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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촌 산책
◇ 관상감 관천대(觀象監 觀天臺) : 종로구 계동 140번지 2호(보물 제1740호)
- 조선시대에 천문을 관측하던 시설
관상감 관천대는 신라 때의 첨성대, 고려시대 개성 만월대와 같이 조선시대에 천문(天文)을 관측하던 시설로, 일명 일영대(日影臺)라고 하였는데, 1434년(세종 16)에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원래 관천대는 이곳에서 약간 동쪽 언덕의 전일 휘문고등학교 자리에 500년간 위치하였다. 휘문고등학교가 강남구 삼성동으로 이전하자 현대그룹 사옥(社屋)을 건축할 때 관천대의 이전이 불가피하였으므로 1983년에 이를 해체하여 도로변에 세우게 되었다. 이 당시 복원할 때 원래 위치했던 지반의 높이를 맞추기 위하여 평지보다 조금 높게 쌓았다.
관천대의 규모는 높이가 3.46m, 넓이가 2.4m, 폭 2.5m 정도 되는데 꼭대기에는 정사면체의 작은 돌이 놓여 있고 둘레에는 돌난간이 만들어져 있다.
조선시대의 관상감은 오늘날의 기상청과 유사한 관아로 해와 달과 별들의 움직임과 일식·월식을 관찰하는 한편 지상의 벼락, 비와 눈, 서리, 이슬, 지진 등을 관측하고, 지리(地理), 달력 제작 등을 담당하였다. 세종 때에는 서운관으로 하여금 측우기를 제작하게 하여 우량을 측정한 것은 유명하다.
조선시대에는 서울에 몇 개의 천문 관측기인 간의대(簡儀臺)가 설치되어 있었다. 관상감은 세종 때에 불린 이름으로 조선 초에는 서운관(書雲觀)이라 하였으며, 1894년에 관상소(觀象所), 1907년에 측후소로 바뀌었다.
◇ 송학선(宋學先)의사 의거 터 : 종로구 와룡동 4-1번지 / 창덕궁 금호문 앞 창덕궁휴게소
- 송학선(宋學先) 의사가 1926년 순종 황제의 승하 소식을 듣고 사이토 총독을 처단하기 위해 창덕궁 금호문에서 일으킨 의거
송학선(宋學先 : 1897.2.19.~1927.5.19.) 의사가 순종 황제의 승하 소식을 듣고, 총독 사이토 마코토를 암살하려 하였던 곳이다.
송학선 의사는 서울의 빈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성인이 된 뒤로 일본인 가게에서 고용살이하다 그만두었다. 그의 이름을 학선(學善)이라고 이름한 것은 배움을 좋아하고 매사에 학문과 선행을 일삼으라는 뜻에서 그렇게 이름 지었다고 전한다.
송학선 의사는 1926년 4월 26일 순종 황제의 승하 소식을 듣고 평소에 이토 히로부미를 주살한 안중근을 흠모하던 송학선은 이 기회에 사이토 마코토 총독을 처단할 마음을 먹었다.
순종 황제의 망곡(望哭) 대열에 참여한 송학선 의사는 이튿날인 4월 27일, 가슴에 비수를 품고 빈소의 출입구인 창덕궁 서남쪽의 금호문(金虎門)으로 나아가 부근을 배회하며 사이토 총독이 나타나기를 기다렸으나 허탕을 치고 말았다.
다음날인 28일에도 송학선 의사는 창덕궁 금호문 앞으로 나가 서성이는 도중에 오후 1시 10분경, 경성부협의원 등 일본인 세 명을 태운 자동차 한 대가 금호문에 도착한 것을 보았다.
자동차 안에 사이토 총독이 타고 있다는 주변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들은 송학선 의사는 그들을 사이토 총독 일행으로 오인하고, 자동차에 뛰어올라 타고 있던 일본인 한 명을 칼로 찔러 즉사시키고, 다른 한 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그리고 재동 방면으로 도주하다가 휘문고보 앞 골목에서 일본 순사들과 격투 끝에 체포되었다.
비록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송학선 의사의 의거는 뒤이은 6ㆍ10만세 운동의 전주곡이 되었다. 일제 경찰에 체포된 송학선은 사형 선고를 받고, 이듬해인 1927년 5월 19일 서대문형무소 사형장에서 순국하였다.
◇ 여운형집 터 : 종로구 계동 140-44
- 독립유공자, 통일운동가, 정치인, 언론인, 체육인.
여운형(呂運亨 : 1886~1947) 선생은 3.1 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등에 참여했고, 언론 활동, 민족 문화 사업, 체육 활동 등 다채로운 분야에서 이름을 남겼다. 1944년 조선건국동맹을 구성하여 해외 독립운동 단체들과 연계를 시도하였다.
8.15 광복 직후 조선건국동맹의 조직을 확대하여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혼란 정국을 예방하였으나 ‘건국준비위원회’가 박헌영 등의 활동으로 좌경화되어, 미군정이 활동을 인정하지 않자 여운형은 미군정기에 정치인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여운형 선생은 조선 민족이 자력으로 국가를 건설해야 하며 친일파를 제외한 좌우 세력 모두가 공평하게 참여한 연대를 통해 통일 국가를 이룩하자고 주장하였다. 이데올로기 문제에 대해서 가장 포용적인 입장이었던 동시에 일반 대중과 국론 통합을 우선시한 인물로 간주하고 있다.
1947년 7월 19일, 극우파로 추정되는 한지근(韓智根 : 본명 이필형)에게 혜화동 로터리에서 암살되면서 좌우 합작운동은 실패하게 되었다.
◇ 인촌 김성수(金性洙)가 : 종로구 계동 133
- 경성방직 사장, 동아일보 사장과 광복 후 제2대 부통령을 역임한 기업인, 교육자, 언론인, 정치인
김성수(1891~1995) 선생은 일제강점기에 경성방직 사장, 동아일보 사장, 제2대 부통령 등을 역임한 기업인, 교육자, 언론인, 정치인이다.
김성수 선생은 1891년 전북 고창 출생으로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하였다. 일제강점기에 경성방직 및 동아일보 사장, 보성전문학교 교장,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와 평의원 등을 역임했다.
1908년에는 군산의 금호학교(錦湖學校)에 다니다가 그해 10월 일본 도쿄 세이소쿠[正則]영어학교에 입학했다. 이듬해인 1909년 4월 도쿄 인조[錦城]중학교 5학년에 편입했다. 1910년에 졸업한 그해 4월 와세다대학 예과에 입학해서 이듬해 정경학부를 택해 1914년에 졸업하였다.
김성수 선생은 일본에서 귀국한 후 양부 김기중의 후원을 받아 1915년 4월 중앙학교의 채무를 갚고, 경영권을 인수했다. 1917년 3월 중앙학교를 정규학교로 승격시키고, 교장으로 취임했다. 같은 해인 1917년 경성 직류주식회사를 인수해서 직조 업을 시작했다. 1918년 3월 중앙학교 교장직을 사임하고, 경영에 전념했으나 쇠퇴하여 경성방직 설립 작업에 착수했다.
김성수 선생은 1919년 3 · 1운동 초기 계획에 참여했고, 그해 10월 경성방직 설립 인가를 받았다. 동아일보사 설립을 주도해서 1920년 7월, 동아일보 사장이 되었고, 1923년 3월 조선민립대학 설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조선 민립대학기성회 회금(會金) 보관위원으로 위촉되었다.
김성수 선생은 1929년 2월, 자신과 양부 김기중 등 7명이 60만 원을 출자해 재단법인 중앙학원(中央學院)을 설립했다. 1931년 9월 중앙고등보통학교 교장에 취임하고, 이듬해인 1932년 3월에는 재정난을 겪고 있는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해 그해 6월부터 1935년 6월까지 교장으로 활동했다.
광복 후에는 김성수 선생은 1947년 1월 반탁 독립투쟁위원회 부위원장으로 김구(金九), 조소앙(趙素昻)과 함께 신탁통치반대운동을 지도했다. 같은 해 2월 동아일보 사장직에서 물러났다. 1949년 2월 한국민주당과 대한국민당을 통합한 민주국민당 창당을 주도하여 최고위원이 되었다. 같은 해 7월 동아일보 고문이 되었다.
김성수 선생은 1951년 5월 국회에서 제2대 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52년 이승만 대통령이 국회의원을 탄압한 부산정치파동의 서막인 5ㆍ26 정치파동을 일으키자 이에 항거해 5월 29일, 부통령을 사임하였다. 1955년 숙환으로 사망했다.
1962년에 김성수 선생에게 대한민국 공로 훈장이 추서되었으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일제강점기에 중일전쟁의 정당성을 선전하고, 학도지원병 고무 및 징병제 참여 독려 등의 글을 기고하며, 전국 순회 강연한 친일 행적을 밝힘으로써 2018년에 취소되었다.
김성수 선생의 생가는 전북 고창군 부안면 봉암리 435번지에 있으며, 전라북도의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 북촌 한옥역사관(韓屋歷史館) : 종로구 계동 25
- 일본 강점기에 북촌의 형성과정에 큰 역할을 한 기농 정세권(鄭世權)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한옥
북촌 한옥역사관은 2021년 3.1절에 개관한 서울시의 공공 한옥으로 북촌의 형성과정과 북촌의 형성과정에 큰 역할을 한 ‘조선 건축왕’ 기농(基農) 정세권(鄭世權 : 1888∼1965)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조성한 공간이다.
정세권은 1930년대 조선물산장려회, 신간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35년부터는 조선어학회 운영자금을 대면서 사전 편찬을 뒷받침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재산을 몰수당하기도 한 독립운동가였다.
3.1운동 직후 경성부의 인구가 급증하여 주택난이 심화하자 일본인들은 북촌에 진출하여 일본식 가옥을 지으려는 현실에 위기를 느낀 기농 정세권은 건양사라는 건축회사를 세워 우리 고유의 주거양식을 지키려고 하였다.
이에 익선동 한옥마을을 비롯하여 가회동, 삼청동 일대에 '조선집'이라 불린 전통한옥을 쪼갠 도시형 한옥을 건축, 보급하여, 오늘날의 북촌 한옥마을이 만들어졌다.
북촌 한옥역사관은 북촌 한옥 탄생의 역사를 오롯이 느낄 수 있는 전시관으로 운영하고 있다.
북촌 한옥역사관 입구에는 석정 보름우물이 있다.
◇ 석정 보름우물 : 종로구 계동 25
- 상수도가 보급되기 전의 북촌마을 주민들이 이용했던 우물
북촌 한옥역사관 입구에는 석정 보름우물이 있다. 이 우물은 15일간은 맑고, 15일간은 흐려진다고 해서 불린 이름이다.
이 우물은 20세기 초의 상수도가 보급 전의 북촌마을 주민들이 이용했던 우물이다. 서울 도심에서 조선 궁궐과 종묘를 제외하고 가장 오래된 우물로 물맛이 좋기로 명성이 자자했으며, 이 우물을 마시면 아들을 낳는다는 이야기도 있어서 아들을 원하는 서울 아낙네들과 궁궐 궁녀들의 수요가 상당했다고 전한다.
1794년 중국에서 암록강을 건너온 우리나라 최초의 주문모 신부가 1801년 새남터처형장에서 순교하기 전까지 계동 최인길의 집에 숨어 지내면서 조선 땅에서 첫 미사를 봉헌할 때, 이 우물물로 세례를 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1845년 한국인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신부도 이 지역에서의 짧은 사목(司牧 : 사제가 신도를 지도하여 구원의 길로 이끄는 일) 기간 동안 이 물을 성수(聖水)로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천주교 박해 당시 많은 순교자가 발생하자 가자기 물맛이 짜져서 한동안 사용되지 않았다고 전한다.
◇ 송진우(宋鎭禹)집 터 : 종로구 원서동 74-1
- 정치가, 독립유공자, 언론인
송진우(宋鎭禹 : 1890~1945) 선생은 일본 메이지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후 중앙중학교의 교장으로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었다. 동아일보사가 주식회사로 개편되자 사장에 취임, 이후 30여 년 간 『동아일보』를 이끌었다.
광복 후 1945년 9월 7일 국민대회준비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으로 취임하였다.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이 결성되자 중앙집행위원회 수석총무에 추대되고, 1945년 12월 1일 『동아일보』가 복간되어 제8대 사장에 취임하였다.
이해 12월 28일에는 신탁통치문제로 아놀드(Arnold, A. V.) 미군정 장관과 회담을 통하여 반탁(反託)시위의 정당성을 강조하였으며, 29일 밤에는 경교장(京橋莊)에서 임시정부 요인들과 회담하였다.
송진우 선생은 미군정청과는 충돌을 피하고 국민운동으로 반탁에 대한 신중론을 피력하고, 자택으로 돌아온 뒤 다음날 12월 30일 한현우(韓賢宇) 등 6명의 습격을 받고 종로구 원서동 74번지 자택에서 죽었다.
◇ 고희동(高羲東) 가옥 : 종로구 원서동 16
- 일제강점기의 「금강산 진주 삼폭포」 등의 작품을 그린 화가.
고희동(高羲東 : 1886~1965) 선생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로서, 새로운 조형 방법을 후진에게 가르친 미술 교육자이다. 그리고 화단(畫壇)을 형성하고 이끌어나간 미술 행정가로서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또한, 일본에서 귀국 후 10년 만에 서양화에서 동양화로 전향, 서양화적 수법을 가미한 풍(風)을 개척하였다.
고희동 선생은 광복이 되자 조선미술건설본부의 위원장으로, 그리고 우익 미술가들의 집결체인 조선미술협회가 창립되자 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또한,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오랫동안 심사 위원장을 지냈다.
6·25전쟁 때 부산 피난 시절을 전후하여 한국민주당에 가입, 4·19 혁명 이후 민주당이 집권하자 참의원을 지냈다.
◇ 원서동 백홍범 가옥 (苑西洞 白鴻範 家屋) : 종로구 창덕궁5길 22-8 (원서동 9-5) (민속문화유산 제13호).
- 일제강점기 안채 · 별채 등으로 구성된 주택. 현재 태재대학으로 사용
백홍범 가옥은 원래 있었던 안채의 별채였던 건물로 ㄱ자형 평면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안채 자리에는 근래에 지은 양옥이 자리 잡고 있다.
이 가옥은 서울에 널리 건축되어온 ‘ㄱ자형’ 평면으로 서북쪽에 1칸 부엌과 2칸 안방이 동남향 하여 있고, 안방의 동남쪽에 정면 2칸 측면 1칸 반의 대청이 자리 잡고 있으며, 대청 옆으로는 1칸 건넌방이 자리 잡고 있다.
건넌방의 옆에는 반 칸 폭의 마루가 있는데 이 마루에는 유리문을 삼면에 달아 마루방을 이루고 있으며, 건넌방과 이 마루방의 앞에는 툇마루를 내달았다.
부엌의 서쪽에는 방 1칸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부엌과 이 방 사이에는 문을 달아 찬방으로 이용하는 것과는 달리 이 집에서는 벽체로 완전히 막아 독립된 방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안채 남쪽 대문 옆 서쪽에는 온돌방 1칸 반의 별채가 있다.
안채는 장대석 외벌대 기단 위에 네모뿔대 초석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워 납도리로 결구한 오량가구(五樑架構)로 종도리는 굴도리이다. 앞뒤 모두 홑처마이고, 처마 끝에 함석홈통을 달아 빗물을 낙수 시키고 있다.
건넌방 동측면에 합각을 형성하여 팔작지붕을 이루고 부엌 옆방에서는 맞배지붕을 이루고 있다. 대청 전면과 건넌방 옆 마루방에는 유리문들을 달았는데 이는 모두 후대 집장사집에서 나타나는 요소들이다.
또 부엌 상부의 다락에 단 넌출은 재래형이지만 부엌의 ‘用자살’ 미세기 유리문이나, 부엌 출입문 옆을 붙장과 부뚜막 위의 살창을 없애고, 매끈한 회벽으로 처리한 것은 모두 후대의 개작이라 생각된다.
대문 옆의 별채는 시멘트 기와지붕을 한 후대의 건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이 집은 1910년대 이후 집장사집(1930년대)이 번창하기 이전의 주택으로서 주택사의 흐름을 알 수 있게 하는 실례(實例)라 할 수 있다.
이 가옥은 현재 태재대학의 건물로 사용하고 있다.
◇ 궁중음식 연구원 : 종로구 원서동 34
- 궁중음식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음식문화를 연구하고, 계승 발전하는데 앞장섰던 전통 식문화 연구의 종가(宗家)
궁중음식 연구원은 1971년에 <조선왕조 궁중음식>이 중요무형문화재 제38호로 지정되자 이를 보급하고 계승하기 위해 설립된 전수 교육기관이다.
1971년 5월 15일 황혜성 한양대 교수를 대표로, 낙선재에서 순정효황후를 보필하던 네 명의 상궁 한희순, 박창복, 성옥염, 김명길이 초기 회원으로 설립되었다. 이 연구원은 궁중음식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음식문화를 연구하고, 계승 발전하는데 앞장섰던 전통 식문화 연구의 종가(宗家)라고 할 수 있다.
궁중음식 연구원은 제1대 기능보유자였던 한희순 상궁 생전에 설립된 이래 전수 교육과 정기 발표회, 조리서 발간, 문헌연구 등의 활동을 지속해서 운영하여 궁중음식과 한국의 식문화 전통으로 계승, 발전시켜 왔다.
원장은 한복려로 한식당 '지화자'와 '궁연'을 운영하고 있으며, 2007년 국가무형문화재 제38호 조선왕조 궁중음식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 원서동 빨래터 : 종로구 원서동 30
- 창덕궁에서 흘러나오는 하천에 마련된 한양도성 안의 3대 빨래터
원서동 빨래터는 창덕궁 신선원전의 외삼문 우측 궁궐 담장 아래로 흐르는 작은 하천에 마련된 빨래터이다.
창덕궁 내의 물이 궁궐 담장을 통해 바깥으로 흐르는 곳에 평교(平轎) 형식의 두 칸의 다리로 길이, 너비 약 1.5m 규모를 설치한 다음에 그 위에 궁궐 담장을 연결하였다.
이곳 빨래터로 통하는 물은 궁궐 내의 풍부한 수원(水源)으로 사시사철 마르지 않을 정도로 많이 흐르고., 또한, 위치가 궁궐과의 경계인 담장 아래여서, 궁궐의 궁인들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도 함께 이용할 수 있는 곳이었다.
조선시대 도성 안에는 3대 빨래터가 있었는데, 이곳은 삼청동, 청계천과 함께 3대 오래된 전통의 빨래터로 널리 알려진 곳 중의 하나인데 그중 원서동 빨래터가 으뜸이었다.(*)