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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람브라궁전
올해로 우리부부는 결혼 30 주년을 맞았다. 그래서 준비한 것이 스페인 여행이다. 정열의 나라, 투우의 나라 스페인. 최근 한국 tvN방송의 ‘꽃보다 할배’에서 소개된 바로 그 스페인이다. 시카고의 샤프여행사에 문의하니 스페인, 포르투갈 그리고 모로코의 10박 11일 패키지 여행상품을 추천하였다. 여행일자는 5월12일부터 5월 22일이고 주관여행사는 LA의 US 아주투어이다. 가격은 $1,700+항공요금이다. 시카고에서 뉴욕을 경유해서 스페인의 바르셀로나까지는 United American항공료가 $1,045로 일인 $2,745인 셈이다. 바르셀로나가 집결지이다. 여기에 가이드 팁이 일일 일인 15유로가 추가된다.
여행사를 통한 단체여행은 비교적 안전하고 편하고 단시간 내에 많은 곳을 볼 수 있는 반면, 개인여행처럼 행동이 자유스럽지 못하다는 제약이 있다. 여행의 종류에 따라 조절하는 것이 좋을 듯싶다. 스페인 관광안내책자를 찾아 스페인에 대해 공부하고, 인터넷으로 스페인을 검색하여 관련 자료를 찾아보았다. 흔히 미국은 여행하기 좋은 나라고 유럽은 관광하기 좋은 나라라고 한다.
여행경로는 바르셀로나(스페인)→리스본(포르투갈)→세비야(스페인)→타리파→탕헤르(모로코)→페스→라바트→카사블랑카→탕헤르→타리파(스페인)→말라가→그라나다→코르도바→마드리드→톨레도→마드리드(스페인)에서 끝난다.
5월 12일 오후 1시 UA항공편으로 오헤어공항을 출발 뉴욕경유, 스페인의 바르셀로나(Barcelona) 국제공항에 도착하니 13일 오전 8시 50분. 뉴욕에서 바르셀로나까지 비행시간 8시간. 공항에서 가이드가 반갑게 맞이한다. 우리일행은 42명, 버스한대로 움직인다. 바르셀로나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도시이다. 스페인 동쪽에 지중해에 접한 항구도시로, 88서울올림픽 이후 1992년 제25회 올림픽개최지이고 황영조 선수가 몬주익언덕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 도시이기도 하다. 스페인은 17개의 주로 나누어지는데 바르셀로나는 카탈루냐지방에 속한 도시이다. 바르셀로나가 속한 카탈루냐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하겠다고 운동중이고 올해 안에 결정이 난다고 한다. 바르셀로나는 수도인 마드리드보다 더 큰 산업도시이며 스페인에서 관광객이 제일 많은 도시이기도하다. 스페인의 관광수입은 연 500억유로정도이다. 국민소득은 $28.800정도. 또한 바르셀로나는 지중해 크루즈의 시발점으로 년 900대 가량의 배가 출항한다. 바르셀로나의 구시가지는 명품점등 화려한 치장을 하고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황영조선수의 뛰는 모습. 바르셀로나시의 허가로 우리정부의 예산으로 세워졌다함.
올림픽경기장 건너편에 세워져 있다. 위의 석상외에 7개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바르셀로나 구시가지의 관광객들 모습
먼저 가우디의 건축양식이 돋보이는 성가족성당(La Sagrada Familia)을 찾았다. 1882년 착공하여 1883년부터 가우디가 맡아 건축하기 시작한 성가족성당. 공사시작 132년이 지나도록 아직도 완공하지 못하고 공사 중인 성당. 가우디는 1926년 전차사고로 사망하였다. 이 성당은 1940년 재개하여 2026년 완공예정이다. 150년씩 걸려 성당하나 완공, 사실 우리생각으론 좀 이해가 힘드는 그런 성당은 유럽에 많이 있다. 182년 걸려 완공된 파리 노트르담성당, 120년에 걸친 바티칸의 성 베드로성당등. 이 성가족성당은 초기에는 건축경비문제로 공사에 어려움이 있기도 하였으나 이제는 몰려드는 엄청난 관람객입장료(1인 14.80유로)수입으로 완공까지 경비문제는 없다고 한다.
성가족성당
외부 조각상
성당내부
성당내부
성당내부
다음 스페인민속촌(Poble Espanyol)인 스페인마을을 찾았다. 1929년 바르셀로나 만국박람회당시 스페인 전역의 건물을 모델로 해 117개의 건물을 13개월 동안 급조하였다. 겉에서 보면 멀쩡하였으나 건물내부는 허접하였다. 기념품점, 식당 등으로 사용하고 있다. 박람회 후 철거예정이었으나 아직까지 관광지로보존하고 있다. 숙소로 돌아와 무박 2일의 피로를 풀었다.
스페인 마을 거리
5월 14일 오전 7시 30분 Vueling Airline으로 바르셀로나에서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Lisbon)에 도착했다. 비행시간 약 2시간. 여행 전 2013년 영화 “Night Train to Lisbon”을 보았다. 영화에는 리스본시내의 풍경들이 그려졌다. 기억에 남는 영화였다. 포르투갈은 유럽의 발꿈치라 불린다. 우리나라 해남의 ‘토말’ 이라고 땅끝마을이 있듯이 여기도 그런 이름이 붙은 마을이 있다고 한다. 유럽대륙은 이베리아반도의 포르투갈에서 끝난다. 북으로 영국과 프랑스 동으로 스페인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나라 포르투갈. 과거에 영화를 누렸던 최초의 제국 포르투갈. 그 땅에 내가 서 있었다. 지금은 공화국이고 국민소득이 $21,000정도이다. 리스본은 1755년 지진과 그에 따른 화재와 해일로 시가지의 2/3가 사라진 도시가 되었다. 파티마 마을로 이동하였다. 파티마는 빛나는 자의 뜻이다.
파티마대성당(Sanctuary of Our lady of Fatima)은 1917년 5월부터 10월까지 매달 13일에 3명의 어린 목동 앞에 성모마리아가 나타나 건축하게 된 성당이다. 그 이후 바티칸의 명으로 성지로 정하였다. 이 성당은 1928년 건축하기 시작하여 1953년 10월 완성되었다. 대형화덕에 순례객들이 양초를 태우며 성호를 긋고 있었다.
파티마 대성당
다음에는 벨렘으로 이동하여 제로니무스 수도원(Jeronimos Monastery)을 방문하였다. 이 수도원은 1499년 인도를 발견하고 귀환한 바스코 다가마를 기리기 위해 마누엘1세에 의해 세워졌다. 이 수도원에는 2명의 포루투갈왕과 바스코 다가마의 무덤이 있다. 포르투갈의 옛 영화를 짐작케 하는 규모였다.
제로니무스 수도원
근처에 있는 벨렘탑(Torre de Belem)은 당초에는 대서양과 테주강이 만나는 곳의 물속에 세워졌으나 테주강의 흐름이 바뀌면서 물에 잠기지 않게 되었다 한다. 1515-1519년에 세워진 이 탑의 외부에는 바스코 다가마외에 여러 항해자들의 조각상이 있으며, 고딕양식에 기반을 둔 3층 구조의 아름다운 탑이다. 19세기에는 정치범의 감옥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1층의 감옥에 물이 들어오는 만조 때는 죄수들이 수영을 하여 물에 떠있어야 했다고 한다. 저 멀리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와 비슷한 다리가 보인다. 스페인이 포르투갈 점령 시 스페인이 건축한 다리라고 한다. 내일 스페인으로 들어갈 때 건너야 할 다리이다.
벨렘탑
5월 15일 오전 8시, 리스본에서 4시간 정도 걸려 스페인의 세비야(Sevilla)에 도착했다. 스페인으로 들어오기 전 포르투갈에서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렀는데 코르크로 만든 여러 제품들을 판매하고 있었다. 조끼, 가방, 여성용 핸드백, 팔찌, 병마개등 코르크로 이렇게 다양한 상품들이 나올 줄은 몰랐다. 기념으로 코르크로 만든 팔찌를 하나 구입하였다. 가격은 18.45유로. 전 세계 코르크의 34%가 포르투갈산이라고 한다.
스페인 사람들은 다른 나라와 비교하지 않는다고 한다. 영국이나 프랑스 혹은 미국과도 자기들을 비교하지 않는다. 사실 다른 나라에는 별 관심이 없다. 스페인사람들은 자기나라의 다른 지방 사람들과 비교한다. 마드리드 사람들은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 관심이 없었다. 그 올림픽은 바르셀로나 올림픽이지 마드리드올림픽이 아니란 예기다. 스페인 사람들은 친절하지 않다. 식당에서 음식 나르는 접시를 식탁에 던지듯 내려놓는다. 손님은 왕이 아니다. 스페인은 국가가 가사는 없고 곡만 있다. 부를 노래가 없고 들을 곡만 있는 것이다. 국경에도 국기는 없다. 국기는 관공서에만 있고, 애국심을 유발하는 상징이라는 것이 없다고 한다. 좀 이해하기 어려운 나라이다.
세계에서 3번째로 크다는 세비야대성당이 있는 세비야(Sevilla). 1492년 콜럼부스가 이곳에서 항해를 떠나 아메리카를 발견했고 1992년 만국박람획를 유치했고, 그리고 플라맹고의 본고장이기도 하다. 또 전설적인 바람둥이 돈 후안의 고향이기도 하다. 우선 세비야대성당부터 찾았다. 바티칸시국의 성베드로성당, 런던의 세인트 폴성당에 이어 세 번째로 큰 성당이라 한다. 1401년 건축이 시작되어 1506년완공되었다. 성당의 건축가는 누구인지 확실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고딕양식의 성당으로는 제일 큰 성당이다. 성당 안의 콜럼부스의 묘는 4명의 왕이 관을 메고 있었다. 콜럼부스는 자기에게 배를 내주고 신대륙을 발견하게 도와준 스페인의 이자벨여왕이 죽자, 자기의 모든 재산을 갈취한 스페인대신들에게 ‘나는 죽어서도 스페인 땅을 밟지 않겠다’는 말을 남겼는데, 그로인해 관을 공중에 메고 있다고 한다. 현지 가이드의 예기로는 콜럼부스는 스페인의 가장 위대한 영웅으로 4명의 왕이 콜럼부스의 관을 떠받들고 있는 형상이라 했다.
세비아 대성당
성당내부
콜럼부스의 묘
성당내부
콜럼부스는 이탈리아의 제노바 출생이다. 포르투갈로 건너가 돈 주앙 2세에게 인도로 항해하겠다고 배를 요구한다. 인도는 향신료의 거대한 산지였다. 그 당시 향신료는 아주 귀한 물건이었는데 후추 한포대면 사람의 목숨 값이었다. 왕이 거절하자 스페인으로 가 이자벨여왕에게 배를 요구하고 도움을 얻어 서쪽의 대서양으로 항해하다가 도착한 곳이 바하마군도의 쿠바이다. 그는 죽을 때 까지도 그곳을 인도로 알고 있었다. 그 전에도 아메리카대륙을 발견한 사람들이 있었으나 그 가치가 부여되지 않았다. 콜럼버스의 역사적 의미는 아메리카 대륙에 유럽의 문명을 가져온 단초가 되었다는 것이다. 남미의 엄청난 양의 금을 스페인으로 날라 성당의 내부를 금으로 입히기 시작한다. 남미는 브라질만 포르투갈령이었어서 현재도 브라질은 포르투갈어를 사용하고, 그 이외에는 모두 스페인령으로 스페인 언어를 사용한다. 스페인의 세계를 향한 항해의 서막이 오르는 것이다. 인도는 그 후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가마가 아프리카의 희망봉을 지나 동쪽으로 항해하여 발견한다.
세비야 대성당의 종탑역할을 하고 있는 히랄다탑(Giralda)은 높이 97m로 15세기 회교사원을 부수고 세비야 대성당을 지을 때 유일하게 남겨진 건물이다. 바람개비라는 뜻의 이탑은 1184년부터 1196년까지 12년 동안 세워진 구조물로 아랍양식에 기독교적 양식이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다.
히랄다 탑
오후 7시 Palacio de Aolaleg 극장에서 플라맹고 공연을 감상하였다. 옵션상품으로 입장료 70유로. 브라질의 삼바는 열정적인 경쾌함이라면 아르헨티나의 탱고는 부두노동자들의 하소연이었고, 스페인의 플라맹고는 우리나라의 아리랑처럼 한이 서린 음악이다. 춤을 추는 무희 얼굴이 밝지 않다. 어두운 얼굴에 현란한 발굽소리, 백뮤직으로 흘러나오는 구슬픈 노랫소리, 이런 것들이 어우러져 음악을 형성하고 있다. 플라맹고는 케네디가 ‘새들의 합창’으로 미국에 전파했다고 한다.
플라맹고 공연
5월 16일 세바아의 스페인광장(Plaza de Espana)으로 갔다. 스페인광장은 1929년 만국박람회가 열렸을 때 본부 건물로 신축되었다. 아침 햇살을 받아 빛나는 광장은 정말 떠나기 싫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아침햇살을 받아 빛나는 스페인 광장
광장의 다리난간은 모두 타일로 다듬어져 있다
버스는 세비야를 떠나 타리파(Tarifa)로 향한다. 스페인 최남단 타리파항에서 훼리로 지브랄타해협을 건너 모로코의 탕헤르(Tanger)항으로 들어간다. 1805년 스페인의 남부 가디스와 영국령 지브랄타(Gibraltar) 사이에서 벌어진 트라팔카해전. 스페인과 프랑스 나폴레옹의 연합함대는 영국의 넬슨제독함대에게 대패한다. 프랑스는 14,000여명의 사상자를 냈고 스페인함대 11척만 가디스로 회항한다. 고등학교때 교과서에서 배운 그 유명한 트라팔카해전이다. 현재도 스페인 국토에 영국령 지브랄타가 있는 지브랄타 해협은 지중해와 대서양의 경계이다. 물살이 세서 모로코에서 스페인으로 건너오는 밀입국자들이 많이 익사한다고 한다. 스페인의 타리파항에서 모로코의 탕헤르항구는 14km정도이다. 훼리로 1시간 남짓 걸리는 이 지브랄타해협을 건넜다. 모로코땅에 발을 내딛었다. 이곳은 유럽이 아니고 아프리카 대륙이다. 이 모로코땅을 밟음으로서 나는 육대주의 땅을 모두 내발로 밟게되었다.
지브랄타 해협을 건너다. 저기 스페인의 타리파항이 보인다.
모로코왕국은 아랍어를 주로 사용한다. 종교는 이슬람이 대부분이다. 국왕은 통치권이 있다. 연 국민소득은 $2,800정도이다. 1Euro=12.10dhs(2014년 5월)화폐단위는 디르함(dhs)이다. 아프리카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 다음으로 잘사는 나라이다. 지중해와 닿아있어 유럽의 영향을 일찍부터 받았고 프랑스령으로 있다가 1956년 독립하였다. 남동쪽으로 사하라사막을 끼고 있고 서쪽으로는 대서양에 접해있다. 특산물로는 아르간(Argan)오일이 있다. 화장품, 목욕제품등에 아르간 오일을 첨가한 제품이 미국에도 상품으로 많이 나와 있다. 모로코가 원산지인 아르간 나무는 6-10m정도의 크기에 향이 강한 상록수이다. 올레인산과 리놀렌산이 다량 함유된 고기능성오일로 피부노화를 막아준다. 가짜가 많다고 한다. 페스를 향하여 버스는 달린다.
우리가 흔히 중동, 아랍, 이슬람을 혼용하는데 중동은 지역으로, 아랍은 언어로, 이슬람은 종교로 분류하는 것이라 한다. 그러나 세 가지가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이란은 중동에 위치하지만 아랍이 아니고, 인도네시아는 중동이 아니지만 이슬람국가이다. 모로코는 아랍, 이슬람이지만 중동은 아니다.
5월 17일 페스(Fes)의 관광이 시작된다. 7,000개의 골목이 있다는 페스의 시장터. 이곳은 12세기부터 똑같은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하여 유네스코에 등록되었다. 가이드는 현지의 모로코인을 데려와 길안내를 부탁했다. 만일 일행과 헤어져 길을 잃으면 그 자리에 서있으라는 당부와 함께. 현지인이 아니면 미로처럼 얽힌 이 골목을 빠져나간다는 건 불가사의한 일이다. 골목은 폭이 2m정도로 좁다. 그 좁은 골목으로 나귀 한 마리가 자기보다 더 큰 등짐을 지고 애처롭게 걸어간다. 양쪽에는 한 평도 안 되는 점포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냉장고가 없어 생선가게는 하루치의 분량만 팔고, 무슨 고기인지는 모르나 좌판위에 얹혀있다. 구역별로 상권이 나뉘어 있고, 식료품지역을 지나니 공산품지역이 나타났다. 목공소, 철공소, 가구공장, 천을 짜는 집, 여인들의 헤잡을 팔기도하고 재봉틀을 하기도 한다. 이곳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라 한다. 한참 골목을 지나니 악취가 코를 찌른다. 가죽가공공장이다. 현지인이 박하 잎을 나눠준다. 냄새를 희석시키라는 의미다. 어떤 가죽제품을 파는 상점에 들어가니 저 아래로 가죽 가공하는 모습이 보인다. 엄청나다. 가죽을 표백하는 곳, 가죽을 염색하는 곳, 가죽의 털을 베끼는 곳, 가죽가공에는 동물의 배설물로 가공하는 공정이 있다. 반바지만 입은 인부들이 그곳에 허벅지까지 잠그고 가죽을 다른 공정으로 옮기고 있다. 아! 그 냄새 는 다름 아닌 사람의 냄새였다. 살기위해 몸부림치는 인간의 냄새였다. 이번여행의 가장 인상깊은 장면이었다. 그곳에서 나와 아내의 슬립퍼하나씩을 40유로에 구입했다. 골목을 빠져 나오니 아이들이 주먹다짐을 하고 있다. 옛 우리나라의 시골 장터풍경이다.
페스의 가죽 염색공장
라바트(Rabat)는 모로코의 수도이다. 국왕이 거처하는 왕궁이 있고 이슬람의 메카 하산탑이 있다. 라바트대학이 있으며 유럽풍과 아랍풍의 건축물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조용한 도시이다.
모하메드 5세광장
다음으로 이동한 곳은 카사블랑카(Casablanca). 영화로도 더 유명한 카사블랑카. 모로코는 몰라도 카사블랑카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1942년 미국의 흑백영화. 카사블랑카는 모로코에서 촬영되지 않고 미국 헐리우드에서 만들었다. 영화 카사블랑카에 나오는 레스토랑은 현재 영화 속의 이름 Cafe America로 카사블랑카에서 미국인이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이 영화를 이번여행 전 찾아 두 번이나 보았다. 고민하는 Rick(험프리 보가드)과 방황하는 Ilsa(잉그리드 버그만). 일자역의 잉그리드 버그만의 얼굴은 그야말로 ‘자체발광’이었다. 첫 번째는 스토리로 두 번째는 버그만의 얼굴만 보다가 영화가 끝나버렸다. 이 카사블랑카는 모로코에서 제일 큰 산업도시로 스페인이 건설하였다고 한다. 카사블랑카는 ‘하얀집’이라는 뜻이다.
카사블랑카의 관광명소 하산2세 사원을 찾았다. 높이가 200m나되는 거대한 기둥사원이 있다. 사원 안에 2만명을 수용할 수 있고 밖의 광장에는 8만명을 수용할 수 있어 동시에 10만명이 예배볼수 있는 곳이다. 이 모스크 건설에 장인만 1만여명이 수용되었고 공사기간은 8년이 소요되었다.
하산 메스키타(하산 회교사원)
지중해의 석양
모로코 국기
5월 18일 카사블랑카를 떠나 지브랄타해협을 건너 오늘 다시 스페인으로 들어간다. 아침 8시경 카사블랑카를 떠난 일행은 버스와 배를 번갈아 타고 저녁 무렵이 되어 말라가의 한 호텔에 도착했다. 이동하는데 하루를 꼬박 보냈다. 말라가는 지중해연안의 휴양도시로 스페인의 부자들의 별장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피카소가 이 말라가 태생이다. 피카소는 20세에 프랑스로 건너가 살아가지만 죽을 때까지 스페인 와인을 마셨다한다. 피카소는 ‘나에게는 말라가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말을 남겼다. 배정받은 우리 방은 둘이 지내기엔 너무 넓었다. 방이 2개에 거실 따로 욕실2개에 주방, 식탁까지 겸한 대식구가 지낼 수 있는 공간이었다. 창밖으로는 수영장과 멀리 산이 보이는 전망 좋은 방에서 하루를 보냈다.
Mijas의 성모출현성지
공중화장실의 표지판이 재미있다.
5월 19일 여행 8일째, 시차도 완전히 회복되고 여행도 막바지에 접어든다. 날씨도 꼭 시카고의 5월처럼 따뜻하고 화창하다. 아! 누가 5월은 세계어디를 가도 좋은 날씨라 했던가. 스페인은 계절을 건기와 우기로 나누는데 5월부터 건기가 시작된다. 오늘 알람브라궁전(Alhambra)이 있는 그라나다(Granada)로 이동한다. 차창 밖으로 올리브나무가 보인다. 올리브는 연 생산량이 1,280t으로 스페인이 세계 1위라고 한다. 올리브는 나무를 심어놓고 기다리다 수확하면 되는 아주 편한 농사이다. 비료도 필요 없고 물도 필요 없다. 스페인은 연 강수량이 700ml정도로 비가 오지 않는다. 나무사이의 길로 차량이 지나갈 수 있다. 차량이 가면서 열매를 떨어뜨려 수확하면 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Extra Virgin은 열매에서 처음 짜낸 오일이다. 두 번, 세 번까지도 오일을 짜낸다. 스페인에서 생산되는 올리브오일은 모두 Extra Virgin이다. 올리브가 너무 많아 두 번 짜내지 않는다. 올리브의 품종에 따라 올리브오일은 가격차이가 많이 난다.
그라나다는 알람브라 궁전으로 유명한 고도이다. 예전에 현대자동차의 모델명으로 더 익숙하다. 그라나다의 뜻은 석류이다. ‘그라나다를 보지 못한 사람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다. 711년경부터 스페인을 약 8세기 동안 다스렸던 이슬람 ‘나스르왕국’ 최후의 거점이다. 스페인의 이자벨여왕은 그라나다에 있는 알람브라궁전의 이슬람을 몰아내고 그의 부군 페르난도왕과 스페인을 통일한다. 1492년이다. 바로 그해 콜럼부스에게 배를 지원하고 신대륙을 발견케 한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궁전에서 여생을 보낸다. 알람브라는 ‘떠오르는 붉은 샛별’을 뜻한다. 이슬람 건축예술의 최고 걸작이다. 전체길이 720m에 폭은 220m에 달한다. 23개의 망루가 있는 성곽이 에워싸고 있다. 요새화 되어 있는 성곽, 잘 가꾸어진 정원과 분수, 궁 안의 방마다 가지고 있는 사연, 이모든 것들이 알람브라를 아름답게 하고 있다. 마지막 이슬람의 왕은 ‘그라나다를 내어주는 것은 아깝지 않으나 이 알람브라를 떠나는 것은 정녕 슬프다’라고 말했다. 이 알람브라는 1238년 이슬람 왕국을 세운 이슬람의 나스르왕조 22명의 왕들이 완성하였다. 이번 여행의 백미였다.
알람브라궁전 입구의 표지판
알람브라 궁전 입장권
궁전 경내의 건축물
경내의 조경시설
궁전내부에서 본 그라나다
각 궁전들의 모습
궁전외부
궁전내부기둥의 정교한 조각
천정의 문양
벽면의 세공
천정의 정교한 모양
벽면의 세공
지붕은 우리나라의 소슬대문을 연상케 한다.
우리나라의 건축양식이 이슬람의 영향을 받았다는 얘기도 있음.
이 얼마나 아름다운 아취인가!
알람브라궁전은 문, 벽, 천정, 지붕등 건물전체를 수를 놓은 듯한 느낌이다.
5월 20일 오전 8시 30분경 코르도바(Cordoba)로 향했다. 코르도바는 로마와 이슬람의 영향을 많이 받은 도시로 이슬람지배당시 이라크의 바그다드와 함께 이슬람 세계의 명실상부한 수도였다. 지금은 오히려 쓸쓸함이 느껴지는 도시이지만 유적들은 옛 영화를 말해주듯 위용을 뽐내고 있다. 코르도바는 메스키타(Mezquita) 회교대사원으로 유명하다. 회교사원을 영어로는 모스크, 불어로 모스케, 스페인에서는 메스키타라고 한다. 이 메스키타는 850개의 이슬람양식 기둥들이 숲을 이루며 건물을 바치고 있다.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크다는 엄청난 규모의 이 사원은 한 건물 안에 이슬람과 가톨릭이 공존한다. 이스람왕국이 물러간 후 참사원의 요구로 이 사원 한가운데에 어울리지 않게 가톨릭성당을 짓는다. 당시 국왕이었던 카를로스1세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건물을 짓기 위해 어디서도 볼 수 없는 건물을 파괴했다’고 한숨지었다한다. 이 사원을 ‘메스키타’라 부르지만 코르도바에서는 이 사원을 ‘성당’이라 불러달라고 한다. 마드리드에 도착해 여장을 풀었다.
코르도바 회교사원내부
사원내부의 기둥(기부금을 낸 사람의 이름이 아랍어로 새겨져 있다)
5월 21일 오전 9시경 톨레도(Toledo)로 향했다. 수도 마드리드에서 1시간 20분정도 거리의 천년의 고도 톨레도. 오하이오주에 있는 도시 Toledo와 같은 이름이다. 도시는 타호 강으로 둘러싸여진 암벽위에 천연적인 요새로 만들어 졌다. 기원전 2세경 로마의 식민도시로 사용되다가, 서기 6세기경에는 게르만 족의 한 부류인 서고트족의 왕국으로 발전하였다. 그 후 이슬람 점령기였던 8세초부터 11세기 말까지 이슬람, 가톨릭, 유대교가 공존하는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한다. ‘톨레도를 가보지 않고 스페인에 대하여 말하지 마라’고 한다. 스페인의 가장 오래된 고도이고 마드리드가 행정적 수도라면 정신적, 종교적 수도라고 할 것이다. 1561년 마드리드로 천도하기까지 스페인의 수도로 발전했다.
톨레도 시가지
톨레도대성당 가는 길의 다리
톨레도 대성당
성당내부
성당내부 천국의 문
톨레도에 있는 산토 토메 성당은 엘 그레코의 ‘오르가스 백작의 장례식’ 대형미술작품으로 유명하다. 4.8*3.6m라는 크기도 크기지만 이탈리아 화풍을 받아들인 작품이다. 오르가스백장을 매장하기 위해 성 스테파누스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두 성인이 14세기 경 이 교회에 기적적으로 나타났다는 전설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세계 3대 명화중 하나라고 한다.
다시 마드리드로 돌아와 왕궁을 관람하였다. 스페인국왕은 이 왕궁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기거하며 이 왕궁은 행사 때만 찾는다. 스페인은 입헌군주국 형태의 왕국이지만 실제 행정집행은 총리와 내각에서 이루어진다. 9세기경에 건립된 카스티야 왕가의 궁에 합스부르크 왕들의 성이 있었는데 1734년 화재로 무너지자 필리페 5세는 1738년 새로운 궁전을 지어 현재의 왕궁이 되었다. 길이가 140m나 되는 엄청난 규모로 이오니아 양식의 기둥과 도리아양식의 벽기둥으로 장식되어 있다. 아쉽게도 이곳을 촬영금지구역이다. 마드리드에도 스페인 광장이 있다. 물론 세비아의 스페인 광장이 더 이름다웠으나 마드리드의 스페인광장은 돈키호테가 말을 타고 있는 모습의 동상과 그 저자 세르반테스의 거대한 석상이 있었다. 고작 한 소설의 작가를 위해 저런 거대한 석상을 만들다니, 세르반데스는 성서위주의 문학이 주류를 이루는 그 시대에 돈키호테라는 코믹한 인물을 등장시켜 문학의 새로운 조류를 창조해 내었다는 점에서 추앙받는다 한다.
마드리드왕궁
마드리드 스페인광장의 세르반데스석상과 돈키호테의 말탄모습
마드리드 도심에 투우장이 있었다. 스페인의 투우도 지방마다 구분된다고 한다. 마드리드의 투우는 소와 사람 중 둘 중에 하나가 죽어야 끝난다. 바르셀로나에서는 투우가 잔인하다고하여 금지시켰다. 버스는 마침 투우장을 지나갔는데 마침 투우가 있는 날이라 많은 사람들이 운집해 있었다. 오늘 출전하는 투우사는 연봉으로 25만 불 정도 되는 유명투우사라고 한다. 스페인에는 투우사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이 있고, 시즌에는 주 2회 정도 경기가 열린다.
1561년 만들어진 마드리드는 평균고도가 635m이며 인구 540만명의 도시로 스페인말로는 ‘마드리’라고 한다. 스페인에서 로마의 유적이 없는 유일한 도시며 1919년 지하철이 개통되었다.
5월 22일 마드리드공항에서 오전 11시 35분 UA로 시카고의 Ohare공항으로 돌아오니 오후 5시 40분. 10박 11일의 여정이 모두 끝났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첫댓글 봉근형님 책한권쓰시죠 정말멋집니다 ^^
유럽여행기 잘 읽었읍니다..
너무 상세한 설명으로 마치 내가 여행하고있는 착각이 드네요..
감사합니다...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사진이 좀 부실해서 죄송.
원정등반때 보이지 않는다했더니 유럽과 아프리카를 넘나드는 여행을 하셨군요.특히 두 문화가 공전하고 한국 장터에서 볼 수있는 몇가지 물품을 그대로 볼 수있어 친근감을 느꼈던 나라. "" 30주년 축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