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 같이 육조단경은 ‘선(禪)을 닦지 않아도 견성(見性)만 하면 된다’는 주의다.
이와 같은 중국의 선불교는 중화주의(中華主義)의 발로로 나온 것이다. 인도불교에서 벗어나, 중국의 독자적인 불교를 하나 내세워, 중국에도 혜능과 같은 뛰어난 도인이 있다는 거짓말을 만들어냄으로써 자칫 인도로 기울기 쉬운 자국민을 포함한 주변국 사람들의 관심을 중국으로 집중시키는 역할을 하게 했다.
이는 중국이 중화주의로 천하의 질서를 계속 잡아가기 위한 정책의 일환이었다고 볼 수 있는데, 이 정책은 아주 성공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13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한국 및 일본의 불자들은 인도의 석가불교는 모르지만, 중국의 선불교는 꽤 많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선불교는 ‘불교의 도인’ 하면 중국을 떠올리게 만들었고,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의 전통을 하나 만들어, 붓다의 가르침인 경전은 보지 못하게 하고, 중국 조사(祖師)들의 선어록(禪語錄)만 보게 만들었다. 이런 불립문자의 잘못된 전통은 경전 읽기를 소홀히 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 불교인들이 붓다의 법에 대해 무지(無知)하게 되었고, 불교가 붓다의 가르침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다. 이와 같이 중국은 “선불교”라는 새로운 불교를 하나 만들어냄으로써 천하를 ‘중국 중심’으로 다시 묶어낼 수 있었다.
선(禪)은 닦지 않고 문자나 생각만으로 불교공부를 하는 것이 문제이듯, 선(禪)만 닦고 경전은 보지 않는 것도 문제다. 왜냐하면 붓다의 말씀에 의거해서 선(禪)을 닦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닦으면, 불로장생(不老長生)을 추구하는 도교의 단전호흡이나 참나[眞我]나 신과의 합일(合一)을 추구하는 힌두교의 요가명상, 혹은 그 외의 다른 신비주의를 추구하는 이상한 외도선(外道禪)을 닦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붓다는 법에 의지해, 닦아가라고 하셨는데, 어떤 사람은 법도 하나의 방편에 불과하기 때문에 법에도 집착해서는 안 된다고 하며, 경전도 읽지 않고, 도니 깨달음이니 하며, 말도 되지 않는 헛소리만 해대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는데, 크게 잘못된 것이다. 법, 경전은 깨달음으로 인도해주는 안내자이고, 저 강을 건너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되는 뗏목이기 때문에 완전히 다 건너기 전에는 그것에 의지해, 그것을 타고 가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물살이 센 저 강을 건널 수가 없다. 불제자는 붓다의 법을 잘 떠받들어 수행해야 한다.
첫댓글 고맙습니다
위의 두 분 댓글 감사합니다. 후반부 내용이 많이 더해졌으니, 다시 한 번 읽어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