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왜 모순 형용이고 역설인가
-천년을 견뎌내는 것
어른을 위한 각서
온몸이 갈라지고 부르튼
상처의 갑옷 한 벌 입고 서서
천년을 견뎌내는 것
■ 동일시의 폭력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와 세계가 동일한 논리적 구조를 공유한다고 보았다. 언어가 사실을 지칭하는 그림이라면, 언어로 기술될 수 없는 것은 사실로서 존재할 수 없다. 언어를 벗어난 대상은 우리의 '세계' 안에 들어올 수 없다.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의 논리가 곧 인식하는 세계의 형식을 결정한다. 인간이 표현할 수 없는 영역은 인식의 세계 바깥에 존재하므로 결국 의미 없는 영역이 된다. 이는 언어의 전능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언어의 무력함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를 통해 말할 수 있는 과학적 사실의 영역에 명확한 선을 그었다. 그는 윤리, 예술, 종교, 삶의 의미와 같은 '신비로운 것'들은 과학적 사실의 영역이 아니기에 언어로 담아낼 수 없는 "말할 수 없는 것"이라 명명하며, 언어의 한계 너머에 있는 소중한 가치들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것은 앞에서도 거론한 것이지만 이 논의는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다시 논의의 장으로 끌고 왔다.
디카시는 비트겐스타인이 침묵해야 한다고 말한 것을 사진기호로 표현해보려고 시도한 것으로 봐도 좋다. 디카시는 문자 언어로 다 설명할 수 없는 '말할 수 없는 영역'을 사진기호와 문자기호의 결합을 통해 드러냄으로써 비트겐슈타인이 설정한 언어의 한계를 예술적으로 확장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시인은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서 다양한 노력을 경주해 왔다. 일상적 언어 체계를 비틀고 해체해서 일상적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것도 하나의 방편이었다.
사물의 이름을 부르면 그 사물을 파악한 것으로 착각하지만 이름이라는 지시적 언어가 존재의 본질을 드러내기보다 오히려 은폐시킨다. 니체는 인간이 사물을 인식하고 언어로 표현하는 것을 은유의 과정으로 봤다. 외부의 신경 자극이 하나의 '이미지'로 바꿔 1차 은유되고 그 이미지가 다시 '소리(말)'로 2차 은유돼 다른 개별적 경험들을 하나의 단어로 묶어버린다. '나무'라고 말할 때에도 세상에 똑같은 나무는 단 하나도 없다. 하지만 언어는 각 나무의 개별적인 색깔, 모양, 흔들림 등의 차이를 무시하고 '나무'라는 추상적 개념 속에 가두어 버린다. 이것이 니체가 말한 은유의 망각화이다. 원래는 은유였던 것이 반복 사용되면서 고정된 진리처럼 굳어졌고, 그것이 은유였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다는 것이다. 은유의 망각화는 '동일시의 폭력'을 불러온다. 모든 사물은 저마다의 고유성을 가지지만 언어는 '같지 않은 것을 같게 만드는' 속성으로 동일시한다. 따라서 일상어인 지시적 언어로 포착한 세계는 생명력을 잃고 박제된 표본에 불과하다.
시인은 비트겐스타인이나 니체가 지적한 언어의 지시적 한계를 처절하게 통감한 존재다. 그래서 언제나 말이 스스로를 의심하는 자리에서 시인은 시작한다.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언어는 대개 명료함과 일관성을 요구하지만, 시는 그 요구를 거스른다. 모순형용과 역설도 바로 그 지점에서 태어난다. 모순형용은 서로 반대되는 의미를 가진 두 단어를 직접 결합하여 하나의 구를 만드는 기법이다. 논리적으로는 양립할 수 없는 두 개념이 부딪히며 새로운 의미를 창출한다. 이에 비해 역설은 문장 전체 혹은 시적 상황 자체가 표면적으로는 모순되거나 불합리해 보이지만, 그 속에 진실을 담고 있는 것을 말다. 역설은 모순형용보다 범위가 넓으며, 시의 주제 의식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디카시 「어른을 위한 각서」에는 여러 수사적 장치가 드러나지만 가장 주목해야 하는 것은 모순형용과 역설이다.
이 디카시도 연화산 산행 길에서 포착한 것이다. 커다란 소나무가 온 몸이 갈라지고 부르튼 채 나를 향해 있는 형상 자체가 큰 충격으로 다가 왔다. 소나무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것이 날시로 포착됐다.
온몸이 갈라지고 부르튼
상처의 갑옷 한 벌 입고 서서
천년을 견뎌내는 것
온몸이 갈라지고 부르튼 소나무를 갑옷으로 은유한 것인데, 여기서는 모순이 발생한다. 소나무 자체를 의인화해서 바라보는 관점이 “온몸이 갈라지고 부르튼”이고 이 주체는 소나무이다. 그런데 “온몸이 갈라지고 부르튼”이 수식하는 것은 “상처의 갑옷 한 벌”이다. 모순 형용이다. 갑옷은 몸에 걸치는 옷인데, “온몸이 갈라지고 부르튼 갑옷”이라면 소나무 몸 자체가 갑옷이라는 말이니 모순형용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몸이 곧 갑옷이고 갑옷이 몸이 된다. 이것이 역설이다. 지시적 의미를 흩트려버린 형국이다. 문법학자라면 이것을 비문이라고 말한다. 지시적 의미로는 담을 수 없는 것을 모순형용과 역설로 표현한 것이 이 디카시의 핵심 미학 구조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상처의 갑옷"이라는 표현도 모순 형용이다. '상처'는 외부의 공격에 의해 파괴되고 찢겨진 '취약함'을 말한다. 반면 '갑옷'은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고 '방어'한다. 겉으로 보면 '상처가 곧 보호막이 된다'는 모순 형용이다. 일반적인 논리라면 상처를 입을수록 존재는 소멸하게 되지만 "온몸이 갈라지고 부르튼" 상태가 되어야만 "천년을 견뎌내는 것"이라고, 파괴됨으로써 완성된다는 존재론적 역설이 성립한다. 이것이 어른을 위한 각서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소나무처럼 자신의 상처를 켜켜이 쌓아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단단한 껍질을 만드는 과정임을 시사한다. 이 디카시는 소나무의 갈라진 틈(상처)을 생존의 도구(갑옷)로 치환함으로써, 고통이 곧 힘이 된다는 역설적 진리를 도출해냈다. 이는 어른이 감내해야 할 삶의 무게를 '각서'라는 형식으로 비장하게 선언한 것이다.
이 디카시의 언술 구조는 모순 투성이다. 어른을 위한 각서라며 “천년을 견뎌내는 것”도 얼마나 터무니 없는 과장인가. 소나무를 의인화해서 인간, 그것도 어른을 말하는 것인데, 현대의학 수준이 엄청 발달해 수명이 늘어났다고 하지만 100년 정도이다. 천년이라니 말이 되지 않는다. 이렇게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일상적 언어의 관점에서 보면 그렇다.
여기서 시적 진실의 문제가 나온다. 일상적 언어는 정보 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지시적 언어'이다. 디카시 「어른을 위한 각서」에서 소나무라는 지시적 의미를 제아무리 자세하게 설명해 본들 현상학적으로 의식에 포착된 시적 진실을 담아낼 수가 없다. 시적 진실은 논리적이고 산문적인 설명으로는 포착되지 않는 사물의 핵심적 생명력이나 존재의 비논리성을 의미한다. 이를 드러내기 위해 모순 형용이나 역설을 사용해 일상의 논리를 깨뜨림으로써 역설적으로 더 깊은 존재의 실체를 보여준다. 이 디카시도 소나무를 지시적 언어로 설명한 것이 아니라 모순 형용과 역설을 통해서 어른의 실체를 드러냈다. 그렇더라도 그것은 환기될 뿐이지 손에 잡히지 않는다.
니체
■ 위버멘쉬
언어는 편리함을 위해 '차이'를 지우고 '동일성'을 부여함으로써 동일성의 폭력을 불러 일으켜 변화무쌍하고 모순 가득한 우주 전체를 '신의 섭리'나 '신의 뜻'이라는 단어 하나로 묶어버린다. 이것이 니체의 인식이기도 하다. 니체는 이런 폭력 때문에 신을 부정한 것이 아닌가. 니체는 신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차이를 잠재우고 거대한 추상적 폭력을 가하는 것이 기독교라고 본 셈이다.
생은 본래 '생성'하는 것이며, 매 순간 변화하며 요동친다. 인간은 이러한 변화의 불확실성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언어를 통해 '선'과 '악', '진리'와 '허위'라는 고정된 이정표를 만들었다. 신이라는 개념이 존재하는 한, 진리는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 됨으로써 인간이 스스로 가치를 창조할 기회는 박탈 당한다. 니체는 삶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것이 모순적이고, 고통스러우며,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신'이라는 개념은 이 모든 혼돈을 '조화'와 '질서'라는 틀 속에 강제로 집어넣는다. 니체는 신이라는 성벽을 부수어 인간을 광활하고 위험하지만 자유로운 '대지'로 돌려보내려 했다. 그것이 위버멘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