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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 무종(하이산칸)의 영정(원대 그림). |
5000년 기나긴 역사에서, 한국에 대규모의 식량을 제공한 나라는 미국을 제외하면, 대몽골 제국밖에 없었다. <고려사>에는 원나라 황제가 많은 거금(巨金)을 고려 왕실에 보낸 내용이 무수히 실려 있다. 그 같은 큰 규모의 대외 원조(援助) 뿐만 아니라, 고려왕실이 원나라 황실과 가족관계였던 관계로 충렬왕(1274~1308)의 탄신일에 원나라 태후가 40여 마리의 양을 보내기도 하고, 고려는 국내에 가뭄이 들면 원나라 중서성에 곡식을 보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주4) 고려 원종(1259~1274) 15년 원나라는 쌀 2만 석을 고려에 보내주었고 충렬왕 17년 원나라는 강남미(江南米) 10만 석을 무려 47척의 배로 고려에 보내주기도 했다. 한반도의 역사상 처음으로 외국에서 엄청난 쌀이 공수되었다.(주5) 물론 일본 정벌의 과정에서 많은 무리가 있었지만, 대부분의 한국 역사책들은 몽골에 의해 고려가 받은 많은 원조나 혜택에 대해서는 침묵한다.(당시 일본 원정에 대한 분석은 정치경제적으로 매우 복잡한데 이 부분도 다른 장에서 다룰 것이다.)
원나라 황제 "고려를 일가로 본다"
고려에 대해 남다른 사랑을 보인 대표적인 원나라 황제가 바로 세조(世祖) 쿠빌라이칸이다. 세조는 고려왕이 누차 원나라 황제의 명을 거역하자 분통을 터드리다가도 고려의 군신들이 내조하자 "고려와 원나라는 군신의 관계라 할지라도 짐이 느끼는 기쁨은 아버지와 아들과 같다."라고 하기도 한다.(주6) 원나라 세조는 고려에 갔던 사신이 돌아와 고려왕이 아프다는 말을 듣자 직접 약을 보내기도 한다. 원 세조는 "지금 짐(쿠빌라이칸)은 고려를 일가로 본다. 고려에 어려움이 있다면 어찌 짐이 고려를 구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주7) 이와 같이 원나라 세조의 고려왕들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돈독했는지를 보여주는 기록들이 도처에 나오고 있다.(주8) 원나라 황제들이나 다루가치의 고려에 대한 애정은 다소 지나친 감도 있다.
▲ 원 세조(쿠빌라이칸)의 영정과 사냥하는 모습(1280) 자료. ⓒ위키피디아 |
드라마에서 보듯이 원나라 일개 장수가 고려국왕을 함부로 하대하는 것은 당시의 사회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소치이다. 흔히 문제가 되는 다루가치도 천자의 부마국인 고려에서는 별로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고려사>에서 다루가치가 국왕에게 절을 하지 않자, 황제의 칙사가 "(고려)왕께서는 천자의 부마인데 늙은 놈이 어찌 감히 이같이 무례하게 행동하느냐? 돌아가서 천자께 아뢰면 네가 무사할 줄 아느냐 ?"고 나무라는 장면과 이에 다루가치가 허둥지둥 변명하는 대목도 나온다.(주9)
심지어 원나라 세조는 "고려에 굳이 다루가치를 둘 필요가 있겠느냐?"라고 반문한다.(주10) 그래서 1278년 경에 이르면 다루가치의 존재는 거의 눈에 띠지 않는다. <고려사>의 기록을 보면, 고려왕은 세계 대제국인 원나라 전체 종친(宗親) 서열의 4위에서 7위에 해당하는 강력한 세력이었다. <고려사>에 따르면, "(1300년) 6월 임자(壬子)에 (충렬)왕이 상도(上都)에 이르러 종전(椶殿)에서 황제(성종 테무르칸)를 알현하고 고려의 특산물을 바쳤다. (이에) 황제가 지순 잔치를 크게 열었다.
지순이란 중국말로 '색깔'이란 뜻으로 연회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모두 같은 색으로 옷을 통일하여 입는 것이다. 황제가 왕에게 명하여 참석게 하였는데 왕은 여러 제왕(諸王)들과 부마(駙馬)들 가운데서 (고려왕의) 서열이 4번째로 배정될 만큼 황제의 총애가 특별하였다."라고 한다.(주11) 특히 충선왕(忠宣王, 1308~1313)은 원나라 무종 황제 옹립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으로 고려 왕실의 세력이 원나라 내에서도 절대적으로 강대하게 되기도 하였다.(주12)
고려와 몽골의 관계, 왜 이토록 특수한가?
<원사(元史)>에는 세조(世祖) 쿠빌라이칸이 서거한 뒤 그 장례를 치르는 과정에서 오직 몽골인과 고려인만이 출입했다는 기록이 실려 있다. 이 기록은 그대로 <고려사>에도 나타난다. 또 원나라 성종 테무르 황제(成宗, Temür)가 "고려와 몽골의 관계가 왜 이토록 특수한가"라는 것을 주변 신하들에게 반문한 적도 있다. 요수(姚燧)는 그의 문집(<목암문집(牧庵文集)>)에서 "몽골과 고려의 관계와 같은 특수한 밀착관계는 만고에 유례가 없다."고 적었을 정도이다.(주13)
▲ 원 성종(테무르칸)의 영정(원대 그림). |
통일신라나 고구려 이후 한국인들의 대외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는 고려와 현재의 한국일 것이다. 당시의 상황은 사회적인 측면에서 오늘날과 매우 흡사하다. 마치 오늘날 한국의 젊은이들이 토익(TOEIC)과 토플(TOEFL)에 목숨을 걸듯이 공부하여 미국으로 가는 것처럼, 당시 고려의 상황도 다르지 않았다. 2011∼12년 기준으로 10만 7054명의 한국인이 미국에서 수학 중이라는 보도가 있었다. 유학에 따른 비용이나 미국과의 물리적 거리를 생각하면 이 규모는 엄청난 것이다.
마찬가지로 몽골학의 국내 대표적 전문가인 박원길 교수(몽골학회 이사장)는 당시 원나라의 수도인 대도(大都)에는 그 인구의 절반이 고려 사람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고려인들이 많았다고 한다.(주14) 그래서 현대의 젊은이들이 미국으로 가기 위해 영어에 목숨을 걸듯이 당시에는 몽골어에 목숨을 걸은듯하다. 이러한 상황은 당시의 몽골어 참고서의 존재가 오늘날까지도 전해져 오고 있는 것으로 파악이 된다. 즉 <첩해몽어(捷解蒙語)>, <몽어노걸대(蒙語老乞大)>,<몽어유해(蒙語類解)>라는 이른바 몽학삼서(蒙學三書)가 바로 그것이다. 당시 고려인들의 몽골 사랑이나 현대 한국인들의 미국 사랑이나 별로 차이가 없어 보인다(필자의 귀에는 마치 <몽골어의 왕도>, <성문 종합 몽골어>, <맨투맨 몽골어> 등의 제목으로 들린다). 2013년 현재 한국인들이 영어를 죽기 살기로 배우듯이 고려인들도 몽골어를 그런 행태로 배웠으리라는 것을 몽학삼서(蒙學三書)가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원길 교수에 따르면, "원나라 당시 조금이라도 잘 나가는 고려인치고 몽골 이름을 안 가진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아예 조선의 건국자인 태조 이성계(李成桂)를 몽골인으로 보는 시각도 있고 이 주장에는 상당한 근거들이 있다.(다음 편에서 상술함)
현재 한국에서는 대몽골 시대에 몽골과 협력한 일에 대해서 매도하는 이상한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소중화(小中華) 사상이 지나치게 팽배한 결과로 보인다. 명나라와 협력한 일은 오히려 존경의 대상이 되는데 원나라와 협력한 일에 대해서는 '오랑캐의 앞잡이'쯤으로 매도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만큼 한국인들의 소중화의 병이 깊은 것이다. 교류가 활발해 질수록 몽골의 귀족이나 장군들은 고려 여인들을 아내로 맞기를 원했다. 사실 양국 간에 활발히 전개된 문화교류는 어느 면에서 양국인들의 결혼으로 시작되고 또 촉진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고려와 몽골과의 혼인관계는 다음 장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다루기로 한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사신의 보고서에는 몽골 병사들이 신흥 명나라 주원장의 공세에 밀려 요동반도에서 전쟁을 치르면서도 현지에 거주하는 고려인들은 '동족'이라 하여 살상하지 않았다는 대목이 나온다. 조선 세종 때에도 몽골은 조선에 사신을 파견, '형제국이니 힘을 합쳐 명나라를 공격하자'는 국서를 전달했다. 일제 침략기엔 일부 조선의 독립 운동가들이 몽골을 넘나들며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려고 시도하기도 했다.(주15)
우르진훈데브 페렌레이 전(前) 주한 몽골대사는 언론 인터뷰(2004년)에서 "몽골 사람은 한국을 외국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과 몽골은 운명적으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고 말했다. 관련 학술 대회(2007년)에서 이상면 서울대 교수는 "양국 국민은 이례적이라 할 만큼 정서를 공유하고 있으며 이는 세계 어느 나라 국민 간에도 찾아보기 어려운 사례이며, 양국 국민 간 우호 관계가 무르익어 어느새 '우리가 남인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동질감을 갖게 됐다."고 한다.
예를 들어 한국어와 몽골어는 어순이 비슷하고 토씨가 있으며 기초적인 어휘에서도 비슷한 것이 적지 않다. '눈'이 같고 '귀'가 비슷하며, '바른쪽으로'를 몽골어로는 '바른쭉으루'라고 말하고, ' 왼쪽으로'를 '준쭉으루'라고 발음한다. 팽대아(彭大雅)ㆍ서정(徐霆)의 <흑달사략(黑韃事略)>에서는 "몽골인들이 말을 타고 달리다가 서로 마주치게 될 때 (상대방의) 왼쪽으로 통과하면 '(나는 당신을) 존중한다(相順)'는 의미이고 남에게 고기를 바칠 때 왼손을 사용하면 '(나는 당신을) 깔본다(相逆)'라는 의미"라고 한다.(주16) 신기하게도 이런 습속은 오늘날 한국에 그대로 살아있다.
이상을 보면 한국과 몽골의 관계에 있어서 국가적 배신을 한 나라는 고려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국제 관계를 단순히 개인적 의리의 차원에서만 봐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나 명나라가 망한 후 한반도의 지배층들이 보인 행태는 철저히 숭명반청(崇明反淸)으로 지속되었던 것과 대조된다. 이것이 동북아시아의 역사를 파탄으로 몰고 간 대표적인 사건의 일부이다. 당시 한반도의 지배자들이 청나라와 보다 적극적으로 교류하여 만주인(滿洲人)들이 중국을 통치하기 위해 입관(入關)한 후 텅 빈 만주 대륙을 청나라와 협조하여 지켰더라면 오늘날 동북공정(東北工程)과 같은 역사적 시련은 없었을 것이다.
드라마로 돌아가 보면 당시 원나라 수도인 대도에서 한국인들이 지나치게 홀대받았다는 작가나 PD의 시각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 이것은 작가나 PD가 이 시대의 역사에 대해 얼마나 무지한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앞으로의 제작 방향에 대해서 좀 더 세심한 주의와 자문인단의 역할이 중요할 것으로 보인다.
본문 주석 (주1) 哈眞曰: "我等來自萬里與貴國合力破賊千載之幸也. 禮當往拜國王吾軍頗衆難於遠行但遣使陳謝耳."哈眞札刺請冲就礪同盟曰:"兩國永爲兄弟,萬世子孫無忘今日." (<高麗史> 列傳「金就礪傳」) 이 기록은 <고려사>의 다른 부분에서도 자주 나오고 있다. 예를 들면, 歲戊寅太祖聖武皇帝應天奮擧之初有亡遼遺種金山王子驅掠中原陸梁東土略無歸順之意妄有興復之謀. 朝廷命哈眞扎刺以討其罪天寒雪深粮道不繼. 我五代祖忠憲王遣趙冲金就礪助兵餽餉恊力攻破. 於是兩元帥聞奏朝廷與冲等結兄弟之盟世世子孫無忘今日.(<高麗史> 36卷 「世家36-忠惠王」) (주2) 朕觀今天下有民社而王者惟是三韓. 及祖宗而臣之殆將百載厥父菑而子復肯播曰我舅則吾謂之甥.旣勳以親宜貴與富 (<高麗史> 忠宣王 1年) (주3) B.하과(Б.Лхагва), <13~14세기 몽골-한국의 관계와 전통으로부터>, 1996(서울)을 박원길 S.촐몬 <한국·몽골 교류사 연구> (이매진, 2013)에서 재인용. (주4) <高麗史>31卷「世家31-忠烈王4」 (주5) "庚寅元遣中書舍人愛阿赤來先是爲征日本運江南米十萬石在江華島今遼瀋告飢帝詔以五萬石賑之. (<高麗史>31卷「世家31-忠烈王4」) (주6) "高麗君臣, 感戴來朝, 義雖君臣, 而歡若父子"(<元史> 世祖紀) (주7) "今朕視爾國猶一家, 爾國若有難,朕安敢不救乎"(<高麗史>列傳「李藏用傳」) (주8) 예를 들면 <高麗史>의 기록에 "삼가 생각컨대 세조께서 특히 우리나라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고조 증조가 계속하여 親朝하였으며 마침 1천년에 際하여 부자가 따라서 입근함이 우금에 70년이 넘었나이다 "라고 한다. 원문은 庚寅以五道人民流入雙城女眞遼陽瀋陽等處表請刷還曰:"天本無私雖高卽聽人如有告所欲必從故罄卑情冀回大度. 欽惟世祖偏恤我邦高曾繼以親朝適此一千年際父子因而入覲于今七十歲餘.(<高麗史>36卷「世家36-忠惠王」) 그리고 세조는 고려군신의 내조를 크게 기뻐하면서 고려를 여러 나라에 자랑하는 장면들이 <高麗史>에 보인다. 즉 "高麗君臣感戴來朝. 義雖君臣歡若父子. 計王之君臣亦已知之.' 褒獎小邦誇示諸國光寵至矣. 繼以帝女齊國大長公主嬪于忠烈王誕得一子卽太尉王年十六入侍天庭冊爲世子詔曰:'嗣惟汝嫡親是我甥. 世爲藩輔.'"(<高麗史>36卷 「世家36-忠惠王」). (주9) (충렬)왕이 조서 받기를 마치자 경령전에 배알하고 강안전으로 돌아와 황포를 입고 즉위하여 군신의 하례를 받았고 이에 대한 보답으로 조사(詔使 : 황제의 사신)를 접대하여 잔치를 베푸는데 詔使가 왕이 황제의 부마이기 때문에 왕을 남쪽으로 추양하고 조사는 동쪽으로 다루가치는 서쪽으로 앉았다. 왕이 행주하매 詔使가 절하며 받고 마신 뒤에 또 절하는데 다루가치는 서서 마시고 절하지 아니하자 詔使가 말하기를 "왕께선는 천자의 부마인데 늙은 놈이 어찌 감히 이 같이 무례하게 행동하느냐? 돌아가서 천자께 아뢰면 네가 무사할 줄 아느냐?"라고 꾸짖으니 다루가치가 답하기를 "공주께서 계시지 아니하고 또 이것은 그 동안의 관례였습니다."라고 변명하였다. 원문은 [王受詔畢謁景靈殿還御康安殿服黃袍卽位受群臣朝賀仍宴詔使詔使以王駙馬推王南面詔使東向達魯花赤西嚮坐 王行酒詔使拜受飮訖又拜達魯花赤立飮不拜詔使曰: "王天子之駙馬也老子何敢如是吾等還奏汝得無罪耶?"荅曰: "公主不在且此先王時禮耳."(<高麗史> 28卷「世家28-忠烈王1」)] (주10) (충렬)왕이 합백평장(哈伯平章)에 이르기를 "왕경 다루가치의 임기가 만료되었는데 랑가알(郞哥歹)은 일찌기 우리나라에 왕래하였으니 그를 대신하면 가히 쉽게 부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합백이 천자(세조)에게 이를 아뢰어 여쭈어 보니 천자가 말하기를 "굳이 (고려에) 다루가치를 둘 것이 무엇이냐? 그리고 그 랑가알이라는 자는 어떤 사람인고? "라고 말했다. 원문은 王語哈伯平章曰: "王京達魯花赤秩滿而郞哥歹嘗往來小邦若以爲代可使如耳目也."哈伯以奏帝曰:"安用達魯花赤爲抑郞哥歹么麽人也?"(<高麗史>28卷「世家28-忠烈王1」) 또 <고려사>다른 부분에는 "(충렬)왕이 말하기를 '원컨대 천자께서는 가깝고 믿을만한 타타르인으로 다루가치를 삼아주소서.'라고 말하니 천자가 말하기를 '어찌 꼭 다루가치가 필요하겠는가 ? 네가 스스로 잘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王曰: "願得上所親信韃靼一人爲達魯花赤." 帝曰: "何必達魯花赤汝自好爲之."(<高麗史>28卷「世家28-忠烈王1」) (주11) "六月壬子王至上都謁帝于椶殿仍獻方物帝大設只孫宴.只孫華言顔色赴會者衣冠皆一色帝命王侍宴王於諸王駙馬坐次第四 寵眷殊異."(『高麗史』31卷-「世家31-忠烈王4」)] 또 다른 기록에는 "甲午皇太子卽皇帝位是爲成宗王與公主獻金盞銀鏤葵花盞各一副金甁金鏤銀尊壺湯甁酒甁各一事半鏤銀尊胡甁各一事銀盂八十一事銀鍾十八事紫羅九匹細苧八十六匹豹皮十八領水獺皮八十一領以充庭實表賀禮訖帝命王赴宴時諸王駙馬畢會王坐第七"(<高麗史>31卷「世家31-忠烈王4」)라고 되어있다. (주12) 壬申太上王餞于金郊酒酣使臣孛魯兀以帝命取國王印授逸壽王. 於是太上王復位. 王如元宿衛凡十年.武宗仁宗龍潛與王同臥起晝夜不相離忠烈王三十三年皇姪愛育黎拔力八達太子及右丞相荅刺罕院使別不花與王定策迎立懷寧王海山.左丞相阿忽台平章八都馬辛等謀奉安西王阿難達爲亂太子知其謀先一日執阿忽台等使大王都刺院使別不花及王按誅之. 五月皇姪懷寧王卽皇帝位是謂武宗. 三十四年五月戊寅元以定策功封瀋陽王制曰: "咨爾推忠揆義恊謀佐運功臣開府儀同三司征東行中書省左丞相駙馬王璋世祖外孫先朝貴壻方朕纘承之始寔叅翊贊之功. 以賞善罰惡之至公保孝父忠君之大節可特授開府儀同三司太子太傅上柱國駙馬都尉進封瀋陽王."又令入中書省叅議政事賜金虎符玉帶七寶帶碧鈿金帶及黃金五百兩銀五千兩. 皇后皇太子亦寵待所賜珍寶錦綺未可勝計. (<高麗史>33卷「世家33-忠宣王1」) 이에 대하여 충선왕 스스로도 백관(百官)에 하교(下敎)하는 자리에서 "부마가 되어 삼조(세조ㆍ무종ㆍ성종)를 겪어 모신 것이 어언 19년이 되었다. 더구나 년전에 황제 황태후 황태자를 우러러 의지하여 공을 일으키고 황제 폐하를 옹위하여 그 뜻과 일을 도와 사해를 숙청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辛未王在金文衍家百官會梨峴新宮王下敎曰: "肇自祖王統合三韓臣服述職者尙矣.逮我父王上國顧遇夐異於前獲承釐降厚沐寵光孤亦入侍繼爲駙馬歷衛三朝于今十有九年越於年前仰憑皇帝皇太后皇太子奮庸熙載肅淸四海至於本國奸佞之儔亦皆蕩除內外安寧. (<高麗史> 33卷 「世家33-忠宣王1」)] 충혜왕도 "大德末我祖太尉王佐仁宗皇帝平定內亂行至央骨迎立武宗皇帝爲定策一等功臣."(<高麗史>36卷 「世家36-忠惠王」)이라고 말하고 있다. (주13) 박원길 <배반의 땅, 서약의 호수 -21세기 한국에 몽골은 무엇인가> (민속원 , 2008)> 22쪽. 이와 관련된 기록은 [癸酉世祖皇帝崩王與公主以羊十馬一祭于殯殿其文曰: "鰈墟莫遠佇瞻蓂陛以來賓龍馭忽回曷極鼎湖之哀慕夢也覺也顚之倒之聊修菲薄之儀冀垂歆容之賜." 將使贊成事鄭可臣讀之諸大臣止之曰: "豈宜用諸侯之禮祭天子乎?" 遂不讀王奠薦之禮哀慕之誠皆致其極 元朝喪制非國人不敢近唯高麗得與焉故王之從臣雖輿臺之賤出入無禁.(<高麗史> 31卷「世家31-忠烈王4」)] (주14) 박원길(2008) 22쪽. (주15) 이상면 「한국-몽골 국가연합 가능성 분석」『한몽국가연합의 의의 세미나』 ; <신동아> 2007. 6월호. (주16) "其國禁, … 騎而相向者,其左而過,則謂之相順,食人以肉而接以左手,則謂之相逆 "(<黑韃事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