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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도시형중등대안[단재학교] 원문보기 글쓴이: 대표교사박준규
어제 구파발성당에서 저녁 7시부터 9시간까지 꼬박 2시간 동안 공연을 펼쳤다. 누리반 아이들이 1시간을 촘촘히 수 놓았다. 나머지 한 시간은 외부 찬조 프로그램으로 꾸몄다. 전체적인 구성이 구경거리로서 손색이 없었다. 구경 온 분들은 시간이 아깝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내 아이가 출연하는 프로그램이니 오죽하겠는가. 어른에게만 5천원 입장료를 받았는데 40만원이 모였다. 이 중에는 은빛초 다른 반 친구들이 구경왔다가 1천원씩 모금함에 넣고 간 녀석들이 있었단다. 얼추 어른 아이 합쳐 150명 정도가 관객이 되었다. 누리반 아이들은 예상을 넘는 관객 동원과 반응에 기분 좋은 긴장을 하고 흥분했다. 지난 번 구파발역에서 리스 판매한 대금 37만원과 공연수익금 40만원을 합쳐 77만원을 성우회 양로원에 드리고 왔다. 누리반 전체가 다녀왔다. 아이들은 평생 기억할 것이다. 나눔의 체험을 한 사람만이 다시 나눔을 실천할 수 있다. 사랑 받은 사람이 사랑할 수 있는 것처럼. 교사로서 일련의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추구한 목표가 있다면 나눔의 체험과 기억일 것이다. 초등학교 교육과정의 전체를 공연으로 가져가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 부모들은 초등학교 연령의 아이들이 교과수업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불필요하고 고통스러운 것인지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본인이 직접 겪었으면서도 잊은 것이다. 그래서 통증과 고통이 구분돼야 하는 것이다. 통증은 신경이 잡아내지만 고통은 대뇌 시스템이 만든 결과물이기 때문에 기억으로만 남는다. 기억을 지우면 고통도 남지 않는다. 더 나아가 대뇌를 조작한다면(세뇌한다면) 애초에 고통 없이 "힘듦"을 짊어지고 있을 수 있다. 내가 늘 주장하는 청소년 4대 과업-놀이, 여행, 독서, 운동(무순)-은 카이스트 정재승 교수의 얘기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다. 하지만 이런 4가지 필수 활동 조차 어린이(통상 틴에이저 이전 상태)들에게 별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한다. 여행, 독서, 운동, 놀이 등이 아동에게는 다음 단계 발달을 위한 초석으로 반드시 작용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거꾸로 여행하지 않아도 독서하지 않아도 청소년이 돼서 시작하면 훌륭하게 자란다는 주장이다. 90년 대 MRI가 발명되고 살아 있는 인간의 뇌를 들여다보는 기술이 획기적으로 증진되면서 새롭게 나온 주장이라고 했다. 내 어린 시절의 발달과정을 더듬거나 아들, 딸의 성장을 보면서 전적으로 동의하게 되었다. 하지만 현실은 거꾸로가 아니겠는가. 어린 아이일 때에 놀이, 여행, 독서, 운동을 시키면서 중학생 이후에는 교과 수업과 시험대비활동('시험공부'라고 이름을 붙이고 싶지 않다. 공부가 아니니까)으로 언제나 바쁘지 않은가. 불필요할 때 수행하고 필요할 때는 하지 않는다. 대단히 어리석은 일이다. 그렇다면 초등학생은 무엇을 해야하는가. "표현"활동을 해야한다. 본능적인 자기 표현(희노애락에 관한)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을 막으면 안 된다. 아이들의 본능적 표현을 자제시키는 것을 사회성 발달이라고 말하는 걱정스러운 상황이다. 학교는 본능적 표현을 하지 않을 수록 칭찬받는 왜곡된 성격을 가지고 있다. 남의 표현을 재현하는 것도 중요하다. 특히 어른이나 특정 분야의 전문가의 표현을 그대로 흉내내는 것은 어린이가 반복적으로 해야하는 과업이다. 그 중 가장 큰 비중이 말하기이며 일차적 흉내가 가족에게서 비롯된다. 부모 역할이 중요한 것은 이런 요소 때문이다. 부모라는 존재 자체가 교육적으로 무조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부모가 아니라도 아이가 충분히 흉내낼 수 있는 표본이 있다면(조부모나 보육원의 후견인 등) 부모 없이도 잘 클 수 있다. 말하기 외에 그리기, 노래하기, 연주하기, 만들기/꾸미기, 춤추기, 음식만들기 등이 흉내내기 활동이 된다. 실내에서 레고 조립을 하든 밖에서 모래놀이를 하든 흉내내기의 일환으로 이루어진다. 레고블럭으로 자동차나 우주선을 흉내내는 것이며, 모래를 파내고 두드리고 쌓으면서 세상의 인공건조물을 흉내낸다. 만약 아이들이 흉내 차원이 아닌 창조적인 작업을 했을 때 어른들은 걱정을 한다. 아이가 상상하지 못한 구성을 블럭으로 만들 때 어른들은 아이의 지능이 낮다고 생각하는 것이 대부분이지 않는가. 이러한 표현활동, 흉내내기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반복'이다. 아이들은 반복함으로써 성장한다. 반복해서 먹고 자면서 몸이 성장하고 흉내내기를 반복하면서 지능과 정서가 성장한다. 아이들에게 반복은 지루함이 아니라 즐거움이다. 어른들이 이해하지 못할 뿐이다. 어린이의 반복을 고민하면서 살아 있다면 140이 넘은 마리아 몬테소리가 들려주는 얘기에 귀기울여보자. ----------------------------- 연습의 반복 -마리아 몬테소리-
내가 처음 눈여겨보게 된 현상은 세 살 가량 된 작은 여자 아이에게서 나타난 것이다. 이 아이는 일단의 나무실린더를 그 각각에 들어맞게끔 파진 구멍에 끼워 맞추었다가 다시 뽑아내는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이 실린더는 병마개와 흡사하게 생겼는데 이것들은 크기 별로 층층이 정확하게 모아져 있었다. 이것들은 제각기 구멍에 맞게끔 되어 있었다. 나는 이 작은 아이가 아주 재밌어하면서 이 연습을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러나 속도와 정확도에서는 지지부진하였다. 아이는 이 모든 일을 동일한 움직임 속에서 쉬지 않고 계속했다. 나는 이같은 일을 관찰하는데 익숙해서 이 작은 아이의 연습을 세어 보기 시작했다. 이 아이의 집중하는 독특한 행동이 어느 선까지 도달하는지 알아보고 싶었고, 그래서 한 선생님에게 다른 아이들이 모두 방 안에서 펄쩍펄쩍 뛰어 돌아다니도록 부탁했다. 이 상황에도 불구하고 아이의 집중상태는 방해를 받지 않고 계속되었다. 나는 아이가 앉아있는 작은 안락의자를 조심스럽게 붙잡고는 그것을 아이와 함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이 아이는 재빠르게 움직여 실린더를 집어 들어 그것을 자기 무릎 위에 올려놓고는 지금까지 했던 연습을 방해받지 않고 계속했다. 그렇게 세어 보니 아이는 그 연습을 4회나 반복했다. 그 다음 아이는 꿈에서 깬 것과 같이 그 일을 멈추고는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아이의 반짝이는 눈은 만족감에 가득 차서 방 안을 획 둘러보았다. 아이는 분명 자신을 다른 방향으로 이끌었을 지도 모를 나의 행동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외적인 이유 없이 아이는 그 일을 끝냈다. 무엇이 끝났으며, 그렇다면 왜 끝났는가? 그것은 어린 아이 내면의 알 수 없는 깊이로부터 얇은 틈을 통해 최초로 솟아오른 것이었다. 한 작은 아이가 앉아 있었다. 그 아이의 주의력은 특별히 어떤 것을 향해 집중하지 않은 채 습관적으로 쉬지 않고 여기저기로 옮겨다니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 아이에게 그러한 집중력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그 아이의 자아는 모든 외적인 자극에도 불구하고 접근할 수 없게끔 되었다. 이 집중행위는 정확하고 과학적으로 구성되어 있는 학습 교재를 가지고 노는 손의 율동적인 움직임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어서 다른 아이들에게도 비슷한 경우가 되풀이 되었다.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아이들은 아주 신선해지고 평안해지고 생명력으로 가득차서 커다란 기쁨을 체험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렇듯 외부 세계와 거의 그리고 완전히 차단된 상태로까지 가는 집중의 행위들에 어떤 규칙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모든 어린이들에게 공통적이며 대체로 모든 연습에서 같은 방식으로 나타나는 진기한 행동 양식이 존재한다는 점을 곧바로 인식하게 되었다. 그것은 내가 나중에 "연습의 반복"이라고 이름 지었던 어린이 활동의 본질적 특징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이 꼬장꼬장한 작은 손들이 일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하루는 이 어린 아이들에게 어떤 쓸모있는 것을 가르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말하자면 손 씻는 법이었다. 여기서 나는 아이들이 자기들 손이 이미 깨끗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쉬지 않고 손을 씻고 있는 것을 관찰했다. 그들은 집에 돌아와서도 바로 다시 손을 씻었다. 몇몇 어머니들은 자기 아이들이 아침에 없어져서 찾아보니 설거지 통에서 손을 씻고 있더라고 설명해왔다. 그 아이들은 깨끗해진 손을 자랑스레 여겼다. 또 아이들은 낯 선 사람들에게 자기 손을 자꾸 내어보였기 때문에 구걸하는 거지로 오해받았다. 이 연습은 더 이상 실제적인 목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되풀이되었다. 이런 현상이 다른 많은 경우에도 발생하였다. 그리고 아이들은 어떤 연습이 아주 정교하게 되면 될 수록 이를 지칠 줄 모르는 반복적 행동을 위한 자극으로 여기는 듯했다.
M. Montessori : Kinder sind anders. Frankfurt, Berlin, Wien 1981, S. 7-10 ; S.165-167 ------------------------------------------------------------------------ 누리반 아이들과 공연을 추진한 것은 이런 반복이 가져오는 성장의 비밀 때문이다. 아이돌 그룹의 노래에 맞춰 안무를 연습하는 것은 반복일 뿐이다. 아이들은 기쁘게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피페라는 새로운 악기를 받아들고 운지법을 익히고 교사가 제공한 악보대로 소리를 내는 과정은 또한 반복일 뿐이다. 연극을 무대에 올리려면 반드시 반복의 과정을 겪어야 한다. 난타의 본질도 반복에 있다. 리듬을 반복적으로 외워야한다는 점도 있지만 리듬 자체가 반복적이다. 반복적 리듬만이 사람을 편하게 해준다. 끊임 없이 변하는 리듬은 참기 힘든 소음일 뿐이다. 반복의 결과가 표현으로 나오도록 의도적으로 커리큘럼을 구성한 것이 "공연"으로 요약된다. 그러니 공연을 초등학교의 교육과정의 핵심에 배치하는 것은 유효한 상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