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하빙인(月下氷人)
당나라 태종(太宗) 때, 위고(韋固)라는 젊은이가 여행을 가는 중이었습니다니다. 달이 휘영청 밝은 어느 날 밤, 그는 송성이라는 곳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길모퉁이에 어떤 노인이 자루를 옆에 놓고 땅바닥에 주저앉아 손에 빨간 끈을 든 채 달빛에 의지해 조용히 책장을 넘기고 있었습니다.
위고가 '무슨 책을 읽고 있습니까?' 고 묻자 그 노인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 책은 이 세상 남녀의 혼사에 관한 책인데, 여기에 적혀 있는 남녀를 이 빨간 끈으로 한 번 매어 놓으면, 반드시 부부로 맺어진다오."
위고는 우습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해서 장난삼아 물어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제 아내감은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이 송성 안에 있소. 성 북쪽에 가면 진씨 성을 가지고 있는 노파가 있을 텐데, 그 노파가 안고 있는 갓난아이가 바로 그대의 배필이오."
위고는 공연히 쓸데없는 것을 물었다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만 들었다고 생각하고는 대수롭지 않게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로부터 14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위고는 상주의 관리가 되어 그 곳 태수의 딸과 결혼을 했습니다. 아내는 방년 17세의 미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신혼 첫날 밤, 신부는 위고 앞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는 게 아니겠습니까? 위고는 깜짝 놀라 그 연유를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위고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 주었는데,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저는 실은 태수님의 딸이 아니옵니다. 저의 친아버지는 송성에서 벼슬을 사시다가 돌아가셨지요. 그 때 저는 젖먹이였는데, 마음씨 착한 유모가
성 북쪽 거리에서 채소 장사를 하면서 저를 길러 주었답니다. 그런 저를 태수님이 가엾게 여겨 양녀로 삼으신 것입니다. 오늘 이렇게 훌륭한 분과
혼인을 하고 보니 지금도 성 한쪽 구석에서 채소 장사를 하실 유모가 그리워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위고는 그제서야 14년 전, 달빛 아래서 혼자 책장을 넘기던 노인이 떠올랐고, 신비하고 기이한 인연에 놀라며 아름다운 신부를 지긋이 안아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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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월하빙인(결혼을 중매해주는 사람) 월하빙인은; 처녀와 총각을 맺어 주는 할아버지, 월은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달이고,
하는 아래, 빙은 얼음, 인은 사람을 뜻하는 글자입니다.
월하빙인은 본디 월하노(달 아래의 노인)와 빙하인(얼음아래의 사람)이 합쳐진 것으로, 결혼의 중매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자아, 월하빙인이 어째서 결혼 중매인을 가리키게 되었는지 그 이야기를 들어 봅시다.
중국 당나라 초기에 위고라는 청년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청년은 부모님을 여의고 외로웠기 때문에 일찍 장가를 들어 가정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청년의 색시로 오겠다는 아가씨가 없었습니다. '아아! 이만하면 인물도 괜찮고,
돈도 웬만큼 있는데 어째서 나의 색시로 오겠다는 아가씨가 없는 거지?' 땅이 꺼져라고 한숨을 내쉬는 청년이 딱해서,
어떤 사람이 한 아가씨를 소개해 주겠노라고 했습니다. 아가씨와 만나기로 한 날, 청년은 한껏 멋을 부리고 집을 나섰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아가씨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벌써 해가 지고, 대지엔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도 아가씨는 오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둥근 달이 떠서 어두워진 밤을 밝혀 주고 있었습니다.
완전히 실망한 청년이 발길을 돌리려 할 때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는지 이상한 노인이 기묘한 글자로 씌어진 책을 읽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청년은 호기심에 끌려 노인에게 다가가 물었습니다. "어른, 그 책이 무엇입니까?" "이 책은 결혼 장부일세. 이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빨간 실은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이것으로 남자와 여자의 발을 이어 놓으면 두 사람은 반드시 부부가 된다네."
"아,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저의 혼인은 언제 이루지겠습니까?" "아아, 자네는 아직 일러. 자네의 색시가 될 아가씨는 지금
세 살밖에 되지 않았는걸. 그 아이가 열 일곱살이 되면 자네에게 시집을 오게 될 걸세."
노인의 말에 청년은 '절대로 그럴 리가 없어. 나는 지금 장가를 갈 나이가 되었는데, 내 색시감은 아직 세 살밖에 되지 않았다니,
하지만, 아무래도 보통 노인 같지는 않아. 어디 내 색시감이라는 아기를 한번 보러 갈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말입니까. 노인이 가르쳐 준 아기는 찢어지게 가난하고 못생긴 노파가 안고 있는 아기였습니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있나!' 화가 머리끝까지 난 청년은 하인에게 비수를 주며 아기를 찔러 죽이라고 했습니다.
하인은 시장의 북적북적하는 사람들 틈에 끼어 기회를 엿보다가, 노파가 안고 있는 아기에게 뛰어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다리가 삐끗하면서 비수를 들고 있던 손이 빗나가, 칼은 아기의 이마를 스키고 떨어졌습니다. 노파는 기겁을 해서 도망치고 말았지요.
이런 일이 있은 후 청년에게는 몇 번의 혼담이 있었지만 하나도 맺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대로 세월은 흘러, 어느덧 14년이
흘러갔습니다. 그 때까지도 위고는 총각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평소 위고의 능력을 높이 사서,
위고를 몹시 아껴 주던 장관이 말했습니다. "내게 양녀가 있는데, 아주 예쁘다네. 자네를 아껴 그 아이를 자네에게 주려하는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위고는 너무나 기뻤습니다. 장관의 딸이라면 자기에게 과분한 신분의 사람인데, 게다가 그 딸은 소문난
미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사실은, 그 딸은 꽃으로 언제나 이마를 가리고 다니는 점이었습니다.
나중에 결혼을 한 다음에 알고 보니, 부인은 바로 14년 전에 자기가 하인을 시켜 죽이려 했던 그 아기였습니다.
위고는 운명의 신비함을 깊이 깨닫고, 평생동안 자기 부인을 아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