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시인은 세 문장으로 고독을 자신의 존재와 자연의 움직임으로 연결한다.
서시 /내 존재의 8할은 고독이었다. 비가 내리면. 고독이 춤을 추었다.
시인은 고독을 자신의 감정이라 하지 않는다. 자신의 존재를 이루는 본질이라고 선언한다. 고독은 외로움과 다르다. 외로움은 누군가의 부재에서 생긴다. 그런데 고독은 누군가와 함께 있어도 사라지지 않는 존재의 조건일 것이다. 왜 10할이 아니라 8할일까? 남은 2할에는 사랑, 사람, 세상과의 관계가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 2할이 있어 8할의 고독을 견딜 수 있었는지 모른다. 비가 내리면. 보통은 '비가 내리면 고독이 춤을 추었다'라고 이어질거다.
그런데 비가 내리면서 글이 멈춘다. 고독이전의 정적이 생긴다. 시의 여백을 생긴 후 고독이 춤을 춘다 고독은 흔히 침묵하고 웅크리는 것이다.
그런데 곽시인의 고독은 춤을 춘다. 비가 내리면 곽시인의 고독은 살아 움직인다.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었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고독이 춤추며 자신의 존재한다. 고독을 극복하거나 제거하려는 것이 아니다. 고독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고독은 결핍인가, 존재의 에너지인가? 곽시인의 고독은 결핍으로 출발한다. 하지만, 움직이는 에너지가 된다. 존재의 8할을 차지하는 고독이 비를 만나 춤을 춘다는 것은, 자신의 가장 깊은 내면이 외부 세계와 만나 생명력을 드러낸다는 뜻이 아닌가.
그 춤이 즐거운 춤인지는 알 수 없다. 슬픔의 춤일 수도 있고, 삶을 견디는 춤일 수도 있다.
고독의 해소가 아니라 고독의 생동이다. '고독이었다.''춤을 추었다.'는 과거형이다.
곽시인은 지금 고독을 말하면서 지나온 자신의 존재를 돌아보고 있다. 곽시인은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세 문장으로 압축한다. 자신의 존재를 고독으로 규정하고, 그 고독이 춤추었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고독하게 살았으나 고독에 갇혀 살고 있지는 않았다. 8할의 고독. 실존의 조건. 2할의 온기. 생을 지속하게 하는 연대의 닻. 비가내린다. 고독이 춤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