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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남성(河南省·허난성) 정주(鄭州·정저우) 기행
먼저 하남성(河南省·허난성)부터 소개한다. 하남성은 중국 중동부, 황하 중하류에 위치하고 있는 인구 1억의 대성(大省)이다. 하남성 지역이 대부분 황하(黃河) 이남에 속하므로 하남(河南)이라고 칭한다. 고대에는 이 지역을 예주(豫州)라고 칭했으므로, 오늘날 하남성의 약칭을 ‘예(豫)’라고 한다. 또 치수(治水)로 유명한 전설상의 임금, 우(禹)가 중국을 구주(九州)로 나누어 통치했을 때, 예주가 구주의 한 중심에 위치하고 있었던 까닭에, 이 지역을 중원(中原) 또는 중주(中州)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남성의 전체 면적은 16만 7천㎢(남북한 면적은 22만3170km²)이며, 서고동저(西高東底)의 지세다. 태행산맥(太行山脈), 복우산맥(伏牛山脈), 동백산맥(桐柏山脈), 대별산맥(大別山脈)이 북, 서, 남쪽의 삼면을 반원 형태로 감싸고 있다. 중동부 지역은 황회해(黄淮海) 대평원이다. 총 면적 가운데 평원과 분지가 55.7%, 산지가 26.6%, 구릉이 17.7%를 차지한다. 하남성에서 가장 높은 산은 삼문협시(三門峽市) 관내의 영보(靈寶)에 있는 노아분뇌(老鴉岔뇌: 해발 2413.8m)이다. 일반적으로 하남성은 산악 지대가 반, 평야가 반이라고 한다.
기후는 북부는 온대, 남부는 온대와 아열대가 교차한다. 연평균 강우량은 1381∼533㎜인데, 지역별로 강우량 편차가 무척 크다. 하남성은 중국에서 가장 많은 농산물을 생산하는 지역이다. 2007년 중국의 양식 생산량 통계자료에 의하면, 524,5억㎏을 생산하여 전국의 수위를 차지했다. 따라서 하남성을 중국의 ‘식량 창고’라고 부른다. 광물 자원도 풍부한데 몰리브덴, 석회석, 석탄, 석유, 천연가스 등이 생산되고 있다.
하남성은 세계 4대 문명 가운데 하나인 황화문명이 탄생한 지역이다. 중국 최초의 왕조라고 할 수 있는 하(夏)나라 때부터 북송(北宋)에 이르는 장구한 세월 동안, 20여 개 왕조가 이 지역에 도읍을 정하였다. 중국 8대 고도(古都) 가운데 네 곳이 하남성에 있는데, 상(商) 나라 도읍지 정주(鄭州), 은(殷) 나라 도읍지 안양(安陽), 일곱 개 왕조의 도읍지 개봉(開封), 아홉 개 왕조의 도읍지 낙양(洛陽) 등이다. 따라서 하남성에는 고대의 역사 유물과 문화 유산이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정주(郑州·정저우)는 하남성 중북부에 위치하고 있는 하남성의 성도(省都)다. 북쪽으로는 황하(黄河)가 흐르는데, 황하를 조망할 수 있는 황하풍경명승구(黃河風景名勝區)까지는 시내에서 차로 1시간 거리다. 서쪽으로는 중국 오악(五岳) 중 중악(中岳)에 속하는 숭산(嵩山: 해발 1440m)이 있다. 그 유명한 소림사(小林寺)가 바로 숭산 자락에 있다. 동남쪽으로는 광활한 황회평원(黄淮平原)이 펼쳐져 있다.
정주를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개봉(開封)이, 서쪽으로는 낙양(洛陽)이 있다. 이 세 도시가 수평축으로 연결되어 있고, 기차로 정주에서 개봉까지는 1시간, 낙양까지는 2시간 30분 걸린다. 정주는 중국 10대 고도(古都) 가운데 제3대 고도인 낙양과 제5대 고도인 개봉을 좌우에 두고 있으므로, 낙양과 개봉을 찾는 관광객들이 대부분 정주를 방문한다.
가장 추운 계절인 1월의 평균 기온이 0.2℃ 정도이므로 혹한의 겨울 날씨는 아니다. 하지만 정주는 강한 바람이 자주 부는 지역이기 때문에 찬바람이 불 때 느끼는 체감 온도는 상당히 낮다. 더구나 주택이나 공공장소의 난방 시설이 빈약하기 때문에 실제로 느끼는 추위는 상당하다. 도시민이 거주하는 정주 시내는 강우량이 적고 주위에 산이 없으므로 건조한 날씨가 지속되고 바람이 자주 부는 환경이다. 중국의 다른 대도시들처럼 희뿌연 안개도 자주 낀다.
정주는 황하와 회하(淮河)의 양대 수계(水系)에 속해 있다. 정주 지역을 통과하는 황하의 길이는 150.4㎞이다. 중원의 유명한 고도(古都)들과 마찬가지로 정주도 황하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정주, 낙양, 개봉, 삼문협(三門峽), 제원(濟源), 초작(焦作), 신향(新鄕) 등의 하남성의 주요 도시들은 모두 황하 유역을 따라 형성, 발전하고 있다. 세계 4대문명의 하나이자 동아시아 문명의 모태가 되는 황하문명이 하남성의 중원 지역에서 탄생한 까닭은 바로 황하가 이 지역을 흐르고 있는 덕분이다.
철도뿐만 아니라 개혁 개방 이후에 건설된 중국을 동서남북으로 관통하는 고속도로들도 정주 지역을 지나고 있다. 정주를 중심으로 북경(北京)과 홍콩, 마카오를 연결하는 경향오(京香奧)고속도로가 남북으로, 강소성 연운항(連雲港)과 섬서성 서안(西安)을 연결하는 연곽(連霍)고속도로가 동서로 각각 뻗어있다. 또 107번, 310번 국도가 정주 경내를 통과한다. 정주 시내에서 약 30㎞ 정도 떨어져있는 신정(新鄭) 국제공항은 국내외 30개 도시와 연결되어 있다. 현재(2008년 11월) 한국과는 대한항공이 인천, 정주 간을 독점 운행을 하고 있다.
또 아시아 최대의 기관차 연결 역, 중국 최대의 화물 하역과 운반 시설이 정주에 있으며 또 우편, 통신 시설 등이 대단히 잘 갖추어져 있다. 따라서 오늘날 정주는 중국에서 가장 중요한 교통과 물류 그리고 통신의 중추 도시들 가운데 하나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에 따라 물류와 통신 분야가 다른 산업에 비해 발전의 속도가 무척 빠르다. 특히 한국 기업들에게 정주는 중국 내륙으로 진출하는 전초 기지로서 대단히 중요한 도시라고 할 수 있다. 정주 인구는 2007년 기준으로 736만 명이며, 이 가운데 시내 거주 인구는 300여만 명이다.
하남성의 성도(省都)인 정주가 고도(古都)라는 측면에서 이웃 도시들인 개봉과 낙양에 비해 덜 알려진 게 사실이나, 2004년 11월에 개최된 중국고도학회(中國古都學會)에서 제8대 고도로 공인을 받았을 정도로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도시다. 오늘날 중화민족의 시조로 추앙받고 있는 황제(黃帝)의 출생지인 이른바 ‘헌원(軒轅)의 언덕’이 정주시 경내의 신정(新鄭)에 있다. 그리고 중국역사상 최초의 노예제 왕조였던 하(夏)나라의 도읍지인 양성(陽城)이 곧 지금의 정주시 등봉(登封)이다.
사실 정주가 제8대 고도로 공인을 받을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는 1950년 이래 정주 시내에서 상(商)나라 성터, 토담, 도기, 청동기 유물 등이 대량으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성터의 전체 면적은 25㎢로 확인되었는데 특히 토담은 판축(版築) 공법으로 한 층씩 쌓았으며, 전체 길이가 7㎞, 가장 높은 곳이 9m, 가장 낮은 곳이 1m이다. 이 성터 유적은 하남성 안양(安陽) 은허(殷墟)의 상나라 전기 유적보다 시기적으로 앞선 것으로 판명되었다. 또 정주시 남관(南關) 일대에서 상나라의 외성 터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정주 시내의 상나라 성터는 도읍지였음이 분명하다.
기원 전 1046년 은(殷) 나라를 멸망시킨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그의 아우 희선(嬉鮮)을 이 지역에 봉하고 관국(管國)이라 칭했다. 수(隋) 나라 문제(文帝) 개황(開皇) 3년(583)에 이 지역을 처음으로 정주(鄭州)라고 불렀다.
1948년 10월 22일에 중국 공산당이 국민당 군대를 몰아내고 정주를 해방시켰다. 1954년 하남성 성도(省都)가 개봉(開封)에서 정주로 옮겨온 이래, 정주는 명실상부하게 하남성의 중심이 된 것이다. 정주시는 행정구역상 금수구(金水區) 등 6구(區), 등봉시(登封市) 등 5시(市), 중모현(中牟縣)의 1현(縣)으로 나뉘어져 있다. 6구 가운데 금수구와 중원구(中原區) 그리고 이칠구(二七區)가 시내의 중심 지역에 해당한다.
정주의 유구한 역사는 풍부한 문화 유적을 남겼다. 정주에는 1,400여 곳의 문물과 유적이 있다. 그 가운데 국가급문물보호단위(国家级文物保护单位: 한국의 국보에 해당함)는 26곳이다. 정주 시내에서 1시간 거리에 있는 숭산(嵩山)은 중국정부가 특별히 지정한 전국 44개의 풍경명승구(風景名勝區) 가운데 한 곳으로 천하제일의 명찰이라는 소림사(少林寺)를 바로 산 아래 품고 있다. 또 숭산 자락에는 중국 최초의 천문대라고 할 수 있는 주공측경대(周公测景台), 원대(元代)의 관성대(观星台), 송대(宋代)의 사대(四大) 서원 가운데 하나인 숭양서원(嵩阳书院) 그리고 현존하는 최대의 도교 건축군인 중악묘(中岳庙)등이 있다.
또 중국인의 인문시조(人文始祖)라는 황제(黄帝),열자(列子), 자산(子产), 한비자(韓非子), 두보(杜甫), 백거이(白居易) 등이 모두 정주가 배출한 유명한 인물들이다.
● 2·7 광장과 그 주변
정주 시내는 격자 모양의 도로 체계를 갖추고 있어서 교통이 무척 편리하다. 시내의 한 중심은 ‘2·7 광장’이다. 2·7 광장에는 14층, 63m 높이의 ‘2·7 기념탑’이 있다.
중국현대사에서 이 유혈 사태를 ‘이칠참안(二七慘案)’이라 한다. 그런데 이 파업은 사실상 린시앙첸(林祥謙), 스양(施洋) 등의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따라서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되고 난 뒤, 1951년에 정주시인민정부는 혁명 열사와 철도 노동자들 추모하고 그들의 혁명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정주 시내 한 중심가에 2·7 광장을 조성했고, 1971년 9월 29일에 지금의 탑을 만들었다. 이 탑이 정주의 상징이며 정주를 대표하는 명소 가운데 한 곳이다.
덕화 거리에서 남서 방향의 대동로(大同路)로 조금 걸어가면, 중국에서 북경역 다음으로 유동 인구가 많은 곳인 정주역 광장이 나온다.
덕화 거리에서 정주역에 이르는 지역은 주말은 말할 것도 없고, 평일에도 인산인해를 이룬다. 아마 이 지역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몰려 있는 지역 가운데 한 곳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분주히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도 볼거리다.
2·7 기념탑이 있는 이칠로(二七路)로를 따라 북쪽 방향으로 조금 올라가면 대상해성(大上海城)이라는 상가가 있다. 이 상가 2층에 가면 뜻밖에도 한국 음식을 파는 전문 음식점이 몇 곳 있다. 저렴한 가격에 한국 음식들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이칠로 주변에는 정주에서 가장 큰 공원인 인민공원(人民公園)이 있다.
● 하남성 박물관과 동물원
● 정동신구(鄭東新區)
정주시는 현재 정주시 동쪽에 대규모의 신도시 정동신구(鄭東新區)를 건설하고 있다. 신도시는 용호남구(龍湖南區), 상주물류구(商住物流區), 용자호구(龍子湖區), 과기원구(科技園區) 등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총면적이 약 150㎢이고, 예상 주거 인구는 150만 명이다.
● 정주박물관 및 그 주변
정주박물관은 시내 중심의 숭산남로(嵩山南路)에 있다. 이 박물관은 하남성 박물관에 비해 규모는 작으나 시설이 현대적이고 유물 또한 적지 않다. 입장료는 무료다. 상나라 때 옥으로 만든 도끼, 창, 낫 등을 전시해 놓았으며, 청동기 유물 가운데, ‘수면문가(獸面紋斝: 짐승 얼굴 무늬 술잔)가 특히 아름답다.
● 소림사(少林寺)
지난 6월 중순 학교 행사의 일환으로 소림사에 간 적이 있다. 소림사는 ‘선종(禪宗)의 조정(祖廷)이며 천하제일의 명찰’이라는 소림사는 정주시 등봉(登封)의 소실산(少室山) 자락에 있다. 정주에서 차로 1시간 거리다. 소림사는 북위(北魏) 효문제(孝文帝)가 태화(太和) 20년(496)에 천축(天竺)에서 선법(禪法)을 전하러 온 승려, 불타(佛陀)를 위해 지은 사찰이다. 사찰이 소실산의 숲속에 있다고 하여 소림사라고 했다. 선종의 초조(初祖) 보리달마(菩提达摩)가 이곳에서 9년 동안 면벽 수도하고 가사(袈裟)를 혜가(慧可)에 전한 뒤부터 중국 선종의 본산으로 천하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원래 소림 무술은 스님들이 용맹정진(勇猛精進)하기 위해 고안한 운동이었다. 그런데 당(唐) 나라가 막 건국될 무렵 진왕(秦王) 이세민(李世民)이 왕세충(王世充)의 할거 세력을 진압하는 데 소림사의 스님들이 큰 공적을 세웠다. 그 후 소림 무술은 전국적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특히 역조(歷朝) 황실의 승병 친위대로서 위세를 떨쳤다.
소림사에 가기 전에는 보리달마 이후 육조(六祖) 혜능(慧能)에 이어지는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은은한 선풍(禪風)이 사찰을 감싸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소림사는 내가 기대한 선풍은 온데간데없고 잘 조성한 관광지에 불과했다.
관광객들로 입추의 여지가 없는 소림사에서 중국인들의 종교에 대한 인식을 생각해 보았다. 역사적으로 중국 종교, 구체적으로 말해서 유·불·도 삼교(三敎)는 공리주의적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중국인들은 지고의 유일신에 종속되어 절대 복종하기보다는 삶의 방편과 통치 수단으로 종교를 이용했다. 어떤 종교든 중국에서는 사람을 위한 실용 노선을 견지해야 만이 발전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중국인들의 관념 속에서 불교는 병을 치료하고, 재해를 없앨 수 있으며, 아들을 낳게 할 수 있으며, 출세하고 돈을 많이 벌게 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물론 지극한 정신 세계를 추구한 선지식(善知識)들도 많았지만, 대다수의 민중들은 기복의 수단으로써 불교를 받아들였다.
또 유일신 사상 체계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다양한 종교들이 서로를 견제하며 어울릴 수 있었다. 이 점에서 중국 종교는 관용 정신과 포용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중국 역사상 중국에서는 서방 세계와는 다르게 대규모의 종교 전쟁이 별로 없었던 것이 바로 중국인들의 이런 가치관에 기인한다고 본다.
소림사도 마찬가지다. 부처의 깨달음을 이신전심으로 우매한 중생들에게 전하려는 노력보다는 소림 무술을 상업화하여 더 많은 관광객들을 끌어들여 치부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래서 소림의 스님들이 스님 같지 않고 무술의 대가나 세상의 이익에 밝은 사업가처럼 보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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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보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travel/324346.html |
첫댓글 하남성게시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