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석사 무량수전
"무량수전은 고려 중기 건축이지만 우리 민족이 보존해온 목조건물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오래된 건물임이 틀림없다. 기둥 높이와 굵기, 사뿐히 고개를 든 지붕추녀의 곡선과 그 기둥이주는 조화, 간결하면서도 역학적으로 기능에 충실한 주심포의 아름다움, 이것은 꼭 갖출 것만을 갖춘 필요미이며, 문창살 하나 문지방 하나에도 나타나 있는 비례의 상쾌함이 이를 데가 없다. 멀찍이서 바라봐도 가까이서 쓰다듬어 봐도 너그러운 자태이며 근시안적인 신경질이나 거드름이 없다."
배흘림 기둥
“더하고 뺄 것 하나 없는 완벽함, 문창살 하나, 문지방 하나에도 천년이 살아 숨 쉬는상쾌한 균형과 절제” 이 말들은 경북 영주에 있는 국보 제18호 부석사 무량수전(고려 13세기)에 대한 예찬이다. 그런데 그런 찬사를 들은 까닭 가운데 하나가 바로 배흘림 기둥이다. 배흘림 기둥이란 가운데 부분을 약간 튀어나오게 한 기둥을 말한다. 이렇게 가운데를 볼록하게 하면 기둥의 머리 부분이 넓어 보이는 착시현상을 막아주며, 건축물의 무게가 기둥의 중간에 집중되는 것을 고려하여 건축물을 견고하게 하고 안전을 배려한 것이다. 기둥의 종류에는 '배흘림 기둥' 외에 위로 올라가면서 지름이 조금씩 좁아지는 ‘민흘림 기둥’ 위아래 지름이 일정한 '원통형 기둥'이 있다.
배흘림 기둥과 함께 무량수전은 안허리곡, 안쏠림, 귀솟음이란 훌륭함도 있다.
귀솟음과 안쏠림
우리나라 전통목조건축의 기둥세우기 기법에는 솟음기법(귀솟음)과 오금기법(안쏠림)이 있다. 이들 기법은 모두 착시를 교정해주기 위한 의장적 효과 때문에 사용되었다.
1) 귀솟음(솟음기법)은 건물을 입면상에 바라볼때 기둥의 높이가 가운데 기둥이 제일 낮고 양쪽 추녀 쪽으로 갈수록 약간씩 높여주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기둥이 귀로 갈수록 솟았다 하여 귀솟음이라고 한다. 귀솟음의 정도는 건물의 규모에 따라 차이가 있으며 거의 눈에 띄지 않을 정도이다. 그러나 귀솟음을 주지 않았을 경우에는 착시현상에 의해 건물의 양쪽어깨가 쳐진 것처럼 보인다. 이 기법은 부석사 무량수전을 비롯해 조선말기까지 이어지고 있는 기법으로 흔히 쓰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2) 안쏠림은 오금법이라고도 하는데 기둥머리를 건물 안쪽으로 약간씩 기울여 주는 것을 말한다. 전체적으로 사다리꼴 형태로 기둥이 안쪽으로 쏠렸다고 해서 안쏠림이라 한다. 이 기법을 쓰지 않으면 양끝 기둥의 윗부분이 착시현상에 의해 건물 바깥쪽으로 벌어진것 같은 느낌을 주어 불안감을 느끼게 한다. 이 기법은 비단 목조건축뿐만 아니라 석탑에서도 사용되었다.(彌勒寺址석탑, 義城塔里오층석탑)
3) 안허리곡은 건물 가운데보다 처마 끝을 좀더 튀어나오도록 처리한 것을 말한다. 이렇게 하면 위에서나 옆에서 보았을 때 지붕의 선이 곡선을 그리게 되어 더욱 우아하고 아름답게 보인다
* 귀솟음과 안쏠림에 대한 기법을 기록한 것은 북송말(北宋末1085~1125년)에 중국인 이명중(李明仲)이 칙명에 의하여 편수한 건축전문서인 '李明仲 營造法式'이 있다.
<참고 : 한국건축용어(김왕직),사원건축(신영훈)>
정면 중앙칸에 걸린 현판은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에 머물 때 쓴 글씨이다.
무량수전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건물 가운데 두 번째로 오래 된것이다. 역사적으로는 안동 봉정사 극락전이 最古의 유구이지만 건물 규모나 구조 방식, 법식의 완성도라는 측면에서는 이 집에 비하여 다소 떨어진다.
본래 탑은 법당 앞에 있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삼층석탑은 무량수전의 동쪽 언덕에 있다. 무량수전 아미타불이 동쪽을 향해 있는 것이 극락왕생자를 맞이하는 형상이라고 볼때 이 탑은 곧 동쪽 사바세계를 상징한다는 설이 있다.
무량수전은 부석사의 주불전으로 아미타여래를 모신 전각이다. 아미타여래는 끝없는 지혜와 무한한 생명을 지녔으므로 무량수불로도 불리는데 '무량수'라는 말은 이를 의미하는 것이다.
무량수전은 불상을 東向으로 배치하고 내부의 열주(列柱)를 통해 이를 바라보도록 함으로써 일반적인 불전에서는 느낄 수 없는 장엄하고 깊이가 있는 공간이 만들어 졌다.
아미타여래는 서방의 극락 세계를 관장하고 있기 때문에 무량수전의 아미타여래를 서쪽으로 모셔 동향하도록 하였음은 철저히 교리에 따른 것이며, 불탑은 석가여래의 열반을 상징하기 때문에 대신 석등을 중정에 세운 것이다.
아미타여래를 모시는 경우 관음과 대세지보살 또는 미륵보살을 협시보살로 모시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부석사의 아미타여래는 일승(一乘)의 미타불로서 열반에 드는 일이 없고 시방 생멸이 없기 때문에, 보처불도 없고 탑도 세우지 않았다고 < 원융국사비문>에 전하고 있다.
무량수전의 천정은 후대 건물들과는 달리 천장을 막지 않아 지붕 가구가 한눈에 보인다. 굵고 가늘고 길고 짧은 각각의 부재들이 서로 조화있게 짜맞추어진 모습은 오랫동안 바라보아도 실증이 나지 않는다. 어떤 이는 이와 같은 무량수전의 천정 가구에서 고저장단의 운율을 느낄 수 있다고도 하였다.
국보 제45호인 아미타여래좌상은 흙으로 만든 소조불(塑造佛)로 석가모니불의 특징인 항마촉지인을 취하고 있는데, 몇 차례의 보수와 改金을 거치는 동안 手印이 변경되었는지 아니면 원래부터 항마촉지인을 취하였는지는 불확실하다.
그러나 불상이 봉안된 전각의 명칭이 무량수전이고, 또한 경내에 있는 원융국사탑비(1054년)의 비문에 補處가 없는 아미타불을 조성하여 모셨다는 기록이 있어 존상의 명칭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불상 뒤에는 당초문과 화염문이 화려하게 조각된 목조 광배가 따로이 제작 배치되어 있는데, 광배 안에 새겨진 치밀한 당초문이나 광배 밖으로 활활 타오르는 듯한 화염문은 불상의 위엄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고려시대 정교한 불교 미술의 한 단면을 잘 보여 준다.
안양루 아래에서 무량수전으로 오르다보면 네모틀의 중심에 있던 석등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점점 비껴앉으면서 무량수전에게 자리를 내주는데, 이는 석등이 무량수전 정면 축에서 조금 치우쳐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시각 체험이다.
무량수전 앞마당을 홀로 밝히는 이 석등은, 홀로이지만 마당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만큼 기품이 있다. 통일신라시대 때 조성된 전형적인 팔각석등으로, 네 면으로 난 火窓 사이사이의 면에는 다소곳한 자세로 수줍은 미소를 짓고 있는 공양보살상의 모습이 너무나 고와서 눈을 떼기가 어렵다.
浮石은 무량수전 서쪽에 있는 바위로 아래 위가 붙지 않고 떠 있다 하여 뜬돌, 즉 浮石이란 이름이 붙었다. 의상대사가 지금의 부석사 자리에 처음 터를 잡을 때 이를 방해하는 무리가 있자 선묘용이 커다란 바위로 변하여 공중에 떠서 그들을 물리쳤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의상이 주석하여 화엄사상을 닦고 수많은 제자를 길러내면서 부석사는 화엄 종찰로서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무량수전의 동쪽 뒤편에는 숨은 듯이 자리한 선묘각이 있다. 얼른 눈에 띄지 않아 지나치기 쉬운데 그 안에는 의상대사를 사모하여 몸바쳐 그를 도운 당나라 아가씨 선묘(善妙)의 초상이 모셔져 있다.
무량수전 팔작지붕안에 쏙 들앉은 안양루 지붕
"무량수전 앞 안양루에 올라앉아 먼 산을 바라보면 산 뒤에 또 산, 그 뒤에 또 산마루, 눈길이 가는 데까지 그림보다 더 곱게 겹쳐진 능선들이 모두 이 무량수전을 향해 마련된 듯 싶어진다."
"소백산 기슭 부석사의 한낮, 스님도 마을 사람도 인기척이 끊어진 마당에는 오색 낙엽이 그림처럼 깔려 초겨울 안개비에 촉촉히 젖고 있다. 무량수전, 안양문, 조사당, 응향각들이 마치 그리움에 지친 듯 해쓱한 얼굴로 나를 반기고,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 번이고 자문자답했다."
- 최순우의<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중에서-
|
첫댓글 부석사의 무량수전을 보면서 조상들의 지혜와 혜안을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국보로써 후대사람들이 오래오래 잘 보존하였으면 합니다.
수업 빼먹고 단풍구경 가는 재미도 쏠쏠했지요? 재미 들려서 버릇되면 어쩌나~~~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번이고 자문자답하였다'---가서 정말 보고 싶네요.
배흘림 기둥에 서서 아 나도 안정된 폼이구나를 알았습니다.
느긋하게 둘러보지 못하고 종종걸음을 쳐야되므로 답사 때마다 아쉬움이 남는답니다.
궁금하던 건축기법을 잘 알았습니다. 아름다운 풍광에 취하고 보니 두 번째 사진의 조정은샘 닮은 저 묘령의 여인네가 자꾸만 저를 보는군요^^. 의미있는 사진 하나하나가 관록을 말해줍니다. 이 사진들을 편집해서 부석사 관광안내 팜플렛 용으로 절집에 팔면 어떨까요? 돈이 탐나서가 아니라 사진이 아까워서 그럽니다. 모자라는 동인지 비용에도 좀 보태고 이민혜선생님 보약도 좀 딿여 자시고 또 돈이 남으면 에세이스트에 찬조도 하고... 흥정 시작하면 절집에서 그냥 시주나 하라 하겠지요? ^^
아하~ 그런 방법이 있었구려. 그런데... 법당 안에 사진기 숨겨 가지고 들어가 몰래 찍은 죄가 있어서... 그냥 우리끼리만 봅시다.
사찰은 깊은 산속에 있고, 교회당은 시내 한복판에 있습니다. 사찰에는 나무숲이 있고, 교회당에는 승용차숲이 있습니다. 사찰에는 관광객이 있고, 교회당에는 관광객이 없습니다. 적막함과 소란함의 차이입니다. 그러나 종착역은 극락과 천당으로 다 살기 좋은 곳입니다.
위트있고 흥미있는 비교입니다.
감사합니다.
깊어가는 가을에 집사람이 외출하고 없어서 점심도 안 먹고 한 비교가 돼서 제대로 잘 됐는지 모르겠네요. 최태준님, 이민혜님 감사합니다.
부엌일 거들면서 눌러 앉았으면 여기 사진에 한번 박힐 수 있었을 텐데... ㅎㅎ 선생님. 저는 그냥 갔다가 그냥 왔습니다.
마음을 비우고 '그냥 갔다가 그냥 온'것이 한 수 위의 여행 아닐까요. "유산(遊山)은 독서와 같다" 는 퇴계의 말을 빌려 보면, 산에 가는 것 자체가 마음 수행 아닐까요. ㅎㅎㅎ...
산 오르느라 숨차하시면서도 카메라를 놓지 않는 여혜당쌤의 작가정신에 경의를 표합니다...
여기저기서 자기를 찍어 달라고 손짓을 하는 바람에......ㅎㅎㅎ...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