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땡볕이 눈부신 날 어변당을 찾았다. 밀양시 무안면 소재지에서 동남쪽으로 2km쯤 가니 오른쪽으로 직각으로 길이 꺾인다. 그 들녘 한가운데 길로 들어서니 눈앞의 산봉우리가 좌우로 두 날개를 펼치고 있다. 봉황이 알을 품고 있으니, 어변당이 있는 연상리 상당동이 바로 그 알의 마을이다. 이곳은 조선 초기의 무장 박곤 장군이 무예와 학문을 닦으며 살던 곳이다. 또 어변당의 적룡지와 함께 그를 기리는 덕연서원이 있다.
박곤은 밀성 박씨 태사공파 박언부의 11대손이다. 이곳 연상리로 이주해온 박의번의 둘째 아들로 고려 공양왕 3년(1391년)에 태어났다.
박곤은 효성이 지극했다. 부모를 위해 작은 연못을 만들어 물고기를 길렀다. 어느 날 꿈에 붉은 옷을 입은 노인이 ‘효성에 감탄하고 우릴 키워줘 감사하다’며 그 은혜로 붉은 비늘 두 개를 드리겠다고 했다. 다음 날 우레와 함께 연못 물이 부글부글 끓더니 붉은 물고기는 용이 되었고 붉은 비늘 2개를 남겼다. 또 자라가 붉은 잉어를 잡아먹으려 할 때 박곤이 살려 주었고 붉은 비늘은 그 보답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박곤은 학문과 함께 무예 익히기에 열중하였다. 그리고 무과의 초시, 복시, 전시를 두루 거쳐 21세에 장원급제하였다. 세종 1년(1419)에 최윤덕 장군의 막하로 대마도 정벌, 남해의 왜구를 토벌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때 박곤은 용이 남긴 붉은 비늘 두 개를 말의 배 가리게 양쪽에 붙였다. 말은 나는 용처럼 빨리 달렸고, 이에 적병은 박곤을 비룡장군이라며 두려워했고 이름만 들어도 도망쳤다.
박곤은 34세 때인 세종 11년에 순문사로 북방의 성들을 살피고 국방정책을 세우는 역할을 했다. 특히 축성법의 전문가로 국방의 자문을 맡아 각처의 진지를 심사했다.
박곤은 공조, 호조, 예조참판, 한성판윤 등을 지냈으며, 세종 18년 명나라 영종 즉위 하례사로 다녀왔다. 귀국 후 다시 한성판윤을 지냈고, 초청을 받아 또 명나라 연경(북경)에 갔다. 이때 박곤이 벼슬을 사양하자, 영종은 표(瓢)씨 성을 하사하며 미인 3인과 맺어주었다. 이들이 세 아들 일걸(一傑), 이걸(二傑), 삼걸(三傑)을 낳았고, 후손들이 표씨 성을 잇고 있다, 그러나 박곤은 고국을 못 잊어 여러 차례 간청으로 어렵사리 홀로 귀국하여 곧장 고향으로 왔다.
그리고 적룡지 연못 앞에 어변당을 짓고 여생을 보냈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별당인 어변당은 박곤이 중국에서 돌아온 1440년경에 지었다. 그 뒤 중종 때 퇴계 이황의 후손으로 밀양부사를 지낸 이휘영이 고쳐세웠다. 1592년 임진왜란에 마을이 모두 불탔으나, 다만 어변당과 적룡지는 무사하였다. 1652년에 밀양부사 김응조가 어변당기를 남겼다. 1708년 후손인 박세용이 어변당을 중수할 때 이명기가 어변당기를 썼다. 또 1841년 중수할 때 이호윤이 쓴 어변당중수상량문이 있다.
이 어변당을 지을 때 박곤이 심은 은행나무가 6백 살이 넘었다. 그러다 2백여 년 전의 벼락과 십수 년 전의 촛불로 몸통에 깊은 상처를 입었으나, 아직도 푸른 잎, 새 가지를 뻗고 있다.
어변당 앞 붉은 용의 못 적룡지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천원지방’으로 조선시대 사대부의 이상향이다. 또 이 네모 연못의 둥근 섬은 동해의 봉래산이니, 신선이 사는 곳이다. 이 둥근 섬에 어린 배롱나무가 있고, 아직은 어린꽃을 피운다. 하지만 언젠가는 하늘로 오른 붉은 용처럼 온 연못에 붉은꽃 그늘을 펼칠 것이다. 그리고 박곤이 심은 화마 입은 은행나무가 아직도 그 푸름을 잃지 않고 있는 것 또한 하늘의 뜻이려니 허리 굽혀 예를 갖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