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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렘과 '제노사이드'
여호수아 8:36-41
36. 여호수아는 온 이스라엘을 거느리고 에글론에서 헤브론으로 쳐 올라가
37. 그 성을 공략하고 왕과 모든 위성 마을의 주민을 칼날로 무찔러 모조리 없앴다. 에글론에서처럼 그는 그 성을 진멸하고 숨 쉬는 것이면 하나도 살려두지 않고 죽여버렸다.
38. 여호수아는 온 이스라엘을 거느리고 돌아와서 드빌을 쳤다.
39. 여호수아는 그 성과 모든 위성 마을을 공략하여 왕을 사로잡고 사람들을 칼로 무찔렀다. 그리고 숨쉬는 것이면 하나도 살려두지 않고 모조리 죽여버렸다. 그는 드빌과 그 왕을 헤브론을 해치운 것처럼, 리브나와 그 왕을 해치운 것처럼 그렇게 해치웠다.
40. 이렇게 하여 여호수아는 그 온 지역을 정복하였다. 산악 지대와 네겝 지방과 야산 지대와 비탈진 지역과 거기에 사는 모든 왕들을 쳐서 한 사람도 살려두지 않았다. 이렇게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께서 분부하신 대로 숨쉬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모조리 죽여버렸다.
41. 여호수아는 카데스바르네아에서 가자에 이르기까지 정복하고 또 기브온에 이르는 고센의 전지역을 정복하였다.
인류가 저지른 범죄 중 가장 큰 것은 '제노사이드(genocide)‘ 즉 ‘집단 살해’입니다.
이 개념은 폴란드 출신 법학자 라파우 렘킨(1900–1959에 의해 제시되었습니다. 그리스어로 인종을 뜻하는 제노스(Genos)와 살해를 뜻하는 라틴어 동사 카이도(Caedo)의 합성어로서 주로 '집단 살해'라고 번역됩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시기인 1944년, 오스만 제국에서 발생한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의 영향을 받아 이 단어를 처음 사용했는데 1948년에 일반적인 학살과는 구분되는 일종의 범죄를 가리키는 용어로 정립되었습니다. 이 용어가 학계나 교육계 등에서 일반적인 용어로 확산된 것은 1970년대 전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노사이드’는 고의적으로 혹은 제도적으로 민족, 종족, 인종, 종교 집단의 전체나 일부를 제거하는 것입니다. '제노사이드'는 한국어로 ‘집단 살해’로 번역되나 반드시 살인을 수반하지 않더라도 특정한 인구 집단을 파괴할 의도로 행해진 모든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행위를 포함합니다. 그 주체는 정부나 정규군일 수도 있으나 민병대와 같은 자생적인 조직에 의해 수행되는 경우도 많죠. 만일 이러한 의도가 있다면 집단의 '절멸' 외에도 '민족적 거세'라는 목표 아래 행해지는 집단 성폭행이나 문화적 탄압 행위 등도 '제노사이드’로 분류됩니다.
집단 살해의 정확한 정의를 놓고 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있으나, 법적인 집단 살해의 정의는 1948년 결의안이 채택되고 1951년 발효된 유엔 집단살해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CPPCG)에 나옵니다. 이 협정 2조를 보면 집단학살은 민족, 종족, 인종, 종교 집단의 전체 혹은 일부를 파괴할 의도로 한 모든 행위를 말합니다. 구체적으로 ▲집단의 일원을 살해하거나 심각한 육체적·정신적 위해를 가하는 것 ▲고의적으로 육체적 파멸을 의도한 생활 조건을 강제하는 것 ▲집단 내 출생을 막는 것 ▲집단의 아동을 다른 집단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것 등이죠.
그런데 이 '제노사이드'가 구약 성경에 많이 나옵니다. ‘헤렘(חרם)’이라 불리는 것인데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과정에서 일어납니다.
'헤렘‘은 일반적으로 ’완전히 파괴하다‘ 또는 ’하나님께 바치다‘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이는 주로 전쟁 상황에서 적의 도시나 재산을 완전히 파괴하거나 하나님께 바치는 행위를 가리키죠. 이스라엘 민족은 전쟁에서 승리한 후 적군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헌납하고, 자신이 거주할 땅 안의 우상들 또는 거주민들에 대해 '헤렘'을 시행할 것을 명령받았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이 명령은 이스라엘이 외부의 부정적인 영향을 받아 도덕적 및 영적 오염을 피하기 위한 방편으로 해석됩니다.
'헤렘'은 구약성서에서 모두 80회 언급되는데, 역사서에 49회 등장합니다(신명기: 9회, 여호수아서: 27회, 사사기: 2회, 사무엘상: 8회, 열왕기상: 2회, 열왕기하: 1회). 이것은 하나님께 바치는 '선물', 재판의 '판결', '진멸'과 같은 뜻입니다. '진멸'이 가장 중요한 뜻으로 쓰였습니다.
신명기에서 명령하고 여호수아서에서 실행하는 ''헤렘''은 기독교의 오랜 고민이었습니다. '헤렘'은 기독교가 벌인 전쟁을 '거룩한 전쟁'이라고 정당화하는 도구가 되기도 했습니다. 11세기 말에서 13세기까지 벌어진 십자군 전쟁이 대표적입니다. 이 전쟁은 교황 우르바노 2세의 주도로 시작되었으며,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성지를 탈환한다는 종교적 사명으로 치장되었습니다. 십자군 전쟁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명령에 따른 성전(聖戰)이며 ▲악과 불의에 대한 전쟁 ▲신에게 바쳐진 전쟁으로 간주 되었습니다. 이는 '헤렘'의 전통을 따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 전쟁에 참여한 자들이 명예와 영광, 그리고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나설 수 있었던 거죠. 최근에 벌어지고 있는 이스라엘의 가자와 헤즈볼라에 대한 공격도 ’헤렘‘ 전통을 따르고 있습니다.
'헤렘’에 대한 성서 이야기를 살펴볼까요? '헤렘‘은 가나안 정복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명령인데, 맨 처음 모세에게 주어집니다. 신명기 7:1-2에는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이제 너희가 들어가 차지하려는 땅에 너희를 이끌어 들이시고 인구가 많은 민족들을 너희 앞에서 모조리 쫓아내실 것이다. 그들은 너희보다 인구가 많고 강대한 헷족, 기르가스족, 아모리족, 가나안족, 브리즈족, 히위족, 여부스족, 이렇게 일곱 민족이다.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는 그들을 너희 손에 붙여 꺾으실 것이다. 그때 너희는 그들을 전멸시켜야 한다. 그들과 계약을 맺지 말고 불쌍히 여기지도 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러한 명령에 따라 여호수아는 가나안 백성들을 상대로 조직적 학살을 감행하죠. 남녀노소는 물론이고 가축들까지도 모두 진멸합니다.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 정복의 첫 번째 관문인 여리고 성을 함락시키고 '헤렘’을 수행합니다. 하지만 아간의 욕심으로 완전한 '헤렘‘이 되지 못하죠. 그 결과 아이성 싸움에서 이스라엘은 어처구니 없는 패배를 당합니다. 첫 번째 아이성 전쟁이 실패한 다음, 탈취물을 빼돌린 아간과 그의 자녀, 심지어는 짐승들까지도 함께 돌에 맞아 죽습니다. 그런 다음에 두 번째 공격이 성공하고 아이성의 전체 인구 1만 2천 명이 살육되는데, 도망가는 생존자들도 학살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수 8:24-25).
여호수아의 '헤렘' 정복 전쟁은 모든 땅에 걸쳐서 진행됩니다.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이 진멸(헤렘)당했습니다. 여호수아 10: 40절은 “이렇게 하여 여호수아는 그 온 지역을 정복하였다. 산악 지대와 네겝 지방과 야산 지대와 비탈진 지역과 거기에 사는 모든 왕들을 쳐서 한 사람도 살려두지 않았다. 이렇게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께서 분부하신 대로 숨 쉬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모조리 죽여버렸다”고 기록합니다.
가나안 정복과정에서 모든 족속이 다 '헤렘' 당한 것은 아닙니다. 세겜 사람들은 살아남았는데, 이것은 아마도 애굽 땅으로 이주하기 전 족장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오래된 부족 간의 동맹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창 12:4-9). 그리고 가나안 땅에 살던 기브온 사람들은 이스라엘을 위해 나무를 패며 물을 긷는" 종이 되었습니다.
또 하나는 고고학 발굴 결과로 알려진 사실들입니다. 핀켈슈타인과 같은 자유주의 고고학자들은 출애굽기에 묘사된 대규모 이주 사건이 실제로 일어난 일과 다르다고 보고, 이 사건이 나중에 구술 전통을 통해 형성된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집트의 기록이나 유적에서 출애굽 사건을 명확하게 입증할 수 있는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말하죠. 지금까지 발굴된 고고학적 증거는 이스라엘이 대규모로 이집트를 탈출하지도, 단기간에 가나안 땅 전체를 정복하지도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일부 사람들이 이집트를 탈출했으며, 일부가 정복 전쟁을 벌인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여호수아서가 묘사하는 것과 같은 대규모 정복 전쟁은 없었다는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은 '헤렘'의 실현으로 끝났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여리고성 함락을 필두로 가나안 중부지역을 점령한 이스라엘은 기브온과의 화친을 맺고 남부지역 정벌에 나섭니다. 여호수아서 10장에는 이스라엘이 서남부 산악지역의 다섯 왕의 동맹을 무찌르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 왕 아도니세덱이 헤브론 왕 호함과 야르뭇 왕 비르암과 라기스 왕 야비아와 에글론 왕 드빌에게 전갈을 보내어 결성한 동맹이었죠. 이들은 이스라엘과 화친을 맺은 기브온을 칩니다. 기브온은 이스라엘에게 구원을 요청하고 여호수아는 밤새 진군해 아모리 동맹군을 기습합니다. 도망치는 동맹군을 추격하여 대승을 거둔 여호수아는 막케다 동굴에 숨어있는 다섯 왕을 끌어내 쳐 죽이고 나무에 달았습니다.
하지만 살육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죠. 막케다에서 리브나로(28-30), 라기스에서 에글론으로(31-35), 헤브론에서 드빌에 이르기까지(36-38) 닥치는데로 성과 거민들을 모조리 살육하였습니다. 그리고 성뿐만 아니라 그 주변의 위성 마을까지도 예외없이 집단 살해 즉 '헤렘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성읍들을 친 내용은 다음의 형식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여호수아는 그 성과 모든 위성 마을을 공략하여 왕을 사로잡고 사람들을 칼로 무찔렀다. 그리고 숨 쉬는 것이면 하나도 살려두지 않고 모조리 죽여버렸다. 그는 드빌과 그 왕을 헤브론을 해치운 것처럼, 리브나와 그 왕을 해치운 것처럼 그렇게 해치웠다(39절).” 즉 각 성읍에 대한 정복의 기록은 지명과 왕의 이름만 다를 뿐 살육 방식은 모두 동일하였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기록 형식은 25절의 "두려워하지 마라, 놀라지 마라. 힘을 내어라, 용기를 가져라. 너희가 원수를 칠 때 야훼께서 그들을 모두 이렇게 해치우시리라."는 말씀의 성취를 확인시켜 주기 위한 것이었죠.
또한 이것은 이스라엘의 완전 승리를 말해줍니다. 본문에서 “모든 사람을 진멸하여” “행한 것이 예리고 왕에게 행한 것과 같더라” 등의 표현도 이스라엘의 완전한 승리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실 때,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떤 대적과 싸워도 완전한 승리를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이죠.
40-41절에는 서남지역의 점령이 하느님의 명하신 것이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 싸운 결과라고 말함으로 '헤렘'의 정당성을 선언합니다. “이렇게 하여 여호수아는 그 온 지역을 정복하였다. 산악 지대와 네겝 지방과 야산 지대와 비탈진 지역과 거기에 사는 모든 왕들을 쳐서 한 사람도 살려두지 않았다. 이렇게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께서 분부하신 대로 숨쉬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모조리 죽여버렸다. 여호수아는 카데스바르네아에서 가자에 이르기까지 정복하고 또 기브온에 이르는 고센의 전 지역을 정복하였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러한 정복 행위도 하느님이 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지른 '헤렘', '제노사이드'는 마땅히 해야 할 의무였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헤렘'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근세사에서 대표적인 '제노사이드'(대량 학살)를 몇 가지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아르메니아 '제노사이드' (1915-1923)입니다. 이는 1차 세계대전 중 오스만 제국 정부에 의해 자행된 아르메니아인의 대량 학살과 강제 이주 사건입니다. 장기간에 걸쳐 체계적이고 계획적으로 진행된 학살로 약 1천 5백만 명의 아르메니아인이 피해를 입었습니다.
2. 잘 아시는 홀로코스트 (1941-1945)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나치 독일이 유럽 전역에서 유대인, 롬족, 동성애자, 장애인 등 다양한 집단에 대해 자행한 홀로코스트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잔인한 '제노사이드'입니다. 약 600만 명의 유대인들이 각종 강제수용소에서 학살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나치의 인종 차별적 이데올로기와 대규모 인권 유린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세계적으로 큰 충격을 안겼습니다.
3. 캄보디아의 크메르 루즈 학살(1975-1979)입니다. 캄보디아의 크메르 루즈 정권하에서 수백만 명이 정치적 입장, 사회적 신분, 교육 수준 등을 이유로 학살당했습니다. 폴 포트 지도 아래에서 인민의 농업 집단화를 목표로 한 대규모 강제 이주와 학살이 자행되었으며, 인구의 약 25%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사건은 공산주의 이념을 극단적으로 구현하려고 했던 결과로, 대규모 파괴가 초래되어 인도적 비극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4. 르완다에서의 '제노사이드' (1994)입니다. 르완다에서 후투족 정부에 의해 투치족이 대규모로 학살당한 사건입니다. 약 100일 동안 80만 명에서 100만 명의 투치족이 살해되었고, 이 과정에서 강간, 고문, 고통스러운 죽음이 자행되었습니다. 이는 정치적 갈등이 인종 간의 폭력으로 변질된 전형적인 예입니다.
5. 미얀마의 로힝야족 '제노사이드' (2022)입니다. 최근 미얀마에서는 로힝야족이 정부군에 의해 조직적으로 박해당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인도네시아와 방글라데시 국경 근처의 아라칸 주에 거주하는 이슬람 소수민족으로, 정부는 이들을 무슬림으로 간주하여 차별과 폭력을 가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국제 사회의 경각심을 자아내고 있지만, 여전히 사건이 진행 중이고 많은 사람들이 난민으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6.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이스라엘의 가자 주민 등에 대한 학살입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 간의 이-팔 전쟁이 시작된 지 1년이 되었습니다. 지난해 10월 7일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하며 전쟁은 시작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마스의 완전 와해를 목표로 가자지구에 무차별 공습과 지상공격을 벌여왔죠. 가자지구는 완전히 폐쇄되었고 식량과 에너지, 의료품마저 끊겨 가자 주민들의 삶은 생지옥으로 내몰렸습니다. 이스라엘의 무차별 공격이 더해져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는데, 대다수 희생자들은 어린아이와 여성 등 민간인들이었습니다. 9월 초 현재 팔레스타인인 4만여 명이 사망했으며, 부상자도 10만 명에 달하고 있습니다. 3만여 명으로 추정되던 하마스 전투원들 중 1만~1만3000명이 사망했다고 이스라엘이 지난 5월 발표했으나 하마스 측은 이를 부인했습니다. 이스라엘군 사망자는 현재 약 700명, 부상자는 1만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죠.
가자 전쟁이 장기화 되며 이스라엘군은 피로해 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군이 건물과 도시를 폐허로 만들고 있지만, 지리를 잘 아는 하마스 전투원들은 매복전으로 끈질기게 버티고 있는 것이죠. 이런 가운데 전쟁을 끝내고 싶은 군 지도자들과 전쟁 지속을 원하는 네타냐후 연립정권과의 갈등도 갈수록 노골화되고 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네타냐후 연정은 이란과의 확전이라는 다른 돌파구를 찾고 있습니다. 이란을 자극해서 중동 전쟁으로 키우겠다는 것이죠. 미국을 뒷배로 한 네타냐후는 가자를 넘어 레바논의 헤즈볼라를 공격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공중전뿐 아니라 지상군까지 투입하여 헤즈볼라와 이란을 압박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레바논 무차별 공습과 융단 폭격으로 3100여 개의 건물이 폭파되고, 1400여 명 사망, 100만 명 이상이 피난길에 올랐다고 합니다. 무차별 공격으로 죽거나 다친 대부분은 민간인이라는 점에서 이스라엘의 만행은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하마스와 헤즈볼라 지도자 살해에 대한 보복으로 이란은 200여 기의 미사일 등으로 이스라엘을 공격하였죠. 이에 네타냐후는 또다시 이란에 대한 보복 공격을 다짐하고 있습니다. 네타냐후 연정의 과격파들은 이란의 석유 시설과 핵시설 공격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의 확전을 반대한다면서도 미국은 전투기와 병력을 중동으로 급파하여 이스라엘을 지원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50여 년 만에 제5차 중동전쟁으로 비화 될 조짐이 점점 뚜렷해 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류 역사에서 '제노사이드'는 여러 형태와 배경으로 발생해 왔으며, 이는 민족, 인종, 종교, 정치적 갈등의 결과로 발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잔혹한 사건들은 인류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로 남아 있으며, 다시는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함을 상기시킵니다. '제노사이드'의 방지를 위한 국제 사회의 규범과 법적 장치를 강화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어떠한 명분으로도 사람뿐 아니라 피조물을 마음대로 살상하는 행위는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정당화하려는 이면에는 추악한 인간의 욕심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뜻이 이처럼 왜곡되고, 특히 종교가 앞장서고 있다는 것은 우리 인류의 미래가 암울하다는 뜻입니다.
세계의 양심이 회복되고, 종교가 그 본분을 되찾아 더이상 전쟁과 억압이 용납되지 않는 세상을 향해 나가길 기도합니다. 이 뜻을 따라 사는 모든 이들에게 정의와 평화의 하느님 은총이 충만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