사흘 만에 죽자 조나라에서 돌아온 자초가 왕위를 계승한다(장양왕).
이로써 최고권력의 으뜸가는 후원자가 된 여불위는 이후 3년 간,
그리고 다시 장양왕이 죽고 영정이 왕위에 오른 한동안 진나라의 최고실권자로서 세력을 떨친다.
<사기>에는 여불위가 이처럼 대담한 도박을 했을 뿐 아니라 세상을 몽땅 속이는 음모까지 꾸몄다고 적혀 있다.
자초에게 자신이 총애하던 무희를 보냈는데, 그 무희는 이미 여불위의 자식을 잉태하고 있었다. 그리고 낳은 아들이 바로 영정,
미래의 진시황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너무 교묘한 이야기로, 여불위와 자초의 긴밀한 관계,
그리고 한때 나는 새도 떨어트렸던 여불위의 세도에서 비롯된 뜬소문이 아닌가 하고 요즘에는 의심받고 있다.
사마천이 이를 <사기>에 기록한 것은 진시황을 폄하하기 위한 의도 때문이라고 보기도 한다.
또한 애초에 진나라 왕이 될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고 하는 자초가 대권을 잡는 과정도 기이하다.
여불위의 억지스러운 음모가 그렇게 척척 통할 만큼 당시의 진나라 왕실이 허술했다면 과연 천하통일을 이룰 수 있었을까.
실제 역사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을지 의문이 든다.
아무튼 13세에 왕이 된 영정은 10년 뒤에 태후(기록대로라면 본래 여불위의 애첩이었다고 하는)와 손잡고 역모를 꾀하던 노애를 처단하고 태후는 옹이라는 고을에 유폐시켜 버렸다. 그리고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을 물어 여불위까지 숙청했다.
1년 뒤 여불위는 자살한다. 이제 진나라는 명실공히 영정의 천하가 된 것이다.
그리고 그의 ‘천하’가 진짜 ‘온 천하’로 확대되기까지는 불과 15년이 더 걸렸다.
기록에 의하면 진시황이 애써 천하를 통일해 놓고도 겨우 50세의 나이로 객사했으며,
곧바로 제국이 무너지고 천하가 다시 전란에 휩싸이게 된 것은 그가 당치 않은 꿈을 꾸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세운 나라가 영원불멸하리라 주장했고, 자신은 1대 황제(시황제)이며 다음은 2대, 3대…로 무궁토록 이어지리라 했다.
수백 년 이어진 주왕조도, 춘추전국의 나라들도 허무하게 무너지는 모습을 본, 아니 그렇게 무너뜨린 장본인이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나라가 있으리라고 여겼다면 그것도 우스운 일이다.
그런데 그는 한 술 더 떠서 그런 주장과 스스로 모순되는 꿈을 꾸었다. 바로 불로불사를 염원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2대, 3대 따위는 없이 자신이 영원히 황제 노릇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연나라 출신의 노생에게 불로장생한다는 영약을 구해 오게 하고(노생은 “진나라는 호(胡) 때문에 멸망한다”는 예언만 전해주었다), 서복(徐福, 서불(徐巿) 또는 서시(徐市)라고도 한다)에게 어린 남녀 수천 명을 주고는 멀리 동쪽에 가서 불로초를 구해 오도록 했다(서복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는데, 그가 일본에 정착해서 일본 왕실의 시조가 되었다는 전설도 있다).
말년에 접어든 그는 점점 죽음이 두려웠던지,
암살을 피하기 위해(218년에 박랑사에서 암살을 모면한 적이 있다. 이 암살 음모를 꾸민 사람은 나중에 한고조를 도와 천하를 통일하는 장량이었다고 한다) 수도 함양 인근에 궁전 270개를 짓고 지하도를 통해 드나들며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비밀로 했다.
이 밖에 거대하고 화려한 본궁을 지었는데, 그 일부인 아방궁만 완성을 보았다. 그것만으로도 일찍이 볼 수 없었던 거대함과 화려함을 갖고 있어, 이후 ‘사치스러운 건물’의 대명사로 쓰이게 되었다. 또한 여산 기슭에 자신의 능묘를 조성하고, 거대한 지하 궁전을 만들어 죽어서도 생전에 못지않은 영화를 누리고자 했다.
결국 기원전 210년 9월 10일, 진시황은 다섯 번째로 천하를 순행하는 길에 나섰다가 사구(沙丘)에서 병을 얻어 죽고 만다.
<사기>에 따르면 이 때 진시황은 북방에 가 있던 태자 부소에게 황위를 물려준다고 유언했으나,
환관 조고와 승상 이사가 음모를 꾸며 다른 황자인 호해(胡亥)를 내세우고는 부소와 그를 지지하던 공신들을 살해하고 2세 황제를 탄생시켰다고 한다.
그 사이에 진시황의 시신이 함양으로 돌아오는 길이 지체되어 심하게썩어 냄새가 나므로, 절인 생선을 실은 마차를 써서 은폐했다고 한다. 전무후무한 통일제국을 세운 황제의 어이없는 마지막이었다.
제국 자체도 그 뒤 겨우 4년 만에 어이없이 멸망해 버린다.
영원할것만 같았던 진시황의 생애도 50세로 객사를 하였다고 하니 인생 허망할뿐입니다. 다 부질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러나 진시황은 그렇다 치더라도 저병마용을 만들고 노동에 동원되었던 민초들의 생애가 가엽기만 합니다.
아무도 모르게 할려고 병아용 들어가는 입구를 막아버려서 모두다 살아남지 못햇다는 이야기,,,,
민초들은 그네들의 생애동안 지도자를 잘 만나야지 엉터리 위정자 혹은 독재자 를 만났다가는 그네들의 의지 와는 상관없이 파리목숨입니다.
현재도 발굴작업은 계속되고 있다.
병마용을 다 돌아보고 나서 진시황릉으로 갔다,
저뒤로 보이는 야산 같은 것이 진시황릉이다. 모든 통제가 되어 있어서 근처에는 가지도 못한다,
도굴 방지를 위해서 진시황릉에는 수은으로 장치가 돼 있어서 만약 저 진시황릉에 들어갔다가는 수은 중독이 되어서 죽고 만다고 한다.
그런데 관리가 전혀 되어 있지 않고 말그대로 방치되어 있는 야산 같다. 멀리서만 나도 불로초 먹다만 불로초 잔가지라도 좀 주면 안돼요? 라고 중얼거릴뿐........
불로초 캐가지고 오라고 했으나 아직까지 도착을 안했다고 하니 아마도 불로초는 없는듯.......
찬물마시고 포기를 해야 합니다.
저 젊은 친구는 심양사는 친구인데 여기 시안에 혼자 와서 같은 여행팀에서 만난 친구다.
나도 심양에 2001년 도에 2년정도 살았는데 반가운 마음에 잠시 친구가 되었다.
이 친구는 오늘 여기 구경하고 내일은 내가 갔다 왔던 화산에 간다고 한다.
내가 엊그제 갔다 왔던지라 이리가서 저리가고 어쩌구 저쩌구 잘난척을 했다.
젊은 친구가 키도 크고 잘생겼다. 젊었을때 여행을 많이 하거라.
여행을 많이 하면서 많은것도 보고 많은것도 생각하고 많은것을 니 가슴에 담아라.
그러다보면 나이먹은 먼 훗날에 많은 재산이 되고 추억이 될것이다.
이친구야!!!! 화이팅이다.
一路顺风 !!!!!!!!!!!!!
병마용을 돌아보고나서 다음 경유지는 화청궁(당나라 현종하고 양귀비가 놀았다는 곳).
처음에 호텔에서 말할때는 밥값, 그리고 입장권을 다포함해서 320위안이라고 했는데 여기는 입장권이 별도라고 한다.
자그만치 300위안(한화 54,000원).
여기까지 와서 못들어가는게 좀 그렇지만.... 200위안 정도면 한번 들어가고 싶지만 배낭여행자라서 경비 절약 때문에 포기...
우리 여행팀이 대충 25명정도였는데 들어간 사람은 2-3명 정도.
다른 사람들은 그사람들 나올때까지 밖에서 기다려야 한다.
젠장!!!!!!
"화청궁" 문앞 광장에 가니 양귀비가 서있다. 대충 저걸로 만족해야 할듯...
이리저리 어슬렁거리다 보니 북경에서 온사람 하고 대화를 하게 되었다.
부부그리고 아들 둘하고 한가족이 차를 몰고 여기 까지 왔는데 이런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그사람들은 "장한가" 라는 뮤지컬을 보기 위해서 기다린다고 한다. 한가족이 그리 하니 매우 좋아보였다.
나한테도 그걸 보라고 한다, 얼마인데요? 했더니 200위안... 젠장!!!!!!!!!
다들 뭐가 이리 비싸? 비싸다고는 못하고 그냥 이리 돌아다니는게 좋아요. 했다. 한국사람이라고 하니 모두들 반갑다고 하면서 호의를 보인다.
한국 위상이 많이 높아졌다. 어깨가 뿌듯하다. 한국사람이라는게 자랑스럽기도 하고....
양귀비는 서시, 왕소군, 초선과 더불어 중국의 4대미인 중 한 사람이다.
사람의 마음을 미혹하고 중독시키는 아편 꽃에 양귀비란 이름을 붙인 걸 보면 그녀의 미모는 어지간히도 치명적이었던 것 같다.
본명은 양옥환이며 잠시 도가에 입문했을 때 법명은 태진(太眞)이다.
산시성 출신이지만 어린 시절 부모를 여의고 쓰촨성 관리이던 숙부 양립의 집에서 자랐다.
양옥환은 노래와 춤에 능하고 미모가 출중해 17세에 당 현종의 18번째 아들인 수왕 이모의 비가 되었다.
수왕 이모는 당 현종과 무혜비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로 황제계승권으로부터는 멀리 떨어진 수많은 왕자 중 한 명에 불과했다.
"화청궁" 문앞. 뒷쪽으로는 제법 높은 산들이 있고 위치가 좋아보인다. 당나라 현종..... 천하 절색 양귀비(현종의 며느리) 하고 노시니 좋으셨나요?
프랑스 할아버지 할머니 관광팀들...
양옥환과 수왕의 사이가 어땠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별 풍파 없이 양옥환이 수왕과 6년간 결혼생활을 이어간 것을 보면 그다지 나쁜 사이는 아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당 현종의 눈에 띄지 않았다면 양옥환은 수왕 이모와 천수를 다하며 해로하였을지도 모르고,
당나라도 혼란에 휩싸여 자멸의 길로 걸어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인박명이라는 말이 있지 않던가.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타고난 자의 운명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았다.
6년간 수왕 이모의 아내로 살던 스물세 살의 양옥환은 현종 처소의 환관인 고력사의 은밀한 방문을 받는다.
고력사는 총애했던 무혜비가 죽고 나서 외로워하는 현종을 위로하기 위해 중국전역의 미녀들을 백방으로 수소문하였다.
그 중에 수왕 이모의 아내 양옥환이 특히 아름답다고 들은 고력사는 그녀를 현종의 술자리로 불러낸다.
양옥환은 이 자리에서 음악 애호가였던 현종이 연주하는 가락에 맞춰 자신의 장기인 아름다운 춤을 선보였다.
춤이 끝나기 전에 남녀 간에 이루어질 수 있는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당시 예순을 바라보던 현종의 마음에 사랑의 불길이 당겨진 것이다.
현종은 양옥환이 아들의 아내라는 사실도 잊은 채 아름다운 그녀를 품기 위해 전전긍긍한다.
망설이는 양옥환을 고력사가 특별히 파견한 궁녀들이 설득하기 시작했고 물량공세와 구애가 이어졌다. 마침내 양옥환은 수왕을 버리고 그 아버지 현종의 여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양귀비는 현종의 사랑을 영원히 붙잡아 두려고 매번 새로운 화장법을 개발하였고 또 목욕을 즐겨 늘 희고 매끄러운 피부를 유지하였다고 한다.
양귀비는 날씬하고 가녀린 미녀와는 거리가 멀었다. 역사서에는 그녀의 용모를 ‘자질풍염(資質豊艷)’이라 하였는데 이는 풍만하고 농염하다는 의미이다.
통통한 몸매에 희고 매끄러운 피부를 가졌던 양귀비는 매일 온천물에 몸을 닦고 새로운 화장법으로 미모를 가꾸어 밤이나 낮이나 당 현종을 자신의 침실로 이끌었다.
백거이는 <장한가>에서 양귀비와 현종의 사랑을 이렇게 노래하였다.
연꽃 휘장 속에서 보낸 뜨거운 봄밤
봄밤에 너무 짧아 해가 높이 솟았구나.
황제는 이날 이후 조회에도 안 나오네
후궁에 미인들은 3천명이나 되었지만
3천명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네.
금으로 치장한 궁궐에서 화장을 끝내고 기다리는 밤
백옥누각에 잔치 끝나면 피어나는 봄,
하지만....
‘화무십일홍 권불십년(花無十日紅 權不十年 꽃은 열흘 붉은 것이 없고 권세는 10년을 가지 못 한다)’ 이란 말이 있듯이
양귀비의 권세도 오래가지 못했다. 양귀비의 몰락은 현종 외에 양귀비가 총애하던 두 남자 사이의 알력에서 시작되었다.
양귀비는 중국 변방 돌궐족 출신인 안록산 을 가까이 하였다.
안록산은 일개 군졸에서 시작하여 용맹으로 공을 세워 일약 중앙정계로 진출한 인물이었다.
통통한 몸매에 희고 매끄러운 피부를 가졌던 양귀비
20대의 양귀비는 40대의 안록산을 수양아들로 삼고 그를 매우 가까이 하였다.
일설에는 양귀비가 안록산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현종은 안록산과 양귀비의 관계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양귀비가 안록산을 총애하는 것만큼 더욱 안록산을 높은 지위로 등용하였다.
그것이 양귀비의 6촌 오빠인 양국충과 안록산 사이에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
양국충은 안록산의 성장에 위협을 느끼고 그를 제거하려 하였다.
이를 눈치 챈 안록산은 변방에서 난을 일으키고 곧이어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까지 쳐들어 왔다. 이것이 바로 안사의 난이다.
현종은 양귀비를 데리고 서쪽으로 피난을 떠났다.
장안에서 100여리쯤 가 섬서성 마외파에 도착했을 때였다.
성난 군중들과 현종을 호위하던 병사들은 나라꼴을 이렇게 만든 양귀비와 그 일족들을 처벌하기를 원했다.
현종은 사랑과 목숨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만 했다. 그는 양귀비와 함께 장렬히 죽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종은 양귀비를 보호하지 않고 그녀에 대한 백성의 분노를 수수방관함으로써 그녀에게 죽음을 종용하였다.
*** 중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양귀비 초상화 라고 합니다 ***
정치를 내팽개치고 나라를 몰락하게 만든 모든 책임을 양귀비에게 덮어씌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현종은 사랑보다는 자신의 목숨을 선택했다.
결국 현종의 뜻을 알아차린 환관 고력사가 그녀를 죽음으로 이끌었다.
양귀비가 자결 아닌 자결로 생을 마감하고 나자 현종은 그녀의 시체를 수습해 인근 조그마한 산에서 장사 지냈다.
양귀비가 죽고 간신히 피난길을 떠났던 현종은 황위를 아들 숙종에게 물려주고 태상황이 되었다.
이후 그는 숙종에게 안사의 난을 진압하도록 모든 것을 맡긴 채 자신은 양귀비만 그리워하면서 지냈다고 한다.
현종은 양귀비의 초상화를 앞에 두고 끝내 그녀를 지키지 못한 회한과 그리움 속에서 6년 세월을 보내다가 762년 78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 내일은 현종이 현장 법사에게 인도에 갔다온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지어 주었다는 대안탑, 그리고 장안성을 둘러봅니다.***
첫댓글 수고 많으셨네~^^
덕분에 진시황과 양귀비 공부 잘했네.
내년에도 계속 건강하게 좋은 모습으로 활동하길 바라네~^^
오케이... 감사...2015년도 얼마남지 않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