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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이의 목마(Trojan Horse)‘라는 악성 컴퓨터 프로그램이 있다. 정상 프로그램인줄 알고 실행시켰다가는 중요한 파일을 삭제하거나 자료를 유출시키는 등의 치명적인 문제를 일으킨다고 한다. 그 명칭의 유래는 고대 그리스 시인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Ilias)]와 [오디세이아(Odysseia)]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트로이 전쟁 신화에서 찾을 수 있다. 호메로스는 [오디세이아]에서 그리스 장수 오디세우스가 고안한 목마의 일화를 잠시 언급할 뿐이지만, 사실상 이는 트로이 몰락의 계기가 된 결정적인 사건이라는 점에서 큰 비중을 지닌다. 목마 이야기는 이후 트로이 전설의 다른 에피소드들과 함께 문학과 미술, 그리고 영화와 같은 많은 예술작품들에서 단골 소재로 등장하게 되었다. 10년 동안 지속되었다는 트로이 전쟁의 서막에서부터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한 ‘트로이의 목마’ 이야기까지, 미술작품들을 통해 만나보자.
트로이 전쟁의 불씨가 된 ‘파리스의 심판’

이탈리아의 화가 귀도 레니(Guido Reni)가 그린 [헬레나의 납치]는 트로이 전쟁의 도화선이 된 사건을 주제로 한 것이다. 요정 오이노네를 아내로 둔 파리스가 유부녀인 헬레네를 납치하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이다 산에서 양을 치던 트로이 왕자 출신의 목동 파리스는 일명 ‘파리스의 심판’을 통해 헤라, 아테네를 제치고 아프로디테를 가장 아름다운 여신으로 뽑았는데, 아프로디테는 그 대가로 파리스에게 절세미인 헬레네를 아내로 맞게 해주겠다고 약속한바 있었다. 곧이어 파리스는 아프로디테의 아들 아이네이아스와 함께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의 궁전을 방문하게 된다. 메넬라오스의 아내였던 헬레네가 파리스를 따라 트로이로 가게 된 것은 신이 정해준 운명이었던 셈이다. 사랑과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맺어준 짝이었으니 말이다. 미술가들이 이들을 사랑에 빠진 아름다운 남녀로 묘사한 것은 아마도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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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도 레니 [헬레네의 납치] 1626~2629년 캔버스에 유채, 253cmx265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납치’라는 제목에 어울리지 않게 작품 중앙에 보이는 하얗고 아리따운 여인, 살짝 홍조까지 띤 헬레네는 투구에 붉은 망토를 두른 파리스의 손에 이끌려 순순히 나서고 있다. 게다가 화면 오른쪽 하단에는 화살통과 활을 든 사랑의 신 에로스(큐피드)가 손가락으로 이들을 가리키며 장난스럽게 화면 밖으로 시선을 던진다.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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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루이 다비드 [파리스와 헬레네의 사랑] 1788년 캔버스에 유채, 146cmx181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프랑스 신고전주의를 대표하는 화가 다비드가 그린 파리스와 헬레네의 다정한 모습이다. 화면 왼쪽 침대 머리맡에 세워진 기둥 윗부분에는 이들 사랑의 후원자 아프로디테 여신상이 새겨져 있다.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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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조부의 장례식에 참석하고 돌아온 메넬라오스는 아내가 자신이 환대해준 손님과 함께 사라져 버린 것을 알고 크게 분노했다. 권위와 명예 회복을 위해 트로이와의 전쟁을 결심한 그는 결혼 전 헬레네의 다른 구혼자들로부터 받은 맹세를 떠올리며 그리스 지역에 있는 그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친형이자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과 언변과 술수에 능한 오디세우스, 불사의 몸으로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줄 아킬레우스에게도 도움을 청했다. 예언가 칼카스에 따르면 아킬레우스가 있어야만 그리스군이 승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테티스는 아들 아킬레우스가 트로이 전쟁에서 죽을 운명이라는 것을 알고 리코메데스 왕의 딸들 틈에 여장한 아들을 숨겼다. 아킬레우스를 데리러 온 오디세우스는 아킬레우스를 찾고자 방물장수로 변장하고 여인들의 물건 틈바구니에 창과 방패 등을 함께 넣어 두었다. 오디세우스는 다른 공주들과 달리 유난히 무기에 관심을 보이는 한 여인이 바로 아킬레우스임을 직감하고 그를 설득해 전투에 참가시킨다. | |

프란츠 프란켄 2세 [리코메데스의 딸중에서 아킬레우스를 알아본 오디세우스] 17세기경 패널에 유채, 74cmx105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플랑드르의 화가 프란켄 2세는 진귀한 물건들을 모아놓은 그림에 특히 능했다. 이러한 그림들은 17세기 당시 이국적인 것에 대한 유럽인들의 관심과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역할을 했다. 이 작품에서 화가는 자신의 전문 분야와 신화 주제를 교묘하게 결합하여 표현해냈다.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지엔씨미디어 작품 보러가기
그리스 영웅 아킬레우스의 활약과 죽음

아킬레우스를 대동하고 아가멤논이 진두 지휘하는 그리스 군대와 트로이와의 전쟁은 무려 9년 이상 계속되었다. 거기다 아가멤논과의 불화로 아킬레우스가 전투에서 빠짐으로써 그리스군은 패전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그러나 친구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은 아킬레우스를 다시 전장으로 복귀시키고 영웅은 친구의 복수를 다짐한다. 프랑스 아카데미 출신의 화가 샤를 앙투안 쿠아펠(Charles Antoine Coypel)가 그린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그리스 편에 선 아테나와 헤라 여신의 비호를 받으며 트로이군을 멸하고 있는 분노에 찬 아킬레우스를 보여준다. 아킬레우스는 파트로클로스를 죽인 헥토르를 찾아 대결을 벌이게 되었고 결과는 아킬레우스의 승리로 끝났다. | |

샤를 앙투안 쿠아펠 [아킬레우스의 분노] 1737년 캔버스에 유채, 147cmx195cm, 에르미타주 박물관, 상트페테르부르크. 화면 중앙에 분노한 아킬레우스와 그의 오른편에 투구를 쓴 지혜와 전쟁의 여신 아테나가 보인다. 그 위편 오른쪽으로 마차를 타고 공작새와 함께 나타난 헤라도 보인다. 두 여신은 ‘파리스의 심판’에서 아프로디테에게 가장 아름다운 여신의 자리를 내준 뒤 이후 트로이 전쟁에서 그리스 군의 편을 들게 되었다. 물론 아프로디테는 파리스와 트로이 편이 되었다.
아킬레우스는 헥토르의 시신을 전차에 매달아 12일 동안이나 파트로클로스의 무덤을 돌면서 분노를 삭였다고 한다. 그러나 헥토르를 불쌍히 여긴 제우스가 테티스를 시켜 아킬레우스를 설득하고 헥토르의 시신은 아버지인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에게 넘겨진다. 왕은 자식의 시신을 돌려받기 위해 적장 아킬레우스의 막사로 몰래 들어가 무릎을 꿇고 눈물로 사정했는데,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는 프리아모스가 아들을 죽인 원수의 손에 키스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프리아모스의 부성애는 아킬레우스를 감동시켰고 그는 헥토르의 장례식이 치러지는 12일 동안 휴전을 약속한다.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의 불화에서 시작한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는 이렇게 헥토르의 장례식과 함께 이야기를 맺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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쥘 바스티앙 르파주 [아킬레우스의 발에 매달린 프리아모스] 19세기경 캔버스에 유채, 릴 미술관 19세기 프랑스의 화가 쥘 바스티앙 르파주(Jules Bastian Lepage)의 작품은 어두운 배경에 두 인물을 중심으로 서사시의 내용을 전달한다. 아킬레우스의 손 끝을 붙잡고 호소하는 늙고 비탄에 빠진 프리아모스와 냉정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는 젊고 건장한 아킬레우스가 대조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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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루이 다비드 [헥토르의 죽음을 슬퍼하는 안드로마케] 1783년 캔버스에 유채, 275cmx203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프리아모스와 헤카베의 장남으로 파리스의 형이었던 헥토르는 트로이 제일의 용사였다. 그러나 아테나 여신의 계략에 휘말려 아킬레우스의 창에 맞아 죽음을 맞는다. 다비드는 헥토르의 시신 앞에서 비통해하는 안드로마케와 그의 아들 아스티아낙스를 묘사했는데, 인물의 표정과 구도, 어두운 배경 등을 통해 고조된 감정과 절제된 슬픔을 효과적으로 드러냈다.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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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트로이 전쟁의 결말과 에피소드들은 [일리아드]의 후편 격에 속하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와 그 외 다른 이들의 서사시, 이를테면 소포클레스(Sophokles)의 비극과 로마 시대 베르길리우스(Publius Vergilius Maro)의 [아이네이스(Aeneis)]나 오비디우스(Publius Ovidius Naso)의 [변신이야기(Metamorphoses)] 같은 기록들을 통해 전해졌다. 그 가운데 플랑드르의 대가 루벤스(Peter Paul Rubens)의 작품에서 그리스 영웅 아킬레우스가 죽음을 맞게 된 순간을 살펴보자. 테티스는 아들 아킬레우스가 태어나자마자 스틱스 강에 몸을 적셔 불사의 몸으로 만들었으나 그녀가 잡고 있었던 발목은 유일하게 강물이 닿지 않은 치명적인 약점이 되었다. 화면 중앙에 파리스의 화살에 발목을 맞고 쓰러져가는 아킬레우스의 모습이 보인다. 아킬레우스는 트로이의 공주 폴릭세네에게 반해 아폴론 신전에서 프리아모스를 만나 폴릭세네를 아내로 주면 그리스 군을 철수시키겠다고 제안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죽음을 향해 가는 과정이었다. | |

루벤스 [아킬레우스의 죽음] 17세기경 캔버스에 유채, 108.5cmx109.5cm, 마냉 미술관 루벤스는 화면 좌우로 트로이 군을 지지한 아프로디테와 아폴론의 신상이 조각된 기둥을 그려 넣었다. 전설에 따르면 아프로디테는 아킬레우스가 폴릭세네를 사랑하도록 만들었고 아폴론은 파리스가 쏜 화살을 아킬레우스의 발목으로 유도했다고 한다. |
거대한 목마, 트로이 전쟁의 끝을 맺다

아킬레우스가 죽고 난 뒤에도 계속된 전쟁은 마침내 오디세우스가 세운 책략으로 인해 트로이 도성이 점령됨에 따라 끝이 나게 된다. ‘트로이의 목마’가 바로 그것이었다. 오디세우스는 건축가 에페이오스를 시켜 속이 빈 거대한 목마를 만들게 한 다음, 그리스 군 정예요원을 이끌고 목마 안에 들어가 숨었다. 그리고는 목마에 ‘그리스군이 철수하면서 아테네 여신에게 바치는 선물’이라고 새기고 트로이 해안에 세워두었다. 또한 시논이라는 첩자로 하여금 이 목마를 트로이 성안으로 들여놓으면 트로이가 그리스군을 소탕할 수 있다고 트로이인들을 부추기도록 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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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필사본이 수록된 삽화. 5세기경. 오디세우스와 짜고 트로이에 남은 시논은 트로이 인들이 목마를 성안으로 들이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
트로이의 목마 일화가 새겨진 기원전 670~650년경 항아리. 목마 안에 숨은 그리스 병사들이 보이고 이를 모른 채 트로이인들이 목마의 발에 바퀴를 달아 성안으로 들여가는 장면이다. |
많은 트로이인들이 시논의 말을 믿고 성곽 일부를 허물어서라도 이 거대한 목마를 들여놓으려 하자 트로이 제사장 라오콘은 이를 반대하며 그리스인들의 선물이라면 더더욱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때 바다에서 나타난 커다란 두 마리의 뱀이 라오콘과 두 아들에게 달려들어 공격하는 것이었다.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에 전하는 이 이야기를 실감나게 묘사한 조각상이 바로 그 유명한 [라오콘]이다. 헬레니즘 시대의 원작을 로마 시대에 대리석으로 모사한 이 작품에는 뱀에 물리고 몸을 조여오는 끔찍한 고통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었고 이후 많은 미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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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콘] 대리석 군상, 높이242cm, 파오 클레멘티노 박물관, 바티칸. 뱀의 공격을 받은 라오콘과 두 아들. 헬레니즘 시기 원작을 대리석으로 모사한 로마 시대 작품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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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 그레코 [라오콘] 1610년. 캔버스에 유채, 142cmx193cm,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워싱턴. 스페인의 화가 엘 그레코는 트로이 전설의 목마 이야기를 그 만의 독특한 화법으로 표현해냈다. 뒤의 배경은 도시 톨레도를 묘사하고 있으며 화면 중앙에 성곽으로 향하고 있는 목마가 보인다. 앞쪽 인물들의 길게 늘어진 신체 묘사가 매너리즘의 특징을 드러내며, 엘 그레코가 그린 고대의 주제 가운데 유일하게 전하는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
트로이인들은 제사장 라오콘이 신의 노여움을 사 벌을 받은 것이라고 여기고 서둘러 목마를 성 안으로 들여오기로 했다. 성문을 여는 것으로도 모자라 성곽 일부를 무너뜨리고 목마에 바퀴를 달아 끌어오는 장면은 화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이탈리아 화가 도메니코 티에폴로의(Giovanni Domenico Tiepolo)가 묘사한 장면을 살펴보자. 옆면에 글귀가 새겨진 목마에 줄을 매달아 잡아 끌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에는 사람들이 줄만 만져도 행운이 생길 것이라 기대했고 소년 소녀들은 목마 주위에서 노래를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 |

도메니코 티에폴로 [트로이로 들어가는 목마] 1773년 캔버스에 유채, 39cmx67cm, 내셔널 갤러리, 런던.
목마를 성안에 들인 트로이인들은 전쟁이 끝난 것을 자축하며 밤새워 먹고 마신 뒤 골아 떨어졌다. 그러자 목마 안에 숨어있던 오디세우스와 그리스 군사들이 나와 공격을 개시했고 무방비 상태에 있던 트로이인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10년간의 트로이 전쟁이 막을 내리게 된다. | |

아담 엘스하이머 [불타는 트로이] 1601년경 동판에 유채, 36cmx50cm, 알테 피나코텍, 뮌헨
가까스로 살아 남은 트로이인들은 아프로디테와 트로이 왕족 안키세스의 아들인 트로이 장수 아이네이아스를 따라 이탈리아를 떠돌다가 훗날 로마에 정착하여 로마 건국 신화의 기반이 되었다. 이렇듯 구두로 전해져 호메로스를 비롯한 여러 시인들에 의해 기록된 트로이 전쟁의 신화는 기원전 6세기경부터 화가들의 작품 안에서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재창조되었다. 신화가 지닌 무한한 생명력과 그 영향력은 오늘날에도 지속되고 있다. 컴퓨터 용어 사전에서도 찾아볼 수 있을 만큼 말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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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이민수 / 미술칼럼니스트
-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졸업,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다. 인간, 사회 그리고 미술의 상호 관계와 이 세 가지가 조우하는 특정 순간을 탐구하고자 하며, 현재 문화센터와 대학부설교육원에서 대중들을 위한 미술사를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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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1.01.27
이미지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NM), 지엔씨미디어, Wikipedia, Yorck Projec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