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18:1
교회 예배당을 짓고서 부터 예배시간이 들쭉날쭉 합니다.
한바탕 전쟁을 치루고 교회에 도착하니 9시가 조금 넘었습니다.
먹다가 남은 김밥을 한꺼번에 처리하고 간신히 9시 예배에 동참했는데
다행이 큰 예배당 덕에 시선을 덜 받는 느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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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각시랑 세 식구가 나란히 드리는 예배가 새롭습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이라고 성찬식 세팅이 되어있습니다.
가지런히 잘린 떡 쟁반이 우리 앞으로 지날 즈음 예주가 자기도 먹고
싶다고 귓속말을 합니다. 장로님들 눈치가 어림 반 푼도 없는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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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무엇과도 주님을 바꾸지 않으리- 다른 어떤 은혜 구하지 않으리-
오직 주님만이 내 삶의 도움이시니 주의 얼굴 보기 원합니다. 주님 사랑해요."
제가 딱히 고난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만 오늘 따라 빨간 포도주에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다가 화체설에 동의하는 프로테스탄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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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종교 개혁자들의 개혁신앙에 대부분 찬성합니다만
성찬 건은 불만이 있습니다. 별로 큰 준빌 하지 않아도 이렇게 좋은 것을
왜 매주 마다 하지 않는 것인지 언젠간 한 번 목사님께 꼭 물어볼 작정입니다.
눈물콧물 처리 하느라 바쁜데 철없는 예주가 또 보챕니다.
“아빠, 난 왜 빵 먹으면 안 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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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랑새를 찾아다닌 지 족히 삼만 리는 될지 싶은데 남태평양 이상은 못 넘어
갔습니다. 기회가 되면 유럽을 경유해서 팔레스타인 지역을 꼭 한번 가보고 싶습니다.
어떤 분 말로는 이스라엘에 가보면 성곽으로 둘러싸여있는 예루살렘이 있고 그
건너편에 감람산이 있다고 합디다. 예루살렘과 감람산 사이에 계곡이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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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을 일컬어 기드온 계곡이라고 말합니다. 울 주님은 기드온 시내 건너편 감람산을
제자들과 함께 오르셨습니다. 과거 충 현 교회 장로였던 YS가 전국구상 하기 전
사조직인 산악회를 이끌고 종종 등반을 한 것은 아마도 이 본문을 벤치마킹 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유다가 횃불을 들고 체포 조와 함께 똘마니마냥 들이닥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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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나사렛 사람 예수다”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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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가 얼굴이 파래지더니 훌러덩 넘어졌습니다.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나사렛 사람 예수다”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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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현장인 감람산에는 겟세마네 교회를 위시하여 러시아 황제가 자기 어머니를 위해
기념으로 세워놓은 교회, 베드로가 말고의 귀를 베어버린 겟세마네 동굴 교회, 울 주님이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고 우셨다는 눈물 교회 같은 기념예배당이 세워져 있다는데
왜 유다 교회는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역사 교육 가치는 은30냥에 주군을 팔아넘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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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욕의 현장이 후세에 더 의미가 있지 않습니까?
저는 수많은 리더들의 말로를 보았습니다. 느와르영화를 통해 보스들의 최후를 보았고
반세기를 살면서 일곱 번이나 통들의 말로를 목격하면서 권위는 어디서 나올까
생각해 본 적이 있는데 세뇌 되거나 강요된 권위는 제아무리 피의 맹세를 했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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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가 죽으면 개 눈 감추듯 사라져 버리지만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제자들을
지키기 위하여“ 죽는 울 주님의 자발적 권위는 포에버, 영원한 큰 바위얼굴이 아닙니까?
유다는 스승과 동료들과 하나 됨의 친교를 나누던 공간을 배반의 장소로
둔갑시켰습니다. 메시아를 가장 먼저 알아보고 경배해야 마땅했던 제자들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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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새들이 무장한 사람을 동원하여 메시아를 잡으러 왔습니다.
예수님의 정체를 드러낸 것은 횃불도 아니고 가룟 유다도 아니었습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예수께서 친히 죽음을 향해 나아가십니다.
그것은 포기와 체념이 아니었습니다. 바로의 군대를 제압하셨던 출애굽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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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이름으로 자신을 소개하심으로써(내로다) 군대를 동원하여 체포
하러 온 사람들과 당당히 대면하십니다. 그것이 자기 백성을 구원할 길이요,
자신과 아버지를 영화롭게 길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시는(10:11,17) 참 목자이셨던 것입니다. 자기 양들의 안전을 간구하셨을
뿐 아니라(17;11,12) 끝까지 제자들의 안전을 살펴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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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배신한 유다(1-3)
a.제자들과 동산에 가신 예수님:1
b.예수님을 체포하러 동산에 간 유다와 군대:2-3
예수님이 자신을 내어 줌(4-9)
a.자발적으로 자신을 드러내시는 예수님:4-6
b.자신을 드러내시면서 제자들을 보호하시는 예수님:7-9
예수님의 자발적 죽음 암시(10-11)
a.대제사장 종의 귀를 베는 베드로:10
b.베드로를 말리며 자신을 내어 주시는 예수님: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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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는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쳐서 예수님의 체포에 저항하였습니다.
자신의 결단으로 예수님의 기적을 촉발시키려고 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끝까지 예수께 자기가 기대한 메시아가 될 것을 요구한 셈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순종의 용기가 아니라 구원의 길과 영광의 길을 가로막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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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용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일을 하는 것보다 늘 앞서야 하는 것은 예수님을
아는 일이고 순종하는 일입니다. 친교의 장소를 배반의 장소로,
배반하는 제자-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 베드로의 만용-예수님의 용기,
고난주간을 어떻게 준비하며 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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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빵이 되어주신 주님 때문에 감사합니다.
들어 닥친 체포조의 위협 속에서도 끝까지 제자들을 지키셨던 주님처럼
저도 연약한 이웃을 섬기되 자기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살다가 베드로의 상황과 같이 직면할 때 혈기 대신
자기 부정의 길을 갈수 있게 도와주옵소서. 우리가 힘들 때 마다 함께
계시는 주님을 기억하므로 매몰되지 않게 하옵소서.
주께서 순종하기 위해 고난을 마다하지 않으신 것을 보여 주었사오니
우리들도 주님 주신 능력으로 당당히 헤쳐갈 수 있게 도와주옵소서.
2005.9.5.sun.헤세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