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제3차 인문학 여행에 삼대일이 넘는 경쟁을 물리치고 독후감으로 선정이 되어 기분 좋은 마음으로 동참을 하게 되었다. 날씨도 상쾌한 계절의 여왕 5월, 신선한 아침을 깨워 서울역에 도착하니 벌써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진행요원들이 나눠주는 선물과 책자며 김밥 등을 받아 들고 끼리끼리 모여서 환담을 나누고 있는 모습들이 마침 어린 시절 수학여행을 떠나는 학생들 같았다. 언제나 여행은 즐겁고 신나며 독후감을 준비하는 시간부터 여행의 기분에 들떠서 기다리는 동안 내내 흥겨워지는 것이 여행의 맛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해진 시간에 KTX를 타고 서울역을 출발한 기차를 타고 가면서 인문학 사랑방으로 책을 소개하느라 덜컹거리는 차 안에서 어렵게 글을 몇 자 쓰고 나니 그 사이에 김천(구미)역에 도착하여 기다리고 있던 관광버스 두 대에 나눠 타고 의령으로 향해 신나게 달려서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이 정암진 나루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부산에 상륙한 왜병들은 거침없이 전격하여 충주 탄금대 부근에서 정여립의 저항을 조금 받기는 하였으나 숫적으로, 또 힘에서 절대적으로 불리한 아군은 무참하게 참패를 하고 정여립 장군은 탄금대에서 스스로 강물에 몸을 던져 죽음으로 장군의 기개를 나타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선조는 자신이 살겠다고 백성도, 나라도 버려두고 혼자 의주로 몽진을 떠난 상황에서 북진을 계속하던 왜군은 식량을 확보하게 위해서는 호남의 곡창지대를 장악해야 한다는 판단으로 일부 왜군은 전라도를 향하여 진격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진주성에는 진주목사 김시민 장군과 관군이 진을 치고 있었고 의령에서는 곽재우, 홍의장군이 붉은 옷을 입고 왜군과 싸워 크게 이기게 되니 왜군은 홍의를 입은 사람만 보면 겁을 먹고 도망을 하는 상황에서 붉은 옷을 여러 병사에게 입혀서 왜적을 혼란에 빠뜨린 기상천외의 전술로 승리를 하였다는 것이다. 음력 4월22일 처음 의병을 일으킨 날을 기념하여 의병의 날로 지키게 되었다고 한다. 정암정과 의병 박물관을 둘러보고 진주로 갔다.
왜군이 진주성을 공략하였으나 진주목사 김시민 장군이 지휘하는 군사들과 경상의병장 곽재우, 전라의병장 최경회, 임계영의 의병 부대가 합류하여 조선군 3,800명이 3만 명의 일본군과 10:1의 전쟁인 제1차 진주성 싸움에서 아군이 대승을 하였던 것이다. 다시 전열을 가다듬은 왜군 10만 명이 진주성을 치는 바람에 2차 진주성 싸움에서 참패한 김시민 장군은 적탄을 맞은 후 사망하고, 최경회와 김천일은 북쪽을 향해 두 번 절하고 스스로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으며 김해부사 이종인은 일본군 두 명의 팔을 끼고 남강에 투신을 하여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최경회 장군이 남강에 몸을 던지니 애첩이었던 논개도 장군을 따라 적장의 목을 안고 강물에 뛰어들어 의로운 죽음으로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진주 박물관을 관에는 임진왜란과 관련된 유물과 역사를 중심으로 전시를 한다고 하는데 그 중에서도 김시민 장군을 추서하는 교지가 일본으로 유출된 것을 다시 사들려서 전시를 해 놓은 것을 보면서 역사의 아이러니를 생각하였고 공훈에 선무공신 18명, 호성공신은 약86명이 선정되었는데 곽재우, 최경회나 논개 같이 나라를 위해서 싸우다 죽은 사람은 제외되고, 선조의 몽진에 같이 간 내시24명이 선정되었다는 사실에 놀라움과 정치라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자괴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어서 역사의 고장 산청으로 가니 해는 서산에 기울어 가자마자 선비문화원 식당에서 마련한 뷔페로 저녁을 먹고 소강당에 모여 소리꾼 손홍주 선생으로부터 판소리를 배우고 춘향전의 사랑가를 따라 부르며 한 시간 가량 즐거운 노래 공부를 하고 110호 숙소로 들어갔다.
숙소는 넓은 실내에 일인용 침대 네 개가 놓여있고 샤워실과 화장실이 분리되어 있으며 세면대도 두 군데 설치가 되어 있어서 깨끗하고 넓은 공간에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까지의 숙소 중에 제일 인 것 같았다.
다음 날 아침 6시경에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바람을 쐬러 나오니 숙소 바로 옆에 기독교 대한감리회 산청 돈암교회가 있어서 관리하시는 분인지 화초에 물을 주고 있기에 들어가서 기도를 하겠다고 하였더니 쾌히 불을 켜주고 문을 열어주어서 들어가니 아담하고 깨끗한 본당의 분위기가 따뜻하게 마음에 다가오는 느낌이 들어서 편안한 마음으로 찬송 한 장을 부르고 성경 한 절을 읽은 다음에 기도를 하고 나오니 본 교회에 출석을 하지 못한 아쉬움이 조금은 해소되는 느낌이라 가벼운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가 있었다.
제일 먼저 들른 곳이 남명 조식 선생님의 유적지였다. 선생님은 이론보다는 실천을 중요한 덕목으로 敬義劍과 惺惺子를 차고 다니며 자신을 깨우쳤다고 한다. 곽재우, 김면, 정인홍, 이대기 등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고 그들이 의병으로 나라를 위해서 싸우다 간 제자들이다. 산천재는 산속에 있는 하늘의 형상을 본받아 군자가 강건하고 독실하게 스스로를 빛냄으로써 날로 그 덕을 새롭게 한다는 뜻으로 지리산 천황봉을 바라보며 후학을 가르친 배움의 장소로 몇 년 전에 왔을 때는 수리 중이라 밖에서만 보았는데 지금은 새롭게 단청을 하여 깨끗하였다. 세심정은 마음을 씻는 정자로 정자 앞에 흐르는 덕천강 물에 간혹 몸을 씻으며 함께 마음도 씻었다는 곳이다. 남명기념관은 부산교통 사장 조욱환씨가 터를 제공하고 사재를 털어 세운 곳이라고 한다. 기념관을 둘러보고 뒷동산에 있는 선생님의 무덤에서 잠시 묵념을 하고 선생님의 학덕을 추모하게 위해 세운 덕천서원과 돌담과 한옥이 유명한 남사예담촌의 이씨 고가와 최씨 고가를 둘러보고 마을 안의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식사가 너무 좋아서 아주 맛있게 식사를 하고 일두 정여창 선생을 모신 남계서원 마루에 앉아서 역시 신교수의 강의를 듣고 근처의 일두 고택을 둘러보았는데 규모가 크고 정원의 소나무를 보니 오랜 세월이 느껴지는 멋진 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함양으로 가서 차 안에서 신라 말 함양 태수로 계셨던 최치원이 지었다는 학사루를 스치면서 보고 상림으로 가서 끝으로 洋夷侵祀非戰則 和主和賣國 서양 오랭캐의 침략에 맞서 싸우지 않고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매국이라는 흥선 대원군이 세운 척화비에 대한 설명을 들은 다음 4시30분에 버스를 타고 김천역으로 가서 근처 매점에서 김밥 두 줄을 사 가지고 오니 모두 둘러서서 내 이름을 부르며 1분 안에 안 오면 취소한다고 하여 쫓아갔더니 내려올 때 인문학 사랑방으로 책을 소개한 결과를 발표하고 있었다. 나는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를 소개했는데 마침 선정이 되어서 김훈의 ‘현의 노래’라는 소설책을 상품으로 받았다. 언제나 그렇지만 선정이 되고 상품을 받는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올라오는 기차 안에서 실시한 4행시는 선정이 되지 않아서 아쉬웠지만 갈 때마다 4행시나 책 소개를 한 것이 선정이 되니 자랑스럽기도 하다.
차 안에서 김밥으로 저녁을 먹고 8시경에 서울역에 도착하여 의병의 발자취를 따라 간 여행은 다음 기회를 약속하며 2019년 제3회 인문학 여행을 무사히 마무리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