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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수행자의 길을 걷고 싶은 뉴욕 한마음선원 원공스님
원공스님은 필자에게는 두 가지 인상이 오버렙 된다. 하나는 수줍은 미소이고 다른 하나는 작업복 차림으로 일하는 모습이다. 필자는 미주의 많은 사찰을 다니면서 많은 스님들을 만났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스님중의 한 분이 메샤츠세츠 주의 ‘일본산묘법사’의 주지스님이다. 어느 날 평화의 탑 건립공사를 수년간 하던 이 사찰을 방문 할 기회가 있었다. 사찰에 들어서자 작업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다가가 인부에게 이 사찰을 주지를 만나러 왔다고 물으니 이 인부가 모자를 벗으면서 “제가 주지입니다”라고 하여 놀란 적이 있다. 작업장의 원공스님을 보면 그 스님이 연상된다.
어느 신도는 원공스님을 “이제는 토목공사 인부가 다 된 스님이고 뉴욕 한마음선원 108평 대웅전은 원공스님의 피와 땀이 스며있는 건물이다.”라고 원공스님과 한마음선원의 상징이 된 법당을 한데 묶어 설명한다.
현재 50대인 원공스님은 대행스님의 권유로 1990년 2월에 미국에 와 뉴욕 한마음선원에서 활동을 시작했으니 뉴욕생활만 20년이 흐른 셈이다. 뉴욕에서 20년 활동은 뉴욕불교계의 스님들중에서도 가장 오랜 활동을 한 스님에 속한다. 뉴욕의 구참인 것이다. 그러나 현재 완공을 눈 앞에 두고 있는 대웅전 공사가 시작된 2005년 7월부터 현재까지 오로지 이 공사에 메달렸고 또 스님 자신은 출가 전 고등학생 시절부터 품어 온 생의 의문점들에 대해 사색하고 수행에 방점을 두고 살아왔기 때문에 활동적인 포교생활이나 남 앞에 나서지 않아 뉴욕불교계에서 아직도 신참 스님처럼 느껴진다.
스님은 선원에서 설법할 때 마다 한마음선원 사부대중의 구심점이자 스승인 대행스님의 가르침을 상기시키는 설명을 많이 한다. 그리고 스님 자신도 대행스님의 말씀을 수행과 실천의 근본 자리에 놓고 있다. 예를 들어 ‘자기 근본을 바라보면서 수행하라’, ‘주인공을 믿고 맡겨라’ 등이 그것이다. 대행스님의 가르침대로 수행하면서 수년간 대웅전 공사장에서 힘든 일을 하고 있는 원공스님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원공스님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삶의 문제’에 대한 사색을 많이 하였다. 그의 눈에는 세상의 모든 것이 불안전하고 부서지기 쉬운 것 처럼 보였다. 인간의 생사문제가 스님에게는 불안하였다. 또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재산문제 등이 허망하게 부서지는 모습들을 보면서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들이 불안정한 모습으로 스님에게 투영된 것이다. 이런 문제와 더불어 ‘고통’에 대한 문제도 그의 사색거리였다. 고통에서 자유로워야 편안한 삶을 살 수 있다는 정도의 인식을 가졌다. 이렇게 ‘불안전’과 ‘고통’을 사색하면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보통 사람들은 고등학교 시절에 이런 고민을 하다가 대학이나 사회로 나와 진로를 정하게 되는데 원공스님은 이 고민의 기간이 다른 사람보다 길었다. 스님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대학시절 까지 약 10년을 방황하였다”고 당시를 회고한다. 고등학교 졸업 후 스님은 ‘생명의 실상’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이 책을 보는 동안 “어두운 동굴에서 갇혔있다가 빛으로 된 길을 보는 느낌”이었다고 한다. 살길이 열리는 것 같았다는 것이다. 이 책을 본 이후에도 ‘마음’에 관한 책들과 종교서적을 많이 보았다. 이런 영향으로 종교를 무시하던 생각을 바꾸었으며 종교적 체험을 겪기도 하였다.
“제가 20대 초반에 백부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묘지를 하고 묘지를 공고히 하기 위해 흙을 밟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울게되었는데 이때 생각이 끊어진 무아의 상태에 빠졌다가 생각이 돌아오는 과정을 겪었습니다.” 이런 체험은 나중에 출가하여 수행하면서 큰 도움이 되기도 했다.
이런 체험을 할 정도로 원공스님은 젊은 시절 사회생활에는 관심이 없고 온통 마음공부에 관한 생각으로 지냈는데 한동안 하루 종일 누워있다가 저녁에 잠깐 일어나 산책하곤 하였다. 그리고 종교단체를 기울이게 되었고 종교단체에서 1년 정도 지도를 받던 중 대행스님에 관한 책 ‘도’를 우연히 읽었다. 이 책을 통해 본 대행스님은 바로 원공스님이 찾던 분이었고 부처님 같은 분이었다.
1985년에 원공스님은 안양으로 대행스님을 찾아가 친견하게 된다. 그리고 스님의 “놓아라”라는 말에 모든 것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이런 느낌과 체험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고 뗄 수 없는 인연으로 연결되었다. 이 친견을 계기로 ‘대행스님만이 답이다’라는 생각이 원공스님 가슴에 깊이 박히자 1986년 5월 출가 하였다. 출가한 후 원공스님은 “올곳에 왔구나 하는 느낌”이었다. 10여년 방황의 끝난 뒤 출가였기 때문에 오랜 동안 집안 떠나 있다가 집에 돌아온 사람처럼 원공스님은 출가 후 한 달은 모든 것을 놓았다.
불문에 본격적으로 들어온 원공스님은 3-4달 대행스님의 법문을 들으니 스님의 가르침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었다. 이렇게 되니 신심이 나고 수행이 순조로웠다. 주인공을 믿고 맡기는 수행을 한 것이다. 그러자 생활하면서 관하는 힘이 생기게 되었다. 그러던 중 스님은 수행중이던 아산 현충사 뒤 개운사라는 고려시대 절에서 대행스님의 부름을 받았다.
“뉴욕에 가겠느냐?”고 대행스님이 물으셨다.
깨달기 전에는 포교활동을 하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스님의 권유가 있자 “스님이 가라고 하시면 가겠습니다”하고 뉴욕에 왔다.
뉴욕 지원에서의 현실은 원공스님 생각과 달랐다.
“가르침이 훌륭하니까 선원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룰 것으로 생각했으나 현실은 그것이 아니었다” 삶을 통해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이해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실제 생활속에서 부딪치며 원공스님은 포교관을 정립하게 되었다.
“저는 포교를 하면서 또 수행을 하면서 항상 대행스님의 가르침을 생각하고 실천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대행스님의 포교방향은 ‘불교의 생활화, 불교의 과학화, 불교의 현대화’이다. 이것은 모든 한마음선원의 포교방향이기도 하다. 요약해서 말하면 수생과 생활이 둘이 아니고 불자들의 수행과 삶이 일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생활과 수행을 일치시키며 앞장서서 사회를 이끌 수 있어야 이 시대에 부합하는 불교인이라는 것이다. 이 가르침을 받들면서 원공스님은 뉴욕한마음선원의 대중인 혜봉스님, 혜고스님, 혜주스님 등 대중스님들과 함께 뉴욕 도량이 나아갈 길을 정했는데 첫째는 법을 확실하게 전하는 도량이고 둘째는 함께하고 함께 나누는 삶을 통해 보살행을 구현하는 도량이다. 이런 도량을 만들고 이런 도량을 유지하려면 양보다는 질을 추구하는 원칙이 필요하다. 질을 추구하는 방향은 원공스님이 원하는 방향과 일치하였다.
“내가 수행자로서 올바르게 사는 것하고 전법이 일치되어야 한다. 오래 전부터 이렇게 생각해왔다. 포교현장에 있다 보니까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가를 실감하고 있다. 선원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많이 온다. 인간의 마음에 있는 고통을 제거하기 위해 설법을 잘하고 사람들을 많이 모으기 위해 이벤트 등이 필요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그들의 어려움을 벗어날 수 있는 근본불교 수행을 지도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하여 불교를 올바로 이해하는 진실한 불자로 만들어야 한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나의 수행을 통해서 바르게 이끌어야 한다. 즉 내가 진실한 수행자가 되어야 한다. 교리는 책이나 인터넷을 통해서 알 수 있다.”는 것이 원공스님의 주장이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스님 자신의 좋은 체험이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원공스님은 누누이 강조한다.
108편 전통사찰건립과 토목공사 인부처럼 일하는 원공스님
한마음선원은 2005년부터 108평 규모의 한국전통사찰건립을 위한 공사를 해왔다. 이제 단청만 하면 이 공사는 끝이 난다. 이 공사를 위해 선원의 스님과 신도들은 혼연일체가 되었다. 원공스님은 이 공사기간 내내 작업복 차림으로 공사판 노동자 같은 생활을 하였다.
선원에서 도량을 만들기로 하고 실태조사를 위해 혜봉스님이 뉴욕일원의 사찰들을 방문하면서 불교계 환경이 열약한 것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한마음선원만을 위한 도량이 아니라 불교계 전체를 위한 공간을 만들고 불교계 전체 발전을 위해 불교계와 함께 해야 한다는 서원을 세웠다. 그래서 선원의 주변 건물들을 사들이고 현대식으로 첨단의 대웅전을 세울 계획을 하였다. 이런 설계도를 가지고 안양으로 가서 대행스님께 말씀드렸으나 스님은 설계도를 보지도 않으시고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마음을 편히 쉴 수 있는 도량을 만들라는 말씀을 하였다”
대행스님의 말씀을 계기로 한국불교문화를 알릴 수 있는 도량으로 방향을 바꾸고 난 후 대목장 신응수 씨를 만나게 되었다. 신응수씨로부터 공사비 예산 설명을 듣고 원공스님과 혜봉스님은 기운이 빠져 3일간을 누워 있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청천벽락 같은 소식이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픈 일을 당했을 때 침식을 잊고 누워있는 기간이 길면 3일 간다고 한다. 하늘이 무너지는 어떤 큰 슬픔이 와도 3일이 지나면서 슬픔이 면역이 생기는 것이다. 당시 원공스님으로서는 꼭 해야만 할 불사의 자금 때문에 충격을 받고 3일 동안 몸져 누워있게 된 것이다. 충격에서 차차 벗어나면서 이 불사는 생명을 걸 가치가 있다는 쪽으로 생각을 정리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그리고 목숨을 걸고 한다는 생각으로 이 불사를 시작하였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혜봉스님도 같은 생각이었다고 한다.
대웅전을 건립하기 위한 공사를 시작하였지만 도량건축을 비롯하여 공사 등에 대해 5명의 대중스님들은 아무런 지식과 경험이 없었다. 실제 일을 담당할 건설회사를 선정하면 다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끊임없는 어려움이 발생하고 무수한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헤쳐 나왔다. 원공스님은 이 공사 과정을 통해 실천속에서 단련이 된 인재가 양성이 되어야 불교가 발전이 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처음 공사를 시작할 때는 원공스님을 비롯한 대중스님, 신도들은 환희심이 넘쳐흘렀다. 선원 주변 3채를 더 구입하여 선원 자체의 힘으로 모든 수리를 다했다. 어떤 경우에는 밤 12시까지 일을 하면서 때로는 신도들에게 본의 아니게 소홀히 한 일도 있었다. 스님들이 중고차 5대를 기증받아서 이 차도 역시 수리하여 중고차 복덕방을 통해 매매하였다. 스님들이 근면 절약을 앞장서서 하면서 헌신적으로 공사 일을 하였으며 처음에는 뉴욕 한마음선원 신도들 자체적으로 재정을 조달하여 공사를 하였지만 현재는 한국의 한마음선원 신자들이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다.
공사하는 과정에서 수 없는 문제들이 생겼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공사시공회사, 하청업체, 그리고 선원이 함께 협의하면서 문제를 해결하였다. 대부분 돈이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처음 예상과 다르게 비용이 올라가는 경우 예산을 올리지 않으면 부실공사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런 문제가 생길 때마다 해결해야만 했다. 기와가 도착 했을때도 빨리 옮겨야 하는데 사람이 없어 운전경험이 전혀 없는 원공스님은 포크 리프트를 운전해야만 했다. 20분이면 하는 것을 2시간 걸려서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원공스님은 이런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마음이 중요하다. 난관이 생겼을 때 이것을 뚫고 나갈 수 있는 기질이 중요하다. 뉴욕 한마음선원의 경우는 이 일을 혜봉스님이 앞장서서 했다.”고 원공스님은 말했다. 대웅전 공사를 통해 원공스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어려움을 돌파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교훈을 얻었다.
원공스님은 대웅전 공사를 하다 보니 부처님의 가르침이 깊이 가슴에 와 닿는 변화가 있었다. 또 공사를 통해 신도들의 어려움을 동감할 수 있었으면 현실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수행의 장이 되었다.
이 공사에는 원공스님 뿐만 아니라 선원의 대중 5명이 초지일관 한마음 한뜻으로 움직였다.이렇게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대중스님들이 화합이 되었고 이 화합이 큰 힘이 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공사기간만 5년이 넘은 이 도량은 이제 완공을 눈앞에 두고 있다. 한국의 안양을 비롯하여 부산, 대구 등 여러 도시에 한마음선원의 전통 사찰이 있지만 미국, 유럽, 남미, 아시아 여러 대륙에 있는 한마음의 해외사찰로서는 첫 번째 한국전통사찰이다. 이 대웅전이 건물로는 한국불교문화를 알릴 수 있고, 한마음 법의 기념비적인 법당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이 도량을 통해 사회와 여러 분야에서 공유하고 소통하고 싶은 바램이 있다.
이런 뜻이 있는 대웅전이기 때문에 원공스님을 비롯한 한마음선원의 4부 대중은 이 도량이 자비와 지혜가 상주하는 도량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주변 사회까지 정화하는 역할을 하는 도량이 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원공스님의 소원
앞에서도 말했지만 원공스님의 관심은 수행이다. 그래서 스님은 바른 수행자가 되고 싶고 죽기 전에 깨달음을 이루고 싶은 것이 원공스님의 화두다. 이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 스승 대행스님을 비롯하여 인도 성자들의 가르침을 항상 명상한다. ‘모든 것을 주인공에 놓아라’라든가 ‘바람에 뒹그는 낙엽처럼 살아라’ 또는 ‘가는곳 마다 편아하게 살아라’ 등이 그것이다. 스님의 삶의 방향이 이러하기 때문에 스님은 여건이 되면 도심 도량의 보조역할을 할 수 있고 집중적인 수행을 할 수 있는 산중선원을 마련하고 싶은 개인적인 소원이 있다. (20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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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원공스님의 느낌은' 하나는 수줍은 미소이고 다른 하나는 작업복 차림으로 일하는 모습이다'그렇읍니다.
늘 한결같은 스님의 모습입니다.
한마음선원이 어서 완공식을 하기를 바랍니다. 한국식의 한국불교아닌 대중들을 위한 진정한 부처님 법을 실행하는 불교를
이곳에서 전파하시기를...왠지 도봉산의 무량스님이 오버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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