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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님과 여려번 편지를 주고 받았는데, 심산님이 수련하시는 뉴저지 홍무관은 성인도 9급부터 시작하고, 승급심사도 아주 까다로워서 탈락률이 높다네요. 리포트 제출까지 해야된데요.저번에 편지로 보내오신 심산님의 승급심사 리포트를 올려봅니다.
검도입문(劍道入門)의 동기(動機).
張 勳
진한 사랑에 푹 빠져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다. 이제는 물릴 수도 없다. 한마디로 푹 빠져 살아야 할 운명인 것 같다. 그것이 숙명이라면 거부치 않고 기꺼이 그렇게 살고 싶은 게 지금의 간절한 심정이다.
불혹의 나이를 서너 해나 넘긴 나이에, 뒤늦게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에, 낯 뜨겁기도 하다. 사랑을 한다는데 나이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아마 모르는 사람들은 불륜이라고 단정하고 그렇게 쉽게 오해할 수도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난 네 줄기 대나무를 묶은 죽도에서 배어 나오는 절제된 그윽함, 그리고 세상을 가르고 외치는 단호함에 매료되어 있다. 죽도의 단조롭지만 아직도 그 맛을 다 느끼기에는 역부족이지만 그 속에 자리잡은 현란함을 느끼기 까지는 긴 시간을 필요로 했던 것 같다. 아마도 그 시간은 한참이나 거슬러 올라 간다.
검도를 가깝게 본 적은 고등학교(서울高)와 대학교(延世大)에 겁도부가 있는 관계로 어렴풋하게나마 알기는 했으나 실제로 접하지는 못했다. 그냥 스치는 바람처럼 알 듯 모를 듯 검도와의 대면은 시작되었었나 보다.
한국남자들이 한 번쯤은 읽는 무협지를 통해 가끔은 검을 휘두르는 주인공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질 즈음에 ‘미야모도 무사시’란 소설도 읽고 또 다시 희미한 검객의 그림자를 느끼기도 했다. 아마도 이 무렵인지는 모르지만 이미 검도란 씨앗이 내 마음 속 어디엔가 심어졌었나 보다.
사회에 첫 발을 디디기가 무섭게 그 빠른 시간의 흐름 속에 검도라는 단어가 되뇌여지는 일은 없었다. 바쁜 청년기를 보냈지만 검도는 나와는 별개였고 생각에도 없었다. 굳이 검도와의 연을 찾으라 한다면 ‘모래시계’라는 검도열풍의 회오리가 한국을 휩쓸 무렵, 잠시 검도라는 단어를 생각했던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4년전 한국에서 벤처기업이 열풍처럼 생겨날 때 난 그 중심에 있었다. SMI(Sports Management International)이란 스포츠마케팅사를 설립, 정신 없이 뛰어다닐 때, 회사발전을 위해 회사와 직원들간의 결속을 다지는 방법을 찾다가 ‘검도’를 매개체로 삼기로 했다. 그 같은 결정이 있기까지는 아마도 그 때까지도 가슴 속에 검도라는 불씨가 살아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회사가 여의도에 위치한 관계로 근처의 聖文館 문을 두드렸다. 전 직원의 의무적인 아침검도가 시작됐다. 16명 전 직원이 오전 7시 검도장에 집합했다. 남녀가 따로 있을 수 없었다. 사장인 나의 고집스런 방침에 검도장에 나오지 않은 직원은 결석, 늦으면 지각으로 처리됐다. 8시에 연습이 끝나면 샤워 후 콩나물해장국을 먹고 업무에 임하는 것이 SMI 첫 일과였다.
인터넷시대에 반강제적으로 실시된 집단검도에 많은 직원들의 반발이 뒤따랐음은 당연했다. 고객접대 차 롬싸롱에 갔다가 곧바로 검도장으로 나 온 영업사원을 비롯, 늦잠(?)을 자다가 이문동에서 택시까지 타고 날아 온 여직원은 택시비가 월급보다 더 많이 나온다는 볼멘 소리 등이 끊이지 않았다. 호면을 뒤집어 쓴 채로 전 날 먹은 술을 토해 내는 직원과 그냥 주저 앉아 버리는 일에도 사장은 무식(?)하게도 검도훈련에 회사규정까지 적용시켜 고가를 산정했다. 당연히 그들의 불만은 폭발직전까지 차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무릎을 꿇고 묵상에 참여하는 초보 검객의 엄숙한 모습 속에 차츰 검도의 마력에 흡수되어 갔다. 어느덧 16명의 초보검객들은 자유연습에 임하는 실력까지 올라갔다. 아마도 ‘공식적으로 허락된 사장 머리 때리기’에 더 한 매력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야단친 다음 날 사원들의 머리치기의 강도가 높아 지는 까닭은 아직도 수수께기다. 하지만 그로 인해 결속된 직원들간의 의리와 정은 지금껏 이어져 오고 있다.
아쉽게도 벤처위기라는 회오리에 말려들며 사업체는 정리되고 난 미국으로 오고 말았다. 이 후 검도는 마음 속에는 고이 간직된 추억이었다.
새로운 비즈니스가 정상적으로 자리잡기까지 검도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다. 지난 겨울 아주 잠시 弘武劍道館에 나섰다 호구에 쌓인 먼지를 틀 틈도 없이 흐지부지 돌아서고 말았다. 어느 정도 안정된 생활이 이뤄지자 검도에 대한 열망이 꿈틀되기 시작했다.
아버지를 닳아 비만스런 아들을 보면서 운동의 필요성을 느껴, 검도를 권유했고 아들은 만화영화 ‘samurai Jake’과 역시 사무라이 만화 ‘Kenshin’에 빠져 있어 쉽게 Yes 했고 또 기대치를 넘어 검도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집에서 까지 기합을 지르고 죽도를 휘두르고 난리다.
아들 앞에서 체면도 있고 늘어나는 체중도 줄여야 하고 건강상 다시 검도를 하기로 맘을 먹고 弘武館에 다시 나섰다. 맘 속으로는 최소한 1년간은 기권하지 않고 나가겠다고 다짐을 거듭했다. 다시 검도를 시작한 이후 무엇보다도 쉽게 포기하지 않은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부자간의 대화도 자연 검도에 대한 부분이 절대적이고 이로 인해 아내는 소외감(?)을 느끼고 있을 정도다. 검도가족이 되자고 아들과 협공을 해도 아내는 아직까지는 검도의 짜릿한 참 매력을 모른다. 언젠가는 온 가족이 죽도를 맞잡는 그 날이 오리라 믿는다. 아내가 남편을 검도에 빼았겼다는 질투 때문에 검도하지 않는 건지 모르지만 말이다.
검도의 깊은 참 맛을 느끼기에는 아직 초보 수련자이다. 하지만 무질서하게 휘두르는 죽도가 미완성이지만 차츰 궤도를 찾아가는 모습과 타격과 함께 마음껏 소리치는 기합 속에서 한 순간 일탈을 벗어날 수 있다. 삶의 찌든 스트레스를 날려 보내고 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도복을 입는 순간부터 현실 세계를 떠난다. 나 만의 공간이 만들어 지는 것이다. 이 공간은 수백년 전의 세계이기도 하고 조금 전 현실에서 허상과 위선으로 얼룩진 내 모습을 보며 과감히 베어 버리고 새롭게 정화시킨다. 재탄생되는 내 모습이 매번 마련되는 곳이 검도장이기도 하다.
원칙을 강조하는 정통파 관장님의 가르침과 주변의 여러 고수들의 정성스런 지도 속에 40대 초반의 초보 검객이 심신적으로 강건해 지고 정결해 짐을 느낀다. 더욱이 짧은 시간이지만 땀 흘린 후 침잠할 수 있는 묵상시간에는 내 자신의 할 일이 더욱 명료해지고 오늘과 내일이 정리되고 있다.
이 같은 매력을 느끼고 빠져있기에 왼쪽 발목과 아킬레스건이 시원찮아 격일로 침을 맞아 가면서까지 검도장에 기를 쓰고 나가고 있는 까닭이다. 집안에는 각종 파스와 호랑이기름(虎票萬金油), Bengay 냄새로 진동하고 아내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지만 한 번 빼든 칼을 그대로 집어 넣지 않겠다는 심정으로 올 한해는 기꺼이 채워볼 작정이다.
검도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40을 훨씬 넘긴 나이에 사랑에 푹 빠지게 하는 지 그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 그 매력을 모르면 아마도 불행이지 싶다.
꺾인 40대들이여!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검을 잡으라!!! 그리하면 희망과 용기, 사랑, 행복을 느끼게 될 것이니!!
<이상은 검도에 입문하게 된 동기에 대한 제 자신의 감상문입니다>
道場五禮
1.國旗에 對한 禮 : 국민의 일원으로서 국가에 대한 애국심의 앙양을 위하여 국기에 대한 경의를 표현한다. 수련의 시작과 끝에 하며 오른 손을 왼쪽 가슴에 대는 인사법이다.
2. 스승(師傅)에 對한 禮 : 자신을 가르치는 선생님에 대한 감사와 존경을 표현하기 위하여 수련이 시작하여 국기에 대한 예를 한 후와 수련의 종료시에 국기에 대한 예를 하기 전에 하며 입례 혹은 좌례로 한다. 도장을 출입할 때에도 정중히 인사를 하고 항상 가르침에 감사하고 겸허한 마음으로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3. 相互間의 禮 : 같이 검도를 하는 선배, 후배, 동료간의 예이다. 도장을 드나들 때나 연습, 경기를 할 때에도 항상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으로 임해야 한다. 수련 전이나 수련 후에는 꼭 예를 갖추어 반가움과 감사의 인사를 한다. 수련이 끝난 후 사범은 사범끼리 단과 나이, 지위를 감안하여 자리를 정해 서로 감사의 표시를 하고 당시의 수련내용에 관한 덕담을 하게 되고, 이때 관원들은 같이 칼을 맞댄 상대방과 감사의 인사를 주고 받는다. 물론 이때도 단이나 나이 등이 적은 사람이 먼저 찾아가 감사를 표시하는 것이 좋다. 이후에 선생님들에게 지도를 받은 사람들은 다시 찾아가 가르침을 구하며 인사를 올린다. 사람이 적을 경우에는 한 명씩 고단자부터 인사를 드리는 것이 좋으나 많은 사람일 경우에는 너무 번거로울 수가 있으므로 단체적으로 관원들이 선생님들에게 같이 인사를 올릴 수도 있다.
4. 道場에 對한 禮 : 도장을 드나드는 사람들은 들어오고 나갈 때 반드시 자신의 수양처인 도장에 겸허한 마음과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는 뜻으로 처음 들어올 때나 수련후 나갈 때에 도장의 출입구에서 가볍게 약 15도 정도의 입례를 한다.
5. 弟子나 後輩에게 하는 禮 : 자신이 검도로써 선배이거나 사범이라도 거만하게 행동을 하며 인사를 받기만 하는 것이 제대로 된 예가 아니다. 후배나 제자에게도 항상 상호 존중하는 마음으로 모범적으로 예를 실천하여야 한다.
張 勳 (弘武劍道館 初步 修練生)
예절을 강조함에 있어 지나침은 없다. 그것은 동서고금을 통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동양과 서양 또한 양식과 방법의 차이는 있지만 상대방을 존중하는 기본마음은 똑 같기 때문일 것이다. 무사도와 신사도 그 바탕은 마땅히 존경일 것이다.
검도를 통해 얻게 되는 소중함은 바로 예절에 대한 자각이다. 禮로서 시작해 禮로서 끝나 道를 이루게 된다는 검도. 아직은 검도에 갓 입문한 단계이지만 정확한 검도의 예가 익숙하지 않지만 느낄 수는 있다.
검도를 하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 ‘예절”이라는 그 분위기에 젖게 됨을 알수 있다. 도장에 들어서면 의렴풋히 느끼는 것은 질서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정렬로부터 시작되는 검도훈련시간은 엄격하게 흐르는 순서에 의해 실시된다. 그것은 질서이고 더 나아가면 모든 것이 예절에서 부터 비롯 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떻게 보면 획일적일 수 있지만 위계에 대한 질서에서부터 모른 것이 하나같이 일맥상통함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숨이 꼴딱 꼴딱 넘어가는 연습시간, 특히 사범님과 마주치면 천당과 지옥을 수차례 왕복하는 기분이다. 특히 사범님의 “마지막 한번 더”라는 말은 이제 온 몸을 짜릿하게 만든다. 매혹적이기까지 하다. 아니 황홀하다는 표현이 더 맞다. 수차례(아니 수십번)거듭하는 마지막 구령에 체력이 모자라 다리는 하늘거리고, 숨이 턱을 차고, 눈의 흰자위가 뒤집힐 즈음, 사범님은 검을 거둔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속에서 상대를 배려하는 훈훈함을 느낄 수 있다. 강한수련을 통해 실력을 꾸준하게 향상시키기 위한 훈련방법이지만 그 또한 예절의 연장 선상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배려들은 속속들이 지친 옴 몸(?)을 통해 느끼고 있으며 여러 고수들 또한 수장의 이 같은 원칙과 철학을 알기에 대물림 하는 전통이 되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러기에 작은 사범님들의 지도도 열성적이고 뜨겁다. 고수들의 가르침에는 이 같은 예절이 배어 있기에 그들의 위상이 더욱 높아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검도훈련을 통해 가장 크게 가슴에 와 닿는 느낌은 인사다. 처음과 끝이 인사다. 훈련 후 무릎 굻고 상호간에 예를 갖추는 모습에서 서로 깊은 감사함의 예절을 행한다. 이 모습에서 옛 우리의 전통도 느낄 수 있고 진한 동료애도 와 닿는다. 검도장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러한 모습을 연출할 수 있을 것인가. 더욱이 진정한 마음에서 우러나지 않는 예절이라면 연출이 가능할 까.
검도를 배우는 일은 무릎 꿇는 일부터 시작된다. 왜 무릎을 꿇어야 하는가.종교에서는 기도하기 위함이다. 검도도 아마 같은 이유이지 싶다. 자신 속에 자리잡은 또 다른 나를 끄집어 내기 위함이 아닐까. 검도훈련 시작은 현실에 물든 나를 털어 내기 위함이고 나중의 무릎은 검을 통해 배운 마음가짐과 예절을 세상에서 그대로 적용시키기 위함이 아닐 까.
예절이 도장에서만 그친다면 검도가 추구하는 검을 통한 예절에 대한 정의가 아닐 것이다. 검도의 예절은 일상에서도 유익하게 이어진다는 생각이다. 가정이나 직장, 사회에서도 적용될 때 검을 통해 도을 깨우치는 첫걸음을 옮기게 된다는 느낌은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학교와 종교, 그리고 가정을 통해 내려오는 우리 고유의 예절이 있지만 이민생활의 바쁜 일상은 무관심, 또는 외면으로 알게 모르게 거의 사라진 상태이다. 굳이 기억하지 않으려 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예절의 근본이 상대방에 대한 존경과 배려, 이해에서 비롯된 것임을 안다면 모든 면에서 보탬이 될 것이라고 여겨진다. 좋은 것이라면 구태여 외면하기 보다는 끄집어 내서 활용해야 함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이다.
살다 보면 화나는 일도 많고, 짜증날 때도 많다. 모든 것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 대부분이다.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살 수 없는 것이 사회다. 사회구성원으로서 질서를 지키며 살아가야 하지만 싶지는 않다. 하지만 검도의 예절은 본인 반성과 함께 따르는 순응과 더불어 절제되고 정화된 결정체로서의 재탄생을 요구한다.
비즈니스를 하다가 일방적으로 자신만의 입장을 알리는 주장을 펴기 보다는, 상대방을 이해하고 기다려 주는 자세는 검도에서 배우는 예절과 일맥상통하다. 상대가 있기에 사업을 할 수 있다는 겸허함도 검도에서 말하는 상호간의 예절과 다를 바가 없다.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기에, 가정을 이끌고 있기에, 감사함을 느끼는 것은 국기와 도장에 대한 예절과 다름 아니다.
매사에 감사함을 느끼고 상대를 존중하기에 검도는 어떤 의미에서 종교와 비슷한 면이 많다. 모든 종교가 추구하는 것은 사랑이고 평화이다. 검인들이 수없이 자신의 허울과 허상을 베어가며 갈고 닦는 이유는 완성을 향해 나아감에 있다고 여겨진다. 그 완성은 곧 평화를 얻기 위함이 아닐까.
그 평화에 이를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검도의 길에 일생을 바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분명한 이유는 알 길 없지만 검이 있고 그 끝이 완숙을 통한 평화가 있기에 그럴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때문에 검도의 예절은 평화에 이르게 하는 디딤돌이 분명하다. 그래서 예절을 바탕으로 평생을 통해 검의 길을 완성하려고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검도를 하는 이유중의 하나가 예절을 바로 알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몸을 던지고 죽도를 잡아야 한다는 느낌이 강하게 와 닿음은 왜 일까.
그 이유를 알기 위해 비록 그 길이 머나멀지만 오늘도 도장 문을 두드린다.
氣劍體 一致
氣는 의욕과 기력, 자신감 혹은 강한 정신의 외적 발현이라고 할 수 있다. 劍은 칼의 앞쪽 1/3 부분으로 칼날을 바르게 하여 격자를 하는, 즉 검의 적절한 사용을 뜻하는 것이다. 體는 신체 각 부위의 근육의 힘과 죽도 쥐는 힘, 타격, 그리고 신체 이동을 뜻한다. 이러한 세 가지가 격자 순간에 일치될 때 완전한 공격, 유효한 한판이 되는 것이다. 경기에서 보여지는 외형적인 기 검 체의 일치는 일반적으로 충실한 기세로 기합을 내뿜으며 규칙에 의해 정해진 상대의 유효격자 부위를 자기 죽도의 유효격자 부위로 정확히 치거나 찌르되 몸이 격자에 알맞은 올바른 상태와 자세가 되어야만 한다.
張 勳 (弘武劍道館 初步 修練生)
‘기검체 일치’라는 말은 죽도를 들면서부터 지금까지 귀가 따갑도록 듣고 있다. 여기에 검도의 모든 정의가 담겨 있는 듯 검도인들은 한결같이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어쩌면 검도의 완결이 ‘기검체 일치’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수련생의 일장에서 볼 때 ‘기검체 일치’란 정말 높은 벽이다. 그 벽을 뛰어 넘기 위해 안간힘을 써 보지만 3가지를 한꺼번에 조합해 완벽한 모습을 이뤄내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검도의 길이 멀고도 험하다고 했던가.
시작 묵상에서 ‘기검체 일치’를 위해 마음을 가다듬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막상 실전에선 내 모습은 ‘움직이는 따로 국밥’이나 마찬가지다. 밥 따로, 국 따로가 아닌 맘 따로, 칼 따로, 몸 따로다. 더욱 멋있게 잘해 보겠다는 이런 저런 생각에 몰두하다 보면 영락없이 ‘따로 검법의 창시자’가 되고 만다.
고수들이 상대를 향해 고양이처럼 사뿐히 다가가 순식간에 타격하는 모습은 멋있다. 매가 병아리 낚아 채듯 하다. 기검체 일치가 이뤄져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무작정 이를 따라 하는 과욕을 부리면 한 순간에 완전히 술 취한 사람마냥 망가진 검법의 달인이 되어 버린다. 특히 이단 공격이나 연타를 시도할 때는 너무나 쉽게 스스로 발레하는 모습을 연출하고 만다. 기본에 충실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고수들은 수없이 강조한다. ‘기검체 일치’는 기본이 충실해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사범님과 고수들의 따뜻하고 진지한 가르침과 지도도 때로는 귀 속에만 맴돌 뿐,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면 왜 그다지도 엉성하고 어설픈지 모르겠다. ‘기검체 일치’를 이루겠다는 마음가짐이야 호쾌하고 담대하지만 몸은 영 맘을 따라주지 않는다. 도복의 차림새만 봐도 논 매러 가는 농부마냥 핫바지를 입은 듯이 검객의 티를 찾아 보기 어려워서 일까. 복장서부터 어설퍼서 ‘기검체 일체’가 이뤄지지 않는지도 모른다. 고수와 하수의 차이는 날을 세운듯한 하의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듯 하의의 주름을 제대로 잡혀있지 않으면 ‘기검체 일치’는 어쩌면 요원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아마도 곧은 자세는 옷차림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 아닐까. 단정함은 기의 기본이고 검의 바탕이 되고 몸을 일으키게 하는 시발점이 된다는 생각은 지나친 비약인 것일까. 아무튼 꼿꼿한 바른 옷차림은 올곧은 마음의 울타리가 되어 ‘기검체 일치’의 발원이 된다고 느껴진다
기합은 자신에게 많은 자신감을 불어 넣고 있다. 실력을 떠나 스스로 마음을 끌어 올려 상대를 향해 흔들림 없는 자세를 유지, 나아가게끔 하며 공수의 견인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뒤따르는 올바른 동작과 바른 칼 씀씀이가 없다면 공염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에 연습에 임하면, 되든 안되든 죽도 끝에 내 몸과 맘을 담아 날려 보내려 한다. 내면에는 일상생활에서 쌓인 허울과 위선을 떨쳐내는 구도자처럼 수도하는 마음으로 행하려 얘쓴다. 이를 통해 난 하루동안 흐트러진 정신을 가다듬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래서 검도장에 나오는 것을 하루의 마지막 일과로 삼고 이를 통해 내일을 준비하려 한다.
‘기검체의 일치’란 검도에서만 국한된 것은 아니지 싶다. 어쩌면 진리일 수도 있다. 천주교의 삼위일체(성부,성자,성령)처럼 절대적이다. 삶을 지탱케 하는 기초라는 생각이 너무나 크게 자신을 사로잡고 있음은 여기서 비롯됐다.
사업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열정과 행동, 그리고 한 방향을 향해 정진하는 것이 바로 ‘기검체의 일치’일 것이다. 이러한 것이 없다는 모두가 ‘따로검객’이 되고 말 것이며 성공이란 단어는 주변에서 사라지고 말 것이다.
검도를 통해 사업에도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 먼저 정신적으로 강건해짐을 느낀다. 정도를 걷고자 하는 올곧은 마음가짐이 우선됨도 피부에 와 닿을 정도다. 당장의 이익보다는 좀 더 멀리 내다보고 상대를 배려하고 다 함께 잘 살자는 동업자적 정신도 자라나고 있다. 어찌 보면 검도는 종교같다. 검도예찬론을 떠나 실제로 죽도를 잡으면서 경제적인 면이나 사업환경은 이전과는 아무런 외적 변화가 없지만 심리적인 여유가 생겨나고 있다. 뜻 모를 자신감과 속절없는 자부심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기검체 일치’어렵겠지만 이미 그 길을 들었기에 반드시 이루고 싶다.
有效擊刺
-1. 유효격자는 충실한 기세와 적법한 자세로써 죽도의 격자부로 격자부위를 칼날을 바르게 하여 격자하고 존심이 있어야 한다.
-2. 다음의 경우도 유효격자로 한다.
(1) 죽도를 떨어뜨린 즉시 가한 격자.
(2) 한쪽이 장외로 나감과 동시에 가한 격자.
(3) 넘어진 즉시 가한 격자.
-3. 다음 경우는 격자는 유효로 하지 않는다.
(1) 상격(서로가 동시에 격자를 한 것)
(2) 피격자자(被擊刺者)의 칼끝이 상대의 상체 전면에 찌르듯 닿아 있어서 그 세와 자세가 충실하다고 판단한 경우.
張 勳 (弘武劍道館 初步 修練生)
유효격자의 요체는 충실함이다. 또한 정확하고 바른 자세에서 비롯된 타격과 정신적 함축을 의미하는 것이다. 때문에 검도의 핵심인 기검체 일치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검도를 수련함에 있어, 좋은 한 단면은 일상을 벗어난 자신만의 세계를 가질 수 있음이다. 도복을 입으면서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세상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유한 분위기다. 죽도를 잡는 사람들은 대부분 공감하고 있는 그 요상하며 차분한 느낌은 엄숙함과 더불어 절제된 모습을 바탕으로 한 통쾌함 속에서 이뤄지는 자기 정진이 아닐까 싶다. 때문에 많은 검인들이 지속적인 수련에 나서고 있고 또한 빠져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검도의 또 다른 어려움을 접하는 대목이 유효격자다. 무작정 타격하는 것에만 열을 올리는 것은 검도가 지향하는 목적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타임머신을 타고, 1천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무분별하게 휘두르는 것은 마치 시정잡배의 몽둥이질이나 망나니의 칼 춤과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충의를 위해 목숨을 초개와 같이 여기는 무사라면 대의 명분과 함께 단 칼에 상대를 베거나 목적을 향해 단호하고 우아한 칼의 궤적을 그려낼 수 있을 것이다. 당연히 무사의 품위는 실력과 더불어 올곧은 자세에서 비롯된다고 보여진다. 오늘날 신사와 건달의 차이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와 같은 무사도를 바탕으로 한 오늘날의 검도에서 유효격자는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지난 7일 도장에서 실시된 장내 검도대회에 출전하며 얻은 소감 중 하나가 비록 검도가 오늘날 스포츠의 형태를 띄고 있지만 무도가 요구하는 정신과 몸이 하나되어 이어진 정확한 타격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승부가 결정 나는 것이다. 유효격자에 의한 것만 점수로 인정, 승패가 갈리는 것을 목격했다. 어설프게 내리친 것은 심판진은 외면했고 바른 자세에 이어진 가격만이 점수로 연결됐다. 당연히 연습량에 의해 승부가 결정났으며 순위 또한 정해진 듯 했다. 검도의 길에는 왕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꾸준한 자기 연마에 달려 있다고 하겠다.
유효격자가 사회생활에서 보여주는 의미도 상당하다. 유효격자에 의거한 정확한 타격은 꾸준한 노력을 요구한다. 이를 바탕으로 실력을 배양해야 가능하다. 성실한 준비 없이는 좋은 결과가 있을 수 없다. 흔들림 없고 꾸준한 준비와 연마는 교육과 사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교육적으로도 볼 때 꾸준한 학습과 효율적인 수험준비는 좋은 결과를 바라볼 수 있다. 이는 유효격자와 일맥상통하다. 올바른 타격을 위해 많은 수련은 시험공부이고 정확한 가격은 자신감을 갖고 임하는 시험과 같다. 비즈니스상에서 준비는 철저한 시장조사와 연구개발을 뜻하며 유효격자는 적절한 마케팅과 판매를 통한 수익증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검도를 하는 이유는 자기 성찰과 정진이다. 여기에 많은 교훈이 있다. 자신의 눈물겨운 노력없이는 모든 것이 이뤄질 수 없으며 설사 운좋게 결과를 얻었다고 해도 무의미 하다. 비록 단순하지만 머리치기의 동작을 완수하기까지에는 수천번의 반복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은 먼저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는 전제조건이나 마찬가지다.
연습 중에 매번 지적되는 벌어진 왼발의 자세와 느린 추진력은 좀처럼 고쳐지지 않는다. 수천번의 반복과 고쳐야 된다는 의지가 있어야 함은 당연하다. 그만큼 검도의 길이 힘들고 이를 이겨내야 유효격자에 이를 수 있다는 뜻이다.
훈련이 고된 만큼 갈수록 정이 들고, 반면 점 점 어렵게만 여겨지는 검도, 만약 그 길이 쉽다면 쉽게 떠나 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더 빠져든다.
기검체 일치에 이은 유효격자를 완성하기 위해 오늘도 안간힘을 다해 본다.
四戒
사계는 검도의 사병(四病)이라고도 하며, 이는 놀람(驚;경), 두려움(懼;구), 의심(疑;의), 미혹함(惑;혹) 등을 일컫는다. 이러 한 네 가지를 극복하고 마음의 평상심을 유지해야 한다.
이를 다시 구체적으로 보면
-驚 : 이는 순간적으로 발생되는 상황에 깜짝 놀라는 것으로 이때 마음과 자세의 틈이 생기게 된다. 갑작스런 상대의 기합이나 의외의 행동, 기술에 놀라서 틈을 보이기 쉽다.
-懼 : 상대의 외형적 우월성이나 유명도 혹은 자신보다 고단자라는 부담감과 선입견을 갖고 자신감을 잃고 두려워하게 되면 이미 지고 들어가는 경우가 된다. 자신감을 갖고 담대히 겨루는 자세가 요구된다.
-疑 : 공격이나 수비에 확신이 서지 않고 혹시나 내가 머리를 치다가 손목을 맞지는 않을까 하는 의심이 들어 과감한 공격을 기대할 수 없다. 기회다 싶으면 의심하지 말고 과감한 공격을 해야 한다.
-惑 : 상대의 연속되는 공격에 정신이 혼미한 상태가 되거나 상대의 속임이나 유인술에 미혹되어서 치고 나갈 것인가, 받아서 칠 것인가 등을 결정하지 못하고 진퇴, 공수에 헷갈리는 경우이다.
이와 같은 네 가지 경우에 대해서 검도 수련자는 마음의 수련을 하면서 곰곰이 생각해보고 항상 평상심 즉, 한결같은 마음을 잃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張 勳 (弘武劍道館 初步 修練生)
四戒는 담대함을 요구한다. 그 담대함은 속을 알 수 없는 깊은 물처럼 고요하고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상대를 물리치기 위해서는 어떠한 동요나 망설임이 없는 단호함을 필요로 한다. 즉 평상심을 바탕으로 한 올곧은 결단이다. 이것이 사계가 주는 교훈이다.
사계의 요점은 상대를 제압하기에 앞서 자신을 가다듬는 마음가짐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驚懼疑惑을 뛰어 넘기 위해선 당연히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즉, 사병을 탈피하기 위해선 사계방지의 체질화가 되어야 한다. 대안없이 사계방지만 외치면‘허구에 찬 빈 말’로 끝날 공산이 크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선 많은 연습량을 필요로 한다. 이론만을 앞세우기 보다는 이론 자체를 소화하고 자신의 몸에 배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다.
검도에세이를 통해 느끼는 것은 수필마다 제목들은 다르나 그 내용들을 들여다 보면 한결같이 한 뿌리에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道場五禮와 氣劍體 一致에 이은 有效擊刺와 四戒는 분명, 그 요결은 다르나, 点들이 이어져 線이 되듯 이러한 것들이 모여 한 이론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칼과 하나되어 단호함을 바탕으로, 천둥처럼 우람하고, 번개처럼 빠르게, 목표를 향해 삼킬 듯한 성난 파도처럼 덮쳐 나아가야 한다는 점이다. 때로는 단순하지만 우직하게 곧 바로 나아 감이 수련에 도움이 되고 검의 완성에 좀 더 다가 갈 수 있음을 내포하고 있다. 그것이 사계의 요체다.
연습 중에 많은 지적을 받는다. 그 중 하나가 상대의 타격을 너무 의식하지 말라는 것이다. 자신이 의도한 바가 있으면 곧 바로 나아가 실행함에 있어 주저치 말라는 것이다. 망설이고 당황하고 놀라거나 두려움이 앞서면 자세가 흐트러지고 기검체의 일치가 이뤄지지 않아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좌우지간 ‘長考 끝에 惡手’란 말처럼, 생각이 많으면 의심을 낳고 결국 초심을 잃고 방황한다는 뜻이다.
사계의 교훈은 교육적인 면이나 사회적인 면에서도 적용된다. 특히 사업을 하는 과정에서 사계는 필요한 지침서나 마찬가지이다. 좋은 사업계획서를 갖고도 망설이다 시기를 놓치는 경우나 자신감이 없어 사업을 확장치 못하고 퇴보하는 것도 驚懼疑惑에 비교된다.
예컨대 9.11 사태 이후 맨해튼 일대의 도매상이나 소상인들은 충격으로 인해 우울증에 빠져들다 시피하고 실제로 문을 닫는 경우도 많았다. 반면 위기를 기회로 삼아 사라진 쌍둥이 빌딩 근처에 Salad Bar를 오픈, 호기를 맞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경제적인 특별한 이유도 따르겠지만 위의 경우는 과감한 결단력과 추진력에 의해 비롯된 것이다. 사계를 떨친 것이 틀림없다.
사업을 하면서 많은 위기를 겪었고 실제로 좋은 기회를 놓친 적이 많다. 모든 여건이 만족스럽게 준비된 적은 거의 없다. 본인의 분명한 의지가 가장 귀중한 자산인 것이다. 흐트러지지 않는 초심의 자세는 성공을 향해 내 딛는 발걸음이며 그것은 분명 사계를 뛰어 넘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검도를 통해 얻는 것이 많다. 심신의 단련뿐만 아니라 검도는‘탈무드’처럼 생활의 경전 역할도 한다. 무심의 경지에 다다를 때까지 검을 내리 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이러한 검의 철학도 몸에 배어들 것이란 생각이다. 외부의 어떠한 환경에도 동요치 않는 마음가짐, 곧 무아의 경지는 현명한 사리판단의 능력을 갖추고 허점 또한 가리게 된다. 사계를 통한 얻음이다.
四病을 피할 수 있는 것은 평상심에서 비롯된 자신감이고 그것은 노력이다.
活人劍
내가 살고 남을 죽이는 곳에만 쓰는 칼은 殺人劍이다. 또한 남을 미워하는 마음, 해치려는 마음을 가지고 쓰는 칼은 살인검이다. 남을 해롭게 만드는 칼, 이성을 잃고서 쓰는 칼, 비열한 방법으로라도 이기기 위한 칼 등은 폭도의 칼인 살인검이다. 반대로 정의를 지키기 위하여 불의를 죽이는 칼, 미움과 원망의 칼이 아닌 관용과 긍정의 칼, 자기 자신의 이기심을 이기고 새로운 자아를 찾는 수련의 칼이 바로 活人劍이다.
검도를 수련하면서 자신의 인격과 체력의 성장을 위한 칼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활인검을 만드는 방법이다. 자신보다 힘이 약한 여자나 어린사람, 나이 많은 사람을 힘으로 몰아붙이며 두들겨 패듯이 하는 용렬한 살인검을 사용하지 말 것이다. 자신보다 경험이 적은 사람을 잔기술을 사용하여 놀리듯 검을 사용하는 비겁한 고수가 바로 활인검은 아닌 것이다. 상대를 북돋워 주고 인격체로서 품위 있는 검도를 하는 검도인 이어야 한다. 칼에 인격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품격 높은 칼, 그것이 바로 활인검이다.
張 勳 (弘武劍道館 初步 修練生)
검도의 기본은 인격의 완성을 위해 끊임없는 자기 수련이나 다름없다. 그 수련은 고달프며 더욱이 완성이란 힘들기 짝이 없다. 검도에 있어 활인검은 그 완성을 위한 디딤돌이라고 할 수 있다. 활인검에 대한 이해와 기본 철학이 없는 검도 수련은 무의미 하다. 활인검의 완성은 검도가 지향하는 목표와 일치된다.
검은 잡은 사람이 활인검에 대해 이해하는 정도에 그치면 진정한 검인이랄 수 없다. 당연히 피나는 수련이 밑바탕 되어야 가능한 것이다. 약자를 위하고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이 활인검의 기본이다. 겸허하고 겸손된 마음가짐이 우선되어야 한다. 때문에 검을 잡은 사람은 평생 배우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 어찌 보면 옛 신라 화랑들이 철칙과 같이 여겼던 세속오계(事君以忠·事親以孝·交友以信·臨戰無退·殺生有擇)중 殺生有擇 에 해당된다고 생각된다.
검도를 통한 깨달음은 생각보다 많다. 예절과 겸손에 대한 새로운 자세와 겸허함은 오늘을 충실하게 하고 내일의 나음을 기약하게끔 한다. 늘어나는 체력과 함께 여유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활인검에 대한 나의 생각과 개념은 조금 다른 듯 하다. 상대를 위해, 정의를 위해 기꺼이 떨치고 일어나는 활인검을 위해 난 살인검을 들어야 한다. 역설적이지만 살인검은 활인검의 완성을 위해 존재한다고 믿는다.
수련중에 수 없이 살인검은 들고 무수히 많은 사람을 벤다. 상대는 나 자신이다. 나태하고 게으른 자신, 세상과 너무도 쉽게 타협하는 자신, 어리석음을 탓하기 보다는 세상이 틀렸다는 오만, 상대가 자신을 알아 주기를 바라는 교만과 허울, 탐욕과 이기심 앞에 무기력하게 무너지는 정체성, 그 밖에 많은 허상을 베고 벤다.
내가 살기 위해 검을 드는 것은 분명 살인검이다 하지만 정도에서 벗어나 어긋나게 걷고 있는 자신을 베다 보면 나도 모르게 활인검으로 재탄생 할 것으로 믿기에 더욱 죽도를 움켜쥔다.
연습중에 관장님을 비롯한 작은 사범님과 고수들의 자상한 모습들이 활인검은 든 모습으로 비쳐질 때가 많다. 잘못된 동작들을 하나씩 지적하며 가르쳐 줄 때의 모습은 진지하다. 자신의 연습시간을 기꺼이 할애하며 많은 시간을 지도하는데 쏟아 붓는다. 때문에 허튼 동작이 나올 때는 미안한 마음이 가득하나 쉽게 고쳐지지도 않을 뿐 더러 진도도 더뎌 송구할 뿐이다. 하지만 고마움은 늘 느끼고 있다. 언젠가는 그 자리를 대신할 날이 오리라 믿는다.
그들의 수고와 더불어 동시에 급수만큼이나 그들의 인격적 성숙함을 느낀다. 검도를 통해 그들에게 감사함을 느끼고 있다. 또한 수련의 시간, 정도에 따라 그 도의 깊이도 상당함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나이의 많고 적음을 떠나 스스로의 인격을 갈고 닦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 까 생각된다.
활인검은 현실에 맞게 적용해 보면 경계심과 더불어 많은 교훈을 얻는다. 물질적인 풍요만을 쫓는 이 시대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혼돈 속에 숨쉬며 살고 있다. 그 혼란은 자만일 수도 있고 비굴함일 수 있고 자신감일 수도 있다. 고마움 속에 더불어 살아가자는 마음가짐은 분명 활인검의 자세며 공명심을 앞세우고 스스로를 평가하려 든다면 살인검에 해당된다.
검도를 통해 배우고 느끼는 것은 각각 이론들의 핵심은 겸손함에 있다는 것이다. 이같이 많은 이론을 통해 겸손함을 강조하는 것은 칼의 속성 상 쉽게 살인검이 될 수 도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무서운 말이다. 그만큼 검의 길은 험난한 것이다.
“칼로 된 자는 칼로 망한다”는 말은 살인검에 해당되고 “칼의 완성은 곧 인격의 완결”이며 이것이 활인검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활인검을 위해 살인검을 휘두르지만 그 검을 잡는 그 날은 반드시 오리라.
三殺法
이는 상대의 칼(劍)을 죽이고, 기술(技術)을 죽이고, 기(氣)를 죽인다는 것이다. 우선 칼을 죽인다는 것은 상대의 죽도를 좌우로 누르거나 치거나 감거나 함에 의해 자유를 빼앗은 상태로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상대의 공격수단을 원천적으로 무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기술을 죽인다는 것은, 항상 선(先)의 기분으로 격자를 계속적으로 하고 격자가 빗나가면 다시 나아가 달려들어 공격하여 상대로 하여금 기술을 사용할 틈을 주지 않고 방어만을 하도록 기선을 제압하는 것이다. 또한 상대가 기술을 사용할 수 없는 거리를 만든다든지 월등한 기술로 상대의 기술을 제압하는 것이다.
기를 죽인다는 것은, 끊임없이 기력을 전신에 넘치게 하며 선의 기분으로 마주서서, 기합과 당당한 기백으로 상대방의 기를 약화시키고 상대가 공격을 일으키려는 때를 눌러서 기력을 꺾고, 상대에게 거리나 기회의 타이밍을 먼저 빼앗아 공격의욕을 꺾는다. 이는 위압적인 기합을 내어서 상대를 움츠리게 한다든가 기민하고 담대한 움직임으로 상대의 움직임을 압도하며 선제공격과 연속적인 공격으로 상대의 공격의욕을 약화시키는 것도 한 방법이다.
張 勳 (弘武劍道館 初步 修練生)
최선의 방어는 곧 공격이다. 그 공격은 一擊必殺의 단호함을 앞세워야 한다. 혼신의 힘을 다해 상대를 제압해야 한다. 그 것은 어찌 보면 죽느냐 사느냐의 결정적인 순간에 행해야 하기에 조금의 주저함도 없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단단한 기초가 필요하다. 꾸준한 훈련에 이은 올바른 행함이 삼살법의 요체이며 몸에 익혀야 하는 목적이다.
검도의 이론들을 면면히 살펴보면 점증적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각 이론들은 따로 떼어서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앞 뒤를 연결하다 보면 이해하기가 쉬워짐을 느낀다. 전자기기의 회로가 아무리 복잡해도 중앙에서 신호를 보내면 일사분란하게 처리되고 또 콘트롤된다. 좀 더 세분화하면 컴퓨터의 부호는 사실 0과 1 만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이 들이 수없이 반복되면 코드가 만들어지고 명령어가 입력되면 프로그램이 되는 이치처럼 모든 이론은 제각각 연결되어 있다. 하나의 프로그램과도 같다.
지금껏 공부해 온 것들이 검도의 초기 이론들이지만 검도이론의 큰 획을 이루고 있기에 기초가 충실한 사람이 검도를 잘 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검도이론은 처음이 끝이고 끝이 처음과 같다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지 모르지만 현재까지의 느낌은 그렇다.
삼살법만 하더래도 그 이론은 그대로 적용된다.
삼살법의 기본 요지는 상대를 제압하는 방법이다. 역설적으로 종전에 익혔던 기검체일치가 상대에게 일어나지 않토록 하면 된다는 가정법이 성립되는 듯 하다. 자신은 기검체 일치를 포함해 사계를 피하고 유효격자를 완성하면 승리를 낚아챌 수 있게 된다. 당연히 삼살법은 이 같은 이론과 튼실한 수련을 통해서만 얻어낼 수 있는 것이다.
현실에서의 삼살법은 무엇인가. 매일, 매일이 경쟁인 오늘날에 삼살법을 통해 많은 것들을 비교해 볼 수 있다.
우선 상대의 칼을 죽이는 것은 경쟁업체를 앞서기 위해서는, 꾸준한 시장조사와 소비자의 심리를 파악, 타사보다 앞선 디자인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기술은 죽인다는 것 또한 남들보다 한 발 먼저 제품을 생산해 소비자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다른 회사의 재품이 시장에 선 보이기 전에 선점, 타 경쟁사를 압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기를 죽인다는 것은 지역별, 시장별로 맞는 마케팅을 적용시키고 다양한 프로모션을 통해 소비영역을 넓혀 매출을 확대, 재생산하는 것이라고 나름대로 정의하고 싶다
시험을 준비하는 학생이라면 예상문제를 미리 선정하는 것이 칼을 죽이는 것이다.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능력을 지니는 것이 기술을 죽이는 것이며 시험날에 흔들림 없이 배운 바를 그대로 적어 내는 것이 기를 죽이는 것이 된다고 가정할 수 있을 것이다.
삼살법을 완성시키기 위해선 열정적이고 진취적이며 능동적인 사고와 꾸준한 노력이 밑바탕 되어야 한다. 노력과 열정이 갖추지 않은 채 무작정 삼살법만 외친다면 오히려 상대에게 쉽게 제압되고 말 것이다. 사업과 학업도 마찬가지로 올바른 이론을 통한 실천만이 성공을 보장할 수 있다.
훈련중에 고수와 하수의 차이는 바로 꾸준한 연마에 의한 자기 수련의 시간차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시간차를 줄이는 것은 이론의 올바른 이해와 꾸준한 훈련에 있다.
삼살법은 곧 담대함이다. 그 담대함은 훈련에서 비롯된다.
7가지 좋은 공격기회
-1. 상대의 실을 피하고 허를 공격하라. 즉 상대가 주의력이 흐트러질 때 등이 좋은 기회
-2. 상대의 동작이 일어나려 할 때 그 마음을 뺏어 힘의 방향을 다른 데로 빠지게 해서 공허케 하고 공격.
-3. 상대의 심중에 의심하는 마음이 생겼을 순간
-4. 상대의 몸과 마음이 정체, 주저하며 심신활동이 중지되어 있을 때
-5. 상대가 급하고 초조하며 무리하게 공격 해올 때
-6. 상대의 체력, 기력이 다하여 죽도가 죽었을 때
-7. 상대가 공격을 끝내고 물러날 때 일반적으로 죽도 끝을 내린 채 물러선다. 이때 상대는 즉시 공격이 불가능한 상태에 빠져 있다. 이러한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張 勳 (弘武劍道館 初步 修練生)
만약, 시대를 거슬러 옛날에 살고 있다면 스스로를 지켜야 할 경우가 오늘날 보다는 월등히 많을 것이다.
더욱이 칼을 사용해 상대와 생사를 놓고 겨뤄야 할 경우는 상당할 것이다.
본인 스스로가 正道를 걷고 인내함을 겸양의 미덕으로 삼는다 해도 사악한 무리들이나 불한당이 시비를 걸어 오거나 주변 사람들을 희롱할 경우 등 피치 못할 상황이 발생하면 분연히 일어나 그들과 맞서야 한다.
하지만 자신이 그들의 폭거에 맞설 의기만 있지 검술의 실력이 따라 주지 않는다면 외마디 비명 속에 횡사할 것은 자명하다. 정도를 걷고자 하는 외침도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사라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때문에 스스로를 방어하고 폭력 앞에 억울하게 시달리는 사람들을 보호하고 대신해 응징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실력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 다음에 정의를 논하고 또한 불의도 제압할 수 있는 것이다.
검도를 함에 있어 첫 번째 목적은 아무래도 자신을 다스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다음은 상대를 제압하는 것일 게다. 상대를 누르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의 능력을 스스로 갖추어야 한다.
부단한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細技를 익혀 빈틈을 노려 일격에 상대를 제압해야 한다. 일곱 가지 좋은 공격기회란 세기의 일종이라고 보면 과히 틀린 말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또한 공격의 흐름을 읽는 눈가짐 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일곱 가지 좋은 공격기회가 주는 의미는 다양하다. 공통된 점은 상대의 빈틈을 노리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허점을 놓치지 말라는 것과 같다. 그것은 찰라의 순간에 일어나기에 주저함이나 망설임없이 실행에 옮겨져야 한다. 그야말로 촌각에 생사가 결정나는 것이나 진배없다.
만약 진검을 쥐고 대결한다면 상대의 흔들림을 발견하면 주저없이 전광석화와 같은 공격으로 제압해야 한다. 역설적 말하자면 상대는 조그마한 허점이나 방심으로 인해 목숨을 잃게 된다.
일곱 가지 좋은 공격기회는 현실에 있어 다양하고 좋은 의미를 던져주고 있다. 이는 곧 사업적으로 일곱 가지 좋은 기회나 마찬가지이고 반대로 일곱 가지를 조심하면 실패를 방지할 수 있다는 논리가 된다. 비즈니스에 대한 성패의 원인제공인 셈이다. 이를 사업적으로 풀어보면 아래와 같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1. 사업적으로 볼 때 틈새시장을 노리라는 말이다. 대기업과의 정면대결을 피하고 그들이 소홀히 하는 대상이나 지역에서 사업기반을 확보, 기득권을 가지라는 말로 대신할 수 있다.
-2. 대기업 등이 문어발식 확장으로, 이미 확보한 틈새시장 마저 노린다면 공격적인 마케팅이나 네트워크를 활용, 그들의 초기 공세를 사전에 봉쇄, 포기하게끔 한다. 실제로 한국에서 ‘벼룩시장’이 중앙일보와 한겨레신문이 구인구직판인 가판사업에 뛰어들자 이들의 공세에 맞서 더욱 공격적이고 다양한 프로모션을 통해 선점한 시장의 효과를 배가, 이들을 물리친 적이 있다.
-3. ‘벼룩시장’은 대형업체들이 작은 시장에 대해 회의를 갖고 투자 등을 주저할 때 오히려 전문 경영인을 영입하고 가판대를 늘리고 가격을 동결하는 등 공격적으로 나섰다. ‘벼룩시장’은 결국 대기업을 제압하는 현대판 다윗이라는 이미지를 얻어 오히려 위치를 더욱 공공히 했다. 이로 인해 벼룩시장’은 5백억원의 매출을 올려 종합지인 경향신문을 따돌리는 부수적인 성과도 얻었다.
-4. 비즈니스를 하다 보면 경쟁업체가 무차별 선물공세를 앞세워 공격적으로 나올 때가 있다. 그 시기에는 이에 대한 대처방법이 적절하지 못해 암담해 한다. 이에 대한 생존책을 찾기 위해 안간힘을 쏟는다. 반면 공세적으로 나온 상대는 어느 시기가 되면 의욕을 잃고 그 상황에 안주하는 경우가 대분이다. 하지만 이 때를 노려 그동안 준비해 왔던 마케팅을 효과적으로 펼친다면 간격을 벌여 이들의 추격권에서 벗어날 수 있고 나름대로 짭짤한 소득도 올릴 수 있다.
-5. 절적한 마케팅과 시장흐름을 파악해 출품한 제품이 소비자들로 하여금 호응을 얻게 되면 라이벌 회사는 필사적으로 뭍 타기 전략으로 나서는 경우가 많다. 나름대로 시장을 지키겠다는 것이지만 오히려 많은 허점을 보인다. 이 때는 준비된 제2, 제3의 제품을 잇따라 출시, 소비영역을 확장한다.
-6. 마케팅의 타이밍이다. 철저한 시장조사와 소비자의 흐름을 제대로 읽어 제품을 준비해 놓은 후 라이벌업체의 광고효과나 제품에 대한 호응도가 떨어지는 시점에 소비자에게 선보여 청량감을 주어 제품이미지를 극대화하는 것과 상통한다.
-7 거꾸로 말해 사업을 하려면 철두철미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상대에게 조그마한 헛점도 보이지 말고 시쳇말로 독종과 같이 끝장을 볼 때까지 파고 들어 완벽하게 시장을 틀어 쥐어야 성공할 수 있다는 뜻이다. 잔인한 말이지만 숨통을 끊으려면 확실하게 해 조그마한 불씨도 살려두지 말라는 말이다.
후환의 싹은 철저하게 잘라야 함은 물론이다.
다시 말해 비즈니스도 생명을 걸고 하는 진검승부승부나 다름아닌 것이다. 검도와 비즈니스의 상통함은 바로 진지함이고 물러날 수 없고 상대를 제압해야 살아남기 때문이다. 무수히 많은 시간을 수련에 매달리는 것과 제품생산과 연구에 몰입하는 것 또한 검도와 비즈니스의 상통함이다. 곧 검도와 비즈니스는 따로 떼어 놓고 생각할 문제는 아닌 듯 하다.
검도를 하는 이유중의 하나는 검을 통해 얻는 것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존심(存心)
공격을 하고 나서 방심을 하여 상대에게 오히려 역공을 당하는 경우가 있다. 자신이 느끼고 생각하기에 완전한 공격이라 해도 완전한 한판, 완전한 승리가 될 때까지는 마음을 놓는 것은 큰 위험 요소이다. 따라서 상대를 격자하고 반드시 그 마음을 보존하여 방심하지 않고 완전한 승리가 선고될 때에 다시 칼을 맞출 수 있도록 한다. 혹 공격이 실패하더라도 방심하지 않는다면 재차 공격을 하거나 상대의 공격에 대처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존심이란 상대방을 격자한 후에도 그 기세를 늦추거나 방심하지 않고 그 마음을 간직하여 상황에 따른 대처를 능히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상대를 격자할 때에는 과감히, 의심 없이 공격을 하고서 상대방이 완전한 한판을 잃었는지, 아니면 자신의 공격을 방어하다 중심을 잃었는지, 또는 상대가 역공을 시도하는지를 빨리 파악하여 이에 대응한다.
張 勳 (弘武劍道館 初步 修練生)
“최선을 다한다.”함은 흔들림 없이 목표에 이를 때까지 전력, 즉 혼신의 힘을 다해, 끝까지 유종의 미를 거두는 것이다. 그래야 ‘최선’이란 단어가 더욱 빛나고 가치가 있다. 또한 거기에는 추후의 방심과 자만이 있어서도 않된다. 존심의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즉, 자신이 추구하는 목적이 달성될 때까지, 최후의 순간까지, 확인하고 또 재확인하는 것이 존심의 요체이다.
모든 힘을 쏟아 상대를 제압하고서도 일말의 방심으로 인해 역공을 허용, 패배를 당한다면 그야말로 가슴속에, 내내 아쉬움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현대검도가 스포츠화되었기에 망정이지, 이러한 과정과 결과가 예전에 목숨을 걸고 겨뤘던 진검승부였다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이미 천추의 한을 안고 구천을 떠도는 원귀가 되었을 것이니 말이다.
검도는 쉽게 말하면 칼싸움이다. 거기에 혼과 정신, 검은 잡는 사람의 예절과 도리, 세상의 이치 등이 녹아 내려 도(道)가 됐지만 근본적으로 목숨을 놓고 겨뤘던 본래의 성질은 고스란히 남아 있다. 때문에 오늘날의 검도가 비록 죽도를 사용하고 있지만 수련생의 입장에선 한 칼, 한 칼의 쓰임새와 동작들을 진검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대련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러기에 존심의 중요성은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존심을 시쳇말로 다시 말하자면 “꺼진 불도 다시 보자” 로 대신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존심은 공격이 무위로 끝날을 경우 재도약할 발판이기도 하다. 반격할 수 있는 든든한 배경인 셈이다. 존심이 상징하는 사회적 의미 또한 의미심장하다. 특히 많은 기업들의 흥망성쇠를 보노라면 존심을 지키는 기업이 장수하고 있는 반면 방심하고 안주하는 기업들은 도산하거나 퇴보하고 있다.기업의 존심은 무엇인가. 사업적 성공을 거뒀다고 안위하는 것이 아닌 끊임없는 연구와 개발, 이에 따른 노력이다. 변화하는 시대를 앞서서 이끄는 것이라 할 수 있고, 모든 이들이 다함께 행복과 부를 공유하는 포용력 또한 존심이다. 또한 2세들의 교육에도 소홀함이 없어야 함은 당연히 존심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반면 거품과 같이 떠올랐다 사라져간 신흥재벌이나 30년전의 10대 기업중에 지금껏 살아 남아 기억하고 있는 기업은 손 꼽을 정도다. 방만한 경영과 미래를 예측하지 못한 인재 개발의 미비와 충실치 못한 투자, 재산다툼 등에 따른 내분 등에 기인해 몰락했다. 다시 말해 잘 나갈 때 뒷문단속을 못했던 것이다. 틈이 많았다고 할 수 있다. 즉 존심을 일으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존심은 틈을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러한 존심의 유무는 기업뿐만 아니다. 가정이나 직장, 학교생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한때 절치부심하며 재기해 놓고도 순식간에 지난 날의 쓰라림을 잊는 경우가 얼마나 허다한가. 여기에도 존심이 필요함은 당연하다.
사업상의 성공을 거둘 때나 또는 실패할 때, 기쁘기도 하고, 낙담하기도 한다. 학생의 경우에는 성적의 좋고 나쁨에 따라 울고 웃는다. 하지만 이러한 일희일비의 원인은 아주 사소한 것에 연루되는 경우가 많다. 역시 방심과 자만에서 기인된다. 존심을 세우지 않았다고도 말할 수 있다.
존심을 잊지 않고 실행한다면 처한 상황에 따라 흔들리지 않고 초연히 자신의 길을 걸을 수 있고 정한 목표에 다가 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이론을 알고 있으나 몸에 밴 행동을 옮기기란 쉽지 않다. 꾸준한 연마만이 존심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러한 존심은 검도수련을 통해 익히고 또 그 이치를 통해 많은 것들은 얻을 수 있다. 저수지의 방죽이 작은 구멍에 의해 무너지듯, 존심은 그 틈을 없애고 항상 유비무환의 마음가짐을 갖게끔 하도록 한다. 존심을 세우는 일은 탄탄한 기초를 세우는 것과 다름아니다.
존심은 마음의 칼날이다. 이제는 그 마음의 검이 날 지배하고 있다. 그 속의 오묘한 길이 날 잡아 일으키고 걷게끔 한다. 반대로 존심은 혹독한 말일 수도 있다. 그 어떤 여유도 용납치 않고, 늘 긴장하게끔 하고 오만해질 수 있는 자신을 늘 경계하라고 말하고 있다.
검을 통해 존심을 알았기에 고쳐 잡지만 이제는 검이 날 잡고 놔주지 않는다.
검도를 하면서 좋아진 3가지:
쾌(快),건(健),정(精)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 3가지는 눈에 띄게 두드러졌다.
쾌(快): 먼저 검도를 시작하며 무분별하게 휘두러진 검의 각도가 점차 궤적을 그림과 동시에 내지르는 기합소리에 호쾌함을 느낀다. 무엇보다도 기합을 지른 후의 상쾌함은 생활의 연장선 속에서도 느껴지고 있다. 아직까지 그 짜릿함의 정확한 이유와 의미는 알 수 없지만 검도의 기합은 짜증난 현실의 분출구이기에 쌓였던 스트레스를 날려 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건 상쾌함은 검도를 통해 심폐 밑바닥에 쌓인 세상의 욕지거리 조차도 날려 보낸다. 어쩌면 카타르시즘적 쾌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쾌활함은 어느새 자신감을 대신하고 있다. 한마디로 빙천수를 들이키는듯한 이 상쾌함은 분명 삶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 아직까지 단전에서 우러나는 힘차고 우렁찬 깊이있는 기합을 뱉어내지 못한 것이 아쉬움이다.
건(健): 근육의 탄탄함이 느껴진다면 지나친 비약인가. 연습시 비상구를 단골로 출입하며 헉헉되던 체력은 아직까지는 미약하지만 이제는 왠만한 훈련은 너끈히 버텨낼 정도다. 업무시간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사무를 보다보면 곧잘 지치던 체력도 야간근무를 불사할 정도로 별다른 피곤함을 느끼지 못할 정도라면 지난친 과장일까. 늘 찌부둥하던 등허리의 누적 피로도 이제는 옛일이다. 더불어 늘어진 뱃살도 청년시절의 체형으로 되돌아 온 느낌이다. 아직까지는 王자 찾기가 어렵지만 말이다. 또한 검도를 다시 시작한지 6개월을 맞으며 체중도 15파운드나 빠져 물찬 제비(?)라도 된 느낌이다. 훈련량만큼 청춘이 되돌아 온 듯하다면 연세 드신 분들을 기만한다고 욕이라도 듣겠지만 실제로 그렇다.
정(精): 정신적으로 집중력이 배가됐다. 반년전 죽도를 잡을 때는 비몽사몽간에 수련시간을 채우느라 뭐가 뭔지 분간도 어려웠지만 훈련한 시간만큼 정신적인 여유를 느낀다. 마치 지저분한 컴퓨터의 파일들을 정리하고 크린한 느낌이다. 이로 인해 냉철함이 요구되는 시점에는 사리분별이 더욱 명료해 진다. 정신적으로 이같은 안정감을 얻을 수 있었던 원인은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라고 자문해 보면, 검도에서 기인되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다. 시작과 끝날 때 실시되는 묵상을 통해 얼마나 많은 자신을 베고, 또 베었던가. 잘난 체하는 자신, 교만하고 교활한 자신, 어리석기 그지없고 쉽게 세상과 타협하는 자신, 수많은 허상들은 베어낸 만큼 내면의 세계는 맑아졌다. 또한 연습을 통해서도 그 맑음은 곧 정신적인 강인함과 집중력으로 이어져고 현실에서도 구현되고 있는 것이다.
검도로 인해 좋아진 점은 너무도 많다. 좀 더 덧붙이자면 가정과 직장, 사회생활에서 매사를 좀 더 깊이 있게 인식하고, 배려하고,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등 활동적이고 능동적이며 미숙하지만 겸양의 자세를 갖게 됐다는 점도 빼 놓을 수 없다.
수파리(守破離)
수련과정의 3단계를 말한다.
“수”는 ‘가르침을 지킨다.’는 의미이다. 사범이 가르치는 형태나 기술을 겸허한 마음으로 충실하게 지키는 것이 바로 ‘수’이다. 즉 사범이 지도한 기본기나 기술을 충실히 수련하여 그 사범의 지도한 내용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체득할 수 있도록 수련을 하는 단계이다. 간혹 지도한 대로 기본기를 충실히 하지 않고 시합하는 재미에 빠져 배운 기본기가 흐트러지면서 이상한 자세로 변형이 된다. 처음에는 자기가 생각한 대로 하는 것이 더 재미있고 쉬우며 짧은 기간에 실력이 급성장 한 것처럼 득점을 잘할 수는 있지만 더 이상의 발전을 기대할 수는 없다.
“파”는 가르침을 받은 기본이나 기술을 충분히 자기 것으로 체득하여 기본 형태가 제대로 갖추어 졌으면 이에 더욱 나아가 기술을 연구하고 개발하여 점차 자신의 개성을 갖고 자기에게 맞는 검도를 창조하는 단계로서 폭과 깊이를 더 넓고 깊게 하는 창의와 연구의 단계이다.
“리”는 창의와 연구의 단계를 거쳐 기존의 형(形), 술(術), 법(法)에 구애받지 않고 심신이 자유자재한 경지이다. 즉 독창성을 확보한 이후에 더욱 심신을 연마하여 생각한 대로 자신의 검도를 표현할 수 있는 영역이다. 그래서 자신만의 독창적인 검으로서 기존의 틀과는 구별된 독자적인 검도세계를 갖는 것이다.
張 勳 (弘武劍道館 初步 修練生)
수련함에 있어 올바른 스승을 만나는 것은 행운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홍무관 수련생 모두는 이미 선택 받은 검객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올곧은 가르침이 배어 나오는 정진도장이기에 그러하고 가르치는 사범님들 또한 무인정신과 바른 자세를 잇고 열성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파리의 정신에 의거하면, 검도는 배우고자 하는 사람의 겸손되고 겸허한 마음가짐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수파리의 요체는 “제대로 배워라”며 이 같은 논지는 더욱 강조되고 있다고 보여 진다.
수파리 중 먼저 ‘수’의 개념이 가장 핵심적이며 근본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시쳇말로 “기초공사를 확실히 하라”는 말이다. 어설픈 흥미위주의 겉핥기 식이 아닌 마음을 비우고 가르치는 것 하나도 빼 놓치 말고 자기 것으로 만들라는 것과 다름 아니다.
그러면 기본기를 충실하게 수련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결론은 의외로 간단하다. 무조건 따라 하면 된다. 굳이 더 앞서 나갈 필요도 없다. 어찌 보면 무조건적인 수용이다. 수동적인 개념일 수 있으나 가르쳐 주는 것을 반복해서 연습하면 그 자체가 ‘수’의 개념에 충실하는 것이다. 기본기라 함에 있어 강인한 체력과 투지가 기본적으로 밑바탕 되는 것은 당연하다. ‘수’의 본질은 올바른 기본기 습득이다. 하지만 자신의 욕구나 의욕마저 피동적일 필요는 없다고 보여진다.
‘수’를 충실히 한 뒤에는 반드시 능동적이고 역동적인 자신의 욕구를 표출해야만 한다. 이를 바탕으로 자신이 그리고자 하는 것을 시험하고 또 응용해 보아야 한다. 이것이 ‘파’라고 여겨진다. 때문에 ‘수’없이는 ‘파’와 ‘리’는 연결될 수 없고 설사 연결된다 해도 그것은 참 검도가 아닐 것이다.
‘파’의 과정에는 무수한 시행착오가 기다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기에 ‘수’의 중요성이 얼마나 큰가를 가름할 수 있다. 초보 수련자의 입장에선 ‘파’와 ‘리’는 일단 다음 단계다. 아마도 ‘파’는 어느 정도 가능할 수 있을지 모르나 ‘리’는 일정 수준에 오른 유단자들의 수련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검도의 이론과 검리를 살펴보면 각각 제 나름대로의 특성을 보인다. 그러나 각각의 이론의 밑바탕에서 강조되는 것은 똑 같다. 기본기에 충실한 뒤에 다음을 도모하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기초가 확고하지 않으면 검도의 참 맛을 알지 못한다는 말과도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치와 같다는 생각이다. 역사는 반복한다. 시대가 다르고 왕조가 다르고 어제와 내일이 달라도 그 흐름은 비슷하다. 그 속에는 현자와 우자가 있고 탐욕과 시기, 각종 음모가 있고 또한 전쟁 또한 되풀이되고 있다. 한 나라, 또는 한 정권의 흥망성쇠를 볼 때, 민심을 잃으면 실권하고 망하게 된다. 여기서 민심이란 검도에 빗대어 보면 기초가 아닐까.
정치의 기본이 사람들을 위함에 있듯 검도를 제대로 알기 위해선 올바른 자세로 배우고 익혀야 한다. 그 정신과 자세는 사회생활에 적용되기에 더욱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사회생활의 기본은 정직이 아닐까 싶다. 비즈니스도 마찬가지이고 모든 것이 신뢰의 바탕 위에서 이뤄지니까 말이다. 하지만 바쁜 생활 속에 기본을 되뇌기란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파와 리는 수를 완벽하게 이루면 자동적으로 완성된다고 보인다. 사회생활의 성공 또한 정직과 신뢰가 밑바탕 되면 모든 것이 보장될 것이란 생각이 강하게 드는 것도 같은 이유다.
守破離를 통해 마음과 자세를 가다듬기 위해 오늘도 기꺼이 검을 잡는다.
틈(隙)
틈은 완전한 자세에서 벗어나 어딘가, 무언가 빠지거나 흐트러져 허점을 노출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상대에게는 자신의 틈을 보이지 않도록 하고 상대의 틈을 찾아서 공격을 시도한다. 혹은 일부러 틈을 보여 상대가 그 틈을 노려 공격할 것을 기다려 역공을 하는 경우도 있다.
-1. 마음의 틈 : 방심을 할 때, 다른 사념에 빠져 집중하지 못할 때, 무리하거나 과다한 의욕을 할 때, 망설이거나 주저할 때 등의 경우에 마음의 틈이 생겨 공격을 시도해도 역공을 당하기 쉽고 상대의 공격에 맥없이 당하게 된다.
-2. 자세의 틈 : 어느 한쪽으로 자세가 치우쳐 있거나 몸이 균형을 잃고 있을 때의 허점
-3. 동작의 틈 : 동작이 일어날 때와 마칠 때, 그리고 공격이 막 끝났을 때 등이 바로 동작에서 노출되는 허점
張 勳 (弘武劍道館 初步 修練生)
세상에 神이 아닌 다름에 완벽함이란 없다. 만약, 완벽함이 존재한다면 삶의 의미와 자체가 무의미하게 될지도 모른다. 인생자체가 허점 투성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성공을 향해, 완성을 위해 달려 나가는 것이 우리의 최종 목표이기는 하나 여태껏 그 완성을 이룬 사람은 없다. 하지만 그 완성을 위해 그 많은 틈, 즉 허점과 미비점을 메우기 위해 매순간 애쓰고 있다.
검도가 말하는 틈이란 상대의 허실을 노린다는 것이다. 검도의 본질이 생명을 지키기 위한 수단인 만큼 역으로 상대를 제압해야 살아 남을 수 있다. 검도의 그 모든 성질이 오늘날 스포츠화 되어 전해져 내려 오고 있기에 틈은 언제나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승부화 되어 있는 검도에서 이기기 위해선 틈을 노리는 것은 당연귀결이기 때문이다. 상대의 틈은 곧 자신의 승리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반대로 자신의 틈은 약점이자 패배로 귀결될 수 있다.
그래서 틈이란 승부의 꼭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검도에서 틈은 한 점에 불과할 수 도 있다. 그 틈을 찾기 위해 다양한 동작과 기합, 정신통일 등이 어우러진다고 할 수 있다. 모든 것이 틈을 캐내기 위한 사전동작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여겨지는 것은 거기에 승부처가 있기에 더욱 그렇다.
다시 말해 자신의 틈, 즉 약점을 최소화 하고 상대의 틈을 극대화하면 승리로 이어진다는 것이 ‘틈’의 요체이자 결론이다.
‘틈’의 의미는 프리즘을 통해 본 색 분석 만큼이나 인생에서 다양한 의미를 던지고 있다. 인격적인 틈, 계산이 서툰 틈, 세상물정이 어두운 틈, 자녀교육의 틈 등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도 크다.
인생살이와 사회생활에서의 틈 또한 검도와 별반 다르지 않다. 현대는 무한경쟁 시대이다. 역으로 말하자면 상대를 누르지 않으면 일어설 수 없다는 무시무시한 말이기도 하다. 칼만 휘두르지 않았지 매순간 모 처에서 승부는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틈을 보이지 말아야 한다. 상대의 틈을 찾아 파고 들어 성공을 틀어 쥐어야 한다. 그것이 곧 생존이기 때문이다.
비즈니스적인 의미로 보면 틈은 상대가 미처 파악하지 못한 부분, 취약점을 파고 드는 것이다. 즉 대기업이나 일반인들이 생각치 못한 틈새시장( Niche Market)을 찾는 것이다. 이 틈새를 찾기 위해선 우선 자신의 능력과 시장규모, 사업적인 위치를 먼저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다.
또 능력에 맞는 마케팅을 개발하는 것은 상대의 틈을 정확히 분석한 뒤에 가능한 것이다. 적재적소에 맞는 마케팅을 통해 대기업이 간과한 분야를 파고 들어 고유의 영역을 넓혀 나간다면 사업적으로 성공할 가능성 높다. 자신만의 시장을 선점하고 확장하는 것은 상대의 틈을 정확히 꿰뚫고 대책을 마련한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모든 상황에서 틈은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그 틈을 이용해 자신이 원하는 사업에 부합되게 활용하면 보수적이며 원칙적인 경쟁을 통해 일어 서는 것 보다 시간이 단축되고 우위적인 자리를 먼저 마련할 수 있다.
사업확장에 있어도 이같은 논리는 적용된다. 프랜차이즈나 분점을 낼 경우에도 자신 및 경쟁업체의 장단점, 원하는 지역의 특징 들을 정확하게 분석하고 감춰진 위치나 미래의 잠재적 고객을 미리 선정해 교두보를 마련하는 것도 틈을 이용한 사업적 포석이랄 수 있다.
하지만 이같은 틈을 이용한 사업적 구상이나 실행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탄탄한 기초이다. 그 기초란 인적구성이나 자금, 시기, 위치 등을 면밀히 분석하는고 것이다. 자신감과 추진력이 결여되면 기초라 할 수 없다.
모든 승부는 ‘틈’에 의해 결정 난다. 그 틈은 읽을 수 있는 게 실력이다.
담력정쾌(膽力精快)
<무예도보통지>의 ‘기예질의’에 나오는 것으로서 기(技)의 대강(大綱)을 첫째 담, 둘째 역, 셋째 정, 넷째 쾌 로 일컬었다.
상대를 두고 대련 연습이나 경기를 함에 있어서 요구되는 것으로 먼저 담대해야 한다. 마주선 상대를 두려워하거나 선입견을 갖고 경기를 하게 되면 공격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수세적으로 밀리다 패배를 자초하게 된다. 먼저 자신감 즉, 담이 있어야 한다.
두 번째로 힘이 있어야 한다. 힘이 없는 격자는 완전한 한판을 만들 수 없으며 힘이 있어야 공격과 수비를 할 수 있으며 오랫동안을 하여도 견딜 수 있는 체력이 있어야 한다.
세 번째로 정교한 기술로 격자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오랜 반복 연습으로 한 순간에 정확한 격자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네 번째로 빠르고 깨끗해야 한다. 신속한 몸놀림, 빠른 공격과 방어로 통쾌하고 시원한 한판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 부단한 연습만이 이를 가능케 한다.
張 勳 (弘武劍道館 初步 修練生)
만약 산중에서 호랑이와 마주친다면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가. 아마도 오금부터 저려 꼼짝달싹도 못하고 주저 앉거나 까무라칠 것이다. 길가의 맹견만 봐도 오싹한 것이 요즘 우리들이 아니던가.
하지만 우리 속담에 ‘범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말처럼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풀려날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흔들림없는 담대함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 담대함이 없다면 정신을 차릴 수도 없을 뿐 더러 쓰러져 호랑이 밥이 되고 말 것이다. 호랑이를 맨손으로 때려 눕혔던 야사나 전설의 인물들도 물러서지 않은 그 담대함이 밑바탕되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담력정쾌의 요체는 바로 그 담대함이다. 그것이 바탕이 되지 않고서는 힘도 정교한 기술도, 빠른 동작도 사실 물거품이 아닐가 싶다. 또한 담대함과 함께 명경지수의 마음과 흔들림없는 수도자의 자세를 지녔다해도 힘과 기술과 신속한 동작이 동반되지 않으면 역시 사상누각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즉 담력정쾌는 검도 검결의 총론을 집대성한 이론이자 실체이다.
담력정쾌가 주는 교훈은 살아가는 데 유익한 면이 많다. 치밀한 사업구상을 끝내고도 시작을 못하고 망설이거나 주저하는 경우는 담대함, 즉 담력이 부족한데서 비롯된다. 또한 사업을 시작하고도 손실에 대한 불안이나 염려로 인해 투자에 인색하고 수세적인 경영을 하다보면 역으로 손해를 입게된다. 역시 담대함이 없음에서 비롯된 실패 사례다.
공격적인 경영은 곧 힘이다. 그것은 경기의 호,불항에도 끄떡없는 뚝심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감이 필요하고 그 자신감은 담대함에서 시작된다고 보면 정확하다. 투자에 인색함이 없고 강한 추진력으로 밀어 부치는 것 또한 힘이다. 그 힘은 빈틈없는 계획과 정확한 판단력에 의해서 나오는 것이다.
검도의 정교한 기술은 비즈니스 측면에선 확실하고 빈틈없는 시장조사를 통해 타당성 높은 품목을 선별, 제품화 해 타사와의 경쟁에서 우위를 확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시장조사는 조그마한 정보라도 소홀히 하지 않고 수집하고 분석해야 한다. 그것이 곧 정교한 기술에 해당된다.
빠르고 깨끗한 쾌의 개념은 정확한 판단력과 함께 남들 보다 빨리 향후 시장을 전망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다. 또한 손실이 예상되거나 진행될 경우에는 과감하게 프로젝트를 삭감하거나 취소하는 결단 또한 쾌이다. 비즈니스 성공을 위해 치고 빠지는 식의 쾌가 진행되기 위해선 끊임없는 공부와 노력이 밑바탕 되어야함은 당연하다.
비즈니스는 생존이다. 생존은 상대를 제압하고 이겨야 가능하다. 반면 실패는 곧 사망과도 같다. 때문에 목숨을 걸고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그 이치를 아는 것이다. 안일함은 퇴보이자 스스로 생명을 단축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다시 말해 사업은 진검승부와 맥을 같이 한다.
담력정쾌의 요체는 상대를 제압하기 위한 자세와 수단을 정리한 것이다. 사업적으로 바라본 결론은 시대의 흐름을 늘 정확하게 파악하고 공격적인 경영과 더불어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안목을 키우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 이론은 학생들에게도 반드시 필요한 논리다. 꾸준한 공부를 통해 실력을 배양하고 흔들림없는 마음으로 시험을 치룰 때, 비로소 배운 바를 그대로 써내는 것이다. 담력정쾌를 알지 못하는 학생은 아는 문제도 조급함과 초조함으로 인해 틀리게 작성, 시험을 그르치기도 한다.
담력정괘는 검을 통한 세상을 사는 실용적 이론이다.
검도를 계속하고자 하는 이유와 목표
張 勳 (弘武劍道館 初步 修練生)
한 선승은 “산은 산이로되 물은 물이로다”고 했다. 또한 어떤 이는 “산이 있음에 오른다”고 했다. 강이 좋아 강촌에 사는 것일까. 살다보니 강가에 살고 그러다 보니 강이 좋고 물이 좋아진 것은 아닐까.
검을 계속 잡고자하는 이유를 묻노라면 할 말이 참 많기도 하고 또한 어색할 정도로 없기도 하다. 그 속에 인생이 있고 우주가 있다면 너무 거창하다. 하지만 굳이 특별히 좋은 점을 꼽으라면 한 참을 망설인다.
그것은 선을 점으로 나누라함과 똑같지 아니한가. 바다와 강을 물과 뭍으로 나누고 산을 나무와 기암괴석들로 가르라함과 무엇이 다른 것인가. 자연이라함은 있는 그대로를 말하는 것일진데…
검도라함도 검도이기에 좋고 그러기에 빠지는 것이며 스스로 헤어 나오려 하지 않는다. 검은 날 잡고 놔주지 않는다. 스스로도 그 잡힘이 좋다. 몸과 마음이 흔들릴 때 마다 죽도를 휘두르면 검은 나의 혼란함과 부산한 감정, 혼절할 것 같은 정신마저도 받아 준다. 그냥 무작정 받아 들인다. 그로인해 자신은 스스로 정제된다.
살다보면 얼마나 짜증나는 일이 많은가. 정신을 사납게 하는 일이 한 둘이 아니지 않는가. 하지만 세상은 이러한 것들은 받아 들이라고 강요할 때가 많다. 수용치 않으면 사회와 등지게 되고 나아가 낙오자가 되기까지도 한다. 하지만 정신을 올곧게 하고 나아 갈 방향을 제대로 잡은 뒤 온 힘을 쏟아 부으면 우리들은 기반을 다지고 성취감과 함께 그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게 된다. 그 옳곧음을 깨닫고 온 힘을 모으기 위해 검을 잡는 다면 지나친 비약이고 과장일까.
죽도를 잡으면 혼신의 힘을 다해 휘두르고 뛰게 된다. 땀방울이 비오듯 하고 온 몸을 적시고 도복마저 흥건케 한다. 그 땀방울은 자신의 오욕스런 편린들이다. 그 속에는 나태함의 유혹, 현실과 타협하며 안주하는 어리석음, 눈 앞의 이익만 쫒는 장사치의 속좁은 어리석음도 있고 허무맹랑한 망상의 찌꺼기도 있다. 그것들은 숨쉬는 동안 계속해서 배출되고 스스로를 무력하게 할 것이다. 그 메쓰꺼움과 역거움의 악취를 제거하기 위해 검을 휘두른다. 억겁의 세월이 흐른다 해도 결코 이 싸움에서 패하고 싶지가 않다.
검을 잡고 상대방을 바라보면 때로는 그 상대가 나 자신이 된다. 이기심과 더러운 욕망만 가득한 세속에 물든 허상을 보게 된다. 스스로 그 머리를 베고 허리를 자르고 찌르지만 또 다시 한순간에 그 허상은 재등장한다. 아무리 자르고 베어도 사라지지 않은 그 모습은 마음이 순결치 못하고 정화되지 못했기에 자신의 형상이 포말처럼 한 순간에 사라졌다가 다시 떠오르는 것이다. 그러기에 또 다시 머리를 치고 손목을 때리고 허리를 벤다.
그래서 그 졸렬함이 내 몸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한 검을 거둘 수가 없다. 검도를 계속해야만 하는 이유는 자신과의 약속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단히 이기적이고 용렬할 수 있지만 당장은 자신을 위해 내적 수련과 단련을 위해 죽도를 잡고자 한다. 지금은 아직 검도의 대승적인 차원을 논할 단계는 아니다. 아직도 검의 숨결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으니까.
아직까지 검도초보자의 딱지를 떼지 못하고 있다. 기검체 일체가 이뤄지지 않고 아직도 몸 따로 칼 따로인 엇박자 검객이다. 그것은 많은 실력 부족과 함께 정신적으로 아직도 무엇이 검도의 길인지 분간을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아흔 아홉개의 검도 봉우리가 있다면 이제 그 첫번째 산등성이에 겨우 다다랐다는 생각이다.
검도의 세계를 굽이 굽이 흐르는 장강의 물결에 비유한다면 자신은 이제 산골짝에서 흐르는 시냇물 정도에 불과하지만 마음만은 언젠가는 망망대해의 가장자리에라도 도달할 것 같은 심정이다. 그 높은 검도의 산들과 느리고 깊은 강물의 흐름과 바다 속은 알길 없지만 그 느낌과 향기와 영감은 늘 가슴과 머리 속에 가득하다. 아직은 검이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다. 죽도의 매서움과 외로움도 알 길 없다. 속절없이 느껴지는 검도의 길, 그 끝은 도대체 어느멜까.
왜 많은 검도 수련자들은 검도의 그 길을 찾고자, 그토록 애타게 자신에게 엄격하며 철저하게 스스로를 닦고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완성을 향해, 또 다른 정상,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격이 다른 세계에 대한 동경 때문이 아닐까. 인내와 함께 끝없는 정진을 요구하기에 더욱 그럴까. 현실의 많은 문제와 고민들을 한 칼에 해결하기 위해 검도 수련자들은 그토록 훈련에 목말라하고 땀흘리기를 주저하지 않는 것 일까. 단순히 이러한 문제 때문이라면 검도의 마력과 매력은 무의미하기 까지 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그 무엇인가가 있기에 많고 많은 이들이 발을 구르고 박차며 죽도를 내리치고 있다고 믿어지는 속성의 근원은 대관절 어디에서 비롯된 것 일까. 좌우지간 건강만은 알게 모르게 저절로 좋아졌다.
산사에서 스님들이 엎드려 절하며 염불하는 것과 수도원의 수사들이 침묵을 통해 얻는 것들과 칼을 통한 득도의 차이점은 과연 있는가. 아니면 같은 것일까. 묵상을 통해 느껴지는 침잠의 시간과 더불어 고요하게 정리되는 자신의 과제와 앞으로의 명제들이 어쩌면 동일하다는 생각이 강하게 와 닿는다. 하지만 그 검도의 한계와 끝과 깊이와 길은 어디일까.
이 같은 의문에도 불구 스스로 검에 중독됨을 느끼고 있다. 또 여러 사람이 간접적이나마 중독(?)되어 입관하기를 희망하고 있다. 그것은 아직은 어렴풋하지만 마냥 검도가 좋기에 그렇고 그들과 같이 이 좋은 것들을 나누고 함께 걷고자 함이다. 초보자의 초심이 그립고 겸허함이 부럽기에도 그렇다. 일찍 이 같은 매력을 느끼지 못한 것도 아쉽지만 뒤늦게 나마 검도와의 애정행각을 벌일 수 있어 그 자체만으로 흥겹고 다행스럽다.
검도와의 인연이 얼떨결에, 그 깊이와 맛도 모르고 시작했지만 어느새 검과 떨어지기가 두려울 정도가 됐다. 검도와의 만남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믿기에 더욱 그렇다. 중년의 나이에 어설프게 알게된 검의 오매한 맛에서 이제는 나이와 체력을 떠나 검향을 느낄 때 까지 죽도를 꼭 쥐고 싶다.
아들과 함께 시작한 검도는 부자간의 사이를 더욱 공고히하고 대화의 장을 계속케하며 또한 한 길을 걷은 동반 수도자 같은 마음까지도 갖게 한다. 검도의 무수한 매력, 굳이 말하라 한다면 짜릿함이다. 그 속에는 너무나 많은 희열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검도는 많은 인고의 시간을 요구한다. 어느덧 자신과 약속했던 1년이 됐다. 최소한 1년간은 검도를 꾸준히 하겠다는 그 다짐에 스스로 답했기에 대견스러움을 느끼며 이 같은 모습을 아들에게 보여줘 다행이다. 모든 것이 검도의 마력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 같은 약속이 지켜지기 까지는 이끌어 주고 밀어준 관장님이하 여러 사범님들, 유단자와 선배들의 아낌없는 수고가 있었기에 가능했음은 너무도 당연하다. 지면을 통해 고마움을 전한다.
삶의 활력소가 되고 있는 검도는 많은 것을 절제케한다. 그 단호함과 세상을 향한 포효소리와 검을 잡는 두 손을 통해 내면의 자신을 불사르는 그 정화과정, 그 한계와 깊이는 도저히 가름할 길 없다. 하지만 검도의 그 길, 정말 끝까지 가고 싶다. 먼저 자신과의 약속을 1년 더 연장하고자 한다.
누군가 왜 검도를 하느냐고 묻노라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 속에 길이 있고 답이 있고 사랑과 애정, 희열과 기쁨이 있으며 인생도 있노라고..”
평상심(平常心)
어느 한쪽에 치우침이 없는 평온한 상태의 마음이다. 상황의 변화에도 놀라지 않고 차분히 그리고 신속히 대처할 수 있는 마음이다. 따라서 이러한 마음 상태가 되면 상대의 허점이 눈에 보이게 되고 상대의 공격에 능히 대처하며 역공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검도는 육체적으로 격렬한 몸놀림이기는 하지만 한 순간도 방심할 수 없는 찰나의 예술이다. 따라서 정신적, 심적으로 내면의 수련을 닦는 연습을 많이 하여야만 마음이 담긴 칼을 사용할 수 있다. 평상심을 유지하는 것이 바로 검도인의 내적 수양을 위한 부단히 노력해야 할 과제이다.
張 勳 (弘武劍道館 初步 修練生)
첫댓글 흐흐흐.. 엄청나죠.. 논문을 읽은 느낌이에요. 아참.. 심산님도 제 편지 그냥 공개했는데 저도 이글 공개해도 되겠죵? ㅋㅋ
검도에 대한 열정이 너무 남다르신것 같습니다.. 배우고 또 배우게 되는군요.. 그 마음가짐..
안되겠다....심산님....얼릉 한번 해운대 놀러오세요... 청사포에 가면 심산님이 그리도 그리워 하시는 바다 앞에 두고 가게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데, 그 가게들이 모두 심산님이 좋아하시는 바다에서 나는 것만 팔지 않습니까... 심산님 꼭 뵙고 싶습니다..ㅎㅎ
방학 되면, 날잡아서 새벽 3시에 일어나 마음 정갈히 하고 부산순수검도에서 심산님 기다리도록 하겠습니다....도저히 밤새는 건 못하겠고...제가 제일 소중하게 생각하는 새벽시간을 심산님께 바치도록 하죠....^_^^_^^_^^_^ 12월 말쯤에 날한번 잡아봐요 심산님~~~
심산님의 검도에 대한 열정이 저의 생각을 훨씬 뛰어넘으시는군요...존경의 마음을...
존경스럽습니다. 深山 님! 압축 파일의 일부분 일뿐이라는 것,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