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장 문화유적 탐방
송은석(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e-mail: 3169179@hanmail.net
159. 성서 토박이 고향사랑, 마을 유래비(2)
월암(月巖)부락 유적비
월암은 성서공단 남서쪽 지금의 성서체육공원 인근에 있었던 마을이다. 약 170년 전 이 지역에 있었던 당산나무를 중심으로 청주한씨가 처음 터를 잡았다. 이후 경주최씨·밀양박씨·성주이씨·전주이씨·단양우씨·달성서씨·김해김씨·동래정씨·인동장씨·파평윤씨·능성구씨 등 약 70여 가구가 살았다. 유적비에는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정겨운 옛 지명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잘 나타나 있다. 유적비는 성서체육공원 내 제일 높은 언덕인 ‘개상덤’에 회화나무 당산목과 함께 서 있다. [1998.5.10. 건립, 달서구 월암동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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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평야 가운데 자리 잡은 개상(介上)덤은 동에서 서쪽으로 퉁두꼬-우뚬-잘래기-알뜸-등거티로 연결된 고만 고만한 능성이들로 이어져 둘러싸인 온화하기 이를 데 없는 곳이었다. (중략) 고향을 잃었으나 당산나무와 이 비가 있음으로 우리 마음속에는 고향이 영원히 남아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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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실[이곡]마을 유래비
배실은 우리말로 ‘배나무 골’, 한자로 이곡(梨谷)이다. 약 480년 전 벽진이씨가 처음 터를 잡았으나 임란 때 폐허가 됐다고 한다. 그로부터 약 230년 뒤 김해허씨가 다시 터를 잡았고, 이후 의성김씨·수성나씨·경주이씨·창원황씨 등이 살았다. 유래비는 과거 배실마을 앞 정자나무가 있는 자리에 세워져 있다. [1999.9 건립, 이곡동 1186-15, 대로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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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도시개발에 의해 마을 앞 들은 고층아파트가 들어서고 이곡지는 구민운동장으로 변했으며 살던 마을은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이에 조상 대대로 이 땅을 지켜오던 마을사람들의 뜻을 모아 옛터 한 자리에 마을 유래를 새겨 이 돌을 남기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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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림동(狐林洞) 유래비
호림동은 성서공단 서편 모다아울렛 인근에 있었던 마을이다. 본래는 ‘홀림동’이었는데 마을 형국이 ‘여우형’이라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여우 호’, ‘수풀 림’ 호림동이 됐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 유래비에 재밌는 내용이 있다. 마을 번영을 위해 마을 앞 여우머리에 해당하는 지점에 우마가축공동묘지를 만들었다는 것. 이는 풍수설에 따라 여우에게 먹이를 공급한다는 의미다. 또 유래비에는 짠맛이 나는 ‘오그랑샘’ 이야기, 금호강·낙동강 합류지점 백사장에서 벌어진 씨름판 이야기, 당산 산신 느티나무·당산 천왕신 포구나무 이야기 등이 소개되어 있다. 현재 성서아울렛공원에는 두 마리 여우 석상을 갖춘 유래비와 함께 당산천왕 신목인 회화나무도 보존되어 있다. 지금의 신목은 1949년 원조 신목이 고사하자 갈산에서 새롭게 옮겨온 것이다.[2004 건립, 호림동 13-11]
파호동(巴湖洞) 유래비
파호동은 강창교를 기준으로 대구 쪽 금호강변에 있었던 마을이다. 처음 마을이 생긴 것은 고려시대[1270년 경]로 한씨와 박씨가 개척해 ‘범어강창’이라 불렀다고 한다. 범어는 물고기가 많다는 뜻, 강창은 인근에 있었던 세곡창고 이름이다. 한씨·박씨 이후 창녕성씨·김해김씨·동래정씨·경주이씨·순천김씨·능성구씨·창녕조씨·영천이씨·경주최씨·단양우씨·달성서씨·밀양박씨·인동장씨·의령남씨·나주임씨 등이 살았다. 파호라는 이름은 뒷동산에 뱀이 많고, 금호강을 끼고 있어 ‘뱀 파’, ‘호수 호’ 파호라 했다. 비문에는 배꼽덤·삶이들·반송·서쪽골짝·성서제 같은 사라진 옛 지명이 소개되어 있다. 과거 파호동에서는 정월대보름이면 당산 천왕신을 모신 반송 아래에서 대동제를 여는 풍속이 있었지만 지금은 사라졌다. 유래비 곁에 작은 소나무 숲을 조성하고 ‘당산천왕신령위’ 표지석을 세웠다. [2009.2.9 건립, 파호동81 삼성명가APT 북서쪽 소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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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의 흐름 앞에 파호동은 2004년 이후 개발로 마을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공동주택, 아파트가 들어서게 되고, 주민들은 인근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에 더 늦기 전에 아름다운 전통을 길이 보존하여 후세에 물려주자는 동네주민의 뜻과 작은 정성을 모아 새로운 도약을 기원하는 이정표로 삼고자 오늘 파호동 유래비를 세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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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못[栗池]마을 유래비
밤못은 ‘밤나무 못’으로 한자로는 율지(栗池)다. 약 400년 전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에 생긴 마을로 김녕김씨·밀양박씨·진주하씨·전주이씨·수원백씨·창녕성씨·여산송씨·능성구씨·경주노씨·파평윤씨·평산신씨 등이 살았다. 밤못이란 이름은 주민들이 농사를 위해 저수지를 파고 주변에 밤나무를 많이 심은 것에 유래한다.[2010.11. 건립, 달구벌대로 1312-8 밤못경로당 앞]
기타
이상 소개한 마을 유래비 외에도 비슷한 성격의 비가 몇 기 더 있다. 이곡동 성서도서관 인근 ‘김해허씨 세거장비’[1988년 건립]와 용산유치원 앞 소공원 ‘성주도씨 서촌세거지비’[2004년 건립]는 해당 성씨가 그 지역에서 대대로 오랫동안 살아왔음을 기록한 비다. 또 계명대 동산병원 서쪽 호산동 입구에는 ‘파산(巴山)마을비’[2011년 건립]가 있다. 본래 파산은 풍수적으로 인물이 많이 배출된다는 좋은 의미였다. 하지만 근래에 이주해온 주민과 입주기업들이 파산이란 마을명이 불길하다하여 ‘호산’으로 개명, 그 내력을 마을비에 새겨두었다. 그 외에도 장기동[구 장터마을], 장동[장골마을], 용산동[서촌마을] 표지석 등이 있다.
에필로그
성서지역에는 1992년 망정부락유적비를 시작으로 2011년 파산마을비에 이르기까지 10여 기의 마을 유래비가 세워졌다. 마을 유래비에는 지명유래·마을역사·주민성씨·옛 지명·이향(離鄕) 사연과 비를 세운 이유 등이 새겨져 있다. 이들 비가 세워진지도 어느새 30년, 한 세대가 다됐다. 당시 비 조성에 앞장섰던 분들 중에는 이미 고인이 된 분들도 많을 것이다. 얼굴도 모르는 그들이 고마울 따름이다. 만약 그들이 지금처럼 마을 유래비를 남겨두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도 성서는 도시화·산업화 과정에서 어느 날 뚝딱 생겨난 족보(?) 없는 신도시가 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특정지역에 이렇게 많은 마을 유래비가 있는 곳은 전국적으로도 드물 거예요. 마을 흔적이 완전히 사라지고 없는 곳에는 유적비·유허비, 그나마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은 유래비로 이름 붙였어요.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참 잘 했던 일인 것 같아요. 마을비가 오랫동안 잘 보존됐으면 좋겠어요”
향토사학자이자 작사가로 활동 중인 갈미 주민 조영창 전 달서구문화원장의 말이다. 그는 갈미유허비에 새겨진 시 ‘이향탄(離鄕嘆)’의 저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