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문학 2019년봄호(90호)/ 광주광역시문인협회/ 2019
천성/ 강경화
한때는 보란 듯이 떵떵거리며 폼도 잡았고
혹한엔 세상 쓴맛도 혹독히 겪어 알 텐데
저 나무
버리지 못한 천성
또 욕심껏
꽃 매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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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꽃/ 이수윤
사라진 것들을 밝히는 뼈가 있다 세월 밖에 밀렸다가 발견되는
미라처럼
쓰고도 떫었던 능선들 굽이굽이 환하다
복제된 이 야성의 유전자는 꿈이다 흐르며 출렁이다 에돌아
빚은 결정
태양을 바로 볼 수 없는 정오 무렵 초점처럼
바뀐 이름 수소문해 너에게로 가는 길 위 서쪽 해는 왜 이다
지 은밀하게 뜨거운지 줄기를 타고 오른 바다가 피워내는 아
픈 꽃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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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안 육각바위/ 전학춘
깊은 처마 밑 기암절벽에
교묘한 조각 빚고
후손들 감동하라
유인하는 바다는
불후의 예술가일까,
교만한 광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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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월/ 조민희
붓질하는 소슬바람
해거름 밀물 든다
갑오징어 구름 한 입 덥석 물다 먹물 튀네
점점이
벼 그루터기
후룩 나는 까마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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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순/ 서향숙
거짓말일기를 쓴 일
엄마에게 말대꾸하며 고집부린 일
언니하고 방청소 땜에 싸운 일
당장 고쳐야겠어
겁이 덜컹 난 희영이
대나무 밭 사이에서
노르스름한 손가락
하늘로 쭉쭉 뻗으며
잘못했다고
야단치고 있구나!
대나무 밭 곳곳에서
크고 작은 잘못을 고치라며
꾸중하는 손가락이
자라고 있어
더 크게
더 크게
더 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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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가는 길/ 이문석
며칠 전 엄마가 돌아가신 내 친구 영식이.
저만치 앞서 힘없이 걷고 있다.
어깨에 멘 책가방
얼마나 무거울까?
엄마 잃은 슬픔도
보고 싶은 그리움도
함께 메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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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문학 2019년 여름호(91호)/ 광주광역시문인협회/ 2019
강물/ 오승준
가기 위해
더 멀리 가기 위해
오늘도
나는
너에게
손을 내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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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닥불을 피우면서/ 이춘배
잘 마른 삭정이 한 개비
모닥불이 지펴지지 않네
큰 장작개비라도 한 개로는
불꽃을 활활 일으킬 수 없네
여럿이 포개고 겹쳐
얽히고설킨 틈새에서 화르르
아름다운 꽃불 피워 올리네
나는 한 개비 땔나무 가지
받쳐주고 기대고
짓눌리고 부딪쳐서
송진같은 눈물이 새어나면서도
보듬고 뒹굴고 간지럼도 태우다가
숨막히는 연기 장막 들추고 까르르
꽃웃음 활짝 피워내기도 한다네
불꽃을 혼자서는 일 수 없다네
타닥타닥 타들던 불꽃도
어느덧 자지러지고
알불로 이글거리다가 하얗게 쇠어져
바람타고 잿가루로 사라지고 말 것이네
잔열은 잠시 온화하다 말 것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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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과 봄 사이, 하루/ 정금숙
초봄의 하루는 여전히
찬바람이 허공에서 나풀거리고
햇빛은 웅크려
허리를 펴지 않는다
우려낸 차 맛이 은은하게
시 한 편을 적시는 오후
오래 전 어머니와의 이별을
절절하게 담았던 글이
책장 사이에서 울컥한다
조각난 꽃잎에 수를 놓듯
다독이는 마음은
꽃의 눈물처럼 번져
겨울과 봄 사이에서
종일 무늬를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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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칼코마니/ 정숙인
그림 한 점 호수에 뜨네
산은 호수에 몸을 맡기고
호수는 산을 품에 안고
함께 어우러진 산과 물
산이 없다면 저렇듯 아름답진 않으리
호수가 없다면 저렇듯 여유롭진 않으리
호수엔 낮달이 지나고
오색이파리들 물 위에 수놓을 때
나란히 어깨를 기대고 가는 이들
오롯이 하나로 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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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적산에는/ 주전이
느릿한 햇살로 꾸벅꾸벅 조는 봄날이
선물해 준 낮잠 언제인 듯 사라진
천천히 흘러갔어도 좋으련만
먼 길 걸어온 나그네처럼 녹록지 않는
소망과 현실이 어긋난 불멸의 길일 때는
할 수 없이 분적산으로 갑니다
산아래 작은 저수지는 나의 마지막 정거장
그곳 숲속 경쾌한 첩첩 굽이치는 메아리
탁탁 타다닥 탁탁타탁 딱따구리
어느 쪽 푸른 숲인지 둥지 짓는 소리
1초나 2초 간격 지속적으로
도르르륵 도르르륵 바람 불어 파장하며
간간히 첨벙첨벙 물빛사이로 잠기다가
바람이 불면 쩌렁쩌렁 울립니다
둥지 짓는 소리만 들어도 좋은데
2급 장애인 청년 낚싯대 쳐들며
저기 소나무 끝 하늘을 보시오
오늘은 원앙 한 쌍이 날아와
연꽃사이 잠방거리고 있소
참 오늘 행운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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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벙벙/ 노창수
날아가는 풍선 봉지
쩌쩌 아이 잡으랜다
엄마 등 엉덩이 들썩
검지질로 돋움한다
대인동 시장 골목에
웃음 사탕 깔깔 봉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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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살이/ 문제완
있는 척, 잘사는 척
젊은 세월 견딘 힘이
오랜 해 질척질척
묵힌 삶이 되어가고
청초한 젊은 얼굴도
옛사람을 닮아간다
좋은 척, 괜찮은 척
힘을 내던 혼잣손에
당찬 척 살던 삶도
설핏설핏 지나간다
층층이
모여든 기척에
마음마저 탑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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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새/ 서연정
가장 작은 새가 가장 높은 가지에서
꽃눈만한 울대로 아침을 열고 있다
어둠이 안 걷힐까봐, 잠시라도 멈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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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작품의 세트장 ‘죽녹원’/ 라규채
...(상략)
나는 죽녹원 대나무의 외형적 상징성인 색(色)을 공(空)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가시적 실체가 없는 바람을 대숲에 끌어들인다. 바람이 일지 않을 때에는 카메라를 가슴에 안고 대숲 사이를 이리저리 휘젓고 다니며 춤을 춘다. 내 스스로 바람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대나무라는 대상을 통해 ‘물질은 비어있는 것이며, 비어있는 것은 곧 물질이다(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라는 우주의 본질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서다.
내가 대숲에서 카메라를 안고 춤을 추며 사진을 통해 대숲의 형태를 해체하는 것은 사실 해체가 아니라 대숲이라는 존재의 변함, 곧 무상함을 포착해 내는 행위이자 실체 없는 대숲의 무아(無我) 곧 공(空)을 얻고자 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나의 작품에는 대나무의 형상적 실체는 보이지 않고 항상 유(有)와 무(無)의 경계인 푸른빛만이 존재한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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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타리 밖 염소처럼/ 박용수
...(상략)
녀석은 울 밖에서도 항시 경계하느라 바빴다. 그래서 배불리 먹지도 못했고, 살도 찌지 못했으니 주인에게 쉽사리 잡히지 않았다. 노인의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았다.
인생도 염소들의 삶과 같지 않을까. 조금만 방심하면 살이 찌고 둔해지기 쉬운 것이 우리 삶이지 싶다. 간결하게 살고 맑게 생활하려는 의지를 놓는 순간, 탐욕으로 비대해지는 우리의 인생 말이다. 사육되지 않고 스스로 주체적으로 사는 저 염소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도 매일 매일 육신의 무게를 비우고 영혼의 뜀뛰기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될 성 싶다.
우리 인생에도 수많은 철조망들이 있다. 어떤 것은 뛰어 넘어야 하고, 또 어떤 것은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극복해야 할 것이다. 탐욕에 눈이 멀거나 현실에 안주하는 것은 트럭에 실리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늘 창 너머, 비쩍 마른 채 하늘을 응시하며 힘차게 뛰어오르는 염소가 오늘 아침 나의 삶에 경종을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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