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형대에 걸린 詩
- 인간해방의 경종을 울려라
4·26(1960년 이날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 성명을 발표했다.-편집자註) 전까지의 나의 작품 생활을 더듬어 볼 때 시(詩)는 어떻게 어벌쩡하게 써왔지만 산문(散文)은 전혀 알 수가 없었고 감히 써 볼 생각조차도 먹어 보지를 못했다. 이유는 너무나 뻔하다.
말하자면 시를 쓸 때에 통할 수 있는 최소한도의 ‘캄푸라쥬(camouflage, 위장·은폐-편집자註)’가 산문에 있어서는 통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산문의 자유(自由)뿐이 아니다. 태도(態度)의 자유조차도 있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나처럼 6·25 때에 포로생활까지 하고 나온 이 사람은 슬프게도 문학단체(文學團體) 같은 데서 떨어져서 초연하게 살 수 있는 자유가 도저히 없었다. 감정(感情)의 자유 역시 그렇다.
이를 테면 같은 시인끼리라도 나와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들은 상대방에 대해서 불쾌(不快)한 일이 있더라도 그런 감정을 하여서는 아니 되고 그런 태도를 극력 보여서는 아니 되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나올 수 있는 작품(作品)이 무슨 신통한 것이 있겠는가. 저주(咀呪)가 아니면 비명(悲鳴)이 아니면 죽음의 시(詩)가 고작이 아니었던가. 그렇다고 앞으로 이에 대한 복수(復讐)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나는 사실 요사이는 시를 쓰지 않아도 충분히 행복하다. 4·26이 전취(戰取)한 자유는 나의 두 손 아름을 채우고도 남는다. 나는 정말 이 벅찬 자유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다. 너무 눈이 부시다. 너무나 휘황하다. 그리고 이 빛에 눈과 몸과 마음이 익숙해지기까지는 잠시 시를 쓸 생각을 버려야겠다.
지난날의 낡은 시단(詩壇)의 과오(過誤)나 폐습(弊習)을 나는 여기서 재삼(再三) 뇌까리고 싶은 생각은 없다. 오히려 그렇듯 숨 막힐 듯한 괴로운 시대 속에서 과감하게 자기의 세계를 지켜 가면서 싸워 온 시인이 현(現) 시단(詩壇)의 기성인(旣成人) 중에서도 몇 사람은 있다는 것을 나는 여간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다. 어느 나라의 시단이고 진짜 시인보다는 가짜 시인이 훨씬 더 많은 법이고, 요즈음 세간(世間)의 여론(輿論)의 규탄을 받고 있는 소위 어용시인(御用詩人)이나 아부시인(阿附詩人)들은 이미 그들이 권력의 편에 서서 나팔을 불기 전에 먼저 시인으로서는 완전히 자격을 상실한 자들뿐이다.(아니 애당초 시인이 되어 보지도 못한 자들뿐이다.) 그러니까 그까짓 것은 하등 문제거리가 되지 않는다.
내가 여기 말하고 싶은 것은 4·26 이전의 우리나라의 시단의 작품들이 대체로 낡은 작품이 많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현상은 시로서 합격된 작물(作物) 중에 특히 더 많았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은 객관적으로 볼 때 새로운 시대의 이념을 반영할 수 있는 제작(製作)상의 모험적 기도를 용납할 수 있는 시대적 혹은 사회적 여백(餘白)이 전혀 없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한데, 이와 같은 고민을 처절히 체득한 시인이라면 4·26은 그에게 황금(黃金)의 해방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앞으로 이러한 시인들만이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지만 4·26의 역사적 분수령을 지조(志操)를 굽히지 않고 넘어온 기성시인 중에서 과연 몇 사람이 새 시대의 선수의 자격을 가질 수 있을는지는 확언하기 힘든다.
‘책임은 꿈에서 시작된다’는 유명한 서구의 고언(古言)이 있는데 이 말은 4·26을 계기로 해서 새로운 출발의 자세를 갖추고자 하는 젊은 시인들이 필히 느꼈어야 할 기본인식이다. 이 인식의 감득(感得)이 없이는 새 시대의 출발은 불가능하다. 4·26의 해방은 꿈의 해방이다. 이제야말로 꿈을 가지라. 구김살 없는 원대한 꿈을 가지라고 나는 외치고 싶다. 이와 같은 꿈은 여직까지는 맛볼 수 없었던 태도의 자유와 감정의 자유를 투박하게 요구한다. 여기에 과실즙이나 솥뚜껑 위에 어린 밥풀 같은, 달콤하고도 거룩한 시인의 책임이 있다. 시인들이여! 새로운 시인들이여! 이제야말로 인간 해방의 경종(警鐘)을 울려라.
나는 4·19 전에 어느 날 조지훈(趙芝薰) 형하고 술을 마시면서 ‘세상 사람들이 모두 시인이 되기 전에는 이 나라는 구원(救援)을 받지 못한다’고 ‘휘트먼’인가의 말을 차용(借用)하여 가면서 기염(氣焰)을 토한 일이 있었는데 요 일전에 윤돈(倫敦·런던-편집자註)에 있는 박태진(朴泰鎭) 형한테서 온 4·26 해방을 축하하는 편지 속에 ‘새로운 정부가 선물(한) 시(詩)를 모르는 녀석들이 거만하게 구는 한, 구제(救濟)가 없겠지요’라는 말이 또 있어서 요즈음은 만나는 사람마다 중이 염불하듯이 이 말을 전파(傳播)하고 있다.
그런데 내가 여기서 말하는 시인이면 반드시 시작품(詩作品)을 신문이나 잡지에 주기적으로 발표하는 사람만을 말하고 있는 것도 물론 아니다. 소위 시를 쓰고 있는 사람들 중에도 이번 4·19나 4·26을 냉담하게 보고 있는 친구들이 적지 않은 것을 나는 알고 있는데(어울리지 않게 날뛰는 친구도 보기 싫지만 그 이상으로) 나는 이런 위인들을 보면 분이 터져서 따귀라도 붙이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고 있다.
나는 극언(極言)하건대 이번 4·26사태를 정확하게 파악(把握)하고 통찰(洞察)하지 못하는 사람은 미안하지만 시인의 자격(資格)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불쌍한 사람들이 소위 시인들 속에 상당히 많이 있는 것을 보고 정말 놀랐다. 나의 친척에 모(某) 국민학교 교감이 있는데 이 작자가 4·19 날의 데모를 보고 집에 와서 여편네한테 “학생들도 이제 볼장 다 봤어. 그런 폭도(暴徒)들이 어디 있어’ 하며 밤새도록 부부싸움을 했다나. 그런 시인이나 이런 교감(校監)은 모두 다 모름지기 이승만(李承晩)의 뒤나 따라가 살든지 죽든지 양자택일(兩者擇一)하여라.
4·26 후 나의 성품이 사뭇 고약해 가는 것을 알면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 너무 흥분한 탓이려니 해서 도봉산(道峰山) 밑에 있는 아우 집에 가서 한 이틀 동안을 쉬면서 마음을 가다듬고 왔는데 서울에 와 보니 역시 마찬가지다. 마음이 정 고약해져서 시를 쓰지 못할 만큼 거칠어진다 해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시대의 윤리 명령은 시 이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거센 혁명의 마멸(磨滅) 속에서 나는 나의 시를 다시 한 번 책형대 위에 걸어 놓았다.
(출처=《京鄕新聞》 1960년 5월 20일)
[편집자註-책형대(磔刑臺)는 죄인을 기둥에 묶어 세워 놓고 창으로 찔러 죽이는 형벌을 행하던 틀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