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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발효되는 바이러스 원문보기 글쓴이: 익명회원 입니다
제24회 2010 <시안> 봄호 신인상 당선작
- 신新 브레인스토밍 외 4편 / 하명환
- 새싹불꽃 외 4편 / 정석봉
신新 브레인스토밍 / 하명환
폭풍전야 브레인스토밍 멤버 여러분 안녕
만 오천 년 전 동굴 속으로 출장을 와있는 나는
어둠속에서 빛에 가려졌던 나를 보고 있기에
이번 폭풍 속엔 두뇌를 휘 뿌리지 못하겠네
대신 동굴 천장에 들소나 사슴 등이 그려진 벽화
그 생생한 묘사나 색채, 입체감의 감동과 함께
내 야생이 튀어나오고 있다는 소식을 안부로 전하네
덧붙여 아래 엉뚱한 소식을 참조e-mail로 보내네
십년 전 주말마다 새 테마가 우리 두뇌를 혹사시킬 때
최신형 압축파일 두뇌로 광야를 질주하던 나는
광풍 맞듯 e-세계 팀원 자리를 권유 받았지
하지만 그땐 우리들 눈이 태풍의 눈이었기에
내 노우-하우 갈래인 e-압축파일을 한 주말만 제공
유효기일 無인 자릴 고사했지
그게 십년 세월, 이젠 동굴 속 출장이 아니라도
도래지로 날아가는 창공의 철새 떼처럼
매주말 서너 번은 e-세계로 날아가야겠네
고딕한 테마에 아이디어를 들이밀 짬은 고사하고
자진탈퇴인 셈인가 엉뚱하게
그래도 혹시 주말 틈새로 멤버에 낀다면
내 최신형 사유를 깔려나?
자, 그간 뱁새눈이 세월처럼 다사다망했던 올해도
여기 석기시대 e-mail로 인사를 갈음하네만
도래할 바이오시대 새해엔 정말 엉뚱한 두뇌폭풍이 거세길
모두 안녕? 짬 내서 여기한번 꼭 다녀가게
아참 여기와 비로소 내 생각을 방목하고 있다네!
샤프란* 저 너머 / 하명환
나는 공소시효 말기
도화살 낀 범죄를 저지른 샤프란이다
홍조 띤 여섯 개의 꽃잎과 노란 꽃심지를 가진
숱한 세월 노란꽃불을 헤집고 짓뭉개려했던 세상은
서남아시아에서 온 이 향기와 고귀함을 모른 척 해왔다
그 푸대접이 그럴수록 사방팔방 내 씨를 방사했다
천둥번개가 칠 땐 내 입술은 동백꽃처럼 붉었고
뒷산 때죽꽃 밤낮 피고지고 툭툭 떨어졌다
그럴 때마다 영화각본처럼 하염없이 내리던 밤비는
빈속을 울렁거리게 했다
오랜 긴 밤 내 몸에 고였던 향신료는 모두 빠져나갔다
그간 내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몇 개의 목 타는 계절이 심연으로 흘러가버렸다
오아시스를 찾지 못해 때죽꽃이 혼자 질 때였다
시시포스의 신화!
메소포타미아 사막에서 불사조처럼 날아올라
태양을 향했던 망울진 꿈들이 어제처럼 꽃술로 영근다
꺼져버린 내 심지에 다시 불을 댕긴다
나는 모진 홍조를 다해 동녘 저 너머로 꽃불을 쏜다
* 붓꽃과에 속하는 식물로 꽃말은 후회 없는 청춘임
꿈물류유한회사 / 하명환
자폐증 깊어만 가는 창공을 벤치마킹 한다
날빛 보관창고관리 계약직간부로 사령장을 받은
회사명은 꿈어린물류유한회사
소재지는 삼라만상
우주의 時空세계에 드리운 블라인드 홀
근무조건 연중무휴 24시간 고립된 외딴 직책
창고 관할 老박사 파우스트
주 업무는 거기 틀어박힌 몽상을 분석하고 보관
잉태된 꿈엔 유통기한과 폐기처분 날짜를 기획 공고
고객관리함
꿈에 대한 A/S는 없음 단, 신규 다운로드 무한 가능
유성처럼 거쳐 가는 별의별 빛 창고보관료 처리는
바코드에 눈물 한 방울 긁고 가면 완불수납 OK
이젠 중증의 어둠인 곳보다 더 까만
장막 속 저편
벤치마킹되어 개똥벌레처럼 반짝거리는
별, 꽃, 달, 바람, 비취빛 하늘풍선 같은 유채색단어들은
가슴속 응어리로 아롱져
천재성을 가진 자폐아 서번트신드롬의 씨앗들로 여문다
야근수당 한 푼 없는 오늘밤도
뜬눈으로 일궈낸 장삿속 세상밭 내 자투리땅에
흩뿌려져 아린 삶 그 흔적으로 발아할
내 안에 사는 풍경 / 하명환
갈 때마다 참 이상한 동네
디카 속 풍경은 리모델링 새 그림
내 머릿속 풍경은 빛바랜 흑백필름
여긴 방앗간 건너 할매떡집 삼거리시장 앞 아이스케키집
도랑 건너 웅이네 제재소 저긴 내 단짝 뚱땡이 붕어빵집
골목입구 구공탄집, 우리이발소 옆 만화가게, 마다
흘러나오던 잡음 섞인 트랜지스터 라디오소리
이곳저곳 모든 것 그때 그대로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마법 걸린 발걸음 동네 한바퀴
돌고 또 돌고
눈부처 좁은 골목길
머릿속 미운 일곱 살 걸어 나온다
케케묵은 추억에 박힌 뻑뻑한 다이얼
반짝이는 향수로 윤기 내고
이리저리 주파수 맞춰보면 또렷해질까
고주파 저주파 뒤엉켜 찍찍거리는
내 마음에 둥지 튼 30년 전 풍경
시력표눈발 / 하명환
눈발 분분한 안과병동 시력표
0.1의 4와 1.0의 4 는
시력표 안에서 너무 먼 거리
천의 얼굴색센서
눈빛이 4만 터치 될 땐 어둔 밤하늘
4 까지도 터치 될 땐 초롱초롱 별빛
얼굴색은 시력 따라 명암 다른 석고상
동상처럼 굳은 채 기다리는 진료시간
제각각 마음속 진료시간
0.1 마음에 몰려오는 먹장구름
때론 영롱하게 빛나는 1.0 자기세계의 별까지
병동 창 너머로? 모두 두둥실?
푸른 하늘시력표 동공에 담는
4만 터치 된 者의 심력시력도 2.0
몽상의 눈발
하명환 시인
2007년《작가마당》으로 작품활동. 2010년 <시안> 시 당선. 서강대대학원 작가회의 회원. <시와문화>편집위원. 현 우송대 국제경영학부 교수
[당선소감]
세상과 소통되는 시의 밭
부끄러웠습니다.
당선소식을 받고 기쁨은 잠시, 수많은 예리한 눈빛이 떠올랐습니다. 《시안》과 심사위원 선생님들이 부족한 언어들을 시어로 인정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깊은 사유의 바다에 용감히 뛰어들어 헤엄칠 수 있게끔 물꼬를 터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 무언의 눈빛을 모아 내 詩眼의 안목을 더욱 환하게 밝히는 전구로 활용하겠습니다.
두렵습니다.
고통스럽지만 쓰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던 독백, 이것을 시라고 자족하면 그만인 시절이 가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제 시작에 불과한 시인이라는 고운멍에를 얹고 세상에 내놓을 각고의 시들이 세인들에게 유익한 메시지가 되길 원해서입니다.
노력하겠습니다.
중학교 때부터 시인이 되고픈 마음을 습작원고에 켜켜이 접어두었던 시간이 끝났습니다.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접어두었던 원고를 절차탁마, 세상에 펼치며 시와 함께 하겠습니다. 평생 시의 밭을 갈며 살겠습니다. 한때의 유행이 아닌 세상과 소통이 될 수 있는 시, 후대의 사람들과도 희로애락의 가슴을 공유할 수 있는 시를 수확하도록 정성을 다할 것입니다.
나누고 싶습니다.
하늘나라에 계신 양가 부모님, 내 시에 대해 늘 철저한 비평자이며 낭송자인 보금자리 동지들, 형제자매, 작가마당 시창작연구원들, 실례를 무릅쓰고 이름의 끝 字라도 불러 보고픈 문인 경.겸.덕.원.선.주.호.구.진.헌.민.도.중.렬.환.권.희.도.철.은.하.식.신.자.출.섭 곤.호.열.례.정.일, 친척, 친구, 지인들과 함께 이 기쁨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새싹불꽃 / 정석봉
가스레인지가 새싹 틔우는 오늘
불붙이고 라면 끓이네요
냄비가 보글보글 끓는 동안
대파 하나 듬성듬성 썰어 넣는 건
배고픈 만큼 참았던 시간을 쫑쫑쫑 썰어 넣는 것이죠
묘지에, 참새 한 마리 내려앉듯
낙엽 몇 장 갈비뼈 몇 개
떠나는 당신의 그림자도 끓여야겠어요
계란 프라이는 너무 지겨워요
더 이상 무엇을 넣고 삶는지 삶은 묻지 마세요
내가 끓이는 라면에는
불꽃이 혀 날름거리는 이유 나도 모르니까요
마침 불쑥 펼쳐지는 채마밭
잡초 속 얼굴 붉히는 일이죠
잘 익은 고추 늘어 말려야겠어요
곧 시들어버릴 게으른 생각
마늘이나 선반 위 올려둔 양파 저녁 늦게 떠올랐어요
쉿! 지금 빳빳한 면발 식사중이거든요
뜨겁게 좀 더 뜨겁게
굶지 않을 삶만 생각하겠어요 그런데 어찌하나요
가스레인지를 켜두고 왔군요
컵라면 줌 / 정석봉
편의점 조그만 탁자 위에
컵라면을 줌으로 당긴다
으스름한 포장 벗겨 하늘 한 자락 담는다는 건
웅크린 시간을 먹는 일
굳은 씨앗에 따뜻한 햇살 한 장 벗겨
식사하는 렌즈
연못 속 물뿌리, 쫄깃하게 건져 올리는 것이다
어느 가을에 봄 꽃비 스프레이 뿌리고
잠시 눈 감았다가 다시 열어본다
말간 기억들이 펼쳐진다
아지랑이처럼 기지개 펴는 왕버들
젓가락 벌리고
향기의 가지들 모락모락 우듬지로 오른다
죽는 순간의 세상을 넣어둔 메모리칩
살아난다
제대로 피워 본 적 없는 기억의 꽃을 피운다
식혀 먹는 얼큰한 봄의 입김 불면
파 한 조각 뜨겁게 춤춘다
안개 낀 주산지
갈래갈래 빠져나오는 길 따라
교과서를 읽다 / 정석봉
늦은 저녁
문 열어보는 방
침대에 잠든 아들처럼
책상 위에 놓인 초등학생 교과서
펼쳐보니, 전등이 켜진다
아른거리는 낱장 같은 시간들 환하게 열린다
오래도록 덥혀 있던 페이지 몇 장 넘겨보니
치자 물들였던 빛바랜 마루 결이 보인다
옹이처럼 들어앉은 친구들
머리 빡빡 깎은 남자아이
두 갈래 꽁지머리 여자아이
눈이 유별나게 큰 아이
머리를 기른 아이
모두 불러 놓으면
6학년 2반이라는 명패가 페이지처럼 붙은 기억들이 보인다
몇 번 읽어도 좀처럼 읽히지 않는 친구도 있다
몇 장 더 넘겨보는 다음교실
열렸다가 닫혔다가 얼굴이 자꾸만 깜빡거린다
내 앞에 지금은 많이 변한 얼굴 펼쳐져 있기 때문에
책상에 다 읽지 못하는 교과서를 내려놓는다
침대에 잠든 아들을 다시 읽는다
가을에 박은 못 / 정석봉
바람이 분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넋 잃은 사람
우수수 떨어진 눈물 홀로 섰다
밑천까지 털린 것을 직감한 몇 몇
며칠 전 허공에 몸을 던져 못 박았다는 소식
하늘은 모처럼 조화를 후두두 내렸다
지붕만큼 줄기줄기 갈라진 기억 사이
가을 끝자리 박혔던 못 뺀 그는
못난 가슴 고쳐 박았다
상처가 깊은 만큼 암고집은 얼마나 단단한지
휘어지는 못
몸 뚫고 허공에 박힌다
그도 조금씩 휘청거렸지만 제자리 찾는 동안
눈물의 꿈이 분홍풍선을 불었다
꽃 피울 때까지
헛소문은 더 큰 풍선을 불었다
동그랗게 겹치는 얼굴들
개미 집 짓고 딱정벌레 이사 오고 박새도 둥지 틀었다
눈물의 몸이 그들을 맞이했다
사과농사 / 정석봉
지우려 한 생각들
뭉게구름처럼, 사과꽃으로 피는 날
예고 없는 봄비가
둘째아이 머리맡에
빽빽한 하루의 꽃잎 떨어뜨린다
아이의 머릿결 빗어 내리듯
실바람 타고
몇 발짝 더 다가오는 기억 몇 방울
물빛 치맛자락 펼쳐든다
지금은 희끗희끗
몇 갈래 벌어진 기억 사이 몇 발짝 더 다가온다
지나온 시간의 철길 끝
생각의 파편이 불쑥불쑥 새싹을 틔우는
예고 없이 피어날 것도 같은 너
뒤춤에 감추는 몇 장의 물빛 꽃잎이다
가볍게 맺히는 일들 점점 무거워져
허리가 해마다 좀 더 휘어질 것이다
한손 번쩍 들어 바람갈기 세워 낯짝 후려쳐도
다시 자라는 밑줄 같은 뿌리
둥치를 잘라버려도
머리 위에 풍년든 구름 둥실둥실 이고 다니는 거라지
흰 눈썹 눈 찌르듯 빗방울이 또 떨어질 수 있는 일이지
백발이 되어도 새파랗게 젊은 날 떠올리면
홍옥보다 더 붉은 얼굴 감추고 싶은 일이지
정석봉 시인
경남 합천 출생. 주소 : 울산시 남구 삼산동.
[심사평]
우리 시단에 축복이 되어주기를
하명환 씨와 정석봉 씨를 신인상 당선자로 추천하였다.
하명환 씨를 추천하면서 앞으로의 작품에 대한 기대가 앞섰다. 그가 그의 시에서 말하듯 그 만의 야생성野生性과 엉뚱함에 대한 기대다. 최근 우리 시단이 지나치게 연약성naivety이나 매저키즘에 치우치고 있지 않는가 하는 우려를 극복해줄 새 시정신이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시 「신新브레인스토밍」과 「꿈물류유한회사」가 그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의 시를 읽으면서 먼저 번쩍 눈에 띈 것은 두 곳의 세련된 표현 때문이었다. 첫째는 「꿈물류유한회사」의 첫 줄, 자폐증 깊어만 가는 창공이다. 이런 기막힌 표현을 써낼 수 있는 이 사람의 시 연습과 언어감각은 믿을만하다고 생각하기 충분했다. 그래서 「신新 브레인스토밍」을 재삼 읽어보게 되었다. 그 다음의 놀람은 「내 안에 사는 풍경」이라는 제목 속의 동사 “사는”에서 느꼈다. 풍경이 내 안에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것 아닌가. 내 안에 있는 풍경이 아니라 내 안에 사는 풍경. 그 감각의 차이에 번쩍 감동하면서 이 시인이 다른 시들에 쓰고 있는 설명문투나 전문 직업용어 학술용어들을 나도 몰래 눈감아주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시「샤프란 저 너머」와「 내 안에 사는 풍경」은 다른 시들보다 쉽게 읽힌다. 그러나 그만의 특성과 매력은 보다 난해하지만「신新브레인스토밍」과 「꿈물류유한회사」에 넘친다. 앞으로 이 시인이 어느 길을 선택할지 모르나 나로서는 쉬운 시가 이니라 어려운 시 쪽의 길을 가보기를 권하고 싶다.
정석봉 씨의 시들은「교과서를 읽다」「가을에 박은 못」처럼 잘 완결된 모범적인 일상 시들이다. 모범적이라 말하는 것은 그가 시에서 과장도 변주도 기도祈禱도 섣불리 시도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하기 때문이다.「새싹불꽃」의 마지막 행, 그런데 어찌하나요 가스레인지를 켜두고 왔군요, 그리고「교과서를 읽다」의 마지막 행, “침대에 잠든 아들을 다시 읽는다” 같은 종결은 이 시인이 얼마나 세련된 위트가 있는지를 보여준다. 위트는 시를 다시 읽게, 그래서 쉽게 기억하게 한다. 우리 일상시의 새 날개가 되어주기를 기대한다. 신인 두 분 모두 우리 시단에 새 축복이 되어주면 우리도 박수를 나누어 받으리라 기대한다. -박의상
2010년 새로운 시인, 신선한 시를 기대하며
이번 신인상 심사에 임하는 마음은 다른 때보다 좀 각별했다. 왜냐하면 2010년을 맞아 『시안』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할 시인의 의미가 조금은 새로워야 했기 때문이다. 또한 2천년대 한국 시단의 흐름이 어떻든 간에 모든 시대를 통틀어서 적어도 『시안』출신 시인들은 가장 깊이 있는 시와 개성적인 시로 우리 앞에 있어주어야 할 것 같아서이다. 예심을 거쳐 최종심에 올라온 작품들은 나의 이 바램에 크게 벗어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막상 당선자를 뽑는데 있어서 심사위원 사이에 약간의 진통이 있었음은 아마도 시가 되는 방향을 놓고 초극되고 초월되어야 하는 부분 때문이었을 터이다. 쉽게 끝나지 않고 의외로 오랜 시간 토론을 거쳐야 했던 이유이다.
당선작으로 뽑힌 정석봉의『새벽불꽃』외 4편은 내면적인 감정을 비비꼬지 않아서 좋았다.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기억’ 이라는 시적 장치를 통해 진솔하게 드러내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앞으로 좋은 시인이 되리라는 믿음을 주었다. 그에게 있어 ‘기억’은 삶을 지탱해가는, 살고 존재하는 방식으로 활용된다. “6학년 2반이라는 명패가 페이지처럼 붙어 있는 기억들이 보인다.”(「교과서를 읽다」), “몇 발짝 더 다가오는 기억”(「사과농사」), “지붕만큼 줄기줄기 갈라진 기억 사이”(「가을에 박은 못」), “제대로 피워본 적 없는 기억의 꽃을 피운다.”(「컵라면 줌」)등에서 직접적으로 표현되고 있는 다양한 ‘기억’들은 「새싹불꽃」의 마지막 행, “가스레인지를 켜두고 왔군요.” 라는 ‘망각’으로 반전을 시도함으로써 ‘기억’과 ‘망각’이 다르지 않다는 인간 본능을 꿰뚫고 있다.
또 당선작으로 뽑힌 하명환의 「신新브레인스토밍」외 4편은 앞의 정석봉과는 다른 시적 인식과 경험으로 자신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능력과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다. 물론 「내 안에 사는 풍경」과 같은 작품이 30년 전에 살았던 곳에 대한 변화된 모습을 ‘기억’이라는 장치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는 정석봉과 같은 시적 인식이긴 해도 표현이나 사고 자체가 전혀 다른 각도로 나타난다.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생산하기 위한 회의 기법인 브레인스토밍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무한한 상상력과 21세기 현대에 대한 은근한 비꼼, 아이러니가 「신新브레인스토밍」이 갖는 장점이다. 그의 언어들이 상당히 거칠게 방목되어진 느낌과 다분이 이지적인 의미를 돌출시킴으로써 난해성을 드러내려는 의도가 엿보이기도 하지만 “나는 모진 홍조를 다해 동녘 저 너머로 꽃불을 쏜다.” (「샤프란 저 너머」)라던가 “벤치마킹되어 개똥벌레처럼 반짝거리는/별, 꽃, 달, 바람, 비취빛 하늘풍선 같은 유채색단어들”(「꿈물류유한회사」)에서 보여주는, 특히「시력표눈발」에서는 은근히 웃음을 머금게 하는, 신선한 서정적 이미지들은 앞으로 좋은 시인으로 기억될 것 같다.
한편, 본심에 올라와 이번에 당선작으로 뽑히지 못한 작품들도 심사위원 사이에 상당히 많은 논의가 있었다는 사실을 밝힌다.「꽃을 보면서」(박홍) 외의 작품은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다소 사변적인 느낌이 강했다. 따라서 이미지의 정리, 가지를 칠 것은 과감히 쳐주었으면 좋겠다.「눈 내리는 저녁에서 새벽까지」(서지숙) 외의 작품은 우선은 띄어쓰기 같은 기본적인 검토에 신경 써주었으면 좋겠다. 상상력의 타당성과 의미 소통도 좀 더 고심해야 할 부분이다.「엠보싱 숲속 나라」(송정예) 외의 작품은 서정성 면에서 돋보인 작품들이었다. 허나 언어의 쓰임이나 상상력의 폭이 좁다는 한계성을 띈다, 시적 감각과 신선함을 어떻게 구현할까에 대해 고심해주길 바란다.「자전거 바퀴를 위한 레퀴엠」(안정혜) 외,「통점을 묻다」(강태승) 외,「막도장」(김우진) 외의 작품들은 자신이 순수하게 열심히 썼지만 이미 신춘문예나 신인상 당선작들에서 보여주었던 이미지가 이와 유사하여 까딱 잘못하면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도 있다. 즉, 이미지나 소재 면에서 신선미를 잃을 수 있다는 말이다.
끝으로 2010년 첫 당선자 두 분께는 축하의 말씀을, 그리고 최종심에 올랐으나 탈락하신 분들께는 다음 기회에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특히 당선자 두 분은 자만하지 말고 자신의 작품에서 초극되고 초월되어야 할 점이 무엇인지를 지금부터 고민해주길 바란다. -허형만
활발한 상상력과 언어의 개운한 보법步法
예술작품을 경험하며 즐기는 것을 ‘감상鑑賞’이라고 한다. ‘감鑑’은 ‘거울’, ‘찬찬히 생각하다’ 등의 뜻을 거느린다. ‘상賞’은 ‘기리다’의 뜻도 있지만, ‘품평을 하며 즐기다’라는 뜻도 있다. ‘감상’은 ‘대상을 찬찬히 뜯어보고, 좋고 나쁨을 가리면서 그 맛을 즐기다’ 정도로 새길 수 있다. 그림에 대해서는 ‘간화看畵’, 즉 ‘그림을 보다’라 하지 않고, ‘독화讀畵’, 즉 ‘그림을 읽다’라 하였다. 그림은 다만 보는 데 그치지 않고, 꼼꼼히 살펴 그 뜻을 헤아려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시는 ‘읽기(讀)’의 대상으로 이해하지 않고, ‘읊조림(吟)’의 대상으로 파악한다. 읊조린다는 것은 여러 차례 되풀이하는 과정에서 뜻을 깊게 새길 수 있는 면이 있겠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 안에는 ‘즐긴다’라는 뜻이 더 깊게 밴 듯하다. 이를 합쳐놓고 보면, 예술작품은 그림이든 시든 찬찬히 살펴 뜻을 헤아리며 줄기는 것이다.
당연한 말을 하는 것은 투고된 시를 읽다가 그것이 당연한 말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요즘 문단의 풍토가 그렇고, 그래서 먼저 반성해야 할 쪽은 기성시인들이겠지만 많은 시인 지망생들이 시를 한갓 위트나 재간으로 인식하는 것 같다. 그런 시들은 ‘어, 이런 표현도 있네’나, ‘재미있군’ 정도의 반응 이상을 기대하기 어렵다. 품은 뜻을 따져 읽으며, 그 맛을 오래 즐길 수 있는 예술품이라 볼 수 없다. 신인상 심사는 위트나 재간이 출중한 사람을 가리는 게 아니라, 예술품인 시를 쓸 수 있는 능력이나 가능성을 지닌 사람을 가리는 일이다.
이번 심사에는 여덟 분의 작품이 논의 대상이었다. 이 분들의 작품은 누구 하나 빼어나지도 떨어지지도 않은 고른 수준을 보여 심사에 어려움이 있었다는 점을 밝힌다. 어느 분이 선정된다 하더라도 크게 이상하지 않은 상황은 심사자에게는 곤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과정에서 새삼 심사의 화두로 떠오른 것은 신인다운 패기를 취할 것인가, 작품적 완성도를 취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결국 양족에 모두 기회를 드리기로 결정했다.
심사자들은 하명환 씨의「신新 브레인스토밍」외 4편, 정석봉 씨의「새싹불꽃」외 4편을 뽑기로 의견을 모았다. 하 씨의 작품은 과장되지 않으면서 활발한 상상력이 시 안에서 알맞은 질감으로 교직되어 있다는 점이 선정의 가장 큰 이유다. 그러나 그 활발한 상상력이 자칫 기교주의에 빠질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는 것은 스스로 경계할 필요가 있다. 정 씨는 개운하고 안정된 언어의 보법을 유지하고 있다. 문장 구사뿐 아니라 이미지 주조에 있어서도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지 않다는 사실은 시에 대한 콤플렉스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것들은 좋은 시를 위한 필요조건은 되어도 충분조건은 안 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두 분의 당선을 축하한다. -오태환
심사 : 박의상, 허형만, 오태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