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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 菩薩十住
1, 體相
佛子야 菩薩住處가 廣大하야 與法界虛空等이니라 佛子야 菩薩이 住三世諸佛家하나니 彼菩薩住를 我今當說호리라
"불자들이여, 보살의 주처가 넓고 커서 법계 허공과 같느니라. 불자들이여, 보살이 삼계의 모든 부처님의 집에 머무나니 저 보살의 머무는 것을 내가 이제 마땅히 설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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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십주(菩薩十住) : 보살의 열 가지의 머무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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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상(體相) : 머무는 곳의 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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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보살주처(菩薩住處)가 : 보살이 머무는 곳이
광대(廣大)하야: 광대해서
여법계허공등(與法界虛空等)이니라 :법계와 허공계로 더불어 동등하다.
보살은 불교가 만들어낸 가장 이상적인 인격자다. 성불하여 부처가 되고도 다시 보살이 되어서 그 원력을 실천해 나간다. 보살의 목적은 성불이 아니라 보살행이기 때문이다.
화엄경도 전부 보살행이다. 그 중에 대표는 보현 보살행이다. 그러니까 화엄경이 광대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보살의 주처가 광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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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보살(菩薩)이
주삼세제불가(住三世諸佛家)하나니 : 삼세에 모든 부처님의 집에 머문다. 이 주(住)자는 주소할 때의 주자다. 우리가 사는 곳, 머무는 곳이다.
보살은 삼세 모든 부처님의 집에 산다. 부처님의 집에 사는 사람이 어떻게 부처의 행동을 하지 않겠는가.
스님들은 크던 작던 부처님 집에 산다. 토굴이든 본사든 전부 부처님 집에 살기 때문에 보살로서 부처님의 심부름꾼 역할을 하도록 되어 있다. 그것이 의무다.
피보설주(彼菩薩住)를 : 저 보살들이 머무는 곳을
아금당설(我今當說)호리라: 내가 지금 마땅히 설하리라.
2, 名稱
諸佛子야 菩薩住가 有十種하니 過去未來現在諸佛이 已說當說今說이시니라 何者가 爲十고 所謂初發心住와 治地住와 修行住와 生貴住와 具足方便住와 正心住와 不退住와 童眞住와 法王子住와 灌頂住라 是名菩薩十住니 去來現在諸佛의 所說이시니라
"모든 불자들이여, 보살이 머무는 것이 열 가지가 있으니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모든 부처님이 이미 말씀하셨고 앞으로 말씀하시며 지금 말씀하시니라. 무엇이 열 가지인가.
이른바 초발심주(初發心住)와 치지주(治地住)와 수행주(修行住)와 생귀주(生貴住)와 구족방편주(具足方便住)와 정심주(正心住)와 불퇴주(不退住)와 동진주(童眞住)와 법왕자주(法王子住)와 관정주(灌頂住)니라. 이것을 보살의 열 가지 주처라 이름하나니 과거. 미래. 현재의 모든 부처님들이 설하시는 바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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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名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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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불자(諸佛子)야 : 모든 불자야
보살주(菩薩住)가 : 보살의 주처가
유십종(有十種)하니 : 유십종하니
과거미래현재제불(過去未來現在諸佛): 과거 미래 현재 모든 부처님이
이설당설금설(已說當說今說)이시니라: 과거 미래 현재를 통해서 계속 설하고 있다. 이설은 이미 설하신 것, 당설은 마땅히 앞으로 설하실 것, 금설은 지금 설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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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자(何者)가
위십(爲十)고
소위초발심주(所謂初發心住)와 : 소위 초발심주와
치지주(治地住와
수행주(修行住)와
생귀주(生貴住)와
구족방편주(具足方便住)와
정심주(正心住)와
불퇴주(不退住)와
동진주(童眞住)와
법왕자주(法王子住)와
관정주(灌頂住)라
시명보살십주(是名菩薩十住)니 : 이것의 이름이 보살의 십주다.
자세한 설명은 뒤에 여러 번 나온다.
거래현재제불(去來現在諸佛)의 :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이
소설(所說)이시니라: 설하신 바니라.
3, 第一 發心住
(1) 發心十事
佛子야 云何爲菩薩發心住오 此菩薩이 見佛世尊의 形貌端嚴과 色相圓滿과 人所樂見과 難可値遇와 有大威力하며 或見神足하며 或聞記別하며 或聽敎誡하며 或見衆生의 受諸劇苦하며 或聞如來의 廣大佛法하고 發菩提心하야 求一切智니라
"불자여, 어떤 것이 보살의 발심주인가. 이 보살이 부처님 세존의 형상이 단정하고 상호가 원만하여 사람들이 보기를 즐겨하며, 만나 뵙기 어렵고 큰 위신력이 있음을 보며, 혹은 신통을 보며, 혹은 수기함을 들으며, 혹은 가르침을 들으며, 혹은 중생들이 온갖 고통 받는 것을 보며, 혹은 여래의 넓고 큰 불법을 듣고 보리심을 내어서 온갖 지혜를 구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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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발심주( 第一 發心住): 이름을 열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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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심에 열 가지 일이 있다. 이것을 보면서 내 나름대로 65퍼센트가 커트라인이라면 나는 몇 퍼센트나 발심을 했는가를 점검해 보았다. 내 나름의 신심, 수행력, 공부의 힘은 60퍼센트는 좀 섭섭하고 간신히 65퍼센트 발심은 하지 않았나 싶다. 이 세상에서 가장 이상적이고 환희심이 나고 기쁨이 넘치고 신심이 나는 복지재단을 꿈꾸고 있는 그 자체로 65점은 맞을 수 있지 않겠나 생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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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심십사(發心十事): 열 가지 일로 인하여 보리심을 내고 지혜를 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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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운하위보살발심주(云何爲菩薩發心住)오 : 무엇을 보살의 발심주라고 하는가.
차보살(此菩薩)이 : 이 보살이
견불세존(見佛世尊)의 : 부처님께서
형모단엄(形貌端嚴)과: 잘생긴 것을 보고 신심을 낸다.
첫번째로 형모단엄이 나왔다.얼굴이 잘 생겨야 된다. 전체 외형이 잘 생겼다는 뜻이다. 어디를 가도 불상은 잘 생겼다. 석굴암 부처님은 잘생겼고 서산마애불은 그 미소가 얼마나 아름다운가. 사바세계의 중생들은 상견중생이라 하여서 형상을 보아야 마음이 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색상원만(色相圓滿)과 : 색상원만은 부분부분을 말한다. 32상과 80종호 같은 것이다. 이것이 원만하고 잘생겼다. 그런데 잘 생겨도 창가에 비치는 마네킹처럼 감정이 없고 풍기는 향기나 냄새도 없어서 영 보고 싶지 않은 아름다움이 있다. 세상에도 그런 것이 많고 사람에게는 더욱 더 많다.
그런데 ‘뚝배기 보다 장맛’이라는 말이 있듯이 생긴 것은 이상해도 보고 싶고, 만나고 싶고, 같이 있고 싶고, 이야기 나누고 싶은 사람들도 있다. 그것이 아래 나오는 인소락견이다.
인소락견(人所樂見)과 : 사람들이 즐겨 보고 싶어하는 바. 부처님은 그런 조건을 다 갖췄다.
난가치우(難可値遇)와 : 만나기 어렵다. 불법 만나기가 어렵다. 우리는 과거생의 인연으로 불법과 이렇게 가까이 하지만 인연 없는 사람은 불법 만나기가 매우 어렵다. 평생 범어사 밑에서 장사를 하고 대대로 범어사 덕택에 살아가는 사람들이어도 부처님에게 절 한 번 안하는 이들이 수두룩하다. 천리만리 먼 곳에서 와서 부처님을 친견하고 동참하는데도 한 번도 절에 안 올라온다. 뿐만 아니라 절과 시비나 하려 드는 사람들도 많다. 스님들은 그런 경험을 많이 할 것이다.
유대위력(有大威力)하며 :부처님은 큰 위력, 위신력이 있다.
혹견신족(或見神足)하며: 혹은 신족을 본다. 이것은 신통력인데 신통력 중에서도 신족통이라고 봐야된다. 신족통은 여기 번쩍 저기 번쩍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도처에 있다. 이 법당에 가도 부처님이 있고, 저 법당에 가도 부처님이 있다. 이 절에 와도 부처님이 있고 저 절에 가도 부처님이 있다. 우리가 만든 부처님이나 실제로 나타나는 부처님이나 그 부처님이 그 부처님이다. 불자들은 그렇게 봐야 된다.
혹문기별(或聞記別)하며 : 혹은 기별 하는 것을 듣는다. 기(記)자가 수기를 준다는 뜻이다. 기별은 ‘여러분 모두가 부처다’‘ 사람이 부처다’‘당신은 부처님’이렇게 수기를 주는 것이다. 나는 늘 인불사상을 주창한다. ‘사람이 부처님이다’ ‘당신은 부처님’ 이라고 하는 인불사상에 관한 책도 두 권이나 냈다. 근래에는 ‘우리 모두는 부처다’라고 하는 책이 나왔다. 이 책은 부탄출신 티벳스님인 켄체스님이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열반적정(涅槃寂靜) 일체개고(一切皆苦) 라고 하는 사법인(四法印)을 가지고 쓴 책이다.
이 스님은 ‘더 컵’ 이라고 하는 영화도 만들었고 이번에 세 번째 만든 ‘바라’라고 하는 영화가 올해 부산 국제 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이 되기도 하였다. 서양교육을 받아서 지식이 이루 말할 수가 없고 불교사상이 무르녹아 있고 보통 똑똑하고 신심이 장한 스님이 아니다. 또 세계적인 영화감독이다.
그동안 달라이라마와 틱낫한 스님만 알았는데 불교계에 이러한 스님이 있다.
켄체스님이 쓴 책 ‘우리 모두는 부처다’는 여기 나오는 기별처럼 우리 모든 사람에게 수기를 주는 말이다. 부처님의 깊은 사상을 들여다보면 ‘우리 모두는 부처다’ 라고 하는 말이 틀림 없는 말이다. 이렇게 수기 주는 것을 들으면 기쁘고 그래서 발심한다는 것이다.
혹청교계(或聽敎誡)하며 :교계는 가르침이다. 화엄경도 배우고 법화경도 배우고 금강경도 배우고 하다못해 천수경도 배우고 이런 것을 듣게 됨으로 해서 발심하게 된다.
이 열 가지가 발심하게 된 동기들이다. 이 가운데 공감 가는 낱말 하나만 가지고도 발심을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스님들은 절을 맡아 있으면 무조건 가르쳐야 된다.
천수경부터 예불문 반야심경 하나씩 하나씩 금강경도 하나씩 하나씩 자꾸 가르쳐야 된다. 그것이 교계다. 가르치는 사람은 모르지만 배우는 사람은 문득 어느 구절에서 깨달음이 온다.
엊그저께도 어떤 신도님이 왔는데 근래에 ‘똑같다 똑같다’라고 하는 선지식의 법문에서 문득 깨달아서 왔다. 나도 당장 그 선지식이 법문하는 사이트에 찾아가서 들어가서 보니 ‘똑같다’는 법문을 하는데 그 거사분이 견성을 일찍했고 소견이 뛰어났다. 듣는 사람이 어디에서 깨달음을 얻을지 모르기 때문에 가르칠 필요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혹견중생(或見衆生)의 : 또 혹 우리가 발심하는 이유 가운데 한 가지는
수제극고(受諸劇苦)하며 : 중생들이 여러 가지 아주 힘든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을 보게 되므로 발심한다.
말썽은 있었지만, 충청도에 오웅진 신부가 백 몇 십만평 땅을 확보해서 최고가는 복지 시설을 만든 것도 어떤 노인이 고통받는 것을 보고 발심한 것이다. 여기도 중생이 극심한 고통 받는 것을 보고서 발심하게 된다고 하였다.
혹문여래(或聞如來)의 : 혹은 여래의
광대불법(廣大佛法)하고 : 광대한 불법을 듣고서 발심하게도 된다.
발보리심(發菩提心)하야 : 보리심을 발해서, 신심 환희심 자비심 지혜심 불심 그것을 한마디로 불심이라고 한다. ‘그 사람 불심이 장하다’는 말도 하는데 그것이 곧 보리심이다.
불심속에는 지혜와 자비가 다 있다. 보리심을 발해서
구일체지(求一切智)니라: 일체지혜를 구하느니라.
(2) 十種難得法
此菩薩이 緣十種難得法하야 而發於心하나니 何者가 爲十고 所謂是處非處智와 善惡業報智와 諸根勝劣智와 種種解差別智와 種種界差別智와 一切至處道智와 諸禪解脫三昧智와 宿命無碍智와 天眼無碍智와 三世漏普盡智니 是爲十이니라
"보살은 열 가지 얻기 어려운 법을 인연해서 마음을 내나니 무엇이 열 가지인가.
이른바 옳은 곳과 그른 곳을 아는 지혜와, 선악의 업으로 받는 과보를 아는 지혜와, 모든 근(根)이 수승하고 하열함을 아는 지혜와, 갖가지 이해의 차별을 아는 지혜와, 갖가지 경계의 차별을 아는 지혜와, 모든 것에 이르러 갈 곳을 아는 지혜와, 모든 선정과 해탈과 삼매를 아는 지혜와, 숙명을 걸림 없이 아는 지혜와, 천안이 걸림 없는 지혜와, 삼세의 번뇌가 모두 다한 지혜니, 이것이 열 가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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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종난득법(十種難得法):열 가지 얻기 어려운 법을 말미암아 마음을 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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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부처님을 표현할 때 열 가지 힘을 가지고 이야기 한다. 또 18불공법이라고 해서 18가지 특수한 법을 이야기 할 때도 그 속에 십력이 들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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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보살(此菩薩)이 : 이 보살이, 발심한 보살이다.
연십종난득법(緣十種難得法)하야 : 열 가지 얻기 어려운 법을 인연을 해서
이발어심(而發於心)하나니: 불심을 내게 되나니
하위(何者)가
위십 (爲十)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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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시처비처지(所謂是處非處智)와 : 처(處)는 도리, 또는 이치다. 시처(是處)는 옳은 도리, 비처(非處)고 그른 도리다. 당연히 해야할 일을 시처라고 하고 그른 이치, 사람이 해서는 안될 일을 비처라고 한다.
시처 비처에 대한 지혜가 있어서 앉을 자리 설 자리를 아는 지혜만 있다고 해도 괜찮은 것이다.
스님들 중에 더러 속없는 이가 있어서 끼어야 할 곳과 그렇지 못한 곳을 모르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서 5회 동창회를 해서 열 명이 모인다고 하자고 했는데 그 중에 자기와 친한 사람이라고 ‘내가 잘 아니 같이 식사해도 된다’고 데리고 오는 사람이 있다. 그렇게 한 사람도 틀렸고 따라온 그 친구도 틀렸다. 이것은 한 예이기는 하지만 시처와 비처, 앉을자리 설자리를 분별 할 줄 모르는 것이다. 설사 친하다고 하더라도 거기는 올 자리가 아니다. 이런 것을 꼭 이야기로 해줘야 아는 사람들이 있다,
선악업보지(善惡業報智)와 :선악 과보에 대한 것이다.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라고 해서 흔히 우리가 인연과보를 이야기할 때 잘 쓰는 말이다.
제근승열지(諸根勝劣智)와 : 중생들의 근기가 높고 낮음을 아는 지혜를 제근승열지라고 한다. 불교를 이해하는 근기가 따로 있다.
씩씩하고 대장부 같고 통이 큰 사람들이라고 해서 소견이 바르고 신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다. 용감하고 씩씩하고 겁없는 사람이 상근기인 것은 깡패사회, 전쟁터에서나 그렇다.
불법에서는 연약하고 쪼그라든 사람이라 하더라도 대승법을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을 가졌으면 그 사람이 상근기다. 그것을 잘 알아야 된다. 스님들이 신도들을 대할 때도 겉모양을 보고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
종종해차별지(種種解差別智)와 : 중생들의 이해가 각각 차별한 지혜다. 멀쩡해 보이는 사람들이 소견이 아주 꼭 막힌 사람이 있다. 어떨 때 보면 참 어이가 없다. 중생들의 가지가지 이해의 차별을 아는 지혜와
종종계차별지(種種界差別智)와 : 가지가지 경계를 잘 안다. 사람들의 경계가 각각 차별하다. 공부하는 데 있어서 서로 친하고 소통이 잘 된다고 다른 분야에도 소통이 잘 되리라고 생각하면 안된다.
서두에 내가 이 세상에 가장 이상적인 복지단체 이야기를 했지만 그것도 쉽게 납득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사람들은 전부 나름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종종계차별이다.
일체지처도지(一切至處道智)와: 평소에 행한 업으로 어디에 가서 나게 되는가를 아는 지혜.
우리는 막연하게 ‘저사람은 수행을 잘 하니까 다음 생에도 수행할 사람으로 태어날 것이다’정도로만 안다. 그러나 정작 그런지 안 그런지는 모른다. 여기서 지혜라고 하는 것은 그런 것 까지도 잘 아는 지혜다.
이것에 대해 조사스님들이 준 힌트가 중처편추(重處遍墜)라고 하는 말씀이다.
나무를 한 토막 떨어뜨려도 뿌리와 같이 무거운 곳으로 먼저 떨어지듯이 우리도 죽어 다시 태어날 때, 살아 생전의 업과 인연에 따라서 무거운 쪽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다.
‘십념왕생(十念往生)’이라고 해서 죽을 때 부처님 이름을 열 번 부르면 극락에 간다고 하는 말도 거기에서 나온 말이다. 평소에 염불을 많이 하면 죽는 순간에도 염불할 수 있다. 그러면 그 인연이 무거운 것이다. 그런 힘은 평소에 닦아야 되는 힘이다.
속으로 무슨 무거운 인연을 지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수십 년 같이 산 부부도 죽을 때 남자가 죽으면서 다른 사람 의 이름을 부르며 죽더라는 이야기도 있다. 마음속으로는 늘 그 사람과 인연을 무겁게 하고 살았다는 뜻이다.그런 것이 중처편추다.
그러니까 누가 공부를 얼마나 했는지도 사실 모르는 일이다. 속으로 공력 쌓고 공부 인연을 지어놓은 것을 누가 알겠는가. 사람들은 빼앗아 가지도 않는데 공부자랑을 잘 안한다.
제선해탈삼매지(諸禪解脫三昧智)와: 선정과 해탈과 삼매를 통달한 지혜
숙명무애지(宿命無碍智)와 : 숙명통을 해서 걸림이 없는 지혜,이것을 알기가 쉽지가 않다. 100퍼센트 도통을 해야 과거생 미래생의 숙명을 안다는 것이다.
그러한 숙명에 걸림이 없는 지혜와
천안무애지(天眼無碍智)와 : 천안통에 대해서 걸림이 없는 지혜
삼세누보진지(三世漏普盡智)니 :과거생 현재생 미래생의 모든 번뇌가 다해버린 지혜
시위십(是爲十)이니라 : 이것이 열 가지니라.
제1발심주에서 보살은 이 열 가지 얻기 어려운 법을 인연해서 발심을 한다.
(3) 勸學十法
佛子야 此菩薩이 應勸學十法이니 何者가 爲十고 所謂勤供養佛과 樂住生死와 主導世間하야 令除惡業과 以勝妙法으로 常行敎誨와 歎無上法과 學佛功德과 生諸佛前하야 恒蒙攝受와 方便演說寂靜三昧와 讚歎遠離生死輪廻와 爲苦衆生하야 作歸依處니라 何以故오 欲令菩薩로 於佛法中에 心轉增廣하고 有所聞法에 卽自開解하야 不由他敎故니라
"불자여, 보살은 마땅히 열 가지 법을 배우기를 권할지니 무엇이 열 가지인가.
이른바 부지런히 부처님께 공양함과, 생사에 머물기를 좋아함과, 세간을 주도하여 악한 업을 버리게 함과, 수승하고 미묘한 법으로 항상 가르침을 행함과, 위없는 법을 찬탄함과, 부처님의 공덕을 배움과, 모든 부처님 앞에 태어나서 항상 섭수(攝受)함을 입음과, 방편으로 적정삼매를 연설함과, 생사윤회를 멀리 떠남을 찬탄함과, 고통 많은 중생을 위해서 귀의할 곳이 되는 것이니라."
"무슨 까닭인가. 보살들로 하여금 부처님의 법 가운데서 마음을 넓게 하며 들은 법을 스스로 이해해서 다른 이의 가르침을 말미암지 않게 하려는 연고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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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학십법(勸學十法): 열 가지 법을 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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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심주에서 ‘이 열 가지 법은 꼭 배워라’ 하고 권하는 것이다.앞으로 계속 권학십법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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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차보살(此菩薩)이 : 이 보살이
응권학십법(應勸學十法)이니: 응당히 열 가지 법 배우기를 권하나니
하자(何者)가
위십(爲十)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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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근공양불(所謂勤供養佛)과 : 부지런히 부처님께 공양하는 것이다. 일체 사람, 일체 생명이 모두 부처님이라고 공양하고 받드는 것, 이것은 꼭 필요한 말이다.
낙주생사(樂住生死)와 : 생사에 머물기를 좋아해야 된다. 중생인 우리는 생사를 벗어나려고 하지만 보살은 생사에 머물기를 즐긴다. 예를 들어서 군대나 형무소에 위문법회를 갈 때 우리는 아주 기쁜 마음으로 간다. 법문하러 갈 때는 형무소도 교도소도 기쁜 마음으로 가듯이 보살은 생사에 있어서 그런 차원이 된다는 것이다.
주도세간(主導世間)하야 : 세간을 주도한다. 사회적으로 대통령이 된다든지 아니면 장관이 된다든지 국회의원이 된다든지 어느 단체의 큰 단체장이 되면 일하기가 쉽고 자기 뜻을 펴기에 좋다.
고려 말에 불교에 하도 데인 조선시대 유생들은 어떻게 하더라도 유교로써 국가를 운영하는 정치 철학을 삼으려고 하였다. 그런데 내가 예전에 조선왕조실록을 읽어보니 조선은 내불외유(內佛外儒)라고 해서 정승이라든지 기타 벼슬하는 사람들은 전부 유교를 숭상하였지만, 왕궁이나 안으로는 불교를 숭상했다. 조선 오백년에 제일 나쁜 임금이라고 하는 연산폭군도 양주에 있는 어느 절에 유생들이 불상을 파괴한 일이 생기자 그 유생에게 곤장 백대를 치게 했다. 조선시대가 시작된지 100년이나 지난 때이고, 당시에 불상의 목을 자르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었는데도 그렇다. 연산군 때도 그 정도로 불교를 보호했다.
조선시대 스님들이 곤욕 당한 것은 구석구석에 이야기가 많다. 얼마나 심했던지 금강산에서 관리를 메고 내려오던 스님이 관리와 함께 자신도 웅덩이에 빠져 죽어버린 일화라든지 하는 이야기들도 많이 전해진다.
그런데도 일제시대가 될 때까지 궁의 상궁들은 절로 드나들었다. 이들 중에는 정치가 뒤바뀌어 오갈 데가 없는 상황이 되자 비구니가 된 예도 많다.
절에서는 궁에서 온 사람들을 대우해야 하는데 고기를 쓸 수 가 없으니 최대한 채소를 가지고 궁중 음식을 만든 것이 요즘 사람들이 말하는 ‘사찰음식’이다. 이것은 궁중음식이지 사찰의 전통적인 음식이 아니다. 그런 것을 모르고 사찰음식이라고 해서 국제 사찰음식 박람회도 열고 별별 일을 많이 벌린다. 이야기가 난 김에 말한다면 절에서의 공양 전통은 일식삼찬이라고 딱 나와 있다. 밥 하나에 세 가지 반찬이면 끝이다. 우리 어릴 때만 하더라도 절의 부엌에는 큰 솥 옆에 ‘금연(禁煙)’이라고 보일듯말듯한 붓글씨가 써 붙여져 있었다. 사찰 부엌에서 담배를 피울리도 없으니 연(煙)자는 담배를 피우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연기 피우지 말라는 뜻이다. 때 아닌 때 불을 때지 말라는 뜻이다.
스님들이 객질을 다니면서 때 아닌 때 절에 가면 절대로 밥을 주지 않는다. 그 절에 사는 사중 스님들도 때가 넘어서 오면 굶는다. 또 밥을 달라고 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옛날에는 연기를 안 피우면 물 한 그릇 못 끓일 때니까 연기를 꼭 내야 물 한 그릇을 끓여도 끓일 수가 있다. 나무도 귀하고 대중 처소에 함부로 이 사람 저사람이 연기를 피울 일이 아니기 때문에 때 아닌 때는 불을 피우지 말라고 금연이라고 한 것이다.
그것이 절 집안 음식전통이다. 궁중음식이 변형된 ‘사찰음식’으로 요즘 시대에 맞게 교화 방편을 쓰는 것은 좋지만 그 뿌리는 알고 있어야 한다.
영제악업(令除惡業)과: 악업을 제하게 하는 것과
이승묘법(以勝妙法)으로: 수승하고 미묘한 법으로써
상행교회(常行敎誨)와 : 항상 가르침을 행해야 된다. 승묘법이라고 하는 것은 대승법이다. 소승법 가르칠 시간이 없다.
대승경전만 해도 얼마나 많은가. 화엄경만 해도 얼마나 많고 법화경만 하더라도 얼마나 많고 금강경만 해도 1, 2년에 끝낼 일이 아니다. 그래서 승묘법이라고 했다. 대승법으로써 반드시 교회, 가르쳐야 된다.
발심하려면 이 일을 해야 된다.
탄무상법(歎無上法)과 : 최상가는 법을 찬탄해야 된다. 좋은 법이 있으면, 화엄경이 있으면 좋다 좋다 하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좋다고 선전하는 것이다.
학불공덕(學佛功德)과 : 부처님의 공덕을 배우는 것이다.
생제불전(生諸佛前)하야 :부처님이 과거에 어떻게 해왔다고 하는 하는 것을 통해서 부처님의 공덕을 배운다.
항몽섭수(恒蒙攝受)와: 부처님 앞에 항상 태어나서 항상 섭수함을 받는다. 옛날 스님들 발원문 같은 데 보면 ‘항몽섭수’라는 말이 많다.
방편연설적정삼매(方便演說寂靜三昧)와: 방편으로 적정 삼매를 연설한다.
방편으로 왜 적정삼매를 연설하는가. 대승불교 특히 화엄경 불교는 보살행을 중심으로 이야기 되고 있는데 삼매에만 빠져서는 보살행이 제대로 발현이 되지 않는다. 보살행을 왕성하게 하려면 삼매만 즐겨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래도 삼매를 주장해야 될 때가 있다. 그래서 방편으로써 적정 삼매를 연설한다는 말이다.
삼매만 자꾸 주장하는 것은 소승이다. 지금 선불교는 견해는 높지만 실천적으로는 소승불교다. 새로운 대승불교가 나와야 된다. 자비구현 다음에 제도중생이다. 중생을 제도하는 일들이 바람직한 대승불교다.
찬탄원리생사윤회(讚歎遠離生死輪廻)와: 생사윤회를 원리하는 것. 멀리 떠나는 것을 찬탄한다.
위고중생(爲苦衆生)하야 : 고통받는 중생을 위해서
작귀의처(作歸依處)니라 : 귀의처가 된다. 우리 사찰은 고통받는 중생들에게 귀의처가 되어야 한다. 신도들의 기도처가 되고 귀의처가 되고 편안히 안식할 곳이 되어야 한다.
사찰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어떤 중생이 오든지 어루만져 주고 쓰다듬어 주고 위로해 주고 안식하게 해 주어야 한다. 그것이 작귀의처 역할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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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고(何以故)오 : 왜 그러냐
욕령보살(欲令菩薩)로: 보살로 하여금
어불법중(於佛法中)에 : 불법 가운데서
심전증광(心轉增廣)하고: 마음이 더욱더 불어나고, 자꾸 넓어져야 된다.
우리 육신은 한 번 타고 나면 아무리 운동을 한다 하더라도 키가 더 커지는 것도 아니고 그저 근력만 좀 세질 뿐 얼굴이 바뀌는 것도 아니다. 몸은 유형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음은 무형해서 수련하는 대로 바꿀 수 있다.
심전증광이라는 말이 불법을 통해서 마음이 더욱더 자꾸 불어나고 커져야 된다는 말이다.
이 권학십법의 결론은 다음에 나오는 ‘유소문법에 즉자개해하야 불유타교고’라고 하는 구절이다.
유소문법(有所聞法)에 : 법을 들은 바가 있음에 있어서 우리가 경을 보든지 혼자 있든지 어디서 법문을 듣든지 강의를 듣든지 하는 그런 문법, 법을 들음에 있어서
즉자개해(卽自開解)하야 : 스스로 열어서 이해가 되어져야 한다. 결국은 여러분들이 듣고 거기서 스스로 납득이 가고 수긍이 가고 고개가 끄덕거려 지고 무릎이 쳐져야 된다.
불유타교고(不由他敎故)니라: 다른 사람의 가르침을 말미암지 않기 때문이다. 불교는 자력종교나 타력종교냐 그걸 가지고 이야기 하는 경우가 많다. 관세음보살을 부른다, 지장보살을 부른다, 아미타불을 부른다는 것은 타력불교다. 그러나 이치는 자력이다. 중생들 근기가 하도 나약하다 보니까 타력쪽으로 유도를 하는 것이다.
결국 극락을 가도 자력으로 가고 관세음보살의 영험을 얻어도 결국은 자력으로 하는 것이다.
그래서 보문품을 해석할 때 게송에 ‘염피관음력으로’ 하는 구절이 있는데 이것을 ‘염피관음력하야’로 해석하지 않는다.
‘관세음보살을 생각하는 힘으로’ 하는 것은 나의 힘이다.
‘관세음보살을 염하는 그 힘으로’ 라고 해석해야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염피관음력하야’ 라고 해서 ‘관세음보살의 힘을 생각해서’ 라고 하면 안된다. 그것은 어떤 제3의 관세음보살의 힘이 있어서 나에게 부여되는 것처럼 이야기 된 것이기 때문에 맞지 않다. ‘염피관음력으로’ 해야 맞다.
관세음보살을 염하든지 화두를 들든지 법화경을 외우든지 화엄경을 공부하든지 무엇이든 간에 내가 하고, 내가 한 그 힘으로, 이런 뜻이다.
결국은 이치대로 이야기 하면 자력이다. 그러나 불교 안에서 타력이야기가 많다. 지장보살을 외우면 어떻게 된다 관세음보살을 읽으면 어떻게 된다. 아미타불을 염불하면 어떻게 된다는 식이다. 십념왕생이라고 해서 마지막에 죽을 때 열 번 아미타불을 부르면 왕생극락한다고도 해 놓았다. 그런데 죽는 순간, 숨이 넘어가는 순간에 아미타불을 부를 수 있는 그 힘이라면 혼자 실컷 극락에 가고도 남는다. 그렇게 염불하는 사람은 염불하느라 부처님이 와도 볼 시간이 없다. 경전에는 부처님이 손을 내밀면 그 손을 붙잡고 극락에 가는 것처럼 유혹해 놓았지만 죽는 순간에 죽음까지도 초월하게 염불을 강력하게 할 수 있다면 그것은 부처님이 와도 쳐다보지 않는 자신의 힘이다. 결국 이치는 자력이다. 이치는 자력인데 근기 약한 사람들을 위해서 타력을 많이 권하고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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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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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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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나무 대방광불화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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