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이 미국과 일본을 순방하는 동안 국내에서는 실로 엉뚱한 두 가지 사건이 벌어졌다.
하나는 동교동 자택의 폭발물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선거대책본부장 정일형 의원의 화재사건이었다. 1월 27일 김후보 자택 마당에서 사제 폭발물이 폭발하였다.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선거를 앞두고 제1야당 후보의 집 마당에서 폭발물이 폭발한 것은 예삿일이 아니었다.
경찰은 폭발물 사건을 수사한다고 비서ㆍ가정부ㆍ친인척ㆍ신민당 간부 등 52명을 연행하고, 중학교 2년생인 김 후보의 조카 김홍준을 범인으로 단정, 14세 소년을 연행하기 위해 120명의 경찰을 동원하는 등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당국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연 52명의 김대중 후보 주변 인사와 신민당 간부들을 불법으로 연행하여 폭발물 사건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문제들을 알아내려고 혈안이 되었다.
① 김후보의 방미 목적 ② 후보의 전국 조직상황 ③ 자금사정 등을 꼬치꼬치 추궁함으로써 신민당의 선거전략을 캐보려 하는 정치수사를 감행했던 것이다. (중략) 놀랍게도 당국은 홍준군을 범인으로 조작하기 위해 14세에 불과한 어린 소년에 대해 두 손을 뒤로 포박하고 바케스 물에 얼굴을 처넣어 심한 고문을 가한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주석 19)
이 사건의 배경은 김대중 부재 중에 그의 주변을 조사하기 위한 정보기관의 소행이었지만, 수사의 칼자루를 쥔 경찰이나 검찰은 범인 체포는 외면한 채 애꿎은 주변 인물들만 불러 조사하였다. 이 사건이 미처 해결되기도 전에 2월 15일 새벽에는 신민당 선거대책본부장 정일형의 집에 화재가 발생하여 전소되었다.
며칠 뒤 경찰은 “고양이가 추워서 아궁이에서 불붙은 종이를 물고 나온 것이 직접적인 화재 원인”이라고, 고양이가 방화범인양 발표했다. ‘고양이 방화사건’이라 불린 이 사건은 해외 토픽으로 소개될 만큼 국민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또 한 가지 ‘웃기는’일이 벌어졌다. 김대중의 귀국 뒤에 부인 이희호가 닉슨 대통령의 영부인과 만나 찍은 사진을 한 장 더 만들기 위해 거래하던 사진점에 그걸 맡겨 놓았다. 이희호를 항상 미행하던 중정 요원들이 그 사진점에 들이닥쳐 ‘탈세혐의’를 구실로 사진점을 샅샅이 수색한 뒤에, 문제의 사진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사진이 사라진 다음날 공화당에서는 이희호가 백악관을 방문한 적도 없으며 더구나 닉슨 부인과 찍었다는 사진은 조작한 것이라고, 김대중 부부의 도덕성을 들어 비난을 퍼부었다. 언론에는 대서특필되었다. 다행이 다른 또 한 장의 사진이 있어서 사실이 ‘입증’되었지만, 박 정권은 참으로 유치하고 졸렬한 방법을 동원하여 야당 후보를 탄압하였다.
1971년 1월 김대중 대통령후보의 미국방문당시 백악관을 방문한 이희호 여사를 닉슨 대통령 부인 패트 리샤 여사가 영접하고 있다.
신민당이 국민적인 관심을 불러 모으며 1971년 4월 27일에 실시되는 대통령 선거전에 김대중 후보를 지명하여 선거운동에 나선 데 반해 공화당은 비교적 느슨한 자세로 일선조직 강화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공화당은 이미 3선개헌을 통해 박정희 대통령이 제7대 대통령후보에 내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후보지명 절차는 요식행위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명대회를 거치지 않을 수는 없었다. 1971년 3월 17일 지명대회를 가진 공화당은 박정희 총재를 또 다시 만장일치로 대통령후보에 지명했다. 선명야당의 기치 아래 창당한 국민당에서는 3월 22일 진보당 출신 박기출을 대통령후보로 지명하고, 대중당에서도 서민호를 후보에 지명했으나 그는 입후보 등록은 하지 않았다.
3월 27일을 기해 4.27대통령 선거일이 공고되자 공화ㆍ신민 양당의 후보 외에 민중당의 함보경, 자민당의 이종윤, 정의당의 진복기, 통사당의 김철 등이 등록을 마쳤다. 이 중에서 김철과 함보경은 중도에 후보를 사퇴했다.
선거전은 당연히 박정희와 김대중 후보의 양자 대결로 압축되었다. 공화당은 조직과 풍부한 자금으로 선거전에 나서고, 신민당은 김 후보의 정책과 전국적인 유세를 통해 이에 맞섰다.
4.27 대선은 과거 어느 선거에 비해 여야 간의 치열한 정책대결로 진행되었다. 그것도 김대중 야당 후보의 리드에 의한 정책대결이라는 특징을 보였다.
김대중 후보는 지방도시의 유세를 통해 ① 대통령의 재산공개 ② 남북간의 서신교류ㆍ기자교류 및 체육인 접촉 ③ 지식인ㆍ문화인 및 언론의 권력으로부터의 해방 ④ 제2의 한일회담 및 주월국군 철수 ⑤ 대통령 및 국회의원 선거권 연령 인하 ⑥ 반공법 제4조의 목적범 적용에 국한하는 개정작업 ⑦ 정부기관 일부의 지방 이전 ⑧ 전매사업의 공영화 내지 민영화 실현 등 각종 정책을 제시하고 집권공약으로 내걸었다. 모두 155개의 집권 청사진을 제시하여 정책대결을 리드했다.
박정희 후보도 10개 부문에 걸쳐 56개 항목의 정책을 제시했다. 정치관련 공약에서 ① 국민여론을 바탕으로 한 발전적 민주정치의 구현 ② 야당협조로 생산적 정치윤리의 구현 ③ 민원행정 간소화 ④ 지방재정 자립도를 높여 단계적 지자제 실시를 제시하고, 경제정책에서 세제개혁 및 금융제도의 개선, 국토개발계획을 내세웠다.
두 진영의 정책대결에 있어서는 김대중 후보의 정책이 상대적으로 돋보였다.
공약을 둘러싸고 쌍방간에 쟁점이 빚어지기도 했다. 쟁점은 주로 ① 안보논쟁 ② 통일문제와 남북교류 ③ 장기집권 시비 ④ 부정부패의 척결 ⑤ 예비군과 교련폐지 문제 ⑥ 경제정책의 시비 등에 집중되었다.
김대중 후보의 예비군 폐지 주장에 따른 대안의 제시로 논쟁은 일단 주춤해졌으나 정부 여당의 안보논쟁의 확산으로 정국에 긴장감이 감돌기도 했다.
주석
19) 김수한, "양대사건 국회특조위 진상조사활동보고", <민주전선>, 1971년 2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