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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기본소득제에 대한 비판
Ⅲ-1
어떤 유토피아론에 대해서- ‘기본소득론’ 비판 ①
남종석씨가 최근 진보진영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기본소득론’에 대해 비판 글을 보내왔다. 남종석씨는 기본소득론이 마르크스주의와 양립할 수 없는 논리이고 경제학적으로도 성립하기 힘든 몽상적 유토피아주의라고 비판한다. 글을 2회에 나누어 게재한다. 기본소득론자들의 반론에 대해서도 환영하며 상호 비판과 토론의 장이 되기를 기대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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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복지동맹으로부터 기본소득까지
최근 몇 년간 한국 진보주의는 ‘복지동맹’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복지 확대를 강조해 왔다.이들은 경제위기와 사회적 불평등이 확대되는 상황에서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 복지의 확대라고 주장한다.
더불어 복지공약은 진보주의자들의 득표 전략에서도 핵심적인 수단이 되어 왔다. ‘무상급식, 무상의료, 무상보육’에 이르기까지 복지 공약은 진보를 표상하는 대표적인 구호가 된 것이다. 성과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민주노동당은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로 기염을 토했고 이들이 공약으로 내세운 ‘무상급식’이나 ‘무상보육’은 우파정부에서도 실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무상급식’이나 ‘무상보육’은 사실 잘못된 표현이다. 복지는 정부가 국민들이 낸 세금으로 시장에서 재화를 공동구매해서 시민들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그것은 정확히 말해 ‘유상급식 유상보육’인 셈이다.
어떤 이들은 무상보육을 탈상품화한 재화라고 주장했지만 이 또한 사실이 아니다. 재화나 복지 서비스의 공급은 여전히 사적 기업이나 개인사업자들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병원을 생각해보면 이는 쉽게 이해가 된다. 정부는 단지 이 재화와 서비스를 구매하여 시민 모두에게 동등하게 나누어 주는 것일 뿐이다. 세금을 내는 것은 결국 시민이다. 단 정부가 거둬들이는 세금은 누진율이 적용되기 때문에 소득수준에 따라 세금을 다르게 낼 뿐이다.
복지가 무상이든 유상이든 한국 사회에서 복지동맹은 강화일로에 있다. 진보주의자들은 더 높은 수준의 복지 공급을 공약함으로써 더 많은 지지를 확보하려 하고, 복지연구자들은 실질적으로 민중들의 삶을 개선하려는 선량한 의도에서 다양한 복지 의제를 다루고 있다.
‘건강보험 하나로’ 캠페인, ‘노령연금 현실화’, ‘반값 등록금’ 등 계층별, 세대별 요구를 복지공약으로 내세워 지지를 받고자 하는 것이다. 진보주의자만이 그런 것은 아니다. 민주당은 민주당대로 민생을 챙기려 하고, 우파정부 또한 복지공약에서 밀려나지 않으려 한다. 가장 왼쪽의 급진주의자들도 마찬가지로 복지공급을 강조한다. 가히 복지동맹의 시대라 할 만하다.
물론 이런 주장들의 ‘정치적 올바름’과는 반대로 진보주의자들이 내걸고 있는 복지공급의 실현가능성에 대한 논의는 심층적으로 이뤄지지 못했다. 복지 공급의 경제적 토대에 대해서는 정교한 논의가 없었던 것이다. 다들 ‘무엇 무엇을 하겠다’라고 외쳤지만 어떻게 그것을 실현가능하도록 만들 것인가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대부분의 복지주의자들은 한국의 복지모델을 유럽에서 찾는다. 그러다가 유럽 경제가 붕괴되자 이제는 북유럽에서 그 모델을 찾으려 한다.
그러나 이들 진보주의자들은 독일과 같은 나라들은 노동생산성이 매우 높고 남유럽/동유럽 국가들로부터 잉여를 수탈하고 있기 때문에 견고한 복지체제가 유지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는다. 더불어 독일이나 스웨덴 같은 경제적 능력을 결여한 유럽 국가들은 대부분 재정위기로 붕괴되고 있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한다.
기본소득론은 범람하는 복지동맹의 가장 최신 버전이자 가장 급진적인 버전이다. 기본소득론의 핵심은 노동을 하든 하지 않든 모든 개인들에게 정부가 ‘기본소득’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기본소득은 노인연금과 같은 공적 급여 수준을 훨씬 초과한다. 그것은 인간다운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수준이다. 그래서 ‘기본’이라는 표현이 붙는다.
노동을 하는 이들은 노동소득과 기본소득을 향유할 수 있고 그렇지 못한 이들은 기본소득만으로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모든 시민들에게 충분한 기본소득을 지급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매우 급진적인 복지담론이다. 아니 기본소득론은 급진적인 복지담론일 뿐만 아니라 이행론이자 새로운 사회체제의 이론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기본소득론은 복지담론을 훨씬 초과한다.
이 글은 기본소득론에 대한 비판이다. 기본소득론은 학계에서도 얼마간 논쟁이 되었지만 이는 결코 학계의 논쟁으로만 머물지 않았다. 내가 속한 노동당의 한 분파는 기본소득 쟁취를 전면적으로 내걸고 있다. 최근 노동당 부대표 장석준 동지 역시 [프레시안] 기고문 “케인즈도 마르크스도 모든 사람에게 100만원”이라는 기고문에서 기본소득론을 지지하고 나섰다. 장 부대표의 이런 행보는 기본소득론 자체가 노동당 내부의 의제가 될 수도 있는 상황임을 보여준다.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는 기본소득론이 학계뿐만 아니라 좌파정치 내부로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기본소득론이 이데올로기적으로 마르크스주의와 양립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실행 가능성도 없으며, 심지어 실현되었을 때조차 한국경제의 지속가능성을 파괴시킨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 글에서는 곽노완 교수의 글을 핵심 텍스트로 하여 기본소득론을 검토한다. 곽노완 교수는 국내에서 기본소득론을 정력적으로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2. 기본소득: 급진적 복지담론이자 이행론
곽노완 교수는 [기본소득학교: 해방적 기본소득의 현실적 비전]에서 기본소득이 마르크스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면서도 그의 코뮌주의를 능동적으로 계승하는 이론이라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마르크스는 착취 당하는 노동자계급만 혁명적인 계급으로 보았지만 오늘날은 착취 당하는 노동자만이 아니라 수탈 당하는 95%의 시민들 모두 반자본주의 세력이 될 수 있다고 한다. 95%의 시민에 속하는 이들은 실업자, 도시빈민, 영세자영업자, 장애인, 대다수 노령층 등 인구 대다수이다.(82쪽)
그에 따르면 이들은 투기소득과 불로소득을 가져가는 지배계급에게 수탈 당하는 존재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이런 배제된 자들의 수탈로 인한 고통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함으로써 이들의 변혁성을 기각하고 협소한 노동자계급 중심주의에 빠졌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사회주의관도 노동 중심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마르크스는 사회주의 하에서의 분배원리를 ‘능력에 따라 일하고 일한 만큼 가져 간다’고 했다. 마르크스주의는 이렇듯 노동에 따른 분배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노동 중심에 갇혀 있다. 곽노완 교수에 따르면 기본소득론은 노동 참여 여부와 상관없이 모든 이들에게 필요한 소득을 제공함으로써 코뮌주의에 조응하는 자유로운 인간형을 창출할 수 있다고 한다.[143쪽]
그에 따르면 21세기의 대안적 경제모델은 ‘노동성과에 따른 분배+각자의 필요에 따른 동일한 분배’가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편으로 노동유인을 만들되 다른 한편에서는 노동과 상관없이 모든 이들에게 필요에 따른 분배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개인들이 조건 없이 기본소득을 받음으로써 개인들은 자신들이 진정으로 하고 싶어하는 일들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곽노완 교수는 이것이 진정한 코뮌주의적 삶이라고 설명한다.
곽노완 교수의 기본소득론은 한편으로 이행론이면서 다른 한편으로 코뮌주의 체제의 재생산논리이기도 하다. 이행론의 측면은 다음과 같다. 좌파들이 기본소득을 설득력 있게 제시함으로써 대중의 지지를 얻을 수 있고 이는 좌파집권의 지름길이 된다. 집권 이후 기본소득을 적극적으로 보장함으로써 대중의 확고한 지지기반 하에 은행을 국유화하고, 은행의 기업대출을 증권화하고 연기금을 통해 주요 기업들의 최대주주가 됨으로써 자연스럽게 이들 기업들을 국유화 한다는 것이다.
국유화 이후 이자소득과 배당소득, 투기소득 등 불로소득을 모두 국가로 환수하여 기본소득의 재원으로 활용함으로써 착취와 배제를 사실상 종결시킬 수 있다고 한다. 곽노완 교수는 이런 소득을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제공되는 기본소득과 구별하기 위해 사회연대소득이라고 개념화 한다. 현존하는 시장체제를 유지하면서도 실질적으로 착취와 배제를 제거했다는 점에서 마르크스의 이행론보다 훨씬 실현가능성이 높은 변혁전략이라는 것이다.[73쪽]
3. 연기금 사회주의의 실현 가능성
곽노완 교수의 이행론은 이행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경제위기에 대해 무지하거나 무시한다. 그의 이행론에서는 어떤 사회적 위기가 발생할 수 있는가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연기금 사회주의 측면만 살펴보자. 그는 앞에서도 썼듯이 국민연금 등 연기금을 통해 기업들의 국유화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한국의 자산시장의 상황과는 전혀 맞지 않는다.
국채시장에 토대를 두지 않는 한국과 같은 주식시장은 근본적으로 취약하다. 국채시장에 토대를 둔 통화정책이 운용될 수 있을 때 주식시장은 안정화되는 것이다. 한국 주식시장이 자주 요동치는 것은 이런 구조적 취약성을 반영한다.
더군다나 한국은 세계에서 개방화의 정도가 가장 높은 나라일 뿐만 아니라 환율변동의 위기에 가장 크게 노출되어 있는 국가이다. 원화의 폭력적인 평가절하의 가능성이 상존하는 것이다. 거기다가 가계부채와 정부부채도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사회다. 위기의 구조가 다방면에 존재한다.
이런 상태에서 국민연금 등 연기금으로 대기업 주식을 전부 매입하고 이를 토대로 이자와 배당을 금지시켜버리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 것인가? 외국자본은 이탈할 것이고 한국 주식시장은 붕괴될 것이다. 배당과 이자 때문에 국내시장에 들어왔는데 그것들을 제거해버리면 어떤 투자자들이 남아 있겠는가?
현재와 같이 주식이 시가평가제로 회계처리가 되는 상황에서 주식시장의 붕괴는 자산가치의 폭락을 초래하고 부채가 자산보다 더 많게 됨으로써 기업 파산을 촉진할 수 있다. 1997년 한국은 이 상황을 경험했다. 유럽의 다수 국가들이 지금 경험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되면 국민연금이 보유하는 자산은 종이쪼가리가 되어버리고 연금 기반은 붕괴해 버린다.
곽노완 교수는 이런 비판에 대해 연금이 없어도 국가가 소유한 기업들의 이윤에 토대를 둔 배당, 이자소득을 배분하면 된다고 강변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앞에서도 보았듯이 주식시장이 붕괴하면 기업의 자산가치가 부채보다 작아지기 때문에 그런 기업은 파산해 버린다. 이런 기업은 영업 이윤이 마이너스다. 이자와 배당의 토대가 없는 것이다.
결국 연금체계가 붕괴되면서 노인들에 대한 연금지급이 불가능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연기금 사회주의의 맹점이 여기에 있다. 현재 축적된 국민연금을 모두 주식시장에 투자해서 기업들을 국유화해야 한다는 주장은 그만큼 위험천만한 발상인 것이다. 경제위기를 그렇게 강조하는 좌파들이 주식시장의 붕괴 가능성을 전혀 사고하지 않는다는 것을 필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더군다나 주식의 유상매입을 통한 국유화는 사회주의적 성격을 지닌 것도 아니다. 최근 미국에서조차 경제위기 국면에서 기업을 살리기 위해 파산한 기업을 국유화 한다. 미국 경제를 상징하던 자동차회사 GM이나 미국국제금융그룹(AIG)도 이런 과정을 통해 국유화 했다. 정부가 투여한 공적자금을 보통주로 전환하여 정부가 다수지분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이런 국유화는 사회주의적인 조치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국유화 자체가 사회주의와 동일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4. 1인당 600만원씩 나누어 주자고?
곽노완 교수은 자본주의 하에서도 기본소득의 재원을 마련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국민가처분소득 가운데 노동소득은 그대로 유지하고 소위 불로소득 부분에 과세함으로써 300조 가량의 재원을 마련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강남훈 선생은 최근 [녹색평론]과의 토론에서 보다 현실적으로 가처분소득에서 국민조세 분담률을 현재 25%에서 서구 국가들처럼 50%로 확대하면 300조 가량 신규 재원을 마련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대담 : 모두에게 존엄과 자유를 – 기본소득 왜 필요한가” [녹색평론 131]호 : 이 대담)
현재 한국은 300조 가량 세금이 거둬지는데, 300조 정도 추가로 세입을 확대해도 경제적인 안정화를 이루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이를 국민 각자에게 현금으로 지급하면 산술적으로 개인당 600만원, 월 50만원의 기본소득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토지세와 같은 수단을 언급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실현가능성이 의심스럽지 않을 수 없다. 강남훈 선생이 예로 들고 있듯이 서유럽 국가들 상당수는 국민총생산 대비 조세분담률이 50%에 가깝다. 그러나 이들 국가들의 조세는 대부분 법인세, 간접세, 개인소득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개인소득은 노동소득과 이자, 배당이 포함되어 있다. 곽노완 선생이 주장하듯이 이자, 배당, 투기소득에 토대를 둔 과세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더불어 이들 국가에서는 이렇게 거둬들인 세금을 개인들에게 현금으로 나누어 주는 것도 아니다. 유럽의 복지지출은 철저하게 노동유인, 노동생산성에 토대를 두고 진행되고 있다. 실업급여는 노동시장에 참여해야만 받을 수 있다. 교육은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공공재이기 때문에 현물급여로 제공된다. 연금 또한 근본적으로 자기 노동에 토대를 두고 제공되는 것이다. 노동시장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상태에서 복지가 제공되는 것이다.
경제위기 하에서 이조차도 재정적자로 인해 지속가능성이 매우 불투명한 상황이다. 더불어 유럽의 경우 복지 공급은 재정위기를 감안하여 계층적 차이에 토대를 두고 있고, 노동규율을 유지하면서 지속되고 있다. 개인들의 선택을 매우 제한하고 있는 것이다.
기본소득은 이런 정책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기본소득은 개인들의 소비를 확대시킴으로써 성장을 추동하는 전략과 맞물려 있다. 고소득자들의 부를 빼앗아와 한계소비성향이 높은 저소득계층이 소비하도록 나누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현금 급여는 노동시장 유인을 매우 약화시킬 수 있다. 위에서 보듯이 4인가구당 모든 계층이 월 240만원의 현금 급여를 받을 수 있다면 굳이 이들이 노동시장에 참여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더 많은 소득을 위해? 물론 더 많은 소득을 원한다면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저소득층은 저임금 노동시장에 참여하고 있다. 비정규직이거나 저임금 노동에 종사하는 것이다. 여가를 선택해도 4인가구당 200만원을 받을 수 있는데, 무엇하러 인격적 모독과 고된 노동, 자유시간의 부재, 저임금을 참으며 노동을 선택하겠는가? 일하지 않아도 가구소득이 200만원이나 된다면, 최소한 노동소득은 이것보다 몇 배 더 높아야 노동시장 유인 요소가 된다. 이것이 노동경제학의 기본적 내용이다.
이렇게 되면 저임금을 통해 유지되던 제조업이나 서비스업, 자영업은 거의 소멸된다. 임금은 가파르게 상승할 것이다. 국민총생산은 줄어들고 불로소득자, 기본소득 수혜자들만 늘어날 것이다. 노동생산성이 올라가지 않는 상태에서 가파른 임금상승은 지속적인 이윤압박을 발생시킨다. 노동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기업들은 영업을 지속할 수 있지만 한국 대부분의 중소기업들이나 자영업자들은 그것을 감당할 능력이 안 된다. 자본의 역외유출이나 폐업이 속출할 수밖에 없다. 경쟁력의 기반이 붕괴되는 것이다.
당연히 경제는 축소되고 조세기반은 붕괴되며 국민총소득은 지속적으로 감소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이자와 배당을 제거해버리면 투자유인도 사라진다. 당연히 한국 경제의 경쟁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다. 기본소득은 지속가능성은커녕 지속적인 마이너스 성장, 즉 경제의 붕괴를 초래할 뿐이다.
5. 기본소득이 역동적이라고?
곽노완 교수는 기본소득의 역동성으로 나의 비판에 대해 답할 것이다. 기본소득의 역동성에 대한 곽노완 선생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사람들이 풍족해져서 좀 힘드는 경제적인 노동을 절반으로 줄인다고 가정하면, 쉽게 이야기 해서 GDP가 절반으로 줄어드는 거죠, 그러면 기본소득의 재원이 절반으로 줄어들기 때문에 이듬 해에는 기본소득도 종래의 절반밖에 못 받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그 정도의 기본소득을 가지고는 만족스러운 생활을 할 수 없으니까 많은 사람들이 다시 노동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다시 GDP가 증가하고 기본소득의 재원도 늘어납니다. 이런 식으로 역동적인 균형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죠”[대담]
이 주장이 경제적 현실과 완전히 무관하다는 것을 독자들은 바로 알아차릴 것이다. 왜냐하면 한 국가의 GDP가 반으로 줄어들면, 즉 경제가 완전히 붕괴되면, 그 회복기간은 짧게는 10년 길게는 수십 년이 걸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붕괴된 경제가 균형 상태로 돌아오려면 수년간의 고통이 지속된다는 점이다. IMF 경험이 증언하고 있지 않는가? 더군다나 균형의 회복과정에는 피를 깎는 구조조정이 유발된다는 점이다.
곽노완 선생은 이런 문제에 대한 아무런 인식이 없다. 한 해 전에 GDP가 반 토막 났는데, 그 다음 해에 균형상태를 회복할 수 있다는 주장은 경제에 대한 기초적인 상식만 있어도 도저히 할 수 없는 주장이다. 더군다나 한 번 파괴된 경제가 곧바로 균형을 회복한다는 주장은 ‘균형의 안정성’을 논하는 신고전파도 주장하지 않는다.
미국의 대공황은 이윤율의 장기적 성장국면과 맞물려 미국 정부의 체계적인 정책을 통해 극복된 사례이다. 기본소득으로 인해 일하지 않던 노동자들이 노동현장에 돌아오니 곧바로 GDP가 정상으로 회복된다는 주장은 소설로서도 감히 쓸 수 없는 황당한 주장이다.
6. 화폐주조차익의 활용?
기본소득의 재원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도 핵심적인 쟁점이다. 곽노완 선생은 근본적으로는, 연기금으로 기업들을 국유화해서 이 기업들의 이윤에 토대를 둔 이자와 배당 소득 및 토지세와 같은 불로소득으로 재원을 마련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자본주의 체제에서 이자와 배당 소득을 완전히 없앨 수 없기 때문에 다양한 형태의 재원 마련 방안을 제안한다. 기본소득을 할 의지만 있다면 재원 마련 방안은 너무도 많다는 것이다. 그가 제시하는 깜짝 놀랄만한 재원 마련 방안들을 한번 들어보자.
“화폐를 국가가 한국은행을 통해 발행하지 않습니까? 여기에 나오는 화폐주조차익이 있지 않습니까? 그중 최소한 20~30%라도 기본소득 재원으로 할 수 있죠. 100억원을 발행하면 중앙은행의 자산, 이자, 부채로 잡힙니다. 그런데 이 부채 부분에 대해서는 사회구성원 누구도 갚으라고 하지 않아요. 사실상 국민 모두의 순 자산이나 마찬가지지요…..(여기에 강남훈 선생이 덧붙인다: 필자) 미국은 무역적자를 달러를 찍어 메우고 있어요. 만약 유엔 같은 데서 국제화폐를 만들었다면 6000억 달러 정도를 찍으면, 60억 인구에게 100달러의 기본소득을 줄 수 있는 거지요.”[대담]
화폐주조차익이라는 것은 최근 미국이 양적완화를 하면서 이슈화된 주제다. 이를 경제학에서는 달러발권이익이라고 한다. 달러발권이익이란 100달러짜리 슈퍼노트 한 장을 찍는데 만약 5달러의 비용이 든다면, 95달러의 신규 구매력이 창출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은 달러를 찍어내어 구매력을 창출하고 있기도 하다. 곽노완 선생은 이런 현실을 두고 미국이 세계를 대상으로 수탈을 하는 전형적인 사례라고 주장한다.(곽노완, “달러지배체제의 위기와 21세기 코뮌주의한국경제 비전”, [진보평론] 28호)
미국이 달러발권이익을 활용하듯이 우리도 재원 확보를 위해 화폐발행차익을 활용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헤게모니 화폐로서의 달러와 원화의 차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서 유래한다. 달러가 발권이익을 활용할 수 있는 것은 달러가 세계화폐이기 때문이다. 달러는 세계화폐이기 때문에 가치는 변동하지 않는다. 모든 국민화폐는 달러와 비교하여 환율이 표시되지만 달러는 그 자체가 세계경제의 본위화폐인 것이다. 그러므로 달러는 환율 폭락이나 폭등이 없다. 달러에 대비해서 엔이나 유로 가치가 변동할 뿐이다.
달러는 세계화폐이기 때문에 가치가 안정화되어 있고, 그로 인해 가장 안정된 자산투자의 대상이 된다. 미국 경제가 붕괴직전까지 간 2008년에조차 달러에 대한 수요는 오히려 증대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것이 동아시아의 수출달러나 서아시아의 오일달러가 다시 미국으로 흘러들어가 미국의 재정적자와 무역적자를 메워주는 이유이다. 양적완화를 위해 최근 달러를 찍어낸 것도 역시 달러의 이런 지위와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달러조차도 마음대로 찍어낼 수 없다. 달러는 곽노완 선생이 쓰고 있듯이 미국 연준의 부채이다. 그러나 연준은 재무부 산하의 조직으로 연준의 달러 발행은 궁극적으로 재무부의 조세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그러므로 미국 경제가 완전히 붕괴되어 조세기반이 해체되면 세계화폐로서의 달러의 지위도 상실한다. 이렇게 되면 당연히 달러의 발권이익도 사라져 버린다. 달러의 구매력은 궁극적으로 미국의 경제적 지위와 맞물려 있는 것이다.
현재 미국은 달러발권이익을 통해 달러가치를 인하시켜 수출경쟁력의 회복과 중국에 대한 채무를 줄이고 있다. 그러나 미국조차도 임의적으로 달러를 발행할 수 없는 것이다. 당장 화폐 공급량 증대로 인플레이션 조세 논쟁을 촉발할 수 있고 더 나아가서는 세계화폐로서의 달러의 지위가 붕괴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화는 세계화폐도 아니고 발권이익을 향유할 위치에 있지도 않다. 원화의 발행을 통해 발권이익을 노린다면 곧바로 원화에 대한 투매 현상이 나타날 것이고, 이는 환율의 폭등으로 귀결될 것이다.
더군다나 원화가치의 폭락은 주식시장의 붕괴도 유발할 수 있다. 원화는 매우 취약한 화폐로서 외국 자본의 유인할 어떤 매력도 존재하지 않는다. 외국 자본을 유인할 수 있는 매력은 한국 기업들의 이윤이거나 신흥시장으로서의 주식시장이지 원화 자체는 아닌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발권이익을 운운하는 것 자체가 황당하기 그지없는 주장이다.
곽노완 선생의 주장은 화폐를 단지 교환수단의 상징물로만 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가격 표준으로서의 국민화폐가 실질적인 가치를 지니지 않는 교환수단의 상징물일 뿐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화폐는 단지 교환수단이 아니라 일반적 등가물로서 가치를 갖는 것이다. 금과 같은 상품화폐는 그 자체로서 가치를 갖는 것이지만 중앙은행권은 국가의 지불능력, 보다 정확히 말해 국가의 조세체계에 기반을 두고 발행되는 것이다.
원화의 가치도 한국 정부의 조세기반을 토대로 발행되는 것이지 아무렇게나 발행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화폐가 부채이지만 누구도 갚으라고 하지 않는다’는 곽노완 교수의 주장은 화폐의 본질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강남훈 선생이 세계화폐를 언급하는 것도 전혀 적절하지 않다. 세계정부가 있어 세계로부터 조세를 거둘 수 있다면 몰라도 그런 기능이 없는 상태에서 세계화폐가 만들어진다면 그건 그저 종이 쪼가리일 뿐인 것이다.
7. 국영카드사는 어떤가?
곽노완 교수는 기본소득 재원마련 수단으로 국영카드사를 설립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카드수수료를 없애면, 자영업자들이 현금을 받던 것을 카드로 받게 되며 세금에서 누락되는 것을 조세 수입의 원천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기본소득에 대하여 4탄” [딴지 일보])
영세자영업자들이 카드 수수료를 부담스러워 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카드를 받지 않고 현금을 받고자 하는 것은 카드수수료 때문이 아니라 카드를 받게 되면 매출액이 추정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국영 카드회사를 만드나 그렇지 않으나 똑같다. 국영카드사가 카드 수수료를 받지 않아도 탈세를 위해 현금으로 받기 때문에 세금 누락은 여전할 것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현실 경제의 초보자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더군다나 국영카드회사라니! 카드는 일종의 소매대출이다. 원래 은행은 도매대출, 그러니까 기업들을 대상으로 대출을 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그래서 우리가 은행에 대한 통제를 주장할 때 주요 산업의 관리와 성장이라는 전략적 차원을 고려해서 그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더불어 은행은 통화정책, 경제정책의 전달 수단으로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국가가 은행소유지분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카드사는 카드 수수료, 카드 이자로 돈을 버는 거래중개 금융기관이다. 자체적으로 예금을 받아 도매 대출을 하는 기업이 아니라 단기적으로 돈을 대신 갚아주고 고이자율을 받는 중개금융기관인 것이다. 그러니 이런 기관들을 국유화해야 한다고 어떤 이도 주장하지 않는다. 국영 카드사를 운영한다는 것은 국가가 일종의 약탈적 소매대출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물론 최근 은행의 겸업화와 함께 은행들이 신용카드 발행을 직접 하거나 자회사를 두어 적극적으로 카드 영업을 하고 있다. 이는 정상적인 영업이 아니라 기형적인 것으로 은행의 본업으로부터 분리시켜야할 대상이지 정부가 나서서 카드사를 차릴 게 아니라는 점이다. <계속>
어떤 유토피아론에 대해서 - ‘기본소득론’ 비판 ②|
8. 마르크스주의의 창조적 계승?
앞의 글에서 간략히 밝혔듯이 곽노완 교수는 자신의 기본소득론이 마르크스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자 마르크스의 이상이었던 코뮌주의를 실천적으로 실현하는 수단이라고 정당화 한다. 필자는 여기서 곽노완 교수가 장황하게 설명하는 코뮌주의 체제의 분배원리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겠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주의자라면 당연히 사회주의를 어떤 도달해야할 모델이라기보다 현실의 운동으로 파악하기 때문이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일한 만큼 가져 간다’는 마르크스의 사회주의의 상은 유토피아 사회주의자인 생시몽으로부터 차용한 것이다. 마르크스는 사회주의체제가 어떨 것인가에 대해 그 어떤 구체적인 상도 제시하지 않았다. 그가 제시한 것은 노동자연합에 의한 생산수단의 소유, 노동에 대한 자기 소유만을 이야기했을 뿐이다.
필자는 아래에서 곽노완 교수의 기본소득론이 마르크스주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보이고자 한다. 곽노완 교수의 입장이 마르크스주의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굳이 비판하는 것은 그가 자신의 입론이 마르크스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곽노완 교수는 마르크스가 노동자계급 중심성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했다. 우리는 그 점에 부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이어지는 곽노완 교수의 입장에 대해서는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불로소득, 투기소득을 추구하는 집단이 사회적 부를 가져가니 95%의 인구가 수탈 당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실증적인 증거도 매우 취약하다. 예컨대 경제활동인구가 아닌 청소년, 대학생, 노인층을 보자. 이들은 경제활동에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빈곤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이 왜 유한계급에게 수탈당하는가?
수탈이란 개념은 착취를 넘어서는 재생산 자체를 파괴하면서 이루어지는 부의 약탈이다. 수탈을 당하려면 순부가가치의 증가에 기여하거나 자산을 소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을 재생산할 수 있는 토대마저 붕괴될 만큼 착취 받거나 순부의 유출을 경험하는 대중이 되어야 한다.
노인층이든 장애인이든, 청소년이든, 실업자이든 이들은 경제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해 빈곤층을 형성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빈곤층이 곧 수탈 당하는 존재는 아닌 것이다.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개인들이 어떻게 수탈 당하는지 도저히 알 길이 없다. 불평등으로 고통을 받거나 빈곤한 존재들을 곧바로 수탈 받는 자로 규정하는 것은 곽노완 교수에게는 가능할지 몰라도 과학적으로 아무런 설득력도 없다.
더군다나 그는 인구의 95%가 수탈당한다고 함으로써 95% 내부의 계층적 차이를 전혀 사고하지 못한다. 현실적으로 보았을 때 소득 8분위나 9분위, 심지어 10분위에 속하는 계층의 구성원들이 무슨 수탈을 당하는가? 이들 상당수는 곽노완 교수가 스스로 불로소득이라고 칭한 자산소득, 지대소득 추구자인데 말이다. 곽노완 교수는 불로소득 추구자가 수탈의 주체라고 했는데, 그의 분류법이라면 고임금 노동자 상당수는 자산소득(주식, 주택 등) 추구자라는 점에서 수탈자에 속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런 주장은 마르크스주의의 창조적으로 계승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곽노완 교수의 주장처럼 마르크스가 자본-임노동 관계만을 분석한 것은 사실이다. 이런 요소로 인해 마르크스주의가 경제적 관계를 절대시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이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윤소영 선생은 마르크스주의의 일반화라는 기획을 제시한다.
마르크스주의의 일반화란 생산관계 내부의 적대만이 아니라 다양한 사회적 적대를 분석함으로써 변혁을 새롭게 사고하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체제는 자본-임노동의 적대만이 아니라 남성-여성의 성적 적대, 인종간-민족간 적대도 존재한다. 이런 적대의 구조는 착취체제와 결합되어 있으면서도 착취로 환원되지 않는 사회적 적대이다. 마르크스주의를 일반화시킨다는 것은 이런 사회적 적대를 중층적으로 인식함으로써 해방의 주체를 새롭게 구성해 간다는 전략이다.
마르크스주의의 유물론은 사회적 관계의 유물론이다. 사회적 모순에 기초하여 변혁적 주체를 사고한다. 남성-여성의 성적 적대는 가부장제라는 구체적인 물질적 장치에 토대를 두고 재생산 된다. 노동자계급이 착취당하는 것도 생산관계라는 물질적 조건에서 비롯된다.
마르크스가 말하는 변혁주체는 사회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개인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회적 관계에서 억압이나 착취를 당하는 집합적 존재이다. 모순에 토대를 둔 저항주체의 구성이야말로 마르크스가 말하는 주체인 것이다.
곽노완 교수처럼 인구의 95%는 수탈당한다고 자의적으로 규정하고선 이들이 모두 사회적 변혁의 주체라고 말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적 분석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런 주장에는 사회적 관계에 대한 분석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곽노완 교수가 제기하는 이행론은, 앞에서도 보았듯이, 일종의 연기금 사회주의다. 국가가 축적하고 있는 연기금으로 주식을 보유함으로써 사회주의로의 합법적 이행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곽노완 교수의 주체이론이다. 그는 95%의 대중들이 수탈당하고 이들이 변혁주체가 된다고 했다. 인구의 95%가 수탈을 당한다는 그의 주장도 현실성이 전혀 없는 것이지만 수탈당하는 개인들이 곧바로 변혁주체가 된다는 것도 기이한 주장이기는 마찬가지다
더군다나 변혁과정에서 수탈당하는 대중들의 역할이란 기본소득론을 주장하는 정당에게 표를 주고 지지하는 것이 전부이다. 기본소득론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기본소득은 정책이고, 정책의 주체는 권력을 잡은 정당이다. 대중들은 기본소득의 혜택을 보는 대가로 더 강력하게 이 정책을 추진하는 정당을 지원, 지지하면 된다. 이 프레임에서는 계급투쟁이 정책의 실현문제로 대체되고 정치의 주체는 집권정당이 되며 대중들은 유권자일 뿐이다. 국유화의 주체도 정부이다
이런 변혁이론은 마르크스주의와 관련이 없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노동자계급이 착취당한다고 곧바로 그들이 변혁주체가 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주체는 급진적 이데올로기와 해후함으로써 구성되는 것이다.
더군다나 노동자계급이 변혁주체인 것은 그들 스스로 조직을 만들고 사회운동에 동참하며 자주적으로 자신들의 힘을 키우는 과정을 거칠 수 있는 집합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여성도, 다른 사회적 주체들도 마찬가지다. 노동자가 특정 정책을 지지하거나 기본소득 캠페인에 동참하는 존재일 뿐이라면 그들은 변혁주체가 아니라 그저 하나의 대중일 뿐인 것이다.
9. 나오며
복지주의자들은 대중들의 복지 수요가 증대했을 때 매력적인 복지공약을 통해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저희들이 이런 저런 복지 정책을 실현하겠습니다. 그러니 저희를 지지해 주세요’라고. 특히 경제위기 이후 팍팍해진 대중들의 삶 속에서 이런 복지 공약이 그들의 현실적인 고통을 덜어줄 뿐만 아니라 경제성장도 추동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기본소득론도 근본적인 프레임은 다르지 않다. 기본소득론자들은 청년실업의 증대, 노인층의 빈곤, 장애인 가구, 여성가장의 가족들의 힘든 삶을 해결할 수 있는 주요한 방안으로 기본소득이 매우 설득력 있다고 주장한다. 대중들의 실질적인 삶의 조건을 개선시킬 수 있기 때문에 정치적 지지를 받기에도 매우 유용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물론 기본소득론은 훨씬 더 급진적이고 근본적이다. 적어도 주장 자체는 그렇다. 그들은 모든 국민들에게 기본소득을 제공하면, 기본소득에 대한 지지는 더 올라갈 것이고 이를 토대로 사회체제의 이행조차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기본소득은 요구투쟁일 뿐만 아니라 이행강령이기도 하며 코뮌주의 체제의 운영원리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그러나 나는 앞에서 이 주장의 실현가능성이 없을 뿐만 아니라 한국 민중들의 실질적인 삶의 조건을 개선하지도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오히려 사회적 재앙만 더 크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지적하자. 이것은 노동자운동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가? 이 주장에 대해 윤종희·박상현은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기본소득론자들은 모두 기존의 노동자운동이 노동 중심주의로부터 탈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사실상 노동자계급의 분할을 조장할 뿐만 아니라 노동자운동을 공격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윤종희·박상현, “2007-09년 금융위기 논쟁 비판”,[2007-2009년 금융위기 논쟁], p.153, 공감)
Ⅲ-2
불필요하고 해로운 기본소득론"
[기고] 기본소득을 둘러싼 쟁점과 비판
기본소득에 대한 논란이 한창이다. 기본소득의 대표적 주창자인 파레이스는 ‘기본소득을 도입하면 많은 사람들이 보다 원하는 노동을 하게 되어 생산력이 증대하며, 이에 기초해서 노동시간을 줄이고 기본소득의 비중을 꾸준히 확대하면, 자본주의에서 ‘노동성과에 따른 분배’를 기본원리로 하는 사회주의(맑스의 코뮌주의 첫 번째 국면)를 거치지 않고, ‘필요에 따른 분배’를 기본원리로 하는 코뮌주의(맑스의 코뮌주의 두 번째 국면)로 직행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혹자는 ‘자본주의를 넘어서거나 획기적으로 변형시키는 대안경제체제를 목표로 하는 ‘트로이의 목마’’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작금의 ‘경제위기를 뛰어넘을 강력한 대안이고 좌파의 집권전략’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현 시점에서 기본소득이 유의미하고 실현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코뮌주의를 앞당기는 이행기 전략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이고 별개의 검토가 필요하다고 할 것이다.
기본소득은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비정규직 등 노동의 유연화와 광범한 실업 등으로, 많은 사람이 고용과 보장의 사각지대에 있는 현실에서, 사회보장의 한 방법론으로 제출되었다. 관리비용의 절약이라는 입장에서 접근하는 우파적 자유주의적 버전부터, 이행기 강령이라고 주장하는 좌파적 버전까지 매우 다양하다.
그런데 좌파들이 주장하는 기본소득론은 기왕의 맑스적 입장과 많은 차이가 있는 듯하다. 하지만 다르다고 해서 곧바로 변혁적 관점이 아니라고 비판하지는 않을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드러내고, 어느 입장이 더 나은지 따져볼 것이다. 이 글은 기본소득론자들의 주장이 유의미한 측면이 있다면 인정하되, 과연 곽노완 교수 등이 주장하는 ‘해방적 기본소득’이 실현가능하고 유의미한 것인지, 해방적 전략 혹은 이행기 전략이 될 수 있는 지, 현 상황에서 슬로건이 될 수 있는지, 슬로건이 될 수 있다면 주되는 것이어야 하는지 부차적인 것이어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모든 복지는 계급투쟁과 계급역량에 의해 결정된다
자본주의 하에서의 복지는 출산장려정책처럼 자본의 필요에 의해서 도입되기도 하지만, 복지의 수준은 본질적으로 자본과 노동의 역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따라서 어떠한 의미있는 복지도 즉 어떠한 자본의 양보도 투쟁없이는 쟁취될 수 없다. 최근 유럽이나 미국에서 등록금 인상과 관련한 큰 투쟁이 있었다. 교육자본이나 총자본의 공공복지에 대한 공격이다. 국민의 절대 다수가 등록금 인상에 반대하고, 이해관계가 있는 수 십만 명의 대학생들과 학부모들도 물론 분노하고 투쟁에 나설 수 있다. 그러나 대학생들이 어느 사회에서나 매우 행동적(active)인 계층임에도 경제위기 속의 국가재정의 위기 혹은 총자본의 처지도 양보할 여력이 적기 때문에 투쟁의 승리는 간단치 않다.
이처럼 모두에 대한 기본소득이 다수에게 이익이 되고 지지를 받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자체는 실현될 수 있다는 추상적 가능성일 뿐 구체적 가능성이나 현실성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무슨 화폐주조이익이라든지 혹은 주식양도 차익세와 같은 조세의 신설 또는 조세의 개혁을 얘기하면서, 은연 중에 치열한 계급투쟁이 없이 자본이나 국가가 마음만 먹으면 관철될 수 있는 것처럼 얘기하는 것은 우려되는 지점이다.
이러한 태도는 지구적 기본소득을 위한 탄소배출권 경매 주장에서 극에 달하고 있다. 배출의 억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기업에 불이익을 주는 것이 올바른 해법일 텐데도, 배출할 수 있는 권리를 상품화하고 경매하여, 그 수익금을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권리를 제약당한 전 인류에게 나눠주자고 한다. 어떠한 경우에도 자본가적 기업은 이 비용을 소비자에게 전가할 것이다. 결국 소비자인 일반 대중의 부담으로 자본가에게 배출의 자유를 주자는 황당한 얘기가 된다. 이 정도면 소부르아적 발상이 아니라 대자본가적 발상이 된다.
기본소득론자들의 주된 특징은 자본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즉 자본과의 치열한 계급투쟁없이, 다수의 이익과 지지만으로 과세를 통하여, 자본으로부터 의미있는 양보를 획득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론을 주장하는 데에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반자본의 이념이 없이, 자본과의 당당한 투쟁없이 어떻게 자본을 극복하거나 자본으로부터 양보를 얻어낼 수 있을까?
우리는 ‘완전고용사회가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전망, 그래서 고용에 연계된 기본보장은 사각지대를 남긴다’는 주장에 공감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란 한마디로 축적위기에 몰린 자본의 노동과 복지에 대한 공격이다. 이 공격에 제대로 맞서 싸우지 못하고 저지시키지 못한 점은 인정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의 공격에 맞서서 복지와 일자리를 지키고 나누는 투쟁의 중요성은 부정되지 않는다. 최근 경제위기로 부도위기에 몰린 그리스에서는 일자리와 복지를 쟁점으로 위력있는 총파업을 진행하고 있다. 일자리와 복지를 통일적으로 사고하면서 자본의 공격에 대하여 계급역량을 결집하여 투쟁을 키워나가는 방향이 아니라, ‘기본소득이 보장된다면 일자리는 저절로 나누어질 것이고 노동시간은 저절로 단축될 것이다’(금민)라고 주장한다면, 지나치게 일면적이고 낙관적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접근방식으로는 결코 역동적인 반자본의 역량을 키워내지는 못할 것이다.
기본소득은 열등처우의 원칙을 초월할 수 없다
자본주의 사회든 사회주의 사회든, 사회의 유지와 재생산을 위한 필요적 노동은 있을 수 밖에 없다.
기본소득은 그 취지에 따라 최소한의 생계비 이상을 지급해야 하지만, 동시에 근로의욕을 해칠 만큼은 지급할 수 없다. 즉 노동을 하지 않고도 노동을 한 사람보다 나은 급여를 제공할 수 없다는 열등처우의 원칙이 관철된다. 두 교수의 1인당 50만원이란 설정 자체도 생존은 유지할 수 있되, 최저임금보다는 낮아야 된다는 원칙이 관철되고 있는 것이다. 이점에서 기본소득이 코뮌주의나 사회주의로의 이행전략이라면서 ‘기보소득을 꾸준히 확대하면 코뮌주의로 직행할 수 있다’(빠레이스)든지,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는 수준의 후한 기본소득이 사회주의적인 개혁’(라이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허구일 뿐이다.
곽노완은 ‘보다 고차적인 코뮌주의 국면의 경제원리로 맑스가 제시한 “각자 능력에 따라, 각자 자신의 필요에 따라!”(MEW 19: 21)는 지속불가능한 유토피아라는 점이다. 맑스의 원리는 능력에 따라 노동하고, 각자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경제원리를 뜻한다. 그런데 앞서 판 빠레이스를 검토하면서 보았듯이 이는 게으르거나 이기적인 사람들의 천국이자 헌신적인 사람들의 지옥으로 귀결될 수 있는 원리이다. 왜냐하면 각자 노동과 상관없이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다면 능력껏 일할 사람은 헌신적인 일부의 사람들로 축소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는 노동자를 감소시켜 사회 전체적으로 생산수준의 축소를 야기할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기본소득이야말로 ‘노동과 상관없는 필요에 따른 분배’이고, 기본소득을 ‘꾸준히 확대하여,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는 후한 수준’이 되는 순간이야 말로, ‘게으르거나 이기적인 사람들의 천국이자 헌신적인 사람들의 지옥으로 귀결’될 것이다. 이 점에서 곽노완의 주장은, 기본소득을 아무리 확장해도 사회의 유지를 위해서 노동유인을 해칠 만큼의 수준이상은 지급할 수 없고 열등처우의 원칙을 벗어날 수 없다는 고백이 되거나, 자신의 기본소득론에 대한 저주가 될 뿐이다.
스는 분명 이러한 지옥을 피하기 위해서 능력에 따라 일하고 기여한 만큼 분배받는 낮은 단계를 설정했다. 높은 단계에서도 필요에 따른 분배만이 아니라 능력에 따라 일하는 사회임을 전제하고 있다. 맑스는 이처럼 생산과 소비 혹은 노동과 분배를 통일적으로 사고하고 있음에도, 안정적인 담세능력을 담지하셔야 할 헌신적인 자본가계급을 필수적 전제조건으로 상정하는 것 외에는 생산의 문제와 노동의 문제를 전혀 사고할 수 없는 틀인 기본소득론이야말로 수평파(leveller)들처럼 사회를 갈등으로 이끌 것이다.
기본소득의 장점과 단점
기본소득의 매력과 장점은 고용과 보장의 사각지대를 없앨 수 있다는 점이다. 조건적인 복지나 시혜적인 복지가 아니라 누구나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사회권이나 시민권에 입각한 보편적 복지로서의 장점이다. 또한 기본소득은 주로 여성이 담당해 왔던 부불노동인 가사노동(재생산 노동)에 대한 지불이 될 수 있다는 점도 큰 장점이다. 심사의 비용이 들지 않기 때문에 관리비용이 들지 않는다는 점도 거론된다.
그런데 위에서 본 바와 같이, 기본소득은 열등처우의 원칙을 벗어날 수 없고, 개인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청년실업자 1인에게 주는 50만원은 생존을 보장할지라도 질 좋은 일자리에 대한 욕구를 없앨 수는 없다. 또한 부부와 자녀 2명의 4인 가족의 경우 180만원을 지급받는다면, 사실상 추가적 소득없이 근검한 생활이 가능한 수준이고, 근로의욕을 포기할 수도 있다. 즉 무차별적이고 무조건적인 개인에 대한 급여는, 브라질처럼 기아모면 수준의 소액 급여라면 문제가 안되지만, 개인에 대한 적정한 급여는, 일부의 수급자에게는 필연적으로 근로의욕을 해치게 된다. 이것은 일하는 자와 일하지 않는 자 간의 사회적 갈등이 커질 수밖에 없게 한다.
또한 모두에게 동일한 액수의 급여는 실업자에게는 절박한 부조이지만, 중간층 이상의 소득자에게는 긴급한 부조가 아니다. 소득 재분배의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하후상박의 원리에 어긋난다. 기본소득론은 긴급하지 않거나 불필요한 사람들에 대한 동일액수의 지급의 정당성을 전혀 제시할 수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임금은 노동력의 재생산 비용이란 측면을 갖는다. 결국 기본소득은 임노동자에게는 추가적인 급여가 되고, 실업자에게는 생계보조급여란 성격을 갖게 된다. 가령 어느 노동력의 재생산비(급여)가 200만원이고 기본소득으로 50만원 더 받았을 때, 자본가는 190만원이든 170만원이든 점진적으로 급여를 낮춤으로서 재생산비를 넘는 부분을 무력화려는 경향성을 가질 것이다. 그리고 생활비가 100만원이 필요한 사람이 기본소득이 없을 때는 악착같이 100만원의 일자리를 찾겠지만, 50만원의 기본소득이 있을 경우 50만원의 파트타임도 수용할 수도 있다. 역사적으로 구빈법과 스핀햄랜드법이 자본의 직접 급여를 축소시키는 역할을 한 것처럼, 기본소득 역시 자본의 직접 급여인 임금을 낮추는 역할을 할 것이다.
그리고 화폐로 지급되는 급여는 자본이 강요하는 상품화와 시장화에 기여할 수밖에 없는데도, 이 점을 소득재분배를 통한 내수중심의 성장에 기여한다고 하고 있는 바, 이것은 결코 반자본의 논리가 될 수 없고, 시장에 대한 종속을 강화시키는 욕망의 상품화를 강화시키는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기본보장안의 검토
노완의 글에 따르면, 비숍(Bischoff)은, ‘최소생계비 미만의 소득을 올리는 성인 내지 가족에게 그 차액을 정부가 지급해주는 제도로 기본보장(Grundsicherung)이 기본소득보다 오히려 진보적이며 우월하다’고 주장한다. ‘기본보장의 수급기준들 중 제일 중요한 기준이 최소생계비 미만의 소득이 이라는 점은 한국의 국민기초생활보장의 경우와 동일하다. 다른 점은, 기본보장의 경우 수급권 판정을 위해 노동소득을 계상할 때 일정 비율(예를 들어 50%)만 소득으로 간주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어떤 1인 가구가 있고 기준 최소생계비가 140만원이며 그 1인의 노동소득이 200만원일 경우 이의 50%인 100만원만 소득으로 계상된다. 그리하여 그 1인은 140만원-100만원=40만원의 기본보장을 추가로 받게 된다. 이는 노동유인을 감퇴시키지 않기 위한 방안이라 할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기본보장에 대하여 블라슈케(Blaschke)의 비판대로, 1. 관료적인 소득 및 재산심사를 강화하고자 하며 따라서 신청자들을 낙인찍고 사회적으로 배제하며, 2. 노동해방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임노동을 최우선의 가치로 삼고 따라서 사실상 시장과 자본을 보완하는 데 머물며, 3. 기본보장의 대가로 사후적이긴 하지만 노동의무를 어느 정도 강요함으로써 강제노동을 사실상 인정한다. 4. 또 블라슈케가 지적하지는 않았지만, 기본보장은 현재보다 소득 및 재산심사를 필요로 하며 따라서 현재보다 많은 인력과 시간 및 비용을 낭비하게 된다는 점도 기본보장이 갖는 결정적인 단점 중에 하나라 할 수 있다’고 곽노완은 주장한다. 이처럼 기본소득론과 기본보장론은 서로 우월함을 다투고 있고, 장단점을 보완해 갈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위 비판 중 2항의 시장과 자본을 보완하는 것은 둘 다 똑같고, 3항의 노동유인이 있다는 것은 기본보장론의 단점이 아니라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문제의식이 모두에 대한 현금급여가 아니라, 신자유주의 하에서 생존을 위협당하는 실업자나 저소득 계층에 대한 긴급한 대안으로 한정한다면, 긴급하지도 않은 사람까지 포함하여 모두에게 무차별적인 급여를 함으로써 막대한 재원을 소모할 것이 아니라, 기본보장안을 수정하여, 필요한 계층(소득 분위 하위 20%)에게만 한정적이고 능률적으로 지급하는 방안이 더 낳은 대안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모든 근로자의 소득은 여타의 소득과 재산도 국세청에 이미 데이터베이스화가 되어 있고, 자영업자의 탈루와 도덕적 해이의 문제도 있겠지만, 국민연금과 의료보험 등의 징수의 공평함을 기하기 위해 포괄적인 조사가 이루어져 있고 꾸준히 보완되고 있다. 이러한 데이터 베이스를 이용한다면 별도의 심사노력이 없이도 지급액은 프로그램으로 산정될 수도 있다. 기본보장은 그 자체가 노동유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심사제나 관리감독제가 아니라 단순 신청제로 한다면 관리비용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필연의 왕국과 자유의 왕국에 관련한 노동해방의 관점-탈노동 혹은 노동으로부터의 탈주가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궤변에 대하여
자본주의 하에서의 노동은 고역이고 자기를 소외시키는 과정이다. 즉 노동자가 생산한 상품과 사회적 관계가 노동자와 대립하여 노동자를 소외시키는 과정이다. 여기에서 노동이 소외를 극복하고 자기실현이 과정이 되도록 하기 위해, 그의 생산물과 사회적 관계의 적대적 대립을 해소하기 위해 자본-임노동 관계의 철폐가 노동해방의 이상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것은 생산수단을 둘러 싼 사회적 관계의 적대적 성격의 해소이다.
또한 어떤 사회적 구성체이든 그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이 있다. 발달한 생산력을 기반으로 사회적 필요노동을 축소함으로써, 그리고 노동의 양을 고르게 분배함으로써 노동시간을 절대적으로 단축하는 것-즉 개인의 자유시간을 절대적으로 확장하는 것-이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란 이상이다. 이것을 맑스는 ‘필연의 왕국에서 자유의 왕국으로’라고 표현했다.따라서 적대적 관계의 해소(를 위한 투쟁)없이 자본의 기생적 이윤에 대한 제약만으로 노동해방을 얘기하는 것은 동의할 수 없는 지점이다.
또한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란, 필연의 영역을 부인할 수 없는 한 사회적 필요노동을 고르게 그리고 절대적으로 단축하는 것에서 얻어지는 것이지, 탈노동 혹은 노동거부의 관점에서 노동과 연계되지 않은 기본소득을 무슨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라고 하는 것도 동의할 수 없다. 가령 기본소득이 노동과 상관없이 인간다운 혹은 최소한의 삶을 보장한다고 하면, 사회는 결국 일하는 사람과 일하지 않는 사람으로 나뉘어 전자의 노력으로 후자를 부양하는 결과를 낳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회의 적대적 모순과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 탈노동의 관점에서 도주나 탈주하는 것은 결코 노동해방과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 될 수 없다. 우리가 관심이 있는 것은, 노동에 참여할 의지와 능력이 있음에도 자본의 반동성과 기생성 때문에 사회적 생산과 경제활동에서 배제되어 인간다운 삶을 보장받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것이지, 안빈낙도하는 예술가가 최소한의 생계보장적 기본소득에 만족하면서 소부르조아적 결단으로 노동으로부터 탈주하겠다는 사람들에 대한 것이 아니다.
기본소득은 탈시장화와 탈상품화의 원칙에 반한다
기본소득논자들은 현물급여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고, 무상의료와 무상교육의 토대 위에서 현금급여를 설계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사회의 전체 구성원의 노동의 결과인 재화와 서비스를 어떻게 소비할 것인가에 대하여, 시장과 상품을 매개로 할 것인지 아닌 지는 중대한 차이가 있다.
무상의료라고 하여도 만약 한국처럼 의료행위가 상품으로 거래된다면, 혹은 이윤추구의 대상이 된다면, 의료비의 100%를 국가가 보장한다고 하여도 자본가적 생산은 극복되지 않는다. 보육기관을 국가가 운영하고 무상으로 이용하게 하는 것과 수많은 유치원이 난립하도록 허용하고 유치원비를 화폐로 보조하는 것은 심각한 차이가 있다. 누구나 무상으로 사용하는 도로를 사적자본이 소유하고 통행료를 화폐로 보조하는 것도 차이가 있다. 전기회사가 사유화된 후 사용료를 화폐로 보조하는 것과, 국가가 소유하고 낮은 가격으로 공급하는 것 중 어느 것이 우월한가?
사회주의란, 공적인 것만이 아니라 우리의 소비와 삶의 모든 것을 상품화하고 있는 자본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탈시장화와 탈상품화의 지향이 관철되어야 한다.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시장과 화폐가 교환의 장과 가치척도로서 하루아침에 소멸되지 않겠지만, 끊임없는 탈시장화와 탈상품화는 사회주의 건설을 관철하는 원칙임에는 틀림없다.
또한 자본주의는 물론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노동자의 의사에 반하여 일시적인 실업이나 노동 무능력자가 있을 수 있다. 이 때에 탈시장화와 탈상품화의 원칙 속에서 필요한 사람에게만 화폐적인 사회부조를 해야 하는가, 아니면 이 원칙을 부정하거나 훼손하면서 사회적 부조가 긴급하지도 않는 사람들에게 무차별적인 화폐급여를 하여 상품으로 소비하게 만드는 것이 올바른가? 무차별적인 화폐급여는 상품과 시장의 확장에 기여한다는 점에서 억제되어야 맞는 것이고, 필요한 사람들에게만 지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할 것이다.
심지어 기아에 직면한 최빈국에게 식량원조보다 화폐를 개인에게 기본소득으로 지급하는 것이 낫다는 주장도 있는데, 진정 도와주고 싶다면 최빈국의 부채를 탕감하고 식량생산의 기반의 재건을 도와주어야 될 일이지, 수입농산물의 소비자로 묶어 놓아서는 안될 것이다. 따라서 탈시장화와 탈상품화의 원칙을 훼손하는 기본소득론은, 성장제일주의와 대량소비, 생태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이 전혀 고려되고 있지 않고, 오히려 이러한 가치추구에 해롭다고 말할 수 있다.
공공적 복지와 개별적 복지 그리고 보편적 복지와 선별적 복지
독일에서는 100 여종의 사회보장제도가 있다고 한다. 그 중에는 무상의료나 무상교육과 같은 보편적인 복지도 있겠지만, 실업자뿐만 아니라 장애인이나 노후 장기요양과 같은 특별한 목적을 위한 선별적 복지가 많음을 알 수 있다. 번잡한 제도는 정비되어야 하겠지만 사회적으로 특별한 부조가 필요한 선별적인 복지의 가치나 필요는 있을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보편적 복지의 일종인 기본소득만으로는 선별적 복지를 없앨 수도 없고, 현재 시행되고 있는 현금급여 역시 대부분 선별적 목적을 위한 것이다. 결국 복지의 재원은 먼저 교육과 의료 등 사회적 필요를 탈시장하고 탈상품화하는 부분 즉 사회의 공공적인 복지 부분과, 개별적인 지급으로 나뉘는 것이고, 개별적 지급도 특별한 목적을 갖는 선별적 복지와 보편적 복지로 나뉘는 것이다.
어느 사회나 (확대)재생산을 위한 투자는 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매년 30% 가까운 투자를 해왔다. 2009년을 예로 들자면, 총생산이 1,000조원인 나라에서, 총투자 29.9%, 정부지출 15.6%은 피할 수 없다면, 민간지출은 55.5%인데, 무상교육과 무상의료 지원비 25조를 뺀 기본소득 필요액 263.9조원, 26.4%는 민간지출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50만원의 기본소득은 개개인의 소비적 지출 혹은 화폐적 지출의 절반에 가까운 금액이 된다. 결국 탈시장화해야 할 공공적인 복지 부분과 선별적 복지는 불가능하게 된다. 이것은 무차별적인 기본소득에 대한 절대화이다.
한국도 물론 현재 26.6%의 국민부담률(조세부담률 20.8+사회보장부담률 5.8%)을 35.6%인 독일이 아니라 스웨덴처럼 50-60%를 부과할 수 있고, 기본소득을 낮은 단계(낮은 액수)부터 시작하여 점증시킬 수도 있고, 노령층부터 선별적으로 시작할 수도 있다. 그러나 총투자와 정부지출을 감안할 때 어떤 경우에도 복지예산은, 민간지출의 50%를 넘기 힘들고, 민간지출의 절반에 해당하는 금액의 수평주의적(leveller)인 화폐적 분배는 사회적 복지와 선별적 복지를 해칠 수 밖에 없다. 결국 한국이건 독일이건 스웨덴이건 혹은 자본주의 사회이건 사회주의 사회이건 간에, 총 민간지출의 절반에 해당되는 화폐적 분배인 기본소득은 지키지 못할 약속이 되거나, 고집해야 할 가치가 없다고 할 것이다.
두 교수는 서유럽의 경우 추가세수 없이 기존의 현금지급형 사회복지만 기본소득으로 통폐합해도, 모든 국민이 1인당 평균 매월 140만원(1,533달러) 정도의 기본소득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독일의 예를 들어보면, 1,533달러x12개월=18,396달러로, 이는 독일 1인당 국민소득 45,004달러의 40.9%에 해당한다. 조세를 포함한 국민부담률이 35.6%임을 감안할 때, 이것은 말이 안되는 얘기다. 만약 독일의 사회보장 부담율 13.7%가 교육이나 의료에 쓰여지지 않고 모두 기본소득으로 지급된다고 하여도 월 513.8달러, 469,000원밖에 안된다.
코뮤니즘에 대한 오해에 대하여
‘능력에 따라 일하고, 일한 만큼 분배받는’ 사회에서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사회라는 이상은 무엇인가? 서구 복지국가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무상의료와 무상 교육 등 필요에 따른 분배가 있고, 낮은 단계인 역사적 사회주의에서도 필요에 따른 분배가 있었다. 기여에 따른 분배나 필요에 따른 분배란, 해당 단계의 사회에서 전일적인 분배원칙이 아니라 규정적인 분배원칙을 말하는 것이다. 어느 사회에도 심지어 봉건사회에도 필요에 따른 분배는 있는 것이고, 단지 양적인 차이와 규정적이냐 아니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따라서 곽노완이 공산주의의 높은 단계에서야 필요에 따른 분배를 한다든지, 낮은 단계에서는 필요에 따른 분배가 없으므로 사민주의보다 저급하다든지, 필요에 따른 분배만 있는 높은 단계는 노동의욕을 해치기 때문에 지속가능성이 없다든지, 노동에 관계없이 필요적 분배를 하는 기본소득이 낮은 단계를 뛰어 넘는 코뮤니즘의 이상을 구현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개념상의 오해로 인한 잘못된 주장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노동유인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에 노동소득의 절반을 필요에 따라 재분배한다는 원리는 공감할 수 있다. 그러나 기본소득론자들이 보편적 복지의 하나인 화폐적 지급형태에만 집착할 때, 기왕의 사회주의자들은 필요적 분배에서 보편적 복지만이 아니라 사회의 공공적 복지(학교, 병원, 요양소 등등)와 특별한 부조가 필요한 장애인이나 노인들의 장기요양과 같은 선별적 복지까지 포함하여 사고하고, 비화폐적인 탈상품화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사회주의 사회에서 기본소득은 불필요하고 해롭다
곽노완은 ‘해방적 기본소득’을 주장하면서, 코뮨주의 사회에서는 필요에 따른 분배 몫 중 누구나 품위있는 생활이 가능한 화폐적 기본소득을 얘기하지만, 액수의 고하간에 누구에게나 균등한 기본소득은 열등처우의 원칙 때문에 최저임금을 넘을 수 없을 뿐 아니라, 탈시장화와 탈상품화의 원칙에도 반한다는 것은 이미 말한 바 있다.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실업자와 노동 무능력자는 있을 수 밖에 없지만 그들은 소수일 것이다. 그럼에도 무조건적인 현금급여라는 형태를 고집하여 사회적 부조가 필요없거나 긴급하지 않은 전체 성원에게 총생산의 30%에 달하는 기본소득을 제공할 경우 사회적 필요에 대한 투자는 현저하게 제약을 받을 수 밖에 없다.
두 교수는 기본소득의 지급을 위해서는 290조원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런데 현재 무주택자를 1,000만 가구라고 한다면 가구당 5,000만원(서울을 제외하고는 아파트 가격이 5,000만원 정도면 된다), 즉 500조면 무상주택을 공급할 수 있다. 이 금액은 기본소득 2년 분의 예산도 안 된다. 이 경우 매년 290조의 재원이 있을 때 소수에 대한 배려로 40조원을 쓰고 나머지를 무상주택으로 돌려야 할까 아니면 기본소득을 고집하여 1인당 50만원씩 분배하여 상품으로 소비하게 하여야 할까? 답은 명약관화하다. 사회주의사회에서는 무차별적인 기본소득은 필요없다. 사회적 계획이 이루어지는 곳에서는 실업자나 노동 무능력자에 대한 지원은 행정비용도 그다지 발생시키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사회주의 사회에서 무차별적인 현금급여인 기본소득은, 탈시장화와 탈상품화의 원칙에도 반하고, 오히려 장애가 될 것이다.
불로소득과 투기소득에 대한 중과세가 지속적으로 유지될 수 있는가?
기본소득은 불로소득과 투기소득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권리와 자유를 인정하면서, 그 결과물의 일부에 대한 양보를 강제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산가치란 수익에 의해 평가되기 때문에 중과세로 수익율이 낮아지면 자산가격은 폭락할 수 밖에 없거나 과세의 회피로 이어져 임대료나 이자율의 상승 등으로 실수요자에게 전가될 것이다. 어떠한 경우든 자산가치의 폭락은 피할 수 없고 과세금액은 축소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불로소득은 근절의 대상이지 온존시키면서 중과세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될 것이다. 결국 좌파의 집권 시 중과세든 전액 환수든지 간에 불로소득(에 대한 총 투자액)은 급감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불로소득에 대한 중과세를 통해 안정적인 재원은 확보할 수가 없다고 해야 한다. 그리고 두 교수는 증권양도소득세를 신설하여 양도차액의 30%를 과세하여, 증권(현물)양도세에서 30.33조원, 파생상품에서 45조원 등 71.8조원을 만든다고 하나, 이는 결국 매년 양도차익이 239조원이 나야 한다는 얘기다.
한국의 금융시장에 투입된 금액이 많아야 300조원 정도일 텐데, 투자자들이 서로 사고 파는 누적거래액이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내외국인 투자자가 투자자들의 제로-썸 게임인 주식과 파생상품을 포함한 한국의 금융시장에서 매년 240조원의 투자이익을 발생시키거나, 매년 240조원씩 신규 투입되거나, 매년 70조원씩 양도세로 추출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도저히 믿기 어렵다. 따라서 진보세력이 정권을 잡기만 하면 기본소득을 즉각 실시할 수 있다는 두 교수의 주장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기본소득은 이행전략이 되기에는 결점이 너무 많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용과 보장의 사각지대에 있는 계층에 대한 대안은 필요하다. 기본소득론이 그 대안의 하나일 수도 있고, 기본보장이나 기초생활보장제도를 보안하여 새로운 대안을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두에게 무차별적인 기본소득은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탈시장화와 탈상품화의 원칙 그리고 개개인의 상품적 필요가 아닌 사회의 공공적 필요를 위한 분배를 우선시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해롭다고 할 수 있다. 그 점에서 노동과 연계되지 않은 기본소득이 필요에 따른 분배라는 이상을 실현하는 코뮤니즘을 앞당긴다는 주장은, 사회의 공공적 필요와 개인의 상품적 필요를 혼동한 주장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또한 노동 의 원칙에서 볼 때 관철될 수도 없다. 또한 일인당 50만원의 기본소득이라는 화폐급여는 총지출의 26.4%에 해당되는 바, 정부지출과 총투자를 감안할 때 총 민간지출의 거의 절반에 해당되고, 설령 스웨덴이라고 할지라도 26.4%의 무차별적인 기본소득은 공동적 복지와 선별적 복지를 희생시켜야만 가능할 것이다. 결국 모두에게 무차별적이고 유의미한 수준의 화폐형태의 기본소득은 어느 사회에서나 가능성이 희박하고, 고집하기에는 단점이 너무 많다.
그리고 설령 해방적 기본소득이 유의미하다고 하더라도, 좌파가 정권을 잡아야만 그리고 정권을 잡고 나서 무상의료와 무상교육의 현물급여를 존중하면서 불로소득에 대한 공격으로 재원을 마련한다고 주장하지만, 과연 전제조건인 좌파의 집권과 무상의료, 무상교육은 어떤 방법으로 이룰 것인지, 그 주체와 주된 슬로건은 무엇이어야 하는지 전혀 제시하고 있지 않다. 유의미한 기본소득이라는 목표보다, 전제조건의 달성이 훨씬 어려운 과제라면, 이러한 목표를 당면 슬로건으로 제시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무엇보다도 기본소득론은 자본을 부정하고 자본과 당당하게 싸우는 관점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자본에게 타격을 주는 운동으로 성장하기도 어렵고, 형태에만 집착하는 이 운동이 설령 성장하더라도 자본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에, 자본이 수용하더라도 왜곡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기본소득의 주장만을 앞세우는 것은 반자본의 전선을 교란시킬 가능성이 크다.
끝으로 무조건적인 현금형태의 기본소득이 사회주의적 원칙을 충족시킬 수 없다면, 고용과 보장의 사각지대에 있는 실업자 등 도시빈민과 사회적 부불노동인 가사노동에 대한 대안을 찾을 필요가 있고, 당면한 현실에서 빈곤층을 포함한 대중을 결집시킬 담론과 요구를 개발할 필요가 있다.
Ⅲ-3
노동에서 분리된 소득? 참신하지만 매력적이진 않아
[질라라비] 기본소득, 섣부른 제도설계에 대한 우려
기본소득의 단순함이 왜 파괴력을 가지지 못하나?
새로운 사상이나 이론들 중에서 체제의 문제에 대한 대항 이데올로기로서의 정합성을 갖거나, 새로운 제도적인 해법을 제시하였을 때, 대안담론으로써 인구에 회자되기 시작한다. 포스트모더니즘 이후로 ‘반자본주의’라는 좌파의 거대담론은 현재성과 구체성이라는 요소에서 비판되기 시작하였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들이 진행되어져 왔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들은 신자유주의가 가지는 파괴력과 자본의 공세에서 커다란 성과를 달성하지는 못 한 듯 보이기도 한다.
여러 가지 ‘대안사회담론’은 전 지구적으로 고민되어져 끊임없이 제출되어져 왔다. ‘기본소득(basic income; Grundeinkommen)’은 이러한 지구적 시도 중의 하나이지만, 대안담론으로써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는 아직 판단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기본소득에 대한 입장은 우파로부터 좌파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지기 때문에 새로운 담론으로써 그 지위와 성격은 여전히 불명확하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에서도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한국의 기본소득 담론은 아직까지는 체제 문제에 대한 대항 이데올로기로가 갖추어야 할 정합성에 그다지 큰 비중을 두지 않는다. 오히려 국가재정의 대대적인 개혁을 통한 소득재분배 모델을 제시하였고, 기본소득 제도의 단순한(simple) 요소에 대한 우수성을 부각시켜 왔다.
그러나 제도 설계 초기 균등 현금급여 중심의 설계에서 현물급여까지 포함하는 모델로 확장되면서 기본소득자체가 가지는 고유한 현금급여 중심의 고유모델이 가지는 독자성은 모호해 졌다. 또한 재원형성과 기본소득을 위한 전제조건인 무상의료 및 무상교육을 위한 경제 및 정치적 방법론은 단서수준이거나 공허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소득이 가지는 단순성 때문에 국민 상당수로부터 동의를 이끌어 낼 수 있고, 국민의 동의가 전제된다면 실현 가능하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어떻게 상당수의 시민과 노동계급으로부터 동의를 구해낼 수 있는지에 대한 기본적인 이데올로기가 빠져 있기 때문에 이 담론은 파괴적이지도 강력하지도 않다(not powerful).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그룹은 실현가능한 모델이라는 것을 증명하기위해 제도설계에 공을 들였지만 오히려 기본소득이 가지고 있는 담론의 지형을 제한하고 있다. 섣부른 제도설계보다는 담론이 가지는 이데올로기적인 우수성이 먼저 입증되어져야 할 것이다.
이에 이 글은 기본소득에 대한 제도적인 측면보다는 대항 담론으로써 가지는 유효한 이데올로기적 요소에 집중한다. 이를 통해 노동과 연계되지 않는 사회적 급여의 실현이 가지는 사회복지의 정치․경제학적 측면의 강화에 주목한다.
사회복지에서 노동의 중심성
자본주의 국가는 노동세계 내부의 대상과 노동세계로부터 배제된 사람들을 구분해서 사회복지를 발전시켜왔다. 노동세계 내부의 대상인 노동자에 대해서는 19세기 말부터 사회보험을 중심으로 사회보장제도가 발전되어왔다. 반면 노동세계로부터 배제된 대표적인 집단인 빈민과 실업자에 대해서는 17세기 구빈법(old poor law)과 18세기 스핀햄랜드(speenhamland system)와 같은 구빈제도에서 현재의 공공부조로 발전되었다. 이처럼 사회정책은 ‘노동’을 매개로 제도의 대상과 급여의 내용을 구분하여 발전해왔다.
그러므로 ‘누구에게 어떤 조건을 전제로 사회적 급여(social benefit)를 줄 것인가’는 사회복지 역사상 아마도 가장 오래된 질문이자 기준이었다. 노동시장으로부터 소득을 버는 사람들에게는 ‘사회적 위험’을 예방하는 것이 목적이 되어 보편적 원리에 기반을 둔 소득보장 제도가 운영된다. 반면 노동시장 외부에 있는 대상자에게는 선별적 원리에 입각해서 급여를 위한 노동의무를 부과한다. 실업자의 경우 취업을 위한 노력을 증명해야만 하고, 빈곤층의 경우 노동능력의 유무로 구분을 두어 노동능력이 있는 경우 반드시 일을 해야만 사회적 급여를 받을 조건을 충족하게 된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급여의 수준은 일반 노동시장에서 형성된 최저임금보다 항상 낮아야 한다는 열등처우의 원칙이 19세기 이후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이렇듯 이제까지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스스로 노동력을 팔아서 생계를 해결하든가, 노동력을 팔 수 없는 경우에는 노동능력을 매개로 하여 사회적 급여를 제공받아 왔다. 그러므로 이미 자본계급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사람에게 내재되어 있는 노동의 중심성을 흩트려 놓을 수 있는 이데올로기가 요청된다.
신자유주의의 공격과 배제되기 시작한 노동
소득보장 중심의 고전적 복지국가들은 포스트 포디즘시기, 신자유주의로부터 심각한 도전을 받기 시작하였다. 탈산업사회로의 전환, 자본의 지구화, 냉전체제 해체와 같은 변화는 산업입지경쟁을 극대화시켜 민족국가단위의 사회정책과 사회적 합의구조를 매우 위축시켰다.
포디즘 시기에 준수되었던 사회적 합의나 노동조합과의 합의는 자본에게 불필요한 요건이 되었고, 자본은 전 지구적 차원으로 자본과 생산입지를 자유롭게 이동하게 되었다. 민족국가들은 자본을 더 많이 자국으로 유치하기 위해 사회복지 및 노동비용을 축소시키는 친자본적인 정책을 펼쳐왔다. 그 결과 다양한 복지국가체제(welfare state regimes)에서 공통적인 현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복지(welfare)에서 노동연계복지(workfare)로 수렴, 국가의 개입보다는 시장의 확대, 국가의 역할이 시민에 대한 소득보장보다는 시민 개인의 책임 및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도록 촉진하는 역할로 전환되었다.
문제는 근본적으로 실업문제가 현재의 산업구조에서 해결되기 어렵다는 점과 저임금의 나쁜 일자리(bad job)의 확대, 비정규직이 전체 고용형태의 절반이상을 차지하게 되었다는 점 등이다. 즉 탈산업화시대와 신자유주의 패러다임으로 노동사회의 위기는 더욱 가시화되었고, 우리가 직면한 실업문제는 더 이상 일시적인 현상이거나 경제공황의 결과라기보다는 자본의 총이윤율 증대를 위한 필수적이고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는 점이다.
실업이 이렇게 구조적이며 필연적이라는 측면에서 생산 영역과 노동시장에서 이탈된 사람들에 대한 '일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먹을 권리'는 1980년대 이후 유럽 좌파의 중요한 과제로 부각되었다. 그 이전까지 주류 경제학은 물론 맑스주의자들과 노동운동에서도 사람들이 개인의 삶을 영위하기 위한 물질적 조건을 오로지 생산영역으로만 국한시켜왔다. 이로 인해 '소득을 노동으로부터 분리'시키는 명제는 이론적으로는 맑스주의 틀로부터의 이탈을, 현실적으로는 노동계급 내부에서도 적극적으로 고려되지 못해왔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이후 복지권이 시민권의 일부인 사회권(social rights)으로써 유지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는 시대에 도래하였다. 임금을 통한 소득보장이 불안정한 상당수의 시민들에 대한 복지권이 어떻게 유지되고 확대될 수 있는가? 이러한 문제제기로부터 출발된 다양한 대안적인 복지 담론 중에서 ‘기본소득’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기본소득의 참신성과 우려성
기본소득이란 ‘심사와 노동요구 없이 모두에게 개별적이면서 무조건적으로 지급되는 소득’을 말한다. 즉 급여자격을 위한 조건이 되었던 자산조사(means tested), 노동능력여부, 기여여부와 관련 없이 일정 수준 이상의 소득을 국가가 지급하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시민에게 똑같은 수준의 급여를 동등하게 지급하고, 이때 소득 수준이나 성별은 고려하지 않지만 연령에 따른 급여차이는 존재한다. 또한 가족 단위 지급이 아니라 개인별로 매달 일정 금액이 지급하게 된다.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가 촉발되게 된 배경은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신자유주적 사회정책이 심화된 빈곤과 양극화의 문제를 양산할 뿐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지 못한데서 기인한다. 또한 실업 및 비정규직 증가 등으로 변화된 노동시장, 기술적 진보와 생산성 향상으로 증대된 부에 대한 공정한 사회적 분배, 새로운 일자리 창출은 어렵지만 생산성은 충분히 확보되었다는 입장에서 전 시민에 대한 기본소득이 관점이 제출되었다.
기본소득은 기존 소득보장제도의 병폐였던 노동과의 연계성을 모두 끊어냈다는 점에서 매우 참신하다. 요즘 광고에서 나오듯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당연히 받을 권리’가 부여되는 것이다. 그런데 기본소득의 참신성은 마냥 매력적이지만은 않다. 노동으로부터 분리된 소득을 보장한다는 것은 생산영역과 생산관계로부터 배제된 사람들에게 소득을 보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전체 사회의 부를 재분배하는 수준을 넘어서 자본의 총이윤을 노동으로부터 배제된 사람에게까지 제공하게 되었을 때 시혜와 자선이 아닌 권리적 의미의 사회정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본소득은 총 소득의 증가만을 강조하고 있다. 이에 기본소득이 가지는 대표적인 두 가지 문제를 살펴본다.
첫째, 이제까지 부의 재분배는 사회복지제도를 중심으로 사회적 필요(social need)를 중심으로 설계되어 제공되어왔다. 신자유주의 이후 노동연계복지가 강화되면서 자산조사 및 조건부 수급이 강화되었고, 이로 인해 사회권의 축소와 저소득층 및 취업취약계층에 대한 급여제한에 기인한 소득감소가 이어졌다. 이에 공공부조(빈곤층 및 실업자)에 대한 조건 없는 사회적 급여가 제안되기도 하였지만, 기본소득에서는 특정 계층이 아닌 전 국민에게 동일한 수준의 월급여를 제안함으로써 ‘제한적인 수량적 평등(numerical equality)’이 아니라 ‘전면적인 수량적 평등’을 주장한다. 즉 모두를 동일한 위험과 동일한 수준으로 간주해서 동일한 급여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이는 신자유주의로 심화된 양극화와 같은 사회문제와 소득의 불균형과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이는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2008년 12월 기준으로 국민기초생활보장수급자는 약153만3명(85만54천가구)으로 전인구대비 수급률은 단 3.1%이다. 이들 중 약 78%가 비경제활동인구이고, 1인 가구가 약 62%로 가장 높다
(이들 가구의 소득 규모에 대한 조사 결과 <0원 초과-20만원 이하>인 가구가 50.2%로 가장 많았고, 그 다음으로 <20만원 초과-40만원 이하>의 가구가 18.3%, <40만원 초과-60만원이 하>의 가구가 9.5%였고 소득이 전혀 없는 가구는 12.6%에 달한다).
이들에게 기본소득이 도입된다면 현재 보다 소득이 향상될 수 있지만 수급권자 78%가 비경제활동이구이고, 62%가 1인 가구라는 점을 고려할 때 상향된 급여수준으로도 생계보장이 어렵다. 그러나 중간계급 이상에게 제공될 기본소득은 해당 가구의 생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소비 선택에 영향을 준다. 그러므로 빈곤층에 대한 소득 보장은 중산층 이상에게 균일한 액수의 사회적 급여를 제공하는 것보다 우선되어야 한다.
더욱이 고용보험 사각지대 규모는 국회예산처 추계 약 1,336만 명으로 경제활동인구의 약 57%에 해당하는 수준이다. 이들에 대해 실업으로 단절된 소득을 보완해줄 기재가 현재로써는 아무것도 없다. 이처럼 절대적 빈곤층으로부터 불안정 노동층까지, 절대적 소득의 상실로부터 소득의 불안정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상당하다. 사회적 필요의 결핍과 생애위험이 높은 계층과 그렇지 않은 계층에게 왜 동일하게 사회적 급여가 제공되어야 하는가? 실업자와 빈민층이 중간계급 이상과 동일한 기본소득을 획득하는 것이 과연 복지제도의 진보라고 할 수 있는가?에 기본소득은 적절한 답변을 가져야만 할 것이다.
두 번째 문제는 시장 임금 이외에 제공되는 사회임금의 수준이 GDP의 31%, 국가재정의 규모가 약 56%일 경우 발생하는 인플레이션의 문제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신설될 조세로 인해 상승할 지대, 임대료, 금융수수료 등이 다시 실물경제와 서민 경제에 미칠 요소가 모두 차단되어져 있다.
유산자와 자본은 현재의 경제 시스템이 유지되는 한 사회적 비용에 대해 절대 그들의 총이윤에서 가져오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세제가 개혁되더라도 결국 그들이 부담하는 비용이 노동자와 서민들에게 전가될 것이다. 이에 대한 안전장치가 제시되지 않았고, 임금소득을 보조하는 성격의 기본소득이 역으로 임금시장과 노동시장에 미칠 영향에 대해 고려되어 있지 않다.
1795년부터 영국에서 시행되었던 스핀햄랜드제도(Speenhamland system)에서 일용노동자의 최소임금을 설정하여 교구가 노동자의 부족한 소득을 보조해주었다. 식량가격과 부양가족의 숫자를 기계적으로 대입하여 노동자의 소득 보조 금액을 정하였다. 즉 최저임금을 정하지 않고 저소득층의 임금을 보조해주는 방식으로 가족이 많을수록 유리하였다.
그러나 제도의 목적과는 다르게 고용주들에 의해 악용되어 의도적으로 낮은 임금이 지급되었고 그 결과 저임금이 형성되고 임금이 적다고 불평하는 노동자들은 해고당하기도 하였다. 즉 사회임금은 한편으로는 가계소득을 증가시킬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시장임금을 떨어뜨릴 수도 있다는 점이 기본소득에서는 고려되지 않고 있다.
자본주의 안티테제로써 기본소득의 이데올로기
노동으로부터 분리된 소득이라는 명제는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항하기 위한 새로운 담론으로서의 가치를 담지하고 있다. 요는 소득을 노동으로 환원시키는 한계를 뛰어넘는 동시에 이런 흐름들이 모든 사회관계를 시장관계로 다시 환원시켜 버리려는 자유주의적 대세에 맞설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단순히 일자리 대신에 생존권의 명목으로 현금으로 받는 사회적 급여만으로는 자본주의 메커니즘에 반하는 사회복지정책이라고 보기 어렵다.
21세기 노동권은 생산과정에 참여하고 있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부여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신자유주의적 체제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상당수의 산업예비군, 불안정 노동층 그리고 이로 인해 증가해 온 노동빈곤층의 생존권이 자본의 총이윤을 위해 언제라도 위협당하고 희생당하기 때문이다.
갖가지 스펙을 쌓아도 취업이 어려운 청년들로부터 구조조정과 유연화로 인한 해고에 이르기까지 이제 노동력자체가 자본과의 관계에서 쉬 교환되지도 않고 있다. 죽은 노동이 산 노동을 지배하는 신자유주의 전략은 노동력의 절대량을 축소시키거나 사회적 덤핑을 통해 노동을 지배하게 되었다.
자본은 더 많은 선택을 노동의 착취를 통해 달성하고 있지만 노동계급의 대부분은 스스로 노동을 선택하거나 포기할 수 없다. 노동계급 대다수의 생존은 여전히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했을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일부의 상위계층을 제외하고는 노동자계급은 자신의 노동에 대한 선택권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에 대해 탈노동 패러다임을 외치며 최소 소득 보장과 노동의 선택을 이야기 하는 것은 아직은 시기상조이다. 신노동에 대한 개념과 탈노동 패러다임은 발전해야 하지만 신자유주의 이래 생산관계에 더욱 종속적인 노동계급에 대한 조건과는 혼동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므로 더욱더 생산관계에 주목해야만 한다. 또한 생산과정 내부의 노동자와 이로부터 배제된 노동자들 모두를 노동계급의 관점으로 포괄해야 한다. 이렇게 볼 때만이 담세자와 수혜자라는 계급 내 대립구도가 지양될 수 있다. 현재의 노동여부나 노동력 유무와 관계없이 사회적 급여가 제공되기 위한 전제조건은 노동으로부터 배제된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 낙인을 드러내고 사회의 구성원으로써 동일한 권리부여의 이데올로기의 형성에서 출발할 수 있다. 생산과정에 직접 참여하지 못하였지만 현재의 체제 유지를 위해 철저하게 유린되어 왔던 노동계층에 대한 계급적 관점의 복원이야 말로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이에 반하는 사회복지로써의 위상을 가질 것이며 파워풀한 담론으로써 인구에 회자될 수 있을 것이다.
Ⅲ-4
기본소득, 체제 내부 전략이며 이행전략--복지국가 단일정당론의 무지와 몰역사성 비판
기본소득: 신자유주의적 노동과정에 조응하는 노동계급의 체제 내부 전략이자 이행전략
나는 앞서 보편적 복지론이 사실은 선별적 복지론과 함께 자본축적을 안정화하는 자본축적체제의 제도적 일부임을 비판했다. 또한 그것은 이행전략이 배제된 자본에 포섭된 그 체제의 일부이며, 노동계급의 당파성이 거세된 자본의 정치임을 지적했다.
그리고 여기서 최근 당내 일각에서 보편적 복지론에 입각해 주장되고 있는 복지국가 단일정당론이 하다못해 왜 보수정치의 기획으로서도 지금의 신자유주의 축적체제에 대한 정치기획일 수 없는지를 조금 더 검토할 필요가 있다.
복지국가 단일정당론을 주장하는 이들은 자신들의 보편적 복지론은 일개 복지정책이 아닌 ‘복지국가’를 지향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 복지는 일개 정책이 아니라 전체의 시스템으로써의 축적체제를 특징짓는 성격이다. 그것은 따라서 국가를 구성하는 수많은 심급들의 총체이다.
그리고 그 총체의 중심은 임노동 관계이며 이 관계로부터 발생하는 사각지역과 시장실패의 요인들을 선별적 복지와 보편적 복지를 통해 보완한다. 그런데 신자유주의 축적체제에서는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이러한 국가 시스템의 중심이 되어야하는 임노동 관계가 노동과정의 변화 속에서 새롭게 바뀌었다.
그들은 신자유주의 이전, 2차 세계대전에서 70년대 이전까지의 노동과정에 입각한 ‘대량생산-대량소비’의 사회환경에 가장 적합한 체제 전략을 “새로운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복지국가 단일정당론의 무지와 몰역사성
이렇듯 ‘낡은 것’을 ‘새 것’으로 인식하는 그들의 착시는 지금의 자본과 축적체제를 분석할 수 없는 무지와 몰역사성에 기인한다. 그들은 북유럽 사민주의 국가들은 현실에 존재하는 '실체'이며 따라서 그것은 실현 가능한 모델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에게 북유럽 국가들은 '모델'일 뿐 과정과 역사가 아니다. 그 국가들이 지금의 시스템을 갖추기까지 맞닥뜨리고 투쟁했던 역사적 조건과 과정, 노동과정의 성격을 간과한다.
따라서 지금 신자유주의의 폭압 속에 신음하고 있는 한국 사회의 역사적 조건 및 노동과정과 북유럽의 그것들 간의 차이점은 간단히 무시된다. 경로와 역사가 없는 사회는 없다. 이러한 역사적 조건과 환경, 노동과정의 특성이 무시된 '실체'는 건설을 위한 투쟁의 역사가 없는 천상의 이데아와 다르지 않다.
반면 반자본의 복지로서 기본소득제는 현재의 신자유주의 축적체제의 역사적 조건으로부터 요구된다. 우선 이것은 신자유주의적 노동과정에 조응하는 축적체제의 일부일 수 있다. 지금 발생하고 있는 '청년 실업'과 같은 실업의 문제는 과거의 축적체제에서 주기적으로 발생하던 상대적 과잉인구로써의 실업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
과거 이러한 실업은 경제주기를 통해 발생하며, 불황국면에서 자본은 다시 실업이라는 상대적 과잉인구의 흡수로부터 축적을 재개하게 됨으로써 실업은 경기순환을 조절하던 메커니즘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실업은 자본이 임노동에 대한 의존성을 탈피하고, 노동과정을 임노동 관계를 넘어서 전 사회에서 조직하는, 착취를 임노동의 잉여노동의 착취를 넘어 사회적 노동의 착취로부터 획득하는 신자유주의의 항구적 특징이다.
따라서 이 체제는 안정적인 자본축적 속에서 벌어지는 사회불안을 본질적 특징으로하며 모든 인민을 생존의 위협 속에 몰아넣는다. 과거 이러한 위협은 강제된 임노동을 부과하는 수단이었지만, 임노동의 의존을 탈피한 자본에 의한 지금의 생존의 위협은 단순한 위협이 아니라 실질적인 생존에 대한 말살이다.
안정적 자본축적 속의 사회적 불안
기본소득제는 사회적 불안 속에서도 자본의 안정적 착취를 유지할 수 있게 하는 원천인 사회적 노동에 대한 착취를 방어하고, 사회적 노동의 정당한 대가로서 기본소득을 모든 인민에게 차별없이 지급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본소득제는 한편으로 신자유주의 축적체제의 착취 형태에 조응하여 체제 내적으로 노동의 권리를 옹호하는 체제 내부 전략이다.
그렇다면 이런한 기본소득제는 과거 복지국가를 통해 자본을 위한 축적체제로써 작동했던 사민주의의 전략과는 무엇이 다른가? 기본소득제는 자본축적체제의 일부이자 체제이행 전략이 거세된 사민주의적 복지국가 전략과는 달리 노동계급이 자본주의를 지양하는 새로운 체제의 건설을 예비하는 이행 전략일 수 있는가? 난 단호히 그러하며 그렇게 조직될 수 있고, 그렇게 조직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 그러한가?
첫째, 과거의 축적체제에서 사민주의의 복지국가는 그 자체로써 두 계급 모두에게 계급 간의 타협을 전제하는 것이었지만, 신자유주의에서 기본소득제는 적대적 두 계급이 동일한 하나의 제도를 둘러싸고 적대적 전략으로 대립하는 계급적대의 전선이다.
기본소득제가 신자유주의 하에서 노동계급의 체제이행 전략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기본소득제는 오히려 '완전경쟁시장'을 실현하려는 우익 경제학자들에 의해 오래 전 고안되었고 일부 우익들에게 여전히 주목받고 있다.
이들은 주로 두 부류로 하나는 자본주의적 노동이 ‘생존의 위협’으로부터 강요된 강제노동임을 부인하며, 이것을 개인의 이윤극대화를 위한 인간의 본성으로 이해함으로써 기본소득이 이러한 인간본성의 실현에 보다 적합하다고 이해한다.
다른 하나는 임금보조금 형태로 지급되는 기본소득은 여전히 생존을 위해 노동해야 하는 강제노동의 조건을 유지하지만 자본의 입장에서 이러한 임금보조금 성격의 기본소득은 저임금과 ‘완전한 노동유연성’을 확보하는 조건이 된다는 점에서 기본소득을 주목한다.
우파가 기본소득제에 주목하는 이유
완전경쟁시장을 이상적 자본주의로 믿는 이들은 임금의 하방 경직성이 없다면 완전고용과 완전경쟁시장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다고 믿으며, 기본소득을 이러한 부르주아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제도적 조건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좌파는 기본소득제가 생존수준 이하로 책정됨으로써 콤보임금(기본소득+임노동에 의한 임금)의 형태로 저임금과 고용불안을 보다 보편화하는 도구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반드시 적정한 사회적 삶이 유지될 수 있는 수준에서 시행될 수 있도록 투쟁해야 한다. 이것이 기본소득제가 좌파적 전망과 노동계급의 체제이행 전략으로써 위치지워질 수 있는 최소 조건이다.
즉, 기본소득제에서 두 계급은 공통의 요구로써 마주치지만 여기서 계급간 타협의 여지는 없으며 기본소득제는 두 적대적 계급의 적대적 전망과 전략이 부딪히는 치열한 전장이다.
둘째, 신자유주의는 임금노동뿐 아니라 사회적 노동까지도 착취하는 극렬한 착취체제이지만 동시에 노동의 사회성이 상품관계로 분절되어있던 자본주의적 노동관계의 한계를 넘어선 새로운 노동관계와 사회관계를 잉태하고 있는 체제임도 분명하다.
삶이 노동과 구분되지 않고 소비가 생산활동과 구분되지 않는 새로운 사회적 환경은 자본에 의해 오히려 삶 그 자체가 착취되고, 소비 그 자체가 ‘착취받는 생산노동’으로 조직된다. 기본소득제는 이러한 사회적 노동과 인간의 행위에 대한 정당한 권리로 지급됨으로써 강제된 임금노동이 아닌 인간적인 것으로서의 노동이 삶과 일치되도록 조직해 나갈 수 있는 물질적 토대를 제공한다.
자본주의는 인간본성의 자연스런 결과가 아니다
이것은 제도의 효과가 아니라 제도 위에서 인간이 조직해 가야 하는 새로운 인간형을 향한 스스로의 운동이다. 자본주의 하에서 인간은 강제된 노동 속에서 오로지 자기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행위와 삶을 조직하도록 훈육된다.
자본주의는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이기적 인간의 본성에 의해 자연스럽게 형성된 사회가 아니라, 이러한 체제로부터 인간이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도록 강제적으로 훈육함으로써 유지되는 사회이다. 기본소득으로부터 획득된 삶의 시간을 개인의 물질적 이익을 위한 임금노동에 사용할 것인가, 인간으로써의 자기개발과 서로를 위한 사회적 행위를 만들어가는데 사용할 것인가는 제도 그 자체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제도를 둘러싼 사회적 운동의 결과로써 형성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새로운 체제를 향한, 새로운 인간의 실현을 위한 체제이행으로써의 운동이다.
셋째, 기본소득제는 사회적 노동의 핵심이 되는 지식과 정보에 대한 배타적 사적 소유권을 폐지하고 그것을 사회화함으로써 상품과 상품의 관계로 분절되어 있는 사회적 생산의 총체성을 형성해가는 '사회화 전략'과 반드시 병행되어야 한다.
지식정보 산업에서의 지적소유권의 폐지는 매우 과격한 주장처럼 보이지만 실제 지금과 같은 형태의 배타적 지적 소유권이 형성된 것은 매우 최근의 일이다. 불과 10년 전까지만해도 음악파일의 다운로드는 화폐의 지불없이 자유롭게 이루어졌고, 소프트웨어 개발환경을 저해하는 카피라이트도 도입 초기에 어떠한 좌파적 정치마인드도 지니고 있지 않은 개발자들 스스로에 의해 격렬히 저항받았다.
왜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들조차 (심지어 독점소스의 대명사 MS조차도) 최근들어 카피라이트가 아닌 오픈소스에 의한 개발환경을 도입하고 있거나 하려하는가. 그것은 지식과 정보는 배타적 소유권에 의해 사용과 변형에 제한을 두지않고 보다 많은 이들이 제한없이 접근하고 이용하며 변형할 때만이 그 자신의 네트워크 효과에 의한 최상의 효율을 갖추기 때문이다. 지식과 정보는 그 어떤 것들보다도 그 생산활동과 소비활동이 구분되지 않는다. 즉, 그것은 상품으로 생산된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사회적 관계이며 삶의 내용이다.
지적소유권을 폐지해야
지적 재산권의 폐지(혹은 지적 공산권의 확립)를 통해 모든 지식과 정보는 공공에 의해 생산되고 향유되는 공산재(혹은 꼬뮨재)로써 인민 모두를 위한 사회적 인프라로 자리잡게 된다. 흔히 우리가 알고있는 공공재는 생산이 아닌 그 소비에서 그 공공성을 발견하는 반면, 공산재는 그 생산과 소비 모두에서, 오히려 그것의 구분없이, 소비되어 사라지는 재화로서가 아니라 공유됨로써 복제되고 강화되는 사회성 속에서 그 공산성을 발견한다.
이러한 사회적 인프라로서의 지식과 정보는 국가에 의해 개인이 배타적으로 그 접근을 제한하지 못하도록 관리하며, 모든 이들이 자유롭게 이용하고 변경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보호한다. 또한 이것이 기업에 의한 이윤활동에 이용될 수 있도록 하되, 이를 통해 창출된 이윤의 대부분은 사회의 공산재를 이용하여 얻어진 소득이므로 과세를 통해 국가에 귀속될 수 있도록 법제화하여야 한다.
아주 단순한 예를 들면, 이러한 방식을 통해 현재 기업이 카피라이트로 인해 소프트웨어 구입을 위해 사용하는 모든 자본이 지적 공산권의 환경 하에서 모두 세금으로 환수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지적 공산권의 확립을 통해 확보할 수 있는 세원의 아주 작은 일부의 예제에 불과하다.
기본소득은 지금의 조세수입으로부터 그 재원을 모두 충당하려 해선 안되며, 사회적 노동이 사적소유권에 의해 자본에 의해 무상으로 수취되는 부분들이 사회로 환수될 수 있도록 제도화함으로써 기본소득의 재원을 확보하여야 한다. 점점 더 많은 기업, 결국은 모든 기업들이 이러한 사회적 인프라에 기반하게 해야하며 이러한 방식을 통해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점차적으로 확대해 나가야 한다.
넷째, 공장별 혹은 부문별로 분할되어 있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단절되어 있는 계급투쟁을 기본소득의 인상을 위한 단일한 경제적, 정치적 투쟁으로 조직함으로써 새로운 진보정당은 총자본과 총노동의 확연한 계급전선을 구획해야 한다.
비정규직 노동운동의 실질적 해법
이것은 지금까지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운동의 실질적인 해법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현재 비정규직 노동운동은 고용안정성 확보와 동일노동-동일임금의 두 원칙이 공존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비정규직 노동운동의 방향은 기본소득제 도입을 통해 고용안정성을 포기하고 동일노동-동일임금을 중심으로 자리잡아야 한다.
고용안정성을 포기하는 것은 동일노동-동일임금을 위해 자본에게 양보하는 협상의 내용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자본에 대한 양보가 아니다. 기본소득제를 통해 확보한 삶의 시간에서 하루 8시간이 임금노동으로 소비되도록 조직되는 것이 바람직한가에 대한 질문을 던져야한다. 기본소득제 하에서 노동은 더 이상 더 많은 화폐의 취득을 위해 소비되는 임노동에 종속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노동계급의 자기가치화와 사회적 삶을 위해 이용되고 강화되어야한다.
기본소득제 하에서 공장별로 부문별로 분할되어 있던 노동계급은 보다 많은 기본소득을 쟁취하기위한 단일한 정치투쟁으로 집중되고 자본에 의해 분할된 노동계급의 단일한 전선을 확보하여야 한다.
***금융수탈체제론, 어떻게 볼 것인가
이번 경제 위기는 지난 30여 년간 금융이 엄청나게 성장해 자본주의 체제에서 전례 없이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던 상황에서 발생했다. 게다가 2008~09년에 여러 나라의 금융 시스템을 거의 붕괴 직전까지 몰고 간 이번 위기는 미국에서 서브프라임 모기지 거품이 꺼지면서 시작됐다.
이 때문에 이미 위기 전부터 여러 마르크스주의자를 포함한 진보진영에서 신자유주의와 금융부문의 확대에 대한 분석이 있었고, 이 중 꽤 많은 사람들은 ‘금융화론’을 주장했다.
이런 금융화론들은 논자들마다 상당히 다르다. 그러나 모두 ‘금융’의 ‘지배’가 자본주의 체제의 동역학을 변화시켰다는 주장을 공유한다.
한국에서 이런 류의 주장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장하준 교수가 주장한 ‘주주 자본주의론’일 것이다. 장하준 교수는 신자유주의의 본질을 주주 자본의 권력이 강화된 것으로 본다.
주주들이 기업들로부터 더 많은 배당을 받아감으로써 기업 투자는 정체되고, 임금 삭감과 해고와 같은 노동유연화가 확대됐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신자유주의 시대는 그전보다 경제성장률은 낮아지고 주식ㆍ부동산 시장 거품이 연달아 발생했다가 터지는 경제 위기의 시대가 됐다는 것이다.
주주 자본주의론의 가장 큰 약점은 기업의 배당금 지출 확대가 반드시 투자 수준을 낮추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주주들이 설사 기업들로부터 많은 배당을 받아냈다고 하더라도 높은 수익을 거둘 만한 부문이 있다면, 투자는 줄어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1990년대 닷컴 호황 때 금융자본이 너도나도 IT 기업들로 향한 것은 IT 기업들이 높은 수익을 거두리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물론 IT 부문에 대한 과도한 투자가 결국 거품 붕괴로 끝났지만 말이다.
결국 신자유주의 시대의 특징인 투자 감소나 저성장은 기업들의 고배당 같은 금융화 때문이 아니라 실물경제 자체의 수익성 하락이 근본 원인인 것이다.
수탈경제
기본소득네트워크나 좌파노동자회는 또 다른 형태의 금융화론을 주장한다. 이들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특징을 “신자유주의적 수탈경제” 또는 “금융수탈체제”라고 규정한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은 신자유주의의 본질을 ‘수탈’로 규정한다. 수탈은 “착취와는 달리 직접적인 노동 밖의 시공간에서 발생하는 모든 빼앗김을 총괄하는 개념”이다(곽노완 기본소득네트워크 학술위원장). 그러면서 여러 수탈의 사례를 언급한다.
주택담보대출, 등록금 대출 등 가계대출 확대로 이자를 수취하는 것, 생물자원에 대한 지적재산권, 공기업ㆍ공유지의 사유화, 거대 자본을 지원하는 공적자금, 환율 인상으로 수출기업에게 이익을 몰아주는 것 등이다. 또, 달러화를 마구 발행해 무역수지 적자를 확대하면서도 달러화 하락 내지 인플레이션 압력을 거의 겪지 않는 ‘달러지배체제’도 미국이 국제적 수탈을 하고 있는 사례라고 본다.
열거한 사례들에서 보듯, 이들은 신자유주의를 ‘약탈을 통한 축적’이라고 규정한 데이비드 하비나, 금융기관들이 가계대출을 늘려 소비자를 직접 착취하는 “금융적 수탈”이 신자유주의의 특징이라는 코스타스 라파비챠스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노동 착취를 통한 축적보다 수탈을 통한 축적이 신자유주의 시대에는 더욱 중요해졌다는 것이다. “잉여노동시간의 착취를 통해 이윤을 확보했던 본연의 축적 방식과 달리 지난 35년간의 신자유주의 시대에서 자본축적은 다른 자본가의 이윤을 금융적 방식에 의해 수탈하는 방식으로 바뀌어 갔다.”(금민 기본소득네트워크 운영위원장)
결국 오늘날 자본주의에서는 생산현장에서의 착취보다 수탈이 더욱 중요하기 때문에, ‘임금 삭감 없는 노동시간 단축’이나 ‘비정규직의 정규직화’가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조건 없이 지급하는 ‘보편적 기본소득’이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적절한 요구가 된다.
또, 실천에서는 생산 현장에서의 노동자 투쟁보다 ‘점거하라’ 운동 같은 불안정 노동자들의 거리 운동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이번 민주노총 위원장 선거에 나선 좌파노동자회의 허영구 후보가 정규직 노동자에 대해 종종 불신을 드러내거나, 비정규ㆍ불안정 노동자를 조직하는 데 필요한 돈을 대는 정도의 구실로 한정하는 것도 분명 이런 관점과 관련 있을 것이다.(이에 관한 더 자세한 분석은 지난 호에 실린 “민주노총 혁신 과제의 문제점” 기사를 참고하시오.)
금민도 비정규ㆍ불안정 노동자인 프레카리아트가 “보편적 해방의 주체”가 되려면 기본소득과 노동시간 단축을 연동된 프로그램으로 제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때 정규직 노동자는 이런 요구를 받아들이는 수동적 대상으로만 설명된다.
이들과 마찬가지로, ‘약탈을 통한 축적’을 강조하는 데이비드 하비도 최근 발간된 책 《자본의 17가지 모순》에서“노동시장과 작업장을 계급투쟁의 쌍두마차로 특권화하는 경향”에 반대했다
자본주의의 성격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수탈 메커니즘이 존재하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이것이 과연 자본주의의 성격을 바꿨느냐 하는 점이다.
우선, 일부 자본가들이 다른 자본가들을 ‘약탈’하는 짓이나,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을 생산 현장에서 착취할 뿐 아니라 이런저런 추가적인 방식으로 노동자들을 갈취하는 짓은 자본주의에서 늘 있었던 일이다.(이 지점에서 기본소득네트워크 내에 미묘한 차이가 있는 듯하다. 금민은 수탈경제가 신자유주의의 “시기규정적 성격”을 갖는다는 데 강조점을 두는 반면, 곽노완은 수탈이 자본주의 일반적 특징인 듯 서술한다.)
이미 마르크스는 19세기에 노동자들이 터무니없이 높은 이자율로 주택을 빌리는 상황을 두고 《자본론》 3권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노동자 계급이 이 형태에서도 크게 기만을 당한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지만, 이러한 짓은 노동자 계급에게 생활수단을 공급하는 소매상들에 의해서도 행해진다. 이것은 [생산 현장에서 벌어지는] 제1차적인 착취와 나란히 진행되는 제2차적인 착취이다. 여기에서는 판매와 대부 사이의 차이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형식적 차이인데, 실제 맥락을 무시하는 사람에게나 본질적 차이로 보인다.”
금융자본은 가계대출을 늘려 노동자의 미래 소득 중에서 많은 부분을 이자로 가져갈 수 있다. 노동자가 사용자에게서 임금 인상을 따내지 않는 이상 이것은 사실상 임금을 삭감해 착취율을 높인 것과 같고, 이렇게 해서 늘어난 잉여가치를 금융자본이 가져간 셈이 된다.
반대로, 노동자들이 임금 인상을 따내는 경우 고용주가 자신의 잉여가치 하락을 감수하고 노동자의 빚에 부과된 이자를 대신 지불해 주는 셈이다. 빵 가격을 인위적으로 올렸을 때 임금도 따라 오른다면 그만큼의 잉여가치가 제빵업 자본가에게 이동하는 것과 똑같은 이치다.
이처럼 노동자에 대한 수탈을 2차적 착취로 보면, 수탈을 강화하기 위해서라도 기업의 잉여가치 창출이 중요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수탈하기 위해서는 먼저 생산돼야 한다는 당연한 사실 때문에라도 그렇다.
결국 신자유주의 시대에 수탈이 강화됐다 하더라도 생산 현장에서 착취에 맞선 투쟁이 여전히 중요하다.
정규직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는 것은 그들의 임금과 노동조건을 지킨다는 점에서 중요할 뿐 아니라, 그 힘을 이용해 노동시간 단축,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최저임금 인상 같은 전 사회적 요구를 내걸고 싸우도록 고무한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것이다.
끝으로, 기본소득네트워크나 좌파노동자회는 신자유주의를 ‘수탈경제’라고 규정해야만 보편적 기본소득이 정당화된다고 보는 듯하다. 보편적 기본소득이 노동자 계급의 당면한 핵심 요구는 아니지만, 이들의 분석과실천적 약점은 오히려 자신들의 핵심 요구를 성취하기 어렵게 만든다
보편적 기본소득의 의미를 찾자면 노동과 자본 사이의 교섭력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아 노동자들을 자본의 독재에서 해방시키는 데 이바지한다는 것이다.
비정규불안정 노동자인 프레카리아트만 주체로 보며 정규직 노동자를 무시하거나 심지어 적대한다면 자본의 이윤에 큰 타격을 줄 힘을 포기하는 것으로, 오히려 기본소득 도입을 더 요원하게 만들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