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정걸은 이순신이 돌아간 후 혼자 바닷가에 털썩 주저앉은 채 저물도록 웅크리고 있었다.
이순신이 대화 끝에 마지막으로 웅변한
‘전라 좌수영을 이끌어가는 수령 열한 사람 가운데 바다에서 전선을 이끌고 적과 싸워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하 장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라 우수영, 경상 좌수영, 경상 우수영, 충청 수영도 결코 예외가 아닙니다. 이제 곧 왜노들이 전쟁을 일으켜 대대적으로 몰려올 텐데, 바다를 지키는 수령과 장졸들이 이 지경이면 나라가 망하고 백성들이 도륙당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 일을 어찌 대비하면 좋을는지요?’
라는 말이 심장을 찌르고 간을 녹여버리는 것만 같았다. 눈앞이 갑자기 흐려져 수평선이 어디인지 구분도 되지 않고, 하늘빛이 푸른지 누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을묘왜변 때 도순변사 이준경 영감께서 나를 자신보다 먼저 남쪽으로 내려가라면서 숙배(임금께 올리는 인사)를 생략할 수 있게 해주십사 임금께 주청하신請除肅拜先爲下送 것은 무엇 때문이었던가? 내가 이곳을 고향으로 둔 사람이라, 지리와 지형을 숙지하고 있는 장점을 발휘해 적을 퇴치하라는 뜻이셨지! 백성들을 지켜내는 데에는 전투가 벌어지는 고장 출신 장수가 제일 낫다는 판단은 고금의 진리인 것이야!
그렇다면 지금 어떻게 하는 것이 옳나? 이순신의 말처럼 수전을 치러본 장수가 오늘의 조선에는 전무하다. 정말 큰일 아닌가? 장졸들도 백성들도 다 죽고, 나라가 망할 지경이다.
… 나는 여러 고위 벼슬을 지낸 사람이다. 바야흐로 일신을 바쳐 나라와 임금에게 보답해야 할 시점이 온 것이야! 이토록 늙은 나이에 새삼스레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도 없지! 방진이 살아 있다면 틀림없이 제 사위를 도와주는 것이 사직과 백성을 돕는 길이라고 말할 터!’
드디어 정걸은 31세나 연하의 후배 아래에서, 30년 전에 이미 역임했던 종4품 조방장 벼슬을 맡아 복무하게 되었다. 선조가 장계를 받고, 즉 정걸을 전라좌수영 조방장으로 임명해 달라는 이순신의 요청이 있자 이렇게 말했다.
“정걸이 여든을 앞둔 나이에 조방장을 맡아 충신의 모범을 보이겠다고 하니 그저 경탄할 따름이오. 하후연의 목을 베어 관우, 장비, 마초, 조운과 더불어 촉의 오호五虎장군으로 이름을 날린 백전노장 황충이 다시 살아오는 광경을 보는 듯하구려. 짐에게도 전라도에 오호 장군이 생겼도다.”
만약 정걸이 지금 조정에 들었다면 선조는 그의 허연 수염과 휘날리는 백발을 바라보며 어주 한 잔을 호쾌히 하사했으리라. 다만 이곳은 여수 좌수영인즉 임금의 옥음 대신 이순신의 낭랑한 목소리가 그의 어깨 위에 살포시 내려앉을 뿐이다.
“봉이와 회는 영공께 인사를 올려라.”
[다음 날 : 1592년 2월 13일, 밤]
전라 병사 최원의 서한을 두고 이순신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정걸도 이윽고 자리를 떴다. 동생 우신, 조카 봉, 아들 회도 숙소로 들었다. 곁에 아무도 없는 밤, 이순신은 혼자 방에 앉아 최원의 서한을 다시 펼쳐든다.
전쟁이 터진다는 소문이 나라를 휩쓸고 있습니다.
세상이 흉흉해서인지, 열일곱 나이로 무과에 급제해 갓 스물에 녹도 권관으로서 왜적 격퇴에 누구보다도 용맹을 떨쳤던 청년 장수 호연浩然이 유난히 그립습니다. 살아있으면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인물이라 생각하니 애통하기 그지없습니다. 오죽하면 전라도 백성들이 그가 전사한 손죽도를 큰大 인물을 잃은損 섬島이라 하여 손대도損大島라 바꿔 부를까 싶어 새삼 원통합니다. 그래도 호연의 장렬한 생애는 우리 전라도 군사들 모두의 가슴속에 뜨거운 불덩이로 시퍼렇게 살아 있으니 왜적이 쳐들어오는 날 그 진가를 드러내겠지요.
설날 선물로 화살을 보내는 현실이 안타깝지만 어쩌겠습니까. 왜적이 쳐들어올 조짐은 너무나 완연한데 조정 높은 양반들은 그저 권세 다툼만 하고 있으니…. (하략)
최원은 이대원(1566~1587)의 애통한 죽음을 돌이켜본 뒤, 이 지역 장졸들이 한결같이 그에게서 깊은 감명을 받은 바 있으므로 전쟁이 발발하는 날이면 왜적을 무찌르는 데 서로 앞을 다툴 것이라고 했다. 그 대목이 특히 이순신의 마음을 찔렀다.
‘걸출한 인재가 그토록 허망히 하세下世하고 만 것은 나라 기강이 아주 무너진 탓이야…. 이 나라가 어찌되려는 겐지….’
한숨을 몰아쉬는 이순신의 뇌리를 호연浩然 이대원에 읽힌 비사悲史가 하릴없이 스쳐 지나간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