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동창생 가운데 아파트 경비를 오래한 친구가 있다.술을 좋아해서 일년이면 몇차례 극성스럽고 사나운 아파트 부녀회 여자들에게 적발돼 쫓겨나는 것을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그 친구는 내게 가끔 전화를 주는 몇 안되는 친구이다.
서울 마포 동막골(용강동 근처)에 살면서 그 아버지가 돼지를 키우면서 서울 외국어 대학까지 입학하게 했으나 어느해 돼지 콜레라가 돌아서 그만 학교를 중퇴하고 학교에서 배운 영어한자 못써먹고 주로 몸으로 때우는 직업, 지하철 공사를 비롯한 아파트 철거 노무자 생활을 전전한 그에게
나는 그의 유일한 지식인 친구로 그의 수첩에 기록되고 있다.
어느날 그가 대낮인데도 "미국말(술)"을 하면서 놀다가라는 간곡한 말에 그가 근무하는 서울 마포 공덕동의 아파트로 갔다. 그는 이제 경비일에 연륜이 붙었는지 모자창에 금줄이 요란하게 새겨진 경감 모자를 쓰고 대낮인데도 불콰한 얼굴로 반갑게 맞이했다.경비반장이 된 것이다. 그는 나를 보자 댓자곳자 아파트 초소마다 데리고 다니면서 경비 아저씨들에게 소개를 시켰는데 그 소개말이 내겐 여간 낯 뜨거운 것이 아니었다. "여보 박씨, 이분이 내 친군데 대한민국 소설가야.유명하지. 노벨 문학상에 올라있어. 인사해. 이런 분 알아두는 거 박씨는 영광으로 알아야해"
나는 얼른 작가가 아니고 노벨 문학상은 더더욱 아니라고 할까 하다가 상대가 심각하고 거룩한 눈총으로 쳐다보길래 그냥 웃음띤 침묵으로 마주했다. 그 아파트엔 열군데의 초소가 있었는데 그만 간다고 하는 나를 열군데를 모두 데리고
다니면서 노벨 문학상 이야기를 꺼냈다.어느 초소에서는 이런 말로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이 친구 조금 있으면 문공부 장관할꺼야. 잘 봐둬 조씨!" 이렇게 대충 소개가 끝나서 나는 그 친구에게 "야 임마! 내가 무슨 작가냐.그리고 노벨 문학상은 또 뭐냐?" 그러자 그는 "야 그래야 내가 위신도 올라가고 그러지. 저 영감들 노벨 문학상 뭔지 아는 영감 한명도 없어! 그냥 눈감아둬.난 글을 쓰는 네가 얼마나 자랑스러운줄 아냐!" 하면서 엉엉 우는 것이었다. 물론 술김이지만, 각종 허드렛 일을 하면서 평생을 보내면서 얼마나 괄시를 받았을까 생각하니 그 친구가 측은해졌다.그는 나를 통해서 자신의 인격을 한 단계가 아닌 여러 단계를 영어로 "업그레이드" 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후 몇달 지나서 그가 근무하는 아파트에 갔을때 경비원들이 나를 알아보면서 "선생님 노벨 문학상은 타셨습니까?" 하면서 물었다. 그래서 그 친구를 생각해서 이렇게 답했다. "아직 심사중이지요. 워낙 국제적인 큰상이라 시간이 걸릴 거에요" 하면서 시간을 멀찍이 잡아두었다. "한 백년정도 걸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