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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두 가지 提案을 드리면서 李鴻章이 남긴 記錄들 중 두 도막을 펼쳐보겠습니다.
提案 1: 漢字竝用
이곳에 계신 여러분들께서는 아마 이미 아시고계시리라 싶기도 하지만 다시 한 번 이 重要한 事實을 여기서 强調하는 것으로 始作하고자 합니다.
漢字는 다른 누구의 글이 아니라 바로 우리 先祖들께서 만드시어 우리들에게 남기신, 우리의 글입니다.
千萬番 물어도, 그 누가 물어도 저는 漢字가 우리글, 朝鮮글이라고 말하겠습니다.
漢字가 우리 글이란 사실은 진태하 교수, 강상원 박사, (「本主」, 「한자는 우리 글이다」 등의 著者) 박문기 선생께서 이미 말씀하신 바이기도 하지만, 저는 道德經을 읽을때 여러 句節에 맞춰진 韻을 소리내어보면서 漢字가 우리글이란 사실을 實感하였습니다.
道德經 第2章 마지막 열세글자는 “功成而弗居 夫唯弗居 是以不去” 입니다. “弗居”와 “不去”의 소리값이 “불거”로 같습니다. 지금의 소리값과 글이 쓰여졌을 당시의 소리값은 다를 수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고 경우에 따라 충분히 그럴 수 있겠지만, 적어도 이 구절만큼은 도덕경이 실제로 쓰여졌을 당시에도 실제로 같은 소리값을 갖는 - 지금의 소리값인 “불거”와 다른 소리로 읽혔을 가능성은 있겠습니다 - 한 쌍의 글자들을 배열했던 것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弗居”를 먼저 둔 다음 끝에 “不去”를 두었는데 뜻도 같고 음도 같은 “弗”과 “不”을 같은 글자의 중복을 피해 일부러 한번씩 쓴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위 구절의 뜻은 “功을 이루나 거기에 머물지 (그것을 (내것이라) 주장하지) 않습니다. ((오직) (그) 功에) 머물지 않기에 이로써 (그 功이) 버려지지 (虛事로 돌아가지) 않습니다”로 풀 수 있습니다.
고도로 精製된 글자들을 써서 깊은 뜻을 전하는 道德經에서, 이 열세글자만으로도 이토록 곱씹을수록 깊은 가르침을 주는 句節일진대, 音과 訓이 모두 같은 “弗”과 “不” 및 訓은 反對이면서 音이 같은 “居”와 “去”를 對句의 같은 자리에 配置하여 글의 音樂的 效果를 이루고 글 全體의 完結性을 더한 것입니다.
지금 대륙에 있는 사람들이 쓰는 표준발음으로는 “弗居”와 “不去”가 각기 “fú jū”, “bù qù”가 되어 전혀 같은 소리가 되지 않습니다. 일본어로도 각기 “フツ キョ”, “フ(ブ) キヨ”여서 “불”에 해당하는 대구의 두 글자 소리값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1446년 訓民正音 頒布 當時 우리입말 발음이 어떠했는지는 더 살펴봐야겠으나 그로부터 130년후 1576년 宣祖가 李珥에게 명하여 짓게 한 栗谷中庸諺解에 따르면 두 대구는 모두 “불거”로 발음됩니다.
도덕경에서, 그리고 그안에서 하나의 사례를 든 것이지만, 수많은 書冊과 資料들을 캐면 캘수록 漢字가 우리글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조각들은 계속 쏟아져나옵니다. 박문기 선생의 「한자는 우리글이다」(2001) 외에, 2017년에 나온 이상화 선생의 「春夏秋冬으로 풀이한 한자의 창제원리와 어원」이라는 책에서는 甲骨文 字音, 字形, 字義를 모두 살피며 漢字 字音의 語源을 우리말 속에서 찾아내어 밝히고 있습니다.
漢字는 한 글자 한 글자마다 뜻을 품고 있으므로 正確한 뜻을 전함에 있어 그 소리값으로만 적는 소위 ‘한글전용’보다 優越하다는 점은 말할 필요없이 分明합니다. ‘한글전용’이랍시고 우리의 뜻글자를 쓰지 않으니 소리를 적은 것만으로는 무슨 뜻인지 分揀이 되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을뿐더러 意味傳達이 貧弱해진 틈을 영어가 비집고 들어와 주인행세를 하여 우리말글과 글말이 모두 汚染되어 가는가하면 사람들의 全般的인 文解力 亦是 갈수록 떨어지고 있습니다.
'한글전용'이랍시고 우리글 漢字를 쓰지 않음으로 생기게 된 가장 큰 弊害 두 가지는 첫째, 우리글인 漢字를 쓰지 않음에 따라 우리가 마땅히 품고 높여야 할 깊은 思考力이 涵養되지 못하는 점, 둘째, 보다 根本的인 問題로서, 우리의 傳統文化와 斷絶되어감에 따라 우리 固有의 바른 精神과 겨레얼이 떨어지고 그 豐富한 遺産을 제대로 이어 새로이 높이고 펼쳐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매우 深刻한 問題입니다. ‘한글전용’이라는 잘못된 정책을 廢止해야만 합니다. (스스로 奴隸됨을 자처하는 ‘중국어’에 대한 소위 “‘외래’어 표기법”규정도 함께 폐지해야 할 것입니다. 역사상 본디의 ‘中國’도 아니고 그 무슨 ‘中國語’도 아니며 ‘外來語’도 아니고 바로 우리글의 우리말發音일 뿐이기 때문에 ‘작은따옴표’안에 넣었습니다.) 반드시 漢字를 竝行하여 써야만 이러한 문제들을 풀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歷史, 잃어버리고 비틀려지고 쪼그라든 우리의 력사 – 소위 ‘두음법칙’이라는 잘못된 ‘법칙’도 원칙적으로 없애가는 방향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봅니다 - 를 되찾고 바로잡기 위한 한줄기 로력을 함께 기울일진대, 漢字가 우리글이고 正音은 그 發音記號라는 사실을 勘案할 때, 뜻을 정확히 나타내고 그 정확한 뜻으로써 서로 疏通하고 硏究한 結果를 共有하여 쌓아가기 위해 이곳 大陸朝鮮硏究會부터 本格的으로 漢字를 竝用해갈 것을 提案합니다.
正音을 쓰고 括弧안에 漢字를 쓰거나 漢字를 쓰고 括弧안에 正音을 附記할 것이 아니라 地名 등을 包含하여 최소한 문장 안에서 重要한 뜻을 담는 글자들은 모두 漢字로만 적는 것을 제안합니다. 그러면 二重으로 쓰는 時間도 단 몇 초, 몇 분이라도 줄일 수 있어 效率的입니다. 또한 그것이 眞正한 竝用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李鴻章이 總理各國事務衙門에 보낸 奏摺속에 비춰진 朝鮮의 疆域
1) 照錄 復朝鮮原任太師李裕元函稿, 光緖五年七月十三日(1879.08.30), 淸季中日韓關係史料, (臺灣)中央硏究院近代史硏究所 編, 朝鮮檔 01-25-004-02-018, http://mhdb.mh.sinica.edu.tw/
李鴻章(1823-1901)이 (朝鮮의 領議政을 歷任한 바 있던) 李裕元(1814-1888)에게 1879년 8월 26일자로 보냈던 書信의 일부분입니다.
“...近察日本行事乖謬 居心叵測... 其疆宇相望之處 北則貴國 南則中國之臺灣...”
(“근래 일본의 일처리는 도리에 어긋나고 그 속마음을 헤아리기 어려우니... 그(일본의) 강역을 서로 마주보는 곳이 北으로는 貴國이요 南으로는 中國의 臺灣입니다...”)
貴國은 朝鮮을 가리키는데 서로 疆土를 마주보는 곳으로서 日本의 北쪽에 朝鮮이 있고 일본의 南쪽에 “中國”의 臺灣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中國”은 疆域으로서 大陸 全體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中央政治權力으로서 일단 “淸朝”(淸(帝)國政府)를 指稱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中國”을 과연 “淸朝”와 同値시킬 수 있을지는 더 검토하겠습니다.)
海峽으로 떨어져 있고(現 半島朝鮮) 東‘支那’海(現表記上 東‘中國’海, East ‘China’ Sea) 너머에 있는 섬(現 臺灣)을 두고 “其疆宇相望之處”라 하여 서로 강토를 마주보고 있다고 표현하는 것은 無理일 것입니다. 淸朝末 第一의 外交家였던 李鴻章이 그런 無理한 표현을 하지 않았다면, 日本의 疆域과 서로 붙어있거나 매우 가까운 곳에 있기에 그리 말했을 것입니다. 相對的 位置上 北에서 南으로 朝鮮-日本-臺灣이 있었던 것이고 그렇다면 위 대목에서 말하는 日本을 大陸의 南東海岸으로 놓고 보면 큰 무리없는 표현이 될 것입니다. (各其 正確한 疆域은 더 밝혀야 할 問題이고, “臺灣”이 現在의 ‘臺灣’을 가리키는 것인지도 더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2) 密咨片奏與朝鮮賫咨官卞元圭筆談節略, 光緖六年九月二十八日(1880.10.31), 淸季中日韓關係史料, (臺灣)中央硏究院近代史硏究所 編, 朝鮮檔 01-25-005-01-012, http://mhdb.mh.sinica.edu.tw/
① 照錄片稿
리홍장이 1880년 10월 31일 總理各國事務衙門에 보냈던 奏摺 중 일부입니다.
“...而俄人則窺伺甚急 朝鮮東北海口與俄接界 防禦太疎... 査朝鮮三面環海 其形勢實當東北洋之衝 而爲盛京吉林直隸山東數省之屛蔽 其民人能耐勞苦 物産亦非甚絀 五金煤鐵之礦未經開採 倘爲俄人佔踞 與吉林黑龍江 俄境勢若連雞 形如拊背 則我東三省及京畿重地 皆岌岌不能自安 關係甚重...”
(“그리고 俄(러시아)人들이 기회를 엿보는 것은 심히 위급하며 朝鮮의 東北海口가 러시아와 경계를 접하고 있는데도 방어가 매우 소홀합니다... 생각컨대 朝鮮은 三面이 海로 둘러싸여있고 그 형세는 실로 東北洋의 要衝이며 盛京⸱吉林⸱直隸⸱山東 등 여러 성의 (屛風같은) 울타리가 됩니다. 그 백성들은 능히 로고를 견뎌낼 수 있고 물산은 심히 부족하지 않으며 五金, 石炭, 鐵 등의 광산은 아직 개발되지 않았습니다. 만약 러시아인들이 (朝鮮을) 占據하게 되면 吉林⸱黑龍江과 러시아 강역의 형세가 마치 닭의 양날개를 움켜쥔 것같은 꼴이 될 것이고 우리 東三省과 京畿의 重地는 모두 아주 위태로워져서 스스로 안전을 누릴 수 없게되니 관계된 바가 매우 무겁습니다...”)
("朝鮮三面環海"에서 ’海’가 반드시 우리가 흔히 말하는 ‘바다’를 뜻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說文解字》卷十二 水部에는 “海, 天池也以納百川者”라 하였는데 이에 따르면 ‘온갖 물길을 모두 받아들이는 (自然히 만들어진) 큰 湖水 또는 江’을 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三面이 모두 ‘바다’였다는 뜻으로 置簿해버릴 것만은 아닙니다. 또한 "海"는 크다’, ‘넓다’, ‘밝다’라는 뜻을 갖거나 ‘人山人海(인산인해)’와 같이 사물이나 사람이 많이 모인 모습을 칭하기도 합니다.)
위 대목을 보면, 첫째로, 朝鮮의 “東北海口”가 俄羅斯(러시아)와 境界를 접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半島는 바다를 향하여 바늘끝처럼 러시아와 닿을 수 있을뿐이며 그 東北海口가 러시아와 접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둘째, 朝鮮의 地理的 形勢가 “東北洋”의 要衝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半島朝鮮에 해당된다고 누군가는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셋째, 朝鮮의 疆域이 盛京⸱吉林⸱直隸⸱山東 등 최소 네 개 성들에 대해 屛風과도 같은 울타리가 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現 山東省은 ‘黃海’가 있기에 결코 半島에 의해 屛風처럼 가려지지 않습니다. 이는 그 地名이 옮겨졌다는 傍證이 됩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세 省들 또한 그 地名이 옮겨졌거나 典故가 刪削⸱變造되었다고 보는 편이 合理的일 것입니다.
또한 눈에 띄는 부분은 李鴻章이 東三省 – 東北三省이 아니라 – 과 京畿를 言及하고 있으며 더구나 “我東三省及京畿”라고 하여 “우리 東三省과 京畿”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我”字가 관형사로 쓰이면 내 소유, 내 관할이거나 또는 그를 親近하게 여겨 쓰는 말(親之之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盛京⸱吉林⸱直隸⸱山東 중에 당시 어느 세 省을 東三省이라 불렀든 그에 관계없이 東三省이 淸朝의 直接管轄이었음을 말한 것임은 분명한데, “我”가 “及”에도 해당되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我”字가 “京畿” 역시 수식하는 것으로 본다면 다시 두 가지로 갈라서 볼 수 있습니다. 첫째, 李鴻章 自身이 속한 政治體(淸朝)의 管轄 아래에 있다는 뜻으로 쓴 것이거나, 둘째, 그(“京畿”)를 親近하게 여겨 쓴 것입니다.
前者로 본다면, 1637년 淸이 朝鮮을 軍事力의 優勢로써 服屬시킨 이후로 淸朝의 中心地를 京畿라 일컬었던 것일 수 있습니다. 後者였다면 朝鮮의 中心地를 그대로 京畿라 하였으되 淸朝에서 그를 친근하게 여겨 그렇게 불렀던 것일 수 있습니다. 이같은 用例는 1895년 淸朝의 淸日戰爭 敗北 이후 實業家 및 敎育家로서 名聲을 떨쳤던 張謇(1853-1926)에게서도 발견됩니다. 그는 실업가로 나서기 전인 1885년에 쓴 글에서 “日本力不逮俄而較俄爲近 旣攘中國之琉球爲已有, 得隴望蜀益思圖我朝鮮”(張謇硏究中心, 南通市圖書館编, 《張謇全集》 第一卷 政治, 1994年, “代某公條陳朝鮮事宜疏”, 淸光緖十一年)이라 하여 “中國”이 (中國에 臣服하고 있는) “我朝鮮”을 日本으로부터 保護해야 함을 힘주어 主張했던 바 있습니다.
저는 淸-朝鮮 支配層이 19세기말 兩者의 政治的 關係에 대해 相互 어떠한 認識을 가졌는지를 연구하고 있으므로 이 대목에 注目하게 됩니다. 리홍장이 후자의 뜻으로 말한 것이었다면, 淸朝가 應當 保護해야 할 朝鮮의 京畿는 淸朝 自身의 安全을 위해서도 甚重한 곳이었음을 밝힌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은 “我”字가 “東三省”만을 修飾한 것이었다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위 그림은 1898년 처음 등장했다고 하는 〈時局圖〉입니다. 러시아를 象徵하고 있는 곰의 무게중심은 現 河北省과 內蒙古를 잇는 線上에 있지 결코 半島에 있지 않습니다. 아래 引用에서 卞元圭가 언급하는 德源과 元山 역시 朝鮮(咸境道)에 있어 陸海의 咽喉가 되려면 곰의 왼쪽 앞발과 뒷발 사이 즉, 現 渤海灣 어딘가에 위치한 곳이었어야 할 것입니다.
이 글의 주제는 아니지만, 위 〈時局圖〉에서 現 半島위에 영어로 "COREA", 그 오른편에 漢字로 "高麗"라고 표기해놓은 것에 대해 그 緣由와 歷史的 眞實 如何를 검토해야만 할 것입니다. 如此如此히 지금 半島에 살고있는 우리 자신의 正體性에 關한 문제이므로 매우 중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위 地圖는 《中國歷史地圖集》第五册 唐代에 실린 것들 중 하나인데 京兆府를 包含하는 京畿道가 長安(現 西安)을 中心으로 表記되어 있습니다.
② 謹將九月二十二日接見朝鮮賫咨官卞元圭筆談問答 照鈔恭呈禦覽
당시 淸에 留學生을 派遣하기 위한 咨文을 가지고가서 리홍장과 筆談을 나누었다고 하는 卞元圭의 答辯중 한 대목입니다. 변원규는 후에 漢城府判尹까지 지냈던 文臣입니다.
“...小邦鹹鏡道卽國祖康獻王肇基之地也 四世仙寢於是乎安 且五金之類於是乎産 其民勇而無謀 習於騎射 堪稱北方之剛 惟是德源元山爲陸海咽喉 所以小邦多年靳持 究竟萬不獲已 而許其開埠矣 倘或有事於此地 則鹹鏡一道非我之有 何則 扼其喉則呼吸豈能通乎 握管焦心不知所裁...”
(“小邦의 鹹鏡道는 곧 國祖 康獻王이 土臺를 놓은 땅이고 四世의 陵寢이 여기에 자리잡고 있으며 온갖 귀한 금속들이 여기에서 나옵니다. 그 백성들은 용맹하나 지모가 부족하고 말타고 활쏘는 일에 익숙하여 北方之剛이라 이를 만합니다. 德原과 元山은 육지와 바다의 咽喉인 까닭에 수년간 버티다가 지킬 수 없어 開港을 許諾한 것입니다. 만약 이 땅에 일이 생겨 鹹鏡이 우리 것이 아니게 되면 어찌 되겠습니까? 목덜미를 누르는데 어떻게 呼吸이 통하겠습니까? 속이 타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朝鮮의 疆域과 關聯해서 여기서는 무엇보다도 德源과 元山이 陸海의 咽喉였다는 구절에 주목하게 됩니다. 現 半島의 咸鏡南道에 덕원과 원산이라는 地名과 그 典故를 붙여놓았지만, 허리처럼 잘록 들어간 곳은 될망정 목덜미는 될 수 없는 곳입니다. 사람의 목덜미는 머리 바로 아래에 붙어있듯이 위쪽 끝에 가까워야 목덜미 또는 목구멍 喉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덧붙여, “北方之剛(强)”은 “衽金革死而不厭 北方之强也 而强者居之”라 하여 中庸 10章에 나오는데 半島의 북녘땅을 두고 (“南方之强”(“寬柔以敎不報無道 南方之强也君子居之”)에 대비되는) “北方之强”을 읊었다고 보기에는 역시 무리가 따릅니다.
提案 2: 質問共有
質問을 共有한다는 것은 例事롭게 들릴 수도 있으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선 스스로 끊임없이 質問한다는 것 자체가 매우 중요한 일이라 할 것입니다. 글을 쓰는 일 자체가 스스로 질문하고 답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것임은 물론이거니와 그 글에서 질문이 일정 정도 풀리는 한편, 다 풀리지 않거나 그로부터 새로이 일어나는 질문들도 있습니다. 그러한 질문들을 글 안에 내놓고 함께 나누었으면 합니다. 각자가 지녀온 질문들이 모이는 속에서 함께 그 실마리를 찾아가는 길도 넓어지고 두터워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글에서 제가 大陸朝鮮硏究會에 계신 여러분들께 드리고자 하는 질문은,
위 “李鴻章이 總理各國事務衙門에 보낸 奏摺속에 비춰진 朝鮮의 疆域”과 關聯하여,
(1) 19世紀末 盛京, 吉林, 直隷, 山東 등의 地名은 果然 어디를 指稱하는 것이었으며,
(2) 李鴻章이 말했던 京畿는 무엇(어디)인가 하는 점입니다.
특히, “淸”의 對朝鮮政策 總括責任者였던 李鴻章이 京畿를 어디라고 認識하고 쓴 것인지 그리고 그 京畿 안에 (“淸”의) “京師” 또는 “(大)朝鮮(國)”의 王京(漢城)이 包含된 것인지 如何를 밝히게 된다면 淸-朝鮮 疆域 및 兩者의 政治的 關係를 糾明하는 하나의 실마리가 풀릴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첫댓글 장문의 글을 정성껏 올려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제가 아는대로 몇자 답글로 올립니다. (1) 19世紀末 盛京, 吉林, 直隷, 山東 등의 地名은 果然 어디를 指稱하는 것인가와 관련하여, 이 지역은 현 알타이산의 좌측과 북쪽의 방대한 지역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만주입니다. 이전글과 영상에서 모두 밝혀놓았으니 참고하시기 바라오며, (2) 李鴻章이 말했던 京畿는 무엇(어디)인가 에 대해 경기는 왕기. 또는 왕경으로 임금이 사는 곳이지요. 따라서 북경입니다. 구한말의 북경은 현 주천지역으로 밝혀지고 있으나, 주천은 이전된 북경으로 보이며, 원래의 북경은 원나라의 칸발리크가 있던 현 자이산호부근으로 보여지고 있으며, 중세 러시아 지도에도 그리 나타내지고 있습니다. 동북해구에서 러시와와 경계를 두고 있다는 기록은 바로 현 바이칼호 부근의 해삼위와 함경도 경흥지방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당시의 대만은 지금의 해남도(조선의 해도)이며, 덕원-원산은 지금대륙의 천진입니다. 신라와 발해의 경계가 바로 대륙의 천진(조선원산)과 천산산맥의 동단끝(대동강)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천진위쪽과 한반도는 고구려,발해, 청으로 이어지는 숙신족의 땅이었던 것입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大陸의 德源-元山(現 天津)과 天山山脈 東端을 잇는 界線을 想定할 때 그 아래가 新羅의 疆域이었다면 그것이 바로 李朝(李氏朝廷)가 다스렸던 疆域(李鴻章 記錄 속 東北海口가 러시아와 접해있다고 하는 朝鮮의 疆域)과 거의 겹쳐지는 것 같습니다. 이외 송계선생님께서 말씀해주신 내용은 제가 더 살펴보겠습니다.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이나 담기양의 중국역사지도집은 모두 현 중국공산당의 주도아래 대륙전체가 원래부터 한족의 강역이었다는것을 강요하고 합리화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위서들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대륙조선을 밝히는데 그러한 책들은 참고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넌센스가 되어버릴 것입니다. 왜냐면 그책들은 한족들이 자기들의 강역을 확정하고 후학에 가르치기 위한 책인데 어찌 그것을 가지고 조선의 역사를 해석하고 강역을 찾아갈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현명하게 인식해야 할 것이며, 올바로 우리의 역사를 찾아 복원하려면 먼저 중국고금지명대사전이나 중국역사지도집을 버려야 할것이며, 단지 그 지명의 연역에 대한 부분만을 참고하면 될 것으로 보여집니다.
原則的으로는 선생님 말씀에 同意하고 싶습니다. 다만 一種의 反間計를 쓴다는 셈으로 接近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즉 그들이 자신들의 政治的 生存을 위해 억지로 엮어놓은 資料들에서 地名 등을 包含한 史實의 沿革과 典故를 追跡해가는 한편 빈틈과 矛盾을 집어내어 그 자료들의 虛點과 그들의 原來 意圖 사이에 離間을 붙이는 것이지요. 물론 이러한 작업에도 적지 않은 시간과 心血을 기울여야 하겠지만 크게 보자면 그러한 離間策을 쓰지 않는 便보다 쓰는 편이 경우에 따라 보다 效率的일 수 있다고 봅니다. 김종윤 선생님과 최두환 선생님께서 해오신 작업도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게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