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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교육 웹진 <미디어로 여는 세상> 5호(2009년 8월호)
[톡톡인터뷰] 교훈씨를 만나다
교훈씨를 만나다 익산공공영상미디어센터 재미 미디어교육팀장
<편집자 주>
미디어로 여는 세상에서는 7월 방송부터 ‘톡톡인터뷰’라는 꼭지를 새로 마련하였습니다. ‘톡톡인터뷰’에서는 미디어교육 현장에서 활동하는 교사, 참여자를 비롯해서 미디어교육에 관심있는 사람들이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찾아가 그/녀들의 ‘톡톡’ 튀는 이야기들을 담아낼 계획입니다. 첫 번째 ‘톡톡인터뷰’의 주인공은 지난 7월 1일 개관한 익산공공영상미디어센터 재미에서 미디어교육팀장을 맡고 있는 홍교훈씨입니다. 대학교 때 관심을 갖게 된 사진으로부터 시작된 그녀의 미디어교육 경험이 벌써 10년을 훌쩍 넘겼는데요. 동영상에 모두 담지 못한 톡톡인터뷰의 전문을 아래에 소개합니다.
* 동영상보기 : 12분 27초 / 만든이 : 수목
박혜미 : 이름이 독특한데요.. '교육'과도 어울리구요..^^; 어떤 뜻으로 지어진 이름인가요?
홍교훈 : 이름은 교훈인데요 한자어를 풀이하면 아름다울 교, 가르칠 훈. 아름답게 가르쳐라라는 뜻. 이런건데 사실 제 이름이 두 개예요. 유치원 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7살까지는 이름이 교훈이 아니라 홍성숙이었거든요(하하하하). 집에서 어른들은 성숙아 성숙아 부르고 밖에 학교 친구들은 교훈이라고 하는거죠. 본명은 원래 성숙이였습니다.
혜미 : 우와. 5년이 넘게 교훈씨를 알아왔는데, 또 다른 이름이 있었다는 건 오늘 처음 알게 되었네요. 교훈씨가 미디어 교육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교훈 : 처음 미디어교육을 하게 된 계기? 음. 그러니까 대학 입학하자마자 한겨레문화센터라는 신촌에 있는 센터에 사진강좌 등록을 해서 초급 중급해서 6개월동안 배우면서, 거기에서 만났던 사람들이 우연찮게 -96년도면 문화센터가 막 급부상하고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이었거든요- 같이 사진 들었던 분들이 기지촌 여성운동, 시화호 물이 썩어가는 것에 대해 환경운동하는 분들이었어요. 그때는 환경운동이나 기지촌 여성운동이 활발하거나 사회적으로 많이 알려진 때가 아닌데 그 관련한 운동하는 현장에서 직접적으로 하시는 간사분들이 몇 분 계셨고 20여명 수강생들이었는데 기본적으로 학생운동하셨던 분들과 기본적으로 사회운동, 시민사회단체운동에 관심을 갖고 계셨던 분들이 많으셔서 그때 사진을 하면서 사진을 통해서 사회운동, 시민사회 운동이나 그런 문제를 알려내려고 했던 간사님이나 활동가들이 사진을 배우는 목적이 그런거였다. 선전활동. 환경운동에 어떤 주제나 이런 문제들을 말이나 어떤 주장하는 것보다 이미지나 사진으로 알려내려고 하는 시도들을 봤고 그런 고민을 사진에 담으려고 하는 것을 옆에서, 술자리에서 많이 봤죠. 일주일에 한 번 수업이 있었는데 수업 끝나고 술자리가 거의 다음날 새벽까지 이어졌어요. 술자리에서 그런 얘기를 들으면서 자연스럽게 뭔가 미디어를 가지고 사람들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소통하고 대화할 수 있는 것이 사진인거구나. 제가 대학이 신문방송과거든요. 미디어를 가지고 사회적인 어떤 참여활동이나 그런거 자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어떤 활용도구로서 의미가 있고 어떤 수단이 될 수 있겠다라는 거를 자연스럽게 몸으로 배웠던 거 같아요. 뭔가 그걸 명확한 단어로 정리하기보다는 그거를 몸으로 좀 익히고 그런 말을 들으면서 고민을 자연스럽게 하지 않았던가 해요.
혜미 : 그럼 처음에는 미디어에 대한 관심이 사진에서 출발한건데 미디어교육으로 넘어오게 된 계기는 뭐였어요? 미디어교육을 시작하게 된 계기 같은 거요.
교훈 : 사진을 가지고 뭔가 사회적으로 이야기를 할 수 있고 이미지로 뭔가 표현할 수 있단 것을 한겨레문화센터에서 배우면서 학교에서 전공이 신문방송과인데 그때 수업중 하나가 3학년때인가 대안미디어론이란 수업이 있었어요, 학교 전공선택 수업에. 김명준 소장님이 강사로 오시고 학교에 처음 개설이 되는 수업이라서 우연찮게 전공선택이라서 필수는 아니지만 관심이 있어서 선택해서 듣고, 들으면서 거기에서 미디어교육 얘기나 공동체라디오운동, 미디어센터, 퍼블릭액세스, 독립영화, 노동자영상운동 이런 얘기를 16주 수업에서 주제별로 들었던게 직접적인 계기였고, 학교에서 그런 수업을 들으면서 한겨레 신문을 집에서 구독하고 있었는데 90년대 말쯤에 한겨레 신문에 시민사회단체들이 자원봉사나 행사를 단신으로 실어주는 면이 있었어요, 1면에. 거기에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미디어교육 자원봉사자를 구한다는 작은 단신의 기사를 보고 거기에 참여하게 된 거에요, 전화해서. 거기에서 만났던 사람이 지금 영국에서 유학하고 있는 김아미씨였고, 그분을 통해서 그분은 해외사례, 미디어교육 해외사례나 이런 정보들을 많이 알고 계셨고, 또 초창기때 서울 YMCA가 사실 미디어교육에서 시작을 많이 하셨잖아요. 다양한 활동들을 하고 시도들을 했을 때 그 때 김아미씨가 그때 이승정씨인가, 와이 초창기에. 그분하고 계속 해외자료, 미디어교육 해외사례를 조사하고 그것들을 번역해서 그 안에서 세미나 이런 것들이 있었던 거 같애요. 그런 활동했던 김아미씨를 만나면서 미디어교육 좀 더 자세한 내용들을 알게 되었고 해외에서의 미디어교육이 얘기된 것들이, 먼저 되었으니까 외국에서. 거기 정보들을 접하면서 좀 더 관심을 갖게 되었구요.
또 하나는 거기에서 과제가 한국성폭력상담소이기 때문에 잡지에서, 그때는 이제 인쇄매체, 영상이 활발하게 된 게 아니어서 인쇄매체에서 여성의 모습이 어떻게 보이는지를 미디어교육 교재로 만들어서 난곡인가 관악의 한 공부방에 가서 그때 중학생인가 초등학생인가 초등학생 고학년인가 교재를 만들어서 아이들하고 잡지에서 여성의 모습이 어떻게 그려지고 있는지를 수업을 한번 하는게 있었어요. 그거 수업을 하면서 미디어교육을 직접적으로 하게 된 계기가 된 거죠.
혜미 : 미디액트 들어오기 전부터 미디어교육을 했던건데, 꽤 오랫동안 다양한 활동을 했을 것 같아요. 어떤 것들이 있었는지 소개해주세요.
교훈 : 미디액트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전에 미디어교육을 했던 경험은 ‘프리즘’이라고 예전에 노동자뉴스제작단이라고 안에 이론분과같은 팀이 있었어요. 거기에 진보적 미디어운동 웹진 ‘프리즘’이라는게 있었는데 그게 거의 해체되기 전에 끝물에 제가 들어가서 활동을 하면서 미디어교육이나 미디어운동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어요. 각 지역에서 미디어, 그때는 사실 미디어교육보다는 미디어운동, 뭔가 영상으로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교육 제작교육을, 미디어교육이라기보다는 딱히, 본인들이 활동하면서 시민들한테 직접 카메라를 들게 해주는 활동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고. 거기에서 부천 실업고등학교라는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노동자학교에 1년간 미디어교육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안을 받은게 있어서 거기서 1년 정도 교육을 하고. 또 ‘매비우스(매체비평우리스스로)’라는 단체에서 학교로 들어가는 교육이 있었거든요. 거기에서 중학교 방송반 교육을 1년 정도, 같은해 그렇게 1년 정도 교육을 하면서 경험의 사례들이 있는거고. 프리즘이란데가 사실 연구하는 자조 모임? 단체라기보다는 자조모임이라서 좀 자기가 경험했던 이런 미디어교육의 경험들을 글로 정리하는 작업과정들이 있었어요. 물론 준비만 하다가 프리즘이 폐간하는 상황이 돼서 기사가 나가진 않았지만. 그런 것들을 정리하는 과정들이 중간에 있었던거죠. 미디액트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전에.
혜미 : 미디액트 미디어교육실에서 5년 넘게 일을 해왔는데, 본인이 직접 교육을 기획하고 전체적인 방향도 잡고 이런 것들을 시작했던거잖아요. 여러 가지 활동을 했겠지만, 교훈씨가 좀더 핵심적으로 하려고 했었던 부분, 실제로 했던 부분 이야기를 좀 해주세요.
교훈 : 활동들은 사실 제가 해보고 싶은 교육들을 거의 해봤어요. 물론 이제 해야할 교육들이 더 많긴한데. 하고 싶은, 미디어교육에서 만나고 싶은 참여자가 있으면 사실 교육의 의미나 필요성들을 현장에 가서 찾아내면서 교육들을 기획하는 것이 미디액트 처음이었고, 초창기 미디어교육 모습은 개척하는게 사실 더 많았거든요. 뭔가 있는거에서 더 안정화시키고 정리하는 작업보다는 그동안 미디어교육 진영에서 하지 않았던, 하지 못했던 것들을 했죠. 조건이나 상황이 되지 못했던 조건에서. 사실 미디액트는 상대적으로 시민사회단체에서 미디어교육을 했던 조건보다는 나은 상황이잖아요. 물적으로 인적으로. 전문적으로 미디어교육만 할 수 있는 전담인력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대에서 다양한 사람들, 다양한 교육의 내용이나 방법, 목적을 가지고 시도를 했던게 5년이었던 거 같아요. 초창기에 했던 5년이라는게.
그 안에서 이제 교육들을 다양하게 시도하고 다양한 참여자를 만들면서 교육 커리큘럼을 개발하고 교육들이 안정적으로 가기 위한 방법들, 방안들을 마련하는 거, 운영하는 체계들을 좀 잡아가는게 저의 주요한, 개인적인 스스로의 목표이기도 했고 미디액트 안에서도... 지금은 상황이나 단계들이 달라져있는 것 같아요. 제가 초창기 1단계였다면 지금은 2, 3단계겠지만 아무튼 단계들을 밟아가는 과정에서 저는 좀 그런 과정들이 있지 않았나 (싶어요).
혜미 : 스스로 생각하기에 성과로 생각되는 부분이 있다면 어떤 거에요? 사실 여러 가지이긴 하지만... 다 해보긴 했지만 이건 정말 좋았다 잘한 거 같다 이런거 있지 않아요? 가물가물한가요?(웃음)
교훈 : 있다면 장애인이겠죠. 장애인미디어교육. 장애인미디어교육을 2004년, 2005년부터 미디액트 그만둘 때까지 제가 주요하게 담당했던 영역이긴한데 거기 다양한 장애유형과 다양한 현장으로 갔거든요. 학교에서부터 시민사회단체, 시설 이런 거에 다양한 현장과 다양한 장애유형, 다양한 참여자들과 만나면서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을 해야했고 거기 안에서 개발한 내용들을 정리해서 책으로 만드는 과정들이 있었고. 그래서 장애인미디어교육이 어떤 교육의 운영과정이나 교육을 하는 과정에서 참여자를 발굴하고 찾고 만나고 기획하고 운영하고 그것들을 평가해서 하나의 가이드북이나 책이나 연구성과물로 나오는 일련의 과정들을 쭉 경험해볼 수 있었고 일련의 과정을 시연할 수 있었던 교육의 사례에서 가장 인상깊은 성과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고.
또 하나는 노인 미디어교육이요. 생애단계별로의 미디어교육을 실험할 수 있었던 교육이 유아와 노인. 노인은 사실 이제 과정들이 어느 정도 일정하게 진행되고 있어요. 사실 노인 미디어교육은 장애인만큼 일련의 과정들을 체계적으로 시연하지 못하고 미디액트에서 나오긴 했는데, 앞으로 해야할 일이긴 하겠네요. 생애단계별로의 어떤 과정들을 커리나 이런 것들을 개발하고 그것들을 완성된 교육과정으로서 만드는 것들을 좀 해보고 싶고 해야된다라는 필요성과 해보고 싶다라는 생각이 있어요. 사실 미디액트에서 하고 나왔으면 좋았을텐데라는 생각이 있었지만. 그거를 다른 현장 다른 어떤 현장 일하는 공간 이런데서 해야할 어떤 개인의 과제로 남겨놓고 미디액트에서 정리를 한게 있었죠.
혜미 : 미디액트를 그만 두고 익산이라는 지역으로 내려왔는데요, 미디액트를 왜 그만두게 되었나요?
교훈 : 미디액트를 그만둔 거가 왜 그만뒀나? (웃음) 그러니까 그만두려고 했던 거는 제가 이거 인터뷰한다 그래서 제가 서울과 거리두기라는 예전에 만든 노트-손으로 직접 쓰는-를 어제 찾아서 읽어봤어요. 수목, 다경과 술한잔하고 한번 기억을 더듬어보고 그동안 활동들을 스스로 점검해보는 시간이 되지 않겠냐해서 자기 전에 한 10분 본 거긴 했어요. 노란 노트북을 한 번 봤는데 그게 2006년 10월인가 11월로 날짜가 적혀있드라구요. 지금도 계속 쓰고 있 긴한데. 미디액트를 그만둔 계기는 사실 서울과 거리를 둬야겠다라는 계기가 있었던거죠. 그 계기가 아.. (이거 그냥 편집해주세요) 직접적인 요인은 미디액트에서, 미디액트라는 운영시스템이 돈을 벌어서 인건비가 나가는거잖아요. 그런 과정 중에 처음으로 월급이 안 나온거야. 근데 내 생활은 모든 생활이, 집도 독립해있던 상태. 안정적으로 나왔던 월급이, 처음으로 내가 임금노동자라는게 절실히 나왔던게 단 한 번의 월급으로 무너진거지, 임금노동자가. 그래서 아 이게 나 자본론 제대로 읽어보진 않았지만 아 임금노동자가 이런 얘기구나 몸소 느낀게 한 번 월급이 안 나왔는데, 부모님이랑 같이 살았으면 문제가 크게 없었을 거 같아요. 돈을 빌려 쓰거나. 근데 내가 생활비를 내야하는 상황이었고, 소득세, 전기세, 가스비, 그다음에 당장 카드로 산 옷값, 책값. 이게 다 올스톱이 되고 대책을 마련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서 내가 이 생활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미디액트 월급이 나오고 안 나오고가 문제가 아니고 거기에 난 아무런 준비가 안 되어있었구나 하는 생각에 대게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 때 고민의 시작이 임금노동자로서의 나를 스스로 인식하면서 그럼 이거의 대안은 뭐고 내가 어떤 대안적인 삶을 살면 이런 상황들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해결할 수 있을까였고, 그런 생각에서 자급자족하는 삶을 찾는 책들을 많이 본거죠. 귀농의 책. 주변에 귀농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고 실제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가서 곁눈질로 계속 보고 나도 귀농하고 싶다 그렇게 하면서 2006년부터 서울과의 거리두기를 시작했고, 그러면서 이렇게 된거죠. 2006년부터 어떻게 안에서의 사업들을 정리하고 대안적인 삶들을 어떻게 준비를 할까해서 사실 그러면서 2008년 1월에 그만두게 된거죠.
혜미 : 서울과 거리두기 프로젝트를 진행했다고 했는데, 여러 지역들 중에서 익산으로 내려오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교훈 : 서울과 거리두기 프로젝트에서 사실 지역을 딱히 정해놓지는 못했거든요. 사실 정해놓고 지역을 찍고 올려고 했는데
처음에는 남해 다랭이 마을을 갈까 해서 다랭이 마을 갔다가 ‘아, 이건 아니다. 내가 살 곳은 내가 아직 준비가 덜 됐다’라는 걸 그 공간에 가서 부딪치고 그런 차에 지역을 정해야되는 상황이었거든요. 관두는 시점에서 원래 미디어교육을 포함해서 미디어교육뿐만 아니라 다양한 교육을 하고 싶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굳이 꼭 미디어교육이 아닌 다른 교육들이 이 사람들에게 우선적으로 먼저 필요하다라는 생각들이 대게 자주 들었던거예요. 그러면서 지역을 찍을 때 당장 내가 귀농을 하기는 쉽지 않은 것들, 사실 귀농을 하고 있는, 귀농해서 살고 있는 후배집이나 아는 사람집을 갔을 때 아 이게 아직 내가 준비가 덜 됐구나. 내가 모르고 환상을 가지고 생각하는게 있구나 하는 것을, 이렇게 다급하게 결정해서 내려올 게 아니라 준비과정을 가지면서 천천히 차근차근히 서울과의 거리두기 프로젝트를 실험해야겠다 생각을 했죠.
그 때가 평생교육을 공부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서울과 거리두기 프로젝트 방안으로 하나가 평생교육이란 대학원 공부를 해서 그것을 가지고 뭔가 내가 지역을 정하고 지역에서 생활을 할 때 그게 나의 하나의 방안수단이 될 수 있겠다해서 미디액트 다니면서 대학원 했던거고. 지역에 평생교육센터들이 많이 생기고 있었거든요. 일단은 평생교육사를 뽑는 지역으로 자리를 구하고 있는, 몰래 남들 몰래 구하고 있는 상황에서 익산에 미디어센터가 생긴다는 얘기가 있었고, 사실 그게 구체화됐었어요. 제가 처음 들을 때는 구체적으로 된 얘기가 아니었는데 선정이 되고 구체화되면서 같이 활동했던 미디어운동네트워크에서 만났던 서정훈씨가 또 아는 활동가로 있고 그러면서 전혀 낯선 지역에 가는 것보다 아는 사람 활동가, 그리고 그나마 미디어교육이나 미디어운동에 같은 지향점을 가지고 있는 활동가가 있는 지역에 가서 준비하는게 서울과 거리두기 프로젝트를 가깝게, 내가 구체적으로 준비하는거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라는 거와, 주변에서 너무 급하게 빨리 뭔가 환경이 바뀌거나 상황이 바뀌면 힘들거다라는 조언이 있어서 익산에 내려오게 된거죠.
혜미 : 익산에서도 미디어교육을 하고 있는데요. 서울과 지역에서 하는 미디어교육에 차이점이 있을 것 같아요.
교훈 : 서울과 지역의 차이? 시간의 차이가 좀 있는거 같아요. 처음에 지역에 내려왔을 때 지역에서 활동하는 분들이 모든 유행이나 이런 그 사회적인 어떤 흐름들이 3년 딱 늦는데요. 3년. 그런 얘기를 초기에 많이 해주셨고 사실 그게 무슨 얘기인지 모른 거였는데... 아.. 이게 3년이 늦다는게 무슨 말인지 교육을 하면서 참여자들 만나고, 교육을 같이 할 수 있는 단체나 기관들을 만나면서 미디액트 초창기에서 좀 1년 정도 된 시기라는게 딱 느껴지더라구요. 그러면서 시간의 차이라는게 그 때 느껴지고 미디액트 초창기 때를 지금 익산에서 다시 한번 해본다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고. 그게 차이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고 그게 또 기회인거 같아요. 초창기 미디어교육 처음 할 때 시행착오 많이 겪으면서 정말 몸으로 때우고 모르니까, 그러면서 이제 활동했던 것들이 익산에 와서는 경험이 있고 시행착오나 가지고 있는 노하우가 있으니까 익산에 와서는 좀 더 여유있고 그나마 좀 더 체계적으로 일을 할 수 있는, 미디어교육을 준비할 수 있고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준비가 좀 되어있지 않나 싶어요.
혜미 : 대개 오랜 시간동안 미디어교육을 해온거잖아요. 거의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미디어교육을 한 건데요.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 미디어교육의 매력은 무엇인지?
교훈 : 길게 했다면 길게 한거의 세월이 있으니까. 몸에 밴 거에 딱히 뭔가 매력있다라고 말하는게 쉽지는 않은데. 일단은 개인적으로 미디어에 대한 매력이 있는거구요. 개인적인 관심, 하고 싶었던 거에 교육을 제가 직접하지는 않지만 제작을 하거나 뭔가 직접 하지는 않지만 그걸 가지고 사람들과 나누는 작업을 한다는게 그 자체로 개인적으로 매력이 있는거구요, 미디어교육의 매력은 현재 미디어교육에 진행되는 과정이나 상황을 보면 다양한 사람을 만나는게 가능하고 다양한 사람을 만났을 때 이 미디어교육이 그들한테 대개 매력적으로 느껴진다는게 보이더라구요. 그 모습들을 자주 봤거든요. 처음에는 내가 할 수 있을까? 이게 뭐지? 막연한 교육을. 교육을 한차시 한차시 해보면 사람들이 거기에 대한 매력을 많이 느끼고 있는거에. 사람들이 새롭고 뭔가 이거에 호기심을 유발할 수 있는 교육에 좀 매력이 있는거 같고. 근데 미디어교육이 그 자체로 호기심이나 새로운 거에 매력으로 끝나는게 아니라 어쨌든 교육 자체가 사람들이 이야기를 같이 나누고 끌어내고 그 안에서 개인이 살아온 이야기나 이 사회속에서 자기를 인식하고 찾게 되는 과정이 힘들지만 그 과정들을 교육 과정안에서 저희가 주요하게 담아내잖아요 교육으로. 그게 이뤄지면서 사람들도 그 스스로 매력으로 느껴지는거. 그게 미디어교육의 매력이지 않을까.
혜미 : 좀 어려운 질문일 수도 있는데, ‘미디어교육은 000이다’ 이렇게 한 마디로 미디어교육을 정의해주세요!
교훈 : 엄청 고민했어(웃음). 000이 세 개길래 그럼 세 개로 맞춰야되나? 그건 아니더라구요.
미디어교육은 ‘만남’이다. 계속 반복해서 얘기하는데 사람들이 일단 만나는 작업인거구요 그 만남에서 어떤 관계들을 만들어가고 그 관계를 전제로 해서 교육들이 이뤄지는 거기 때문에. 사실 교육이 1차시가 시작되는 교육의 과정이라기보다 1차시 시작하기 전에 전과정이 많은거잖아요. 그 과정들을 포함해서 미디어교육의 시작, 하나의 교육의 시작이 된다라고 생각이 드는데 다양한 사람들, 다양한 사람들과의 새로운 만남, 교육 과정에서 만났던 사람들을 계속해서 만날 수 있는 만남, 그래서 미디어교육은 ‘만남’이다.
혜미 : 익산공공영상미디어센터 ‘재미’가 드디어 개관하게 되었는데요. ‘재미’에서 특별히 해보고 싶은 것이 있다면요?
교훈 : 재미에서 하고 싶은거? 아~~ 보셨겠지만 공간이 대개 재밌어요. 있고 싶은 공간이거든요. 여기서 하고싶은 거는 교육, 지금 상설 대중강좌로 해서, 예전에 자꾸 비교하면 안되지만 미디액트에서는 미디어교육팀 따로, 상설교육팀 따로 있으면서 그 과정에서 만나는 지점들이 있거든요. 이게 미디어교육으로 했던 공동체미디어교육이 상설교육화되고 상설교육이 미디어교육 안으로, 서로가 공통분모가 있으면서 교류가 되고 교육프로그램들이 좀 구분되어 있는 어떤 전문화, 각각의 영역들이 전문화, 세분화 될 필요도 있긴 한데 그런 넘나드는 미디어교육을 해보고 싶어요. 미디어센터들이 대개 공동체미디어교육하고 대중강좌하고 구분해서 많이 가고 있는 상황에서 그것을 통합적으로 진행하고 싶은 교육의 운영상에서는 그런 계획들이 좀 있구요. 그동안 교육프로그램을 다양화시키는 대중강좌에서, 교육 프로그램을 기존의 안정화된 교육을 포함해서 다양한 시도들을 해보고 싶어요. 이게 미디어교육이야? 그리고 미디어교육에서 가능할까? 어, 할 수 있네 이런 교육 프로그램들을 새롭게 시도하고 싶은 생각이 있어요.
그리고 이건 얘기하면 안되는데.. 아.. 해야되나? 하나는 지금 학교 교육들을 하고 있거든요 익산에서. 대안미디어학교? 탈학교 청소년이나. 대안미디어가 있잖아요, 미디어운동 안에. 그런 대안미디어학교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센터 안에서 학교들을 운영해보면 어떨까. 작은 학교를 만들 수 있을 거 같아요. 학급이 한 학급 정도 있는, 학생들 20~30명 있는. 대안학교 운영을 해보고 싶다 미디어인데 청소년들 영화들이 입시로, 대학으로 가는 과정에서 그 안에서도 또 깨지잖아요. 기존의 청소년미디어센터나 청소년영화제에서 얘기했던 것들이 실제로 대학에서 영화를 제작하거나 영상을 전공하게 되었을 때 그 괴리감들을 얘기하는 것들을 좀 들어보고 그런 과정에서 청소년들이 자기 진로 고민하고 했을 때, 실제 고등학교 과정 정규교육 과정에 교육과정을 개발해서 그 학생들이 수업을 들어도 성인이 되어도 사회에 진출했을 때 사회에 참여했을 때도 그런 괴리감이 느껴지지 않게 대안적인 어떤 자기네 활동들? 요즘 사회적 일자리나 대안적 일자리 찾기를 하잖아요. 사회적 기업? 그런 고민들도 있었어요 초기에. 미디어센터 작년에 2008년에 그런 고민들을 했었는데 그런 것들을 현실화시키고 싶다 그런 생각들. 이건 저 혼자의 생각입니다. 재미의 입장이 아닙니다. ^^;
혜미 : 미디어교육에서 풀어야 할 과제들이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교훈 : 과제? 지금 익산미디어센터 재미 미디어교육 과제만이라도... (웃음)
지역의 과제? 아니면 미디어교육의 과제요? 사실 미디어교육이 여전히 많은 사람
들한테 낯설고 새로운 교육이거든요. 우리들만의 교육인거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들고 우리 안에서만 내용, 의미가 공유되는 상황에서 이게 많은 사람들한테 알려지고 꼭 특별한 사람만이 받는게 아니고, 내 관심을 개인적으로 갖거나 소외계층이나 계층적인 접근들을 많이 하면서 그 어떤 일면 말하는 특별하다고 말할 수 있겠죠, 일반 대중들은. 특별한 사람들만이 받는 나도 내 얘기를 할 수 있다라는 것들을 좀 더 사람들을 만나서 작업들이 이루어지고, 그게 교육 하나하나 하면서 더디게 갈 필요가 있는거고 사실 그렇게 가야하는 거긴 한데 넘 더디다는 생각. 좀 더딘거를 좀 더 이제.. 기다리고 있어서 지치고 있는 사람들한테 적절하게 맞춰서 갈 수 있는 방법들이 뭐가 있을까. 그런게 교육 안에서 좀 고민이 되야할 거 같은데요. 근데 그게 어떤 정책을 만든다, 어떤 교재를 만든다, 교육과정을 체계화한다, 교사를 많이 양성한다라고 얘기들을 많이하는데 사실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하는데 궁극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뭘까 이 네 가지 앞에서 얘기했던 우리가 고민하고 있고 과제로 설정한 것들이 제대로 안되서 그런건지, 아니면 또 다른 어떤 것을 우리가 놓치고 있는건 아닌지 그런 것들을 고민을 좀 더 해서 과제들을 더 정리할 필요가 있고, 실제 그것들이 잘 안 되고 있는 것들을 잘할 수 있을까.. 그게 지역에서 본다면 같은 맥락에 놓여있는거 같아요, 지역이. 더더욱 지금 미디어센터가 뭔지도 모르고 미디어교육하면 더 모르고. 미디어센터는 건물이 있기 때문에 와서 보이는게 있지만 미디어교육은 정말.. 미디어교육을 한다고 했을 때 과연 이걸 어떻게 설명해내고 그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게 할건가라는거. 여전히 미디어교육이 낯설고 새롭고 어려운 것들을 쉽게 누구나 참여할 수 있게 할 수 있을까 과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그런데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잘 모르겠습니다. (웃음)
혜미 : 기억에 남는 사진과 담긴 사연을 소개하는 시간인데요. 가장 기억에 남는 사진이 있으세요?
교훈 : 2005년에 했던 노숙인 미디어교육인데요. 상영회 때... 결과물을 보는데 별 사실 그냥 음악 틀어놓고 자기 얘기하는건데 그 상영회에 있는 사람들이 다들 눈물을 흘렸고 저도 모르게 좀 눈물을 흘리는 기억이 남고. 노숙인미디어교육이 그런 상영회, 미디액트 대강의실에서 상영회를 했던 사진 한 장? 이미지? 그게 좀 남아있는 거구요, 노숙인 교육이 왜 마지막 상영회 기억이 좀 남냐면 2005년에 보면 소외계층 미디어교육에 대한 붐을 일으켰던 많은 다양한 소외계층을 만나는 작업을 했을 때, 노숙인 교육에 대한 것을 고민하면서 사실 소외계층 교육은 질문이 안 되어지잖아요. 노숙인이나 장애인은 당연히 하는 교육들. 그거 왜 필요해? 어떤 의미가 있어? 라고 질문 되어지지 않는 교육인데 그 교육과 함께 했던 게 레즈비언 미디어 교육이었거든요. 그러면서 레즈비언 교육은 그 때 여성 레즈비언 교육은 대개 엘리트, 일명 사회적인 지위나 이런 것들이 있는, 일명 경제적으로는 좀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하고 이 노숙인 교육하고 동시에 되면서 저도 모르게 비교가 되는 상황에 혼란이 좀 있었던거예요. 경제적으로 어려운 노숙인 교육은 너무나 당연히 필요한 거고 레즈비언 교육은 경제적으로 자기네들 끼리도 알아서 할 수 있는 사람들인데 왜 센터에서 이런 장비와 이런 것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면서 해야되는가에 질문들이 막 혼란스럽게 막 이렇게 섞이고 있는 과정에서, 제가 노숙인 당사자, 노숙인 운동하는 당사자들을 교육을 한 거거든요 참여자들이. 평가하는 상영회 다 끝나고 교육을 평가할 때 당사자 분한테 왜 노숙인 미디어교육이 필요할까라고 당돌하게 물어본거죠. 사실 기획자로서는 그 질문을 제가 가지고 있어야되는건데. 저는 너무나도 당연한 답만을 갖고 있고 그게 확신이 없었던거고. 그래서 물어봤죠, 당사자분한테. 그분의 대답에서 아~ 라는 질문의 답을 찾게 됐고 제가 소외계층 미디어교육이나 미디어교육에 자기확신을 갖게 되었던 건데, 그분이 하신 말이 제가 “왜 노숙인 교육을 할까요? 왜 필요할까요?”라고 했을 때, 그분은 본인들이 경제적으로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기 때문에 그 문제 때문에 자기네들이 제외될 경우가 너무 많다, 학교 공부하는 거나 어떤 문화적으로 뭔가 누리는 것들이나 그러면서 이런 1차적인게 안됐기 때문에 모든 것들이 제외되면서 차단된 거에 우리가 1차적인 어떤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거 아니냐 이런 얘기를 하시면서.
그 때 계속 그런 질문을 찾기 위해서 참조자료나 논문이나 책들을 읽었을 때 그런 답들을 찾지 못했거든요. 있어도 사실 제가 그 문구를 읽어내지 못했겠죠. 그분이 그렇게 얘기를 해주면서 레즈비언 미디어교육이 왜 해야되는지 의미나 이런 것들이 노숙인 당사자분이 해준 말을 통해서 질문에 대한 답을 찾게 된거죠. 그래서 노숙인 미디어교육의 평가회의와 상영회 했을 때 나눴던 대화들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혜미 : 마지막 질문인데요. 좀 낯간지러운 질문이기도 해요. 교훈씨의 삶의 꿈을 이야기해 주세요
교훈 : 나중에 바뀌어도 되는거죠? (웃음) 나중에 증거자료 되고 이거 왜 안했어? ㅋㅋㅋ 익산은 준비하는 과정에 있는 거고 익산에 내려와서 활동하는 것도 과정에 있는 건데 궁극적으로는 자급자족하는 삶을 살고 싶어요. 그래서 제가 생활하는 일상 공간도 도시와 좀 더 거리를 둘 수 있는 공간에서 살고 싶은게 있는 거고, 그러기 위해서는 먹고 사는 이런 게 해결이 좀 되어야겠죠. 그게 귀농이 될지, 아니면 얕은 수준에서는 일정하게 어떤 조직에서의 활동보다는 공공기관 조직의 생활, 활동보다는 자급자족 할 수 있는 공동체 생활, 공동체를 만들어보는거? 그게 어떤 건지는 모르겠어요. 그런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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