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곰솔나라 원문보기 글쓴이: 곰솔
제주도 기념물 제61-1호(2003년 11월 12일 지정)
-. 위치 ; 하원동 1864번지
(하원동에서 1100도로를 따라 제주시 방향으로 1Km쯤 가면 법정사 진입로가 나온다.
여기서 2Km쯤 들어가면 법정사가 있다.)
-. 유형 ; 위인선현유적(항일운동발상지)
-. 시대 ; 일본강점기
-. 면적 : 230,346㎡(보호구역 189,940㎡)
법정사는 1918년(무오년) 항일운동이 일어난 발상지이다. 1910년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법정이(법쟁이)오름 능선 해발 680m에 터를 잡은 이곳에서 일어난 투쟁은 1919년의 삼일운동보다 5개월 먼저 일어난 제주도내 최초 최대의 항일운동이며 1910년대에 종교계가 일으킨 전국 최대 규모의 무장항일운동이다.
1918년 10월 7일 서귀포시 도순동에 있는 법정사에서 평소 일본제국주의 통치를 반대하던 불교계와 선도교, 민간인 400여 명이 집단으로 무장하여 2일 동안 조직적으로 일본에 항거한 항일운동으로서 민족의 항일의식을 전국적으로 확산시켜 나아가는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당시 법정사 주지인 김연일과 방동화 스님 등 30여 인에 의하여 1918년 5월부터 10월 7일 거사일에 이르기까지 무장항일거사 계획을 면밀하게 추진해 나아가면서 '우리 조선은 일본에 탈취당해 괴로워하고 있다. (중략) 1918년 9월 3일 오전 4시 하원리에 집합하라. 그래서9월 4일 대거 제주향(濟州鄕=제주시)을 습격하여 관리를 체포하고 일본인을 추방하라'라는 격문을 만들어 법환리, 호근리, 영남리 등 각 마을구장에게 격문을 돌리도록 하고 10월 7일(음력 9월 3일) 새벽 무장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공격의 1차 목표는 서귀초 순사 주재소였으나 여의치 못하여 2차 목표인 중문리 주재소를 습격하였다. 이 과정에서 강정천을 가로지르는 전선과 전주 2개를 절단하였고, 하원리에 이르자 항일항쟁에 참여한 가담자가 300-400명애 이르렀다. 중문주재소로 향하던 일행은 하원리에서 일본인 고이즈미세이싱(小泉淸身), 장로교 윤식명과 일행 부용혁을 때려 상처를 입히고, 중문순사주재소에 불을 질렀다. 이후 연락을 받고 출동한 서귀포순사주재소 순사들에 의해 총격을 받고 퇴각하면서 흩어지게 되었다.
1918년 10월5일 새벽4시 스님 16명을 비롯한 법정사 인근주민 400여명이 중문 주제소를 공격하여 단시간에 불사르고 주제소장 요시하라 및 경찰, 일본인 상인3명을 납치한 후 13명의 구금자를 석방한다. 이 과정에서 일본경찰 3명이 포박 당했고 스님 1명이 일경의 총에 맞아 부상당했다. 격분한 주민들의 일본경찰을 죽이려 하였으나 불교의 자비정신과 주민 등에 대한 보복이 두려워 스님들의 만류했다. 성난 봉기 행렬은 서귀포 지서로 향했다. 일부는 주제소에서 탈취한 무기로 무장까지 하였다. 비상연락을 받고 출동한 기마경찰대와 지금의 스모루 입구에서 격돌한다. 좋은 무기와 훈련된 일경에 맞대결 할 수가 없어 현장에서 김연일 스님등 다수가 체포되고 나머지는 도피하여 거사는 끝이 나고 만다.(제주도청 홈페이지 '무오법정사항일투쟁' 참조)
무장항일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으로 송치되었다. 총 66명 중 48몀이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되었고, 1919년 2월 4일 실형 선고 31명, 벌금 15명, 재판 전 옥사 2명(강춘근, 강수오), 불기소 18명이었다. 수감중 3명이 옥사하였다.
당시 법정사 법당은 우진각 지붕의 초가였으며 면적은 87.3제곱미터의 작은 절이었으나 항일지사들의 체포와 함께 일본 순사들에 의하여 불태워졌고 지금은 축대 등 건물 흔적만 남아 있으며, 현재 성역화작업이 추진되고 있다.(제주문화의 향기 277-278쪽)
이 투쟁은 줄곧 '보천교사건'으로 알려져 왔었으나 사건과 관련된 수형인 명부가 발견됨에 따라 75년만에 진상이 밝혀지게 된 것이다. 일제시대에는 보천교를 비롯한 민족종교를 모두 유사종교라고 하여 탄압하였다. 민족운동을 못하게 하기 위한 정책의 일환이기도 했으며, 유사종교의 틀에 집어넣으면 탄압하기가 쉬웠기 때문에 법정사 항일운동도 보천교의 난으로 취급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곳에는 美滿華(또는 光明華, 호적명 高美楊, 1920년생) 보살님이 계신데 이분은 방동화 스님이 인근 원만사에 있을 때 가르침을 받았다고 하며 '光明華'란 이름도 방 스님이 지어 준 것이라 한다. 美滿華 보살님은 9살에 절에 들어와 12살부터 이곳 법정사에서 지냈으며, 4·3사건 후인 1958년경 다시 올라와 손수 돌을 쌓으며 터를 닦아 초가로 절을 지었다고 한다.(2006년 5월 6일 면담)
당시 주동자의 한 사람이었던 주지 김연일 스님은 1914년경부터 법정사에 거주하면서 법정사 신도들에게 항일의식을 고취시켜 오던 중 1918년 법정사 승려들을 중심으로 지역 주민들의 참여를 이끌어내어 무력 항일 운동을 주도하였다. 강창규 ․ 방동화 등과 함께 계획적인 사전준비를 거쳐 조직구성을 주도하였으며, 불무황제로 즉위식을 거행하여 거사의 정점에서 대중들에게 신앙적 확신을 심어 주었다.
일본경찰의 극비본(極秘本) 폭도사(暴徒史) 편집자료 고등경찰요사 (高等警察要事) 경북경찰부에 보면 , 『수괴 김 연일은 경상북도 영일군 출신으로 4년 전 승려로 제주도 좌면 법정사에 살면서 항시 교도들에 대하여 반일사상을 고취하고 있었는데 1918년 9월19일 우란분절 때 교도 30명에 대하여 왜놈이 우리 조선을 합병하였을 뿐만 아니라 우리 동포들을 학대하고 있다. 불원 불무황제가 출현하여 국권을 회복하게 될 것이니 제주도에 사는 일본놈들을 죽이고 상인들을 도외로 구축하여야 한다. 고 말하고 그 후 10월5일 교도33명을 소집하여 스스로 불무황제라 칭하여 앞서 선언한 목적을 수행할 것을 말하고 도대장이하 군부서직을 명하여 대오를 편성하고 각면 이장에게 격문을 배포하여 인민을 인솔하여 군에 조사토록 명하면서 스스로 법정사에 머물면서 폭도를 지휘하여 전선(電線)을 절단하고 주제소를 습격하여 파괴 소각하고 주제소원을 폭행하고 길가는 일본인을 폭행하여 상해를 입히는 등 2일간에 걸쳐 이미 4백 명을 강제 징발하여 폭동 하였음.』 이라고 되어있다.(제주도청 홈페이지 '무오법정사항일투쟁' 참조)
거사 당일 체포되지 않은 채 궐석으로 1919년 2월 4일 판결을 받았으며 소요 및 보안법 위반죄 징역 10년을 선고 받았다. 1920년 3월 1년 6개월여의 도피 끝에 체포되어 목포분감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0년 칙령 제120호, 1924년 칙령 제10호에 의해 징역 4년 1월로 감형되었고, 1923년 6월 6일 가출옥하여 실제적으로는 3년 2개월간 복역하였다. 김연일은 출옥 이후 경상북도 영일군 입암리에 관음사를 창건하여 승려 생활을 지속하였고 만주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지속하여 관음사는 독립 인사들의 모임 처로 활용되었다. 1948년 대통령령 제8호에 의해 복권되었다.
법정사 항일운동이 일제의 의도에 의해 보천교의 난으로 알려진 것과 마찬가지로 김연일 스님도 보천교도인 것으로 왜곡되어 왔었다. 그러나 스님은 출옥 이후까지도 승려생활을 지속하였다. 제주도에서 활동하지 않고 고향인 영일군에서 활동하였기 때문에 그동안 연구되지 않았고, 알려지지도 않았었다.
또 다른 주동자 박주석은 그간 선도교 수령으로 알려져 왔었다. 그러나 박주석이 선도교 수령이라고 나온 곳은 일본 고등경찰요사라는 독립운동의 기운이 있는 지역과 인물을 극비리에 관리하고자 1934년에 만든 책이다. 박주석의 유족들은 박주석이 명수라는 이름으로 활동한 승려이며, 경상도 지역에서의 의병활동을 숨기기 위해 제주도에 들어온 것으로 증언하였다. 박처사라는 다른 이름도 있다. 박주석은 방동화의 권유로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에 참여하였다. 사전준비 단계에서부터 함께 참여하고 1918년 10월 7일 거사일에는 모사(謀師)로 장임호 ․ 강창규와 함께 현장의 대중을 이끌었다. 현장에서 체포되어 1919년 2월 4일 대석 재판으로 판결을 받았다. 소요 및 보안법 위반죄로 징역 7년을 선고 받았다. 판결청은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이다. 1920년 칙령 제120호에 의해 징역 3년 6개월로 변경되었다. 목포감옥에서 2년 5개월 21일간 옥고를 치르다 1921년 7월 24일 형 집행 중 사망하였다. 1948년 대통령령 제8호에 의해 복권되었다. (인터넷 카페 '제주불교산책'에서 인용)
김인수 (金仁秀) 지사(1898. 2. 2 ∼ 1939. 7. 28)
제주보훈지청에서는 광복회제주도지부와 공동으로 무오년 법정사 항일항쟁을 하신 김인수 지사를 7월 우리고장출신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일명 김경태(金景泰)이시며, 본관은 김해로서 김기덕(金基德)의 차남으로 경상북도 영일(迎日)군 동해면 도구(都邱)리 478번지에서 태어나 숙부 김연일(金蓮日 : 일명 基寅)을 따라 제주 법정사(法井寺)에서 반일(反日)·반외세(反外勢)라는 일념으로 일제의 침탈에 분노를 지니고 있었다. 법정사 주지 김연일은 1918년 봄에 김창규·방동화 등의 승려를 중심으로 항일 비밀결사를 결성한 다음 신도들을 포섭하여 조직을 확대하고, 1918년 10월에 이르러서 김인수 지사를 비롯한 30여명의 동지들과 법정사를 근거지로 조직적인 결집을 이룰 수 있었다. 동년 10월 5일 거사동지들은 김연일을 불무황제(佛務皇帝)로 옹위하고 도대장(都大將) 박명수(朴明洙) 이하 군직(軍職) 체제로 조직을 편성한 후 도내의 일본인 관리와 일본인 상인들을 도외로 축출하기로 하여
무력에 의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행동에 앞서 각면(各面)의 이장에게 격문을 배포하고 동참할 것을 권유하여, 마을주민 등 4백여 명이 가세하는 가운데 행동을 개시하였다. 이에 지사와 동지들은 일경의 연락을 차단하기 위하여 전선(電線)을 절단하고, 각 주재소(駐在所)를 고립시킨 다음 중문(中文)경찰관주재소를 공격하였다. 주재소에 감금되었던 13명의 구금자를 석방하고 식민수탈의 전위역할을 맡았던 일본 상인들을 공격하는 등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일부는 주재소에서 탈취한 무기로 무장까지 하였으나 비상연락을 받고 출동한 기마경찰대와 지금의 스모루 입구에서 격돌하게 된다. 좋은 무기와 훈련된 일경에 맞대결 할 수가 없어 현장에서 김연일 스님 등 다수가 피체되고 나머지는 피신하여 거사는 끝이 나고 만다. 김 지사는 1919년 2월 4일 광주지법 목포지청에서 소위 소요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귀향하여 경북 영일군 기계(杞溪)면에서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8년 광복절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제주국제교육정보원 홈페이지 교육정보자료실 참조)
방동화(房東華, 1887. 8. 8~1970.12.28)
제주 대포동 출신, 제주도 남제주의 법정사(法井寺) 승려로 1918년 10월 5일 승려 김연일(金連日)·강창규(姜昌奎) 등과 함께 항일무력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는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자 망국의 한을 품고 종교에 귀의하여 승려가 되었다. 1913년 육지로 건너가 경상도 일대의 기림사(祈林寺)·대승사 등지의 사찰에서 득도한 뒤 1918년 봄 법정사에 돌아와 승려 김연일 등과 교류를 통하여 항일의식을 길러 갔다.
방동화는 1918년 봄에 김연일·강창규 등과 함께 승려를 중심한 항일비밀결사를 결성하였으며, 점차 신도들을 포섭하여 조직을 확대해 갔다. 산천단에서 항일비밀결사 조직하고 관음사를 근거지로 삼으려 했으나 보안 유지가 어려워 산간벽지에 자리 잡은 법정사로 들어가 항일거사 성취를 위한 백일기도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1918년 10월에 이르러서 30여 명의 신도들이 법정사를 근거지로 동지적 유대를 이루는 가운데, 조직적 결집을 이룰 수 있었다.
이들은 동년 10월 5일 김연일을 불무황제(佛務皇帝)로 옹위하고 도대장(都大將) 이하 군직(軍職) 체제로 조직을 편성한 뒤, 제주도 내의 일본인 관리의 처단과 일인의 구축을 행동 방침으로 정하고 무력에 의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행동에 앞서 각 면(面)의 이장(里長)에게 격문을 배포하여 동참할 것을 권유하여 군민 4백여 명이 가세하는 가운데 행동을 개시하였다. 이에 방동화 등은 일경의 연락을 차단하기 위해 전선(電線)을 절단하여 각 주재소(駐在所)를 고립시킨 다음 중문(中文) 주재소를 습격하여 주재소에 감금되었던 13명의 구금자들을 석방하였으며, 식민수탈의 전위 역할을 맡았던 일본 상인(商人)들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곧이어 출동한 일본군에 의해 이틀 만에 피체되고 말았다. 그는 피체 후 1919년 2월 4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소위 소요(騷擾)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년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2007년 5월 23일 민족정기선양센터 인물 찾기에서 내려받음)
징역 6년형을 받았던 방동화 스님의 아들(서기1995년 현재 43살)도 스님으로서 진주라 부르는데 중문 광명사 주지이다. 그는 "부친한테서 김연일·강찬규와 경북 대성사에서 함께 불교 교리를 공부하고, 불교계 인사들이 항쟁을 주도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