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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적 사고’는 시민의 힘 – 원균 장군에 관한 역사 논쟁에서 배운다
백승종
전 독일 튀빙겐대학교, 벨를린자유대학교, 보훔대학교, 서강대학교 교수
차례
1. 들어가는 말: 영화 <한산>을 보셨습니까
2. 역사 기록은 객관적 사실인가요
3. 원균 장군의 승리일까요, 또는 이순신 장군의 승리일까요
4. 칠천량 해전의 진실
5. 맺음말에 대신하여: 역사의 가치를 찾아서
부록: <평택시민에게 다섯 가지 질문으로 역사를 묻다>
1. 들어가는 말: 영화 <한산>을 보셨습니까
김한민 감독의 <한산: 용의 출현>이 금년 여름 극장가를 달구었습니다. 지난 7월 27일 개봉하여 약 한달이 지난 9월 1일 현재 이 영화의 누적 관람자수는 708만 명입니다. 몇 해 전에 나온 <명량>에 비하면 호응이 좀 저조한 편이기는 하지요. 그래도 관객 평점도 높고(8.58) 많은 시민이 이 양화에 매료되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도 이 영화를 보신 분이 적지 않을 듯 합니다. 어떠셨습니까.
1592년 4월에 조선은 왜군의 침략을 받았고 불과 15일만에 한양을 빼앗겼지요. 조선의 운명은 거기서 끝날 듯하였습니다. 그러나 남쪽 바다에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영화에서는 나라를 지키는 수호신 즉, “용”으로 상징되는 불세출의 영웅 이순신 장군을 등장시켜 한산대첩의 영광을 극적으로 묘사합니다. 이 한번의 압도적인 승리를 통하여 조선은 되살아나게 되었다는 점을 암시합니다.
이것은 물론 한편의 영화입니다. 그러나 제작자도, 그것을 관람한 시민들도 허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역사시간에 배운 내용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아서겠지요. 이순신이 거의 혼자서 나라를 구했다는 것인데요. 그럼 우리 평택에 고이 잠든 선무 제1등공신 원균이 임진왜란에서 한 역할은 무엇이었나요?
영화 <한산>에서도 그렇지만 역사 수업에서 배운 바 원균은 잘해야 졸장(拙將, 못난 장수)요, 적나라하게 말하면 비겁하고 음험하고 간신배나 다름없는 사람이라고요. 우리는 늘 그렇게 배웠습니다. 원균은 과연 어떤 장수였을까요. 역사적 진실은 우리의 통념과 항상 일치하는 것일까요. 만약에 통념과 진실 사이에 큰 괴리가 발생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세상에는 일부러 역사를 조작하거나 왜곡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일까요. 시민으로서 우리는 역사를 어떻게 다루어야할지요. 생각이 무척 복잡해집니다.
시민이 해결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문제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마는, 우리들 시민에게도 역사는 꽤 중요한 문제입니다. 복잡한 한일관계만 보아도 그 근저에 역사왜곡이란 문제가 숨어 있지요. 또, 정치가들의 인기 다툼에도 ‘가짜 뉴스’가 상당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친구 간에도 이웃과 형제 사이에도 과거에 대한 서로의 엇갈린 기억이, 갈등과 불화를 낳는 주된 역할을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 점에서 ‘비판적인 사고’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옥석이 가려질 테고, 진실을 바탕으로 할 때만 화해와 소통도 가능하겠지요. 역사적 성찰은 평화로운 미래를 여는 굳건한 토대가 될 것입니다. 개인에게도 그러하고, 크든 작든 모든 공동체에게도 마찬가지일 줄로 믿습니다.
우리 평택의 인물 원균 장군에 관해서 그동안 우리 사회는 많은 논쟁을 벌여왔습니다. 이 작은 지면을 빌려서 저는 그 문제를 간단히 짚어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연장선에서 여러분과 함께 시민의 역사인식 전반에 관해서 허심탄회한 대화를 갖고자 합니다. 먼저 제 이야기를 경청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런 다음에 저는 여러분에게 5가지 질문을 드릴 것입니다. 시간이 넉넉하지 못한 때문에 여러분은 모든 질문에 대답하실 겨를이 없을 것입니다.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는 두 가지 질문만 고르셔서, 5분 이내로 고견을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 역사 기록은 객관적 사실인가요
객관적이라고 믿기 쉽습니다만, 역사 기록도 왜곡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리가 접하는 거의 모든 기록은 순전한 왜곡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진위(眞僞)가 뒤섞여 있을 때가 대부분입니다. 글쓴이가 사실과 편향된 해석을 교묘하게 뒤섞었기 때문에, 독자들은 옥석을 가리기가 어렵습니다.
한 가지 실례를 들어보겠습니다. <<선조수정실록>> 제26권에서 선조 25년(1592) 5월 1일 경신일의 기록을 읽어봅니다. 먼저 전문을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전라 수군절도사 이순신(李舜臣)이 경상도에 구원하러 가서 거제(巨濟) 앞 나루에서 왜병을 격파하였다.
왜병들이 바다를 건너오자 경상 우수사 원균(元均)은 대적할 수 없는 형세임을 알고 전함(戰艦)과 전구(戰具)를 모두 물에 침몰시키고 수군 1만여 명을 해산하였다. 그런 다음 혼자서 옥포 만호(玉浦萬戶) 이운룡(李雲龍)과 영등포 만호(永登浦萬戶) 우치적(禹致績)과 남해현(南海縣) 앞에 머물렀다.
(원균은 안전한) 육지를 찾아 적을 피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이)운룡이 항거하여 말하기를, ‘사또가 나라의 중책을 맡았으니 의리상 관할 경내에서 죽는 것이 마땅하다. 이곳은 바로 양호(兩湖)의 요해처인데, 이곳을 잃게 되면 양호(전라도와 충청도)가 위태롭다. 지금 우리 군사가 흩어지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모을 수 있으며 호남의 수군도 와서 구원하도록 청할 수 있다.’ 하였다.
그러자 원균이 그 계책을 따라 율포 만호(栗浦萬戶) 이영남(李英男)을 (이)순신에게 보내어 (도움을) 청하였다.
이때 순신은 여러 포(浦)의 수군을 앞바다에 모으고 적이 오면 싸울 차비를 하고 있었다. 영남의 말을 듣고 장수들의 대부분은 말하기를, ‘우리 지역을 지키기에도 부족한데 어느 겨를에 다른 도에 가겠는가.’ 라고 하였다.
그때 녹도 만호(鹿島萬戶) 정운(鄭運)과 군관 송희립(宋希立)만은 강개하여 눈물을 흘리며 이순신에게 진격하기를 권하였다. ‘적을 토벌하는 데는 우리 도(道)와 남의 도의 구별이 없다. 적의 예봉을 먼저 꺾어놓으면 본도도 보전할 수 있다.’ 그러자 (이)순신이 크게 기뻐하였다.
언양 현감(彦陽縣監) 어영담(魚泳潭, 다른 곳에서는 광양 현감이라고 하였다-백승종)이 수로(水路)의 향도가 되기를 자청하고 앞장서서 마침내 거제 앞바다에서 원균과 만났다. 원균이 (이)운룡과 (우)치적을 선봉으로 삼고 옥포에 이르렀는데, 왜선 30척을 만났으나 그대로 진격하여 크게 물리쳤다. 남은 왜적은 육지로 올라가 도망치자 그들의 배를 모두 불태우고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노량진(鷺梁津)에서 싸워 적선 13척을 불태우니 적이 모두 물에 빠져 죽었다.
이 전투에서 순신은 왼쪽 어깨에 탄환을 맞았다. 그런데도 종일 전투를 독려하다가 전투가 끝나고서야 비로소 사람을 시켜 칼끝으로 탄환을 파내게 하니, 군중(軍中)에서는 그때에야 그 사실을 알았다.
그에 앞서 순신은 전투 장비를 크게 정비하면서 자신의 마음대로 거북선을 만들었다. 이 제도는 배 위에 판목을 깔아 거북 등처럼 만들고 그 위에는 우리 군사가 겨우 통행할 수 있을 만큼 십자(十字)로 좁은 길을 내고 나머지는 모두 칼·송곳 같은 것을 줄지어 꽂았다. 그리고 앞은 용의 머리를 만들어 입은 대포 구멍으로 활용하였으며 뒤에는 거북의 꼬리를 만들어 꼬리 밑에 총구를 만들었다. 좌우에도 총구가 각각 여섯 개가 있었으며, 군사는 모두 그 밑에 숨어 있도록 하였다. 사면으로 포를 쏠 수 있게 하였고 전후좌우로 이동하는 것이 나는 것처럼 빨랐다. 싸울 때는 거적이나 풀로 덮어 송곳과 칼날이 드러나지 않게 하였는데, 적이 뛰어오르면 송곳과 칼에 찔리게 되고 덮쳐 포위하면 화총(火銃)을 일제히 쏘았다. 그리하여 적선 속을 횡행(橫行)하는데도 아군은 손상을 입지 않은 채 가는 곳마다 바람에 쓸리듯 적선을 격파하였으므로 언제나 승리하였다.
조정에서는 순신의 승보를 보고 상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를 가자(加資)하였다.
이 기사를 끝까지 읽어보신 소감이 어떠하십니까. 비판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면 누구라도 글쓴이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겠지요. 임진왜란은 그해 4월에 전쟁이 일어났고, 우리 편은 참담한 패주(敗走, 져서 달아남)를 거듭했습니다. 암울한 가운데 5월부터 남쪽 바다에서 상쾌한 승전보가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하필 5월 1일에 이 기사를 배치한 까닭이 있어 보입니다. 이순신의 전쟁이었고, 우리가 승리한 전쟁이라는 인식을 부각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렇다면 왜란 이후에 상당히 중요한 인식의 변화가 일어났다는 뜻으로도 읽히지요. <<선조수정실록>>이 만들어진 시기는 효종 8년(1657)이었습니다. 병자호란의 수치를 씻으려고 애쓰던 때지요. 효종은 북벌(北伐, 청나라 원정)까지 고려하였으므로, 그 어느 때보다 국가적 영웅이 나타나기를 바랐습니다. 효종과 측근들은 역사 속에서도 영웅을 발견하고 싶었을 것인데요, 그들은 이순신에게서 한줄기 찬란한 빛을 보았습니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어언 60년가량 세월이 흘렀고, 그날의 진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역사가들은 이제 마음껏 해석의 자유를 누리게 되었고, 그들은 결국 대단히 독창적인, 보기에 따라서는 편향적인 역사서술을 마음껏 즐겼습니다.
그럼 이제부터는 앞에서 제시한 기사를 내용의 흐름에 따라 10단락으로 나누어 다시 읽어봅니다. 간단한 설명도 붙여 보겠습니다.
(A) 전라 수군절도사 이순신(李舜臣)이 경상도에 구원하러 가서 거제(巨濟) 앞 나루에서 왜병을 격파하였다.
선조 25년(1592) 5월 초하루에 이순신 장군이 거제도 앞바다에서 승리하였다는 기사를 대서특필한 셈이지요. 원균 장군과 함께 거둔 공동 승리였는데도, 역사가는 전투의 주역을 이순신 한 사람으로 특정하였습니다. 실로 과감한 역사 편집입니다.
(B) 왜병들이 바다를 건너오자 경상 우수사 원균(元均)은 대적할 수 없는 형세임을 알고 전함(戰艦)과 전구(戰具)를 모두 물에 침몰시키고 수군 1만여 명을 해산하였다. 그런 다음 혼자서 옥포 만호(玉浦萬戶) 이운룡(李雲龍)과 영등포 만호(永登浦萬戶) 우치적(禹致績)과 남해현(南海縣) 앞에 머물렀다.
여기서 <선조수정실록>의 편찬자는 원균이 이 전투의 주인공이 되지 못할 이유를 거론하였습니다. “전함(戰艦)과 전구(戰具)를 모두 물에 침몰시키고 수군 1만여 명을 해산하였다”라고 이유를 댔는데요, 사실과는 동떨어진 설명이었습니다. 원균이 경상우수사로서 명령을 내리고 말고 할 겨를은 없었습니다. 경상도 각 지역의 수군은 서로 앞다퉈 흩어졌습니다. 수군만이 아니라 육군도 지방관도 모두 도망쳤습니다. “1만 명”의 수군을 원균이 해산하였다는 말은 증거가 없지요. 그의 휘하에 그 많은 부하가 있지도 않았고, “전함과 전구를 모두 물에 침몰”시켰다는 것은 험담일 뿐입니다.
그것이 거짓 주장이란 점은 기사의 후반부에 저절로 드러납니다. “옥포 만호(玉浦萬戶) 이운룡(李雲龍)과 영등포 만호(永登浦萬戶) 우치적(禹致績)과 (원균은) 남해현(南海縣) 앞에 머물렀다.” 이운룡과 우치적은 누구였습니까? 다름 아닌 원균의 휘하의 정예한 장수였지요. 그들은 제각기 옥포와 영등포를 다스리는 장수였습니다. 원균이 휘하의 수군을 몽땅 포기하였더라면 원 장군과 그 막하(幕下, 휘하와 같은 뜻)의 장수들이 “남해(지역 명칭)”를 무대로 군사활동을 계속한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원균의 지휘 아래 있던 많은 수군은 저절로 흩어졌고, 원 장군은 그 문제에 관해 지휘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왜적과의 싸움을 완전히 포기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과 달랐습니다.
(C) (원균은 안전한) 육지를 찾아 적을 피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이)운룡이 항거하여 말하기를, ‘사또가 나라의 중책을 맡았으니 의리상 관할 경내에서 죽는 것이 마땅하다. 이곳은 바로 양호(兩湖)의 요해처인데, 이곳을 잃게 되면 양호(전라도와 충청도)가 위태롭다. 지금 우리 군사가 흩어지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모을 수 있으며 호남의 수군도 와서 구원하도록 청할 수 있다.’ 하였다.
이 부분은 이운룡 장군의 역할을 과장한 것입니다. 제가 확인한바 이운용 장군의 <묘지>를 인용한 것입니다. 알다시피 정유년(1597)에 원균 장군은 칠천량에서 전사하였고, 부하 이운룡과 우치적 등은 살아남았습니다. 그들은 이순신의 부하로 계속하여 수군 장수로 복무하였습니다. 우치적은 이순신의 조방장이 되었고, 이운룡은 이순신 사후에 수군통제사의 벼슬까지 지냈습니다.
그들은 원균과 이순신 등 한때의 상관 세상을 떠난 다음까지 살아남아 영화를 누렸습니다. 그들의 전기 자료에는 당연히 그들을 중심으로 전투 결과 등이 서술되었습니다. 그들이 각자의 공을 부풀려서 말한 것은, 인간적으로 얼마든지 이해가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선조수정실록>을 편찬한 역사가는 전후 사정을 참작하지 않고, 이운룡의 말을 가져다가 원균 장군 죽이기를 감행하였습니다.
(D) 그러자 원균이 그 계책을 따라 율포 만호(栗浦萬戶) 이영남(李英男)을 (이)순신에게 보내어 (도움을) 청하였다.
수식어를 떼놓고 보면 이순신 장군에게 협력을 요청한 것은 결국 원균 장군이었습니다. 그가 이순신에게 연락장교로 보낸 율포만호 이영남도 원균 장군의 부하였습니다. 수정실록에서 원균은 부하도 없다는 식으로 썼으나, 장군의 휘하에는 이운룡, 우치적과 더불어 이영남과 같은 장수들이 건재하였습니다. 수군 1만 명을 해산하고 모든 병장기를 바닷물에 침몰시켰다는 주장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E) 이때 순신은 여러 포(浦)의 수군을 앞바다에 모으고 적이 이르면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영남의 말을 듣고 장수들의 대부분은 말하기를, ‘우리 지역을 지키기에도 부족한데 어느 겨를에 다른 도에 가겠는가.’ 라고 하였다.
이 대목은 아마도 사실에 가까울 것입니다. 전라좌수영 소속 장수들로서는 낯선 바다에서 작전을 벌이기가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런 점을 십분 고려하여 원균 장군은 무려 15번에 걸쳐서 이순신 장군에게 끈질기게 협력을 요청하였던 것입니다. 14번을 내리 거절한 끝에 이순신은 결국 협력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수정선조실록>을 편찬한 역사가는 그 점을 언급하지 않고 교묘하게 속입니다. 이순신은 참전하고 싶었으나 장수들이 말렸다는 식으로 말을 꾸민 것입니다.
(F) 그때 녹도 만호(鹿島萬戶) 정운(鄭運)과 군관 송희립(宋希立)만은 강개하여 눈물을 흘리며 (이)순신에게 진격하기를 권하였다. 그들은 말하기를, ‘적을 토벌하는 데는 우리 도(道)와 남의 도가 따로 없다. 적의 예봉을 먼저 꺾어놓으면 본도도 보전할 수 있다.’고 하니 (이)순신이 크게 기뻐하였다.
그런데 완전히 다른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이순신이 경상도를 구원할 뜻을 보이지 않자 정운 장군이 상관인 이순신의 목을 자르겠다고 위협하였다는 것입니다. 실록에도 그와 비슷한 내용이 나옵니다. 그 점은 나중에 따로 설명하겠습니다. 그런데 인용문을 작성한 역사가는 이순신이 정운과 송희립의 발언을 기다린 것처럼 서술하였습니다. 이순신을 영웅으로 만들기 위한 처사였다고 생각합니다.
(G) 언양 현감(彦陽縣監) 어영담(魚泳潭)이 수로(水路)의 향도가 되기를 자청하여 앞장서서 마침내 거제 앞바다에서 원균과 만났다. 원균이 (이)운룡과 (우)치적을 선봉으로 삼고 옥포에 이르렀다. (원균 등이) 왜선 30척을 만났으나 그대로 진격하여 크게 물리치자, 남은 왜적은 육지로 올라가 도망하였다. 이에 그들의 배를 모두 불태우고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노량진(鷺梁津)에서 싸워 적선 13척을 불태우니 적이 모두 물에 빠져 죽었다.
이순신의 길잡이를 한 이는 경상도 “언양 현감 어영담”이라고 하였습니다. 다른 데서는 전라도 “광양 현감”으로 나오는 인물입니다. 만약에 그가 처음에는 “언양 현감”이었다면 사태가 좀 심각해집니다. 경상도가 왜군의 침략을 받자 관청을 버리고 전라도까지 피신하여, 이순신의 막하로 들어와 향도(길잡이)를 맡았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여부는 아직 최종적으로 판단하기 어려운데요, 그때는 적의 예봉(銳鋒, 날카로움)을 피해 멀리 달아난 관리가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경상도 지리에 밝았다는 점에서 어영담이 경상도와 깊은 관계가 있었던 것은 사실로 보입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그다음의 기록입니다. 처음에 작전을 통제한 이도 원균이요, 전투의 선봉장도 그의 직계 부하인 이운룡과 우치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옥포에서 왜선 30척을 무찔렀지요. 이어서 연합함대는 노량에서도 왜선 13척을 해치웠습니다. <선조수정실록>의 역사가도 그 점을 외면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우리는 모든 승리를 이순신의 것으로 여깁니다. 결정적으로는 <난중일기>에 따른 것이지만 역사의 왜곡이 심하다고 생각합니다.
(H) 이 전투에서 순신은 왼쪽 어깨에 탄환을 맞았다. 그런데도 종일 전투를 독려하다가 전투가 끝나고서야 비로소 사람을 시켜 칼끝으로 탄환을 파내게 하니, 군중(軍中)에서는 그때에야 그 사실을 알았다.
역사서술에는 역사가의 교묘한 공작이 개입할 여지가 큽니다. (H)부터 역사가의 왜곡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어요. 우선 승전보를 요약한 다음에 그에 이바지한 원균 장군과 직속 부하들의 공을 칭찬하지 않고, 대신에 이순신 장군 쪽으로 서술의 흐름을 바꾸었어요. 역사가는 이순신이 얼마나 장한 장수인지를 증명하려고 감동적인 에피소드까지 곁들였습니다. 독자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방법일 것입니다.
(I) 이에 앞서 순신은 전투 장비를 크게 정비하면서 자신의 마음대로 거북선을 만들었다. 이 제도는 배 위에 판목을 깔아 거북 등처럼 만들고 그 위에는 우리 군사가 겨우 통행할 수 있을 만큼 십자(十字)로 좁은 길을 내고 나머지는 모두 칼·송곳 같은 것을 줄지어 꽂았다. 그리고 앞은 용의 머리를 만들어 입은 대포 구멍으로 활용하였으며 뒤에는 거북의 꼬리를 만들어 꼬리 밑에 총구를 만들었다. 좌우에도 총구가 각각 여섯 개가 있었으며, 군사는 모두 그 밑에 숨어 있도록 하였다. 사면으로 포를 쏠 수 있게 하였고 전후좌우로 이동하는 것이 나는 것처럼 빨랐다. 싸울 때는 거적이나 풀로 덮어 송곳과 칼날이 드러나지 않게 하였는데, 적이 뛰어오르면 송곳과 칼에 찔리게 되고 덮쳐 포위하면 화총(火銃)을 일제히 쏘았다. 그리하여 적선 속을 횡행(橫行)하는데도 아군은 손상을 입지 않은 채 가는 곳마다 바람에 쓸리듯 적선을 격파하였으므로 언제나 승리하였다.
여기서 역사가는 갑자기 거북선 이야기를 꺼냈고, 장황할 정도로 친절하게 설명합니다. 앞에 서술한 옥포 해전이나 노량진 싸움에서 거북선이 어떤 역할을 하였던가요? 아무런 역할도 없었던 것인데, 갑자기 화제를 거북선으로 바꾸고는 이순신의 능력과 공적을 부각하였습니다. 편향적 역사서술이란 이런 식으로 전개되는 것입니다. 독자들은 앞뒤를 제대로 따져보지도 못한 채 이순신을 찬미하는 역할을 떠맡게 됩니다.
(J) 조정에서는 (이)순신의 승보를 읽어보고 상으로 가선 대부(嘉善大夫)를 가자(加資)하였다.
이순신에 대한 포상으로, 장황한 기사가 마무리되었습니다. 진정으로 공정한 포상이 되려면 원균 장군과 이운용 및 우치적에 관한 평가가 나와야 하지요. 제대로 된 역사서술이 되려면 위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되었어야 합니다.
첫째, 어영담이 정말로 언양 현감이었다면, 그가 마음대로 임지를 버리고 전라도로 갔으니 잘못되었다. 그러나 의미 있는 작전에 이바지하였으므로 용서한다는 식으로 서술하였어야 합니다. (그가 언제 언양 현감이었는지는 아직 확인하지 못하였습니다)
둘째, 이순신은 오래 시간을 끌며 원균의 요청에 바로 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안타깝다는 평가도 곁들였어야 합니다. 또는 거듭해서 출정을 미룬 이유도 사실적으로 기술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앞에서 읽은 기사에서는 그런 점이 언급되지 않았어요. 이순신은 절대선(絶大善) 원균은 몹쓸 위인이라는 식으로 간단히 처리하였습니다.
끝으로, 원균 장군이 이순신 장군과 연합작전을 요구한 점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말했어야 합니다. 아울러 경상도의 모든 육군과 지방관이 도망쳤고 수군 장수들도 일대 위기를 맞았으나, 원 장군과 휘하의 여러 장수가 끝까지 버티며 위기를 극복하려고 힘쓴 점도 제대로 소개하였더라면 좋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항이 조금도 고려되지 않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앞에 소개한 <선조수정실록>의 기사는 적절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의견은 어떠하십니까. 방금 예로 든 것처럼 우리는, 역사적 기록을 읽을 때 곧이곧대로 읽으면 안 됩니다. 역사적 진실을 찾는 작업은, 큰 함성이나 잠깐의 열기로는 해결하지 못할 지난(至難, 지극히 어려운)한 과업입니다.
3. 원균 장군의 승리일까요, 또는 이순신 장군의 승리일까요
앞에서 살핀 것처럼 원균과 이순신은 왜군을 무찌르기 위해서 합동작전을 벌였습니다. 그 실상은 어떠하였을까요?
두 장수의 합동작전은 선조 25년(1592) 5월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원 장군이 무려 15번이나 요청을 한 결과였습니다. (실록에 그런 기록이 보입니다!) 그때 원 장군의 뜻을 가지고 이순신의 막사를 찾아갔던 장수가 이영남이었고요. 그 장수가 나중에 이순신 편이 되어 원 장군의 험담을 이순신 앞에서 늘어놓았습니다. 그 점은 <난중일기>에서 여러 차례 확인됩니다.
원 장군이 실제로 무엇을 크게 잘못해서 그렇게 된 것인지, 아니면 이순신 장군이 원 장군을 싫어하기 때문에 비위를 맞추려고 이영남이 그런 말을 한 것인지는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또, 이영남의 진술을 이순신이 제대로 일기장에 적은 것인지, 아니면 왜곡한 것인지도 현재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영남의 진술이 옳은지에 대해서 판단을 유보해야 합니다. 그것이 공정한 태도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후일담이고요.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선조수정실록>> 제26권에는 원균과 이순신의 합동작전을 언급하였고, 그것은 곧 이순신의 승리로 기록되었습니다. “전라 수군절도사 이순신(李舜臣)이 경상도에 구원하러 가서 거제(巨濟) 앞 나루에서 왜병을 격파하였다.”(선조 25년(1592) 5월 1일 경신)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하지만 <선조실록> 제26권을 자세히 읽어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역사가들이 놓치고 있는 한 가지 사실입니다. 선조 25년(1592) 5월 10일의 기록을 보면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그때 전라도에서 방금 올라온 선전관 민종신(閔宗信)이 어전(御前) 회의에서 남부지방의 형편에 관하여 여러 가지 사항을 보고하였지요. 그의 보고 가운데 이런 말이 나옵니다.
“원균(元均)이 바다에 나가 적선 30여 척을 격파했다고 합니다.”
민종신이 원 장군의 승리에 관하여 제법 자세히 설명을 갖추었을 법도 합니다. 그러나 실록에는 그런 내용은 없습니다. 아마도 다른 사안이 더 중요하다는 기록자의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그로 말미암아서 의미심장한 이 구절을 많은 역사가가 그냥 지나쳐버립니다.
원균 장군이 쳐부순 왜선 30척에 관한 이야기가 궁금해집니다. 이를 자세히 기록한 곳은 없을까요? 천만뜻밖에도, 그것이 이순신의 승리라고 주장한 <선조수정실록>에 답이 있습니다. 다음을 잘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마침내 거제 앞바다에서 (이순신은) 원균과 만났다. 원균이 (이)운룡과 (우)치적을 선봉으로 삼고 옥포에 이르렀는데, 왜선 30척을 만났으나 (선봉대가) 그대로 진격하여 크게 물리쳤다. 그러자 남은 왜적이 육지로 올라가 도망쳤다. 이에 그들의 배를 모두 불태우고 돌아왔다. 그리고 (우리 편은) 다시 노량진(鷺梁津)에서 싸워 적선 13척을 불태우니 적이 모두 물에 빠져 죽었다.”
역사가들이 이순신의 첫 승리라고 말하는 옥포 해전, 그때 우리가 “왜선 30척”을 쳐부순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선전관 민종신은 바로 그 해전을 원균의 승전이라고 보고하였던 것입니다. 이어서 연합함대는 노량진에서도 13척을 불살랐습니다. 그때도 선봉에서 이운용과 우치적 등 원균의 부하들이 승리를 이끌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아요. 여하튼 연합함대의 승리였던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고요.
안타깝게도 바로 그때 연합함대 내부에 치명적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선조수정실록> 제26권에 그 사실이 정확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흔히 수정된 실록은 원균에게 불리한 내용으로 가득하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누군가 기록을 잘못 읽고 그렇게 주장한 것인데요.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선조수정실록>을 열어서 선조 25년(1592) 6월 1일 기축 일의 기록을 읽습니다.
“처음에 원균(元均)이 이순신에게 구원병을 청하여 적을 물리치고 연명(聯名)으로 장계를 올리려고 하였다. 그러자 순신이 말하기를, ‘천천히 합시다.’ 하고는 밤에 홀로 연유를 갖춰서 장계를 올렸다. 그러면서 원균이 군사를 잃어 의지할 데가 없었던 사실과 적을 공격할 때 공로가 없었다는 점을 자세히 기술하였다. 원균이 (그런 말을) 듣고 대단히 유감스럽게 여겼고, 그 뒤로는 (두 장수가) 각각 장계를 올려 공을 아뢰었다. 두 사람의 틈이 생긴 것이 여기서 시작되었다.”
제 생각에는 이 기사가 역사적 사실을 정확히 묘사한 것 같습니다. 이순신은 원균과의 약속을 어기고, 단독으로 <장계>를 올렸어요. 게다가 그 안에서 모든 것은 자신의 승리라고 주장하였고, 원균은 공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이미 고립무원(孤立無援, 의지할 곳 없이 딱한 상태)이라고 선조에게 아뢰었습니다.
얼마 뒤 원균 장군이 그런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동지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이순신 장군의 배신에 원 장군은 치를 떨었습니다. 그 뒤로는 두 장수가 합동작전을 펼친 뒤에 저마다 자신의 공을 조정에 따로 보고하였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었지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때 이순신의 처사는 과연 옳았을까요. 크게 잘못한 것은 아니었을까요. 이순신이 지략도 있고 학식이 풍부한, 훌륭한 장수인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함께 사선을 넘어 싸운 동료 장수에 대하여 예의를 잃은 것은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이순신에게는 그 나름의 사정이 물론 있었을 것이라 짐작합니다. 그 점이 궁금하기는 하지만, 현재의 우리로서는 알 길이 조금도 없습니다.
이제 간단한 중간 결론을 내려야겠습니다. 원균은 거듭해서 이순신 장군과의 합동작전을 소망하였고, 결국 성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만남은 큰 성공인 동시에 큰 실패이기도 하였습니다. 옥포에서 원 장군 측이 30척의 왜선을 격파한 것은 대승이었으나, 이순신과의 신의가 산산조각이 나고 만 것은 쓰디쓴 실패의 역사였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까지도 그 실패의 연장선 위에 서 있는지도 모릅니다. 한쪽에서는 철저히 이순신의 입장에서 임진왜란을 바라봅니다. 다른 쪽에서는 그것이 역사적 왜곡이라고 의심하고 있고요.
4. 칠천량 해전의 진실
원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이도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조차 가장 곤혹스러운 사태가 있었습니다. 바로 칠천량 해전(1597)의 참패입니다. 정유년(선조 30년, 1597) 7월에 있었던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전투를, 저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나라의 운명이 걸린 일전이었습니다. ‘칠천량 해전’이야말로 원균 장군에게 패장(敗將)이란 불명예를 안겨준 사건이었습니다. 이 해전에 관하여는 지금까지 여러 말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제가 일일이 거론하지 않아도 여러분이 대개는 아시는 것입니다. 하나는 원균 장군이 무능하고 비겁해서 그렇게 큰 실패를 하였다며, 이순신 장군이라면 절대로 이런 일이 없었다는 추측성 비난이고요. 또 하나는 권율 도원수 책임론입니다. 수륙병진(水陸竝進, 수군과 육군의 연합 진출)이 아니면 전투를 벌여보았자 손해만 본다는 원균 장군의 평소 지론을 권율이 무리하게 꺾어버렸기 때문에 참패를 당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이야기 즉, 이순신이라면 그래도 이겼을 것이라는 추측은 하나의 소망 사항일 뿐입니다. 비현실적인 가정으로 원균 장군을 비방하다니요. 이런 주장은 검증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라서 거론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세종 대왕이 지금 이 나라의 대통령이라면’과 같은 반(反)역사적 가정법이니까요.
두 번째 주장은 일리가 있습니다. 권율 도원수는 직권을 남용하였다고 볼 수 있어요. 수군의 사정을 도외시한 무리한 강요로, 통제사 원균 장군을 궁지에 몰아넣었으니 책임론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과연 권율의 강요로 원균 장군은 무리한 출격을 감행하였을까요? 이 역시 충분히 검증된 것으로 보기에는 다소 어려움이 따릅니다. 권율은 정말로 원 장군에게 곤장을 치면서까지 왜적 토벌을 요구하였을까요?
제가 존경하는 조선 후기의 역사가 한치윤은, 이 문제에 관해 완전히 새로운 시각을 제공합니다. <<해동역사>> 제63권에서 <정유재란>에 관한 대목을 읽다가 제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여러분도 아실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한치윤은 18세기 조선을 대표하는 위대한 역사가였어요. 그는 국내는 물론이고 중국과 일본의 사료까지도 두루 섭렵하였습니다. 생각이 정치(精緻, 정교하고 치밀함)하기로 따를 자가 없었어요. 한치윤은 <<해동역사>>에서 칠천량 전투의 패전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습니다.
“이때는 주사(舟師, 수군)가 (전쟁에) 편리하였고 보병과 기병이 불편하였다. 그러므로 조선 수영(水營)의 장관(將官, 통제사)인 원균(元均)이 한산도(閑山島)에 있으면서 몰래 거병하기로 모의하여, 중국 군사와 만나서 부산에 있는 왜적의 소굴을 치기로 약속하였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김응서(金應瑞)가 의령(宜寧)에 (주둔하고) 있으면서 육로(陸路)에서 허세를 부리다가, 원균이 중국 군사와 함께 (왜적의) 소굴을 유린하기로 약속한 날짜를 (왜장) 소서행장(小西行長,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누설하였다.
소서행장은 남원을 공격하려고 준비하면서 (행여) 원균이 자신의 뒤를 습격할까 두려워하고 있었던 참이다. 그는 이 소식을 듣고서 속으로 계략을 꾸몄다. 풍무수(豐茂守) 등을 파견해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원균의 수군을 습격하게 하였던 것이다. 드디어 (왜군이) 한산도를 빼앗았다.
한산도가 함락되자 서울 서쪽의 바닷길에 왜적이 통행하지 못할 곳이 없어졌다. 이에 왜적들이 수로와 육로로 한꺼번에 나왔다. 왜선이 2, 3일도 지나지 않아 광양(光陽)의 두치진(豆耻津)에 정박하였는데, 두치진은 남원과의 거리가 매우 가까웠다. 또, 부산과 서산(西山)의 왜적들이 또 경상우로(慶尙右路)를 통해서 모두 남원으로 몰려들었다.
권율(權慄)과 이원익(李元翼) 등은 군사 형편상 이들을 막을 수가 없어, 모두 동쪽으로 달아났다. 그러자 왜적은 더욱더 거리낌 없이 멋대로 날뛰었다.
양원(楊元)이 놀라운 소식을 듣고, 8월 10일에 우선 가정(家丁)을 시켜서 짐꾸러미 두 상자를 평양으로 실어 보냈다. - 평양과 남원은 1000여 리 거리인데 그 사이에는 대동강(大同江), 한강(漢江), 금강(錦江) 등 여러 강이 있다.”
짐작하건대 한치윤은 이런 내용을 중국의 어느 기록에서 발견한 것 같습니다. 위에서 제가 인용한 글의 마지막에 중국 장수 양원(楊元)이 나옵니다. 그가 가솔(家率)을 보내 평양으로 후퇴할 준비를 하였다는 내용으로 미루어 양원 또는 그의 측근이 쓴 기록일 것으로 짐작합니다.
명나라 장수들이 보기에, 칠천량의 패전은 일차적으로 김응서에게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가 중요 정보를 누설하였기 때문입니다. 원균 장군은 그때 명나라 측과 “수륙병진”을 약속하였는데, 이것은 매우 민감한 정보였습니다. 그런데 김응서가 그 비밀첩보를 적에게 주었다고 합니다. 결과적으로 명나라 군대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고, 원균 장군만 출동하였던 것입니다.
게다가 일본군 사령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우리 쪽의 움직임을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대 작전을 구상하였습니다. 적은 헛되이 시간을 소모하고 기지로 귀항(歸港)하는 원균 장군의 부대를 후미에서 습격하여 큰 성과를 냈습니다. 결과적으로 중과부적인 상태에서 우리 수군은 패배를 떠안았습니다. 원균 장군은 끝까지 싸우다 순국하였고요.
지금까지 칠천량 해전을 논의한 글은 많아요. 그러나 어느 누구도 한치윤이 남긴 위의 기록을 신중하게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알고서 그랬는지 모르고서 그랬는지는, 섣불리 판단하기 어렵습니다만 이 기록은 우리의 시야 바깥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태도를 바꿔야 합니다. 한치윤의 <<해동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그동안 숨겨진 역사적 진실에 한걸음 더 가까이 다가서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5. 맺음말에 대신하여: 역사의 가치를 찾아서
지금까지 저는 원균 장군에 관한 논란의 일부를 소개하면서 제 의견을 밝혔습니다. 원균의 업적이 제대로 인식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비판한 셈입니다. 그럼 저는, 우리사회가 내버린 원균을 옹호하기 위해서 이 글을 쓴 것일까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역사가로서 저는 제 자신에게 묻습니다. 역사란 도대체 어디에 쓰는 물건인가요? 이름 있는 역사가들의 답변은 기껏해야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식으로 심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제 질문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 답변입니다. 그런데요, 미국의 흑인 소설가 제임스 볼드윈(1924-87)은 마치 제 질문에 대답하기로 작정하기라도 하였던 듯, 이렇게 말했습니다.
"역사는 단순히 과거에 관한 것이 아니다. 아니 과거와는 거의 상관이 없다. 역사가 강력한 힘을 갖는 까닭은 우리 안에 역사가 있기 때문이고,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말 그대로 우리가 하는 모든 일 안에 '현존하기' 때문이다."
옳은 말씀입니다. 저는 볼드윈의 답변에 박수를 치고 싶어집니다. 역사는 지나간 일이 아니라 우리 안에 "현존"합니다. 이순신도 원균도 우리 가슴 속에 살아 있씁니다. 그래서요, 저는 역사의 운동장이 한쪽에 유리하게또는 불리하게 기울어 있으면 분노를 느끼는 것이지요.
돌이켜 보니, 젊은 시절에 저는 동학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중년에는 서자(庶子)들의 사회적 성장에 주목한 일도 있었고, 이것이 나중에는 <<정감록>>을 중심으로 펼쳐진 평민지식인의 활동에 대한 관심으로 번져갔습니다. 평택에 살게 된 이후 근래에는 서평택 원정리의 괴태곶 봉수대의 문제에도 관심을 두게 되었습니다. 억울하기 짝이 없는 원균 장군에게 주목한 것도 실은 똑같은 이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사실 역사라는 것은 인간의 삶에 위력적입니다. 그래서 권력자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역사를 쓰게 하여 모든 시민을 세뇌하려 듭니다. 박정희 정권이 이순신을 성웅으로 미화한 것도, 원균을 천하의 악인으로 끌어내린 것도 실은 정치적 계산이 작동한 결과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정확히 인지하는 시민은 많지 않습니다. 대개의 시민은 그런 사실에 잠깐 주목하였다가도 결국에는 권력자의 의지에 따라 부화뇌동하고 맙니다. 일본 시민들이 한반도에서 저지른 과거의 죄상을 시인하지 않는 것도, 일본 정부의 악의적인 역사 왜곡의 결과입니다.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만, 역사는 이용가치가 있기 때문에 그에 주목해서 역사를 조작하고 독점하려고 열을 올리는 집단이 항상 존재합니다. 그들은 국가 권력을 동원해서라도 지난 역사를 자의적으로 왜곡합니다. 그리고 역사에 관한 해석도 전유(專有)하려 듭니다. 역사를 손에 움켜쥘 수만 있다면, 현실을 쉽게 장악할 수 있습니다. 진실을 왜곡하고 시민을 깜깜한 암흑 속으로 유혹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음험한 소수의 정치가들과 그들의 하수인이었습니다.
우리는 사극을 통해서 역사를 배우면 안 될 것입니다. 드라마와 소설 등 대중매체를 빌려서 역사를 호흡하는 것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것들은 역사 교과서보다도 더욱더 위험한 선전물일 때가 많습니다. 진실을 향해 나아가기란 워낙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도 그것은 가능한 일입니다. 그 출발점은 ‘빈판적 사고’입니다.
작가 볼드윈의 말처럼, 과거(역사)는 우리가 미처 눈치채지 못할 만큼 미묘한 방식으로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겠습니다. 우리는 한쪽으로 치우진 역사를 바로잡아야 할 것이고, 이것은 곧 하나의 '문화투쟁'이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볼드윈이 어느 작품에서 던진 한 마디의 말이 제 가슴을 쿡 찌릅니다. "Not everything that is faced can be changed, but nothing can be changed until it is faced." 다 아시겠는데요, 직면한 모든 일이 다 바뀔 수는 없으나, 직면하기 전까지는 우리가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고 합니다. 진리가 담긴 말씀이 아닐까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균형잡힌 의식이요, 진실을 밝히려는 의지, 날카로운 비판정신일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끝)
부록: <평택시민에게 다섯 가지 질문으로 역사를 묻다>
다음의 5가지 질문을 읽고 그 가운데 두 가지만 선택하여, 5분 이내에 여러분의 의견을 설명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1. 일본의 역사교과서와 한국의 역사 교과서는 같은 사실에 대해서도 다르게 서술할 때가 많습니다. 가령 고대에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하였는지 아니면 한국이 일본을 사실상 지배하였는지도 의견이 엇갈립니다. 또, 일제 식민지 강점기에 일본의 역할에 관해서도 서술이 상반됩니다. 이것은 단순한 관점의 차이일까요?
2. 우리 나라 근현대의 역사적 인물에 관하여도 우리 내부의 평가가 크게 다릅니다. 누구는 박정희 대통령의 역할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누구는 이에 반대합니다. 이것이 평가하는 사람의 가치관과도 관계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밖에 다른 이해관계는 없는 것일까요?
3. 시대가 달라지면 같은 일에 대해서도 평가가 바뀌는 경향도 있습니다. 갑신정변의 주체인 김옥균의 역할에 관해서도 그렇고, 동학농민혁명에 대해서도, 광주민주화항쟁에 대해서도 그러합니다. “난리”쯤으로 평가절하되기도 하였고, 이제는 ‘운동’ 또는 ‘혁명’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렇게 된 주된 까닭이 무엇인가요.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인가요, 아니면 시각이 달라졌기 때문인가요.
4. 역사는 이미 지나간 일을 다루고 있으나,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사람에 따라서 그리고 시대의 흐름에 따라서 평가가 여러 차례 뒤바뀝니다. 역사적 진실이 고정불변은 아니란 뜻도 되겠지요. 여러분이 역사가라면 역사 서술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할까요.
5. 오늘날의 사건이나 인물에 관해서도 <조선일보> 다르고, <한겨레>의 이야기가 다릅니다. 진실은 어디에 있는 것이며, 우리는 그 진실에 어떻게 다가갈 수 있을까요. 우리는 정말로 진실을 필요로 하는 것일까요? 무엇 때문에 진실이 필요한지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