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창고 관리는 호조와 군기감, 각 지역 수령 등이 담당했지만, 화재, 습기 등을 모두 다 예방할 수는 없었다. 특히 전쟁이나 화재 등으로 창고가 불탈 경우 귀중품을 하나만 보관하면 복원할 수가 없으므로, 중요한 자료의 경우 분산 보관을 선택했다. 특히 국가의 중요 기록물인 실록(實錄)은 4부를 인쇄해 궁궐의 춘추관과 충주, 전주, 성주 4곳에 보관했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겪으며 전주를 제외한 3곳의 실록이 불타 없어지자, 이후 사고(史庫)를 태백산, 묘향산, 오대산, 정족산 등 방어에 유리한 전국 각지에 분산 배치해 두었다. 이로 인해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이 남아있을 수 있었고, 1997년 유네스코 세계 기록문화유산으로 선정될 수 있었다
궁궐 안에도 창고가 여러 곳에 분산 배치되어 있는데, 이는 사용처에 따라 쓰기 편하게 하기 위함도 있었다. 궁궐 안에는 무기고, 화약고, 장고(장독대), 책고, 주고(廚庫- 부엌 창고), 어차고(御車庫- 수레 보관), 연고(輦庫- 가마 창고) 등 다양한 창고들이 있었다. 임금은 평소 정사(政事)를 처리하는 편전(便殿) 앞에 위치한 천자고(天字庫), 지자고(地字庫) 등에 넣어둔 물건을 신하들에게 하사품으로 내리기도 했다.
오래 보존하기 위한 노력
창고는 물건을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어야만 한다.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 보관된 해인사 장경각(藏經閣)이나 얼음을 보관할 수 있는 석빙고(石氷庫) 등을 만든 우리 조상들은 바람의 대류현상을 활용해 습기와 온도를 조절하여 물건을 오래 보존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고려시대 곡물 창고의 경우, 바닥은 흙으로 대를 수 척(尺- 약 30㎝) 이상 쌓고 풀을 엮어 멱서리(곡물을 담는 그릇)을 만들어 그 속에 쌀 한 섬씩을 담아 쌓아 올렸는데, 그 높이가 수 장(丈- 약 3m)나 되어 담장 밖으로 솟아 있다. 그리고 그 위를 다시 풀로 덮어 비바람을 막는 형태로 되어 있었다. 조선의 조창 역시 이처럼 야외에 노적한 것처럼 되어, 창고 벽이 없어 곡식이 도난당하는 사례도 많았다. 하지만 이렇게 곡식을 저장한 것은 통풍을 원활하게 하여 두어 해가 지난 쌀이라도 새로운 것처럼 먹을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고려의 대의창(大義倉)은 본래 개경의 서문 안에 있는 300만 석을 보관하는 큰 창고였는데, 화재로 불타 버리자, 그 위치를 물길이 모이는 개경 서남쪽 장패문 부근으로 옮겨 화재를 예방하고자 했다. 화재를 예방하고자 조선시대에는 창고 주변에 인가를 철수시켰고, 담장을 높게 하고 아무나 창고에 드나들지 못하게 했다. 물론 화재보다 더 막기 어려운 것은 외적의 침입이었다. 깊은 산에 배치한 사고(史庫)의 경우도 1592년 일본군의 침략으로 전주사고를 제외한 나머지 사고들의 책들은 온전하지 못했다. 또 나라가 망하면 창고에 보관된 물건들은 대부분은 외적에게 약탈당하고 만다.
창고의 진정한 가치
인류는 오래 전부터 창고에 다양한 것을 보관해왔다. 당장 사용하지는 않지만, 짧은 시간이든 긴 시간이든 다음을 위해, 또 필요한 사람과 필요한 곳에 쓰이기 위해 물건을 창고에 모아둔 것이다. 창고의 기능은 보관이 아니라, 적재적소에 재물을 사용하여 물건을 가치를 극대화시키데 있다. 인류가 문명을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은 창고를 활용해 물건의 활용가치를 높였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창고의 중요성은 계속 커져왔고, 미래에도 더욱 커질 것이다.
참고문헌: 권오영, [삼한사회의 구성에 대한 고찰], [한국고대사연구] 10집, 1995;주남철, [桴京考], [민족문화연구] 27집, 1994;김창석, [신라창고제의 성립과 조세운송] ,[한국고대사연구] 22집, 2001;김재명, [고려시대의 京倉], [청계사학] 4집, 1987;김흥섭, [한국전통창고의 건축특성에 관한 연구], 홍익대 박사논문, 2003;서정석, [산성에서 발견된 석축건물의 성격에 대한 시고], [백제연구] 42, 20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